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객(長袖客)
【정견망】

작약이 아직 피지 않았을 때
비가 그친다.
빗방울이 꽃잎 위에 남아 크고 작게 영롱하게 빛난다.
몸을 숙여 가까이 다가가자, 원래 익숙하던 꽃 한 송이가 문득 낯설어진다. 꽃잎들은 층층이 겹쳐져 어떤 것은 펴져 있고 어떤 것은 말려 있으며, 밝은 곳도 있고 그윽한 깊이도 있다. 한 방울의 물이 꽃잎 위에 엎드려 있어 뜻밖에도 그 자체로 원만을 이루고 있다.
멀리서 볼 때 우리는 “이것은 한 송이 꽃이다”라고 말한다.
가까이 다가가서야 비로소 깨닫는다. 우리가 말하는 “한 송이 꽃”이란 어쩌면 단지 사람의 척도에서 그것을 향해 붙인 하나의 호칭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오히려 더 미세한 세계가 나타났다. 꽃잎은 산맥과 골짜기가 되었고, 주름에는 공간이 생겼으며, 빗방울이 그 사이에 흩어져 마치 또 다른 차원 속의 빛과 같다.
한 송이 꽃이 하나의 세계(一花一世界),
하나의 잎이 하나의 보리(一葉一菩提).
어쩌면 옛사람들이 보았던 것은 단순히 꽃과 잎만이 아니었으리라.
천지의 조화 속에는 큰 것에는 큰 질서가 있고, 작은 것에는 작은 건곤(乾坤)이 있다. 우리가 꽃 한 송이를 보고 작다고 여기는 것은 우리가 멀리 있기 때문이며, 만약 진정으로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가 본다면 비로소 미소(微小)한 그 속에도 온전한 천지가 절로 갖추어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빗방울 하나로 하늘의 빛을 비출 수 있고, 꽃잎 한 장으로 세계를 감출 수 있다.
광대(廣大)란 반드시 치수의 크기 사이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광대는 우리가 아직 보지 못한 곳에 숨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