소학 정리
【정견망】
중국 고서에 소인에 대한 기록
청나라 《열미초당필기 閱微草堂筆記》의 기록
중국 청나라 건륭제와 가경 시기에 “높은 신망을 가진” 학자이자 예부상서에 오른 기효람은 그의 저서 《열미초당필기》에 소인에 관한 두 가지 기록을 남겼다. 이 책은 평생의 견문을 종합하여 만든 것이다. 기효람은 학문적인 글로서 명성을 떨쳤으며, 역사책 《사고전서》를 편찬을 주관하기도 했다. 그의 기록은 신빙성이 높다.
첫 번째 소인에 대한 기록은 이 책의 권3 ‘난양소하록3’에 편찬되어 있다. 책에는 우루무치(현재 디화현)에서 키가 겨우 한 자에 불과한 작은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으며, 남녀노소 모두 포함되어 있다. 붉은 석류나무가 꽃을 피울 때마다 이 작은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꺾어 작은 원을 만들어 머리에 쓰고, 무리를 지어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그들의 목소리는 사슴 울음소리처럼 가늘고 은은했다.
어떤 소인은 조정 주둔군의 텐트 안으로 몰래 들어가 음식을 훔치다가 잡히면 무릎을 꿇고 울기도 했다. 그들을 묶어놓으면 단식하고 죽었으며 만약 그들을 풀어주면, 그들은 즉시 도망치지 않았다. 먼저 천천히 몇 자씩 걸어가며 뒤를 돌아보았다. 혹 누가 그들을 쫓고 욕을 하면 곧 무릎을 꿇고 울며 그렇지 않으면 천천히 멀리 가다가 거의 따라잡지 못할 거리에 도달하면 빠르게 깊은 산속으로 숨어버린다.
청군은 이 소인들의 거처를 찾지 못했고, 그들이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몰랐다. 소인들이 홍류를 즐겨 쓴다고 해서 ‘홍류왜’라고 불렀다. 당시 구현(현재 허난성 후이현) 현승이었던 천금天锦은 목장을 순찰하기 위해 파견되었는데, 한 소인을 잡아 그를 데려고 갔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들의 수염과 머리카락이 우리 일반 사람들과 똑같았다.
또 다른 소인의 기록은 이 책의 18권 《고망청지 4》에 들어 있으며, 이는 청나라 군수인 지무사가 묘사한 것이다. 지무사는 깊은 산속으로 꿩을 쫓다가 절벽 위에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계곡을 넘어갔다고 말했다. 땅에서 네다섯 장 떨어진 곳에서 얼굴과 수족에 약간 긴 검은 털이 있는 사람을 보았는데, 보라색 털 망토를 입고 있었다.
그와 마주 앉아 고기를 굽는 사람은아름답고 몽골인처럼 꾸민 여자였다. 이 여자는 신발을 신지 않고 녹색 털 망토를 입고 있었다. 옆에는 네다섯 명의 검은 털이 시중을 들고 있는데, 그들은 어린아이 크기만 하고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사람을 보면 웃으며, 하는 말은 몽골어도 아니고 다른 방언도 아니었다. 마치 새가 우는 소리처럼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이 상황을 보아하니 그들은 요괴 같지 않아 기무사가 그들에게 절을 했다. 갑자기 절벽에서 물건을 던지는데 보니 익힌 노새의 다리 반쪽이었다. 또 인사하여 감사하니 두 사람 다 그러지 말라고 손을 흔들었다. 그 노새고기는 삼사일 동안 먹기에 충분했다. 지무사는 나중에 목동들과 함께 옛 흔적을 다시 찾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청대 필기 《야우추등록》.
청대 필기 《야우추등록》에 따르면, 광둥성 마카오섬에는 구명단(仇名端)이라는 이름의 무역 상인이 있었으며, 자주 여러 나라에 가서 장사를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어느 날, 태풍을 만났는데 다행히 어느 섬으로 피했다. 바람이 잠잠해진 후, 사공은 지쳐서 배를 보고 추단은 섬에 산책하러 올라갔다.
구단이 보니 섬에는 죽은 나무가 매우 많으며, 크기는 열 아름이나 되고, 나무는 구멍이 많았으며, 구멍 중에는 소인이 살고 있었다. 사람의 키는 겨우 일곱, 여덟 치에 불과하며, 노인과 어린이 남자 여자가 다 있고, 피부색은 밤껍질 같았다.
모든 사람은 몸에 칼과 활과 화살을 매고 있는데 크기는 사람에게 알맞았다. 구단이 오는 것을 보고 일제히 “커치산이리!” 하고 외쳤다. 구단은 이때 공손하게 행동하려고 바지를 벗고 바닥에 주저앉은 후 담배를 피우며 계속 관람했다.“
갑자기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서 쳐다보니 마른 나무의 가장 높은 곳과 무릎까지 닿는 작은 성이 있었고, 모두 검은 돌로 쌓은 것이었다. 성문이 크게 열리자, 약 천여 명의 소인이 나란이 나와 깃발을 흔들자, 각 나무 구멍에 소인이 마중을 나와 명령을 들었다. 그중 얼굴이 반듯하고 머리에 자금관을 묶은 어떤 젊은이가 소인의 총지휘를 맡고 있었다. 중얼중얼 하는데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시리” 하면서 집요하게 몰려들었다. 구단은 크게 놀라며 자신을 몰아내려고 하는 줄 알았지만, 너무 작은 것들이라 무시하고 두려워하지 않았고 여전히 쭈그리고 앉아 있다. 젊은이가 또 한참 중얼거렸는데 구단이 응하지 않자 지휘하여 싸움을 시작했다. 작은 화살, 작은 창, 작은 칼, 작은 창으로 공격했는데 넓적다리에 두 군데 찔려 매우 아팠다.
그것이 싫어서, 장난삼아 손에 든 담뱃대로 젊은이를 한대 때리자. 한 방에 닭의 등에 떨어져 죽었다. 모두들 시체를 들고 돌아가 성을 굳게 닫았다. 나머지는 모두 나무 구멍으로 들어갔다. 구단도 배를 돌아갔다.
약 한 달 후, 구단은 광둥으로 돌아와 그의 그것을 아는 사람들에게 물었더니 고대 난쟁이 나라(초요국 僬僥國) 사람이라고 말했다. 서양인에게 물었더니, 소인은 바다고니가 물어갈까 두려워 혼자서는 감히 다니지 못한다고 했다. 그들은 예의를 알고 염치를 알며 소인의 영성과 생활 습성이 현대인과 다를 바 없고 그저 작을 뿐이었다.
송나라 시대에 편찬된 《태평광기》.
송나라 시대에 편찬된 《태평광기》 제480권과 제482권은 모두 소인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으며, 이는 소인이 지구에서 생존한 적이 있음을 보여준다. 이제 이 소인들의 전설을 간략하게 소개한다.
(1) 서북해 학민국 鹤民国
서북해 술해 그 지방에는 학민국鹤民國이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사람의 키는 3인치지만 걸음걸이는 나는듯이 빨라 하루에 천 리를 달리는데, 종종 해학(바닷새의 일종)에게 잡아먹혔다.
그들 중에도 군자와 소인이 있다. 군자라면 천성이 총명하고 꾀가 많고 민첩하며, 매번 해학과 같은 재앙에 대비하기 위해 나무로 자신의 모습으로 새기곤 한다. 때로는 그 수가 수백에 달해 황량한 교외의 물가에 두기도 한다. 해학은 그것이 학민인 줄 알고 삼켰다가 나무가 목에 걸려 죽는다. 해학은 이렇게 수백 번 속자, 앞으로 진짜 학민을 만나도 삼킬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학민 대부분은 산골짜기 근처에 있으며, 동굴에 구멍을 뚫어 성에 해자를 만들었다. 길이가 30보에서 50보만 해도 하나의 성이 되며, 이와 같은 성은 수천 수만이 넘는다. 봄과 여름에는 학민들이 길가의 풀씨를 먹고, 가을과 겨울에는 풀뿌리를 먹는다. 여름이면 발가벗고 몸을 드러내고 겨울이면 짚으로 옷을 만들어 입으며 양생지법을 안다.
(2) 비올때 떨어진 아이들
위魏나라 시기에 하간河間의 왕자충王子充의 집에서 비가 올 때 여덟아홉 명의 아이들이 비와 함께 마당에 떨어졌는데 키는 겨우 대여섯 치 정도였다. 아이들은 자신의 집이 바다의 동남쪽인데, 강풍과 비바람으로 인해 이곳으로 불려왔다고 말했다. 그들과 대화하면서 그들이 상당히 지식이 있다고 느꼈고, 말한 일들은 모두 역사책에 서술된 바와 같았다.
기타 고서에 소인에 대한 기재
(1) 《산해경》의 소인에 대한 기록
<산해경-대황동경>에 기록: ‘소인국(小人國)이 있는데 이름은 정인(靖人)이다.‘
<산해경-대황남경>에는 : ‘소인이 있는데, 이름은 초요지국’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소인(小人)이 있으니 이름은 균인(菌人)이다. ”
”《산해경-해외남경》에 따르면, “주요국은 동쪽에 있으며, 그 사람들은 키가 작고 관대를 하고 있다.”
(2) 《수신기 搜神記》의 소인에 관한 기록
《수신기》 권12에는 “왕망이 건국한 지 4년, 지양에 소인의 장면이 나타났는데, 키가 한 자 남짓이고, 수레를 타거나 걸어다녔고 소인들은 자기 몸 크기 만한 물건을 들고 있었다. 이런 일은 사흘 동안 지속되다가 마침내 사라졌다.”
동시에 ‘경기’慶忌라고 하는 소인이 기록되어 있는데, ‘경기’는 사람 같이 생겼고 키는 네치이고, 옷이 노란색이고, 노란관을 썼으며, 노란 덮개를 쓰고, 조랑말을 타고, 질주하기 좋아했다.
(3) 《열자》의 소인에 대한 기록
<열자-탕문 제5>에는 “중주 동쪽 사십만 리에 초요국이 있다. 사람의 키는 한 자 다섯 치이다. 동북지방에는 쟁인(諍人)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키가 9촌이다.”
(4) 《사기》와 《법원주림》의 소인에 대한 기록
《사기 史記·대완열전大宛列傳 제63》 괄지지括地志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 “소인국은 대진의 남쪽에 있는데 사람이 겨우 석 자이다. 그가 농사를 지을 때 학에게 잡아 먹히는 것을 두려워하며, 대진이 그를 호위했다, 즉 초요국이며, 그 사람들은 동굴에 거주한다.”
《법원주림 法苑珠林》이라는 책은 많은 불교 경론과 외전 속서를 널리 다루고 있으며, 항상 불교 백과사전으로 여겨져 왔다. 《법원주림》 권8에는 외국의 그림을 인용하여 말한다: “초요국인은 키가 6 촌이고, 바람을 맞으면 넘어지며 바람을 등지면 엎어지고, 용모가 다 갖춰 있으나 야숙한다.”
(5) 《산해경 해경신석 山海經海經新釋 권1》의 소인에 관한 기록
<산해경 해경신석권1>에는 ‘제환공이 사냥하여 고니 한 마리를 얻었는데 그것을 잡자, 목구멍에서 사람 하나가 나왔다. 길이는 3촌 3푼이고, 흰옷을 입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6) 《남촌철경록 南村輟耕錄 》에 나오는 소인에 관한 기록
《남촌철경록》은 원나라의 도종의陶宗儀가 쓴 것이다. 제14권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당시 어떤 사람이 소인랍(건조된 시체)을 팔고 있었는데, 그 사람(도종의)이 빌려와서 보니 그 소인의 몸길이는 겨우 여섯 치 남짓이었지만, 모든 특징은 사람과 다름없고 소변 부위도 다 있었다. 듣자 하니 이 소인은 몇 년 전에 외국에서 바친 것이라고 한다.” 이런 소인은 《한무고사漢武故事》에서도 말한다: 예전에 동군에서 어떤 사람이 일곱 치의 짧은 사람을 보낸 적이 있는데, 이름은 “거령”이었다.
(7) 《신제해 新齊諧》의 소인에 관한 기록
《신제해》는 원매(袁枚 1716-1798)가 쓴 것으로, 일명 《자불어》라고도 불린다. 원매는 청나라 시인으로 건륭제 때에 벼슬했으며, 강녕, 열수 등지의 지현을 역임했으며,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신제해》 제9권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 “건륭 4년, 산서山西 포주蒲州에서 성을 수리하느라고 강의 모래톱을 파자 관 하나를 발견했는데, 상자처럼 납작했다. 열어보니 그 중에는 아홉 개의 선반가 있고 각 선반에 두 사람씩 들어 있었는데 키는 약 한척이었다. 노인, 어린이, 남녀가 다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어찌나 이상한지 모르겠다.”
《자불어》에서 하태사가 말한 세 가지 중 하나: 고우 하례곡 선생이 호남을 감독하느라 배를 타고 동정호를 지나갔다. 마침 큰 풍랑을 만나 수천 척의 배들이 정박하기 전이었다. 하태사는 성질이 급하여 제 날짜에 도착하려고 사공에게 명하기를 바람을 거슬러 항해하라고 하였고, 여러 배들이 그를 따라 돛을 올렸다. 호수 한가운데에 이르자 바람이 갈수록 강해졌고 천지는 어두워지고 흰 물결이 산같이 일어났다. 수면 위의 작은 두 사람을 보았는데 키가 한 자 남짓하고 얼굴이 약간 검으며, 배를 타고 손을 움직이는 모습이 마치 순찰자 같았다. 여러 배에서 사람들이 모두 보았다. 바람은 잠잠해지고 해가 나타나자 점차 사라졌다.
(8) 《별국동명기》에 나오는 길이 3촌의 늑필국勒畢國인.
한나라 곽헌의 《별국동명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륵필국인은 길이가 세 치이며, 날개가 있고 말을잘하며 농담을 잘한다. 때문에 선어국이라고 한다. 늘 떼를 지어 햇빛으로 날아가서 쬐다가 몸이 뜨거워지면 돌아간다. 단로를 마시는데, 단로란 것은 해가 뜰 때 이슬이 구슬처럼 맺히는 것이다. 곽헌은 늑필국인의 문자가 비교적 적다고 기술했는데, 여전히 약간 얼룩이 엿보인다고 했다.
이렇게 많은 중국 고서에는 소인에 관한 기록이 있어, 소인이 지구에서 생존했음을 충분히 입증할 수 있다. 이 소인들은 이제 사라졌다. 아마도 지구상의 생존 환경에 적합하지 않은 몇 치의 키 때문에 점차 도태되었을 것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806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