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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은 말이 있다: 누가 새들에게 둥지 짓는 법을 가르쳤을까?

장수객(長袖客)

【정견망】

새 한 마리가 풀잎 하나를 물고 나뭇가지 사이를 스쳐 지나간다.

그 풀잎은 매우 가벼워서 땅에 떨어져도 거의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은 풀잎을 나뭇가지 위에 아무렇게나 버리지 않고, 부리로 여러 차례 교차시키고 얽어매며 팽팽하게 당겨 부드러운 풀줄기를 나뭇가지 사이에 고정했다. 또 다른 풀잎, 그리고 또 다른 풀잎. 본래 아무런 모양도 없던 마른풀들이 점차 호를 그리며 입구가 생겨났고, 새알과 어린 새를 받쳐줄 수 있는 공간도 갖추어지게 되었다.

우리는 대개 새 둥지를 매우 단순하게 여겨, 마치 몇 개의 나뭇가지와 풀잎 몇 장이 대충 모여 있는 것 정도로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진정으로 자세히 들여다보면 새들의 세계 속 ‘건축’이 상상보다 훨씬 정교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베고니아새(weaverbird)는 가늘고 긴 풀줄기를 하나씩 둥지 몸체에 엮어 넣는다. 어떤 둥지는 나뭇가지 끝에 매달려 있고 입구가 아래를 향해 있어 마치 정교하게 엮어 만든 풀 바구니 같다.

붉은목재니아는 심지어 뾰족하고 가는 부리로 잎사귀 가장자리에 구멍을 뚫고, 식물 섬유로 여러 장의 잎을 ‘꿰매어’ 잎사귀 사이에 부드러운 작은 둥지를 숨긴다. 바늘도 없고, 자도 없으며, 그 누구도 시범을 보여준 사람이 없지만, 그것은 어디에 구멍을 뚫어야 할지, 어떻게 섬유를 이끌어야 할지, 또 어떻게 잎사귀를 모으면서도 찢어지지 않게 해야 할지 스스로 알고 있다.

그리하여 매우 자연스러운 의문 하나가 떠오른다. 누가 새들에게 둥지 짓는 법을 가르쳤는가?

생물학에서는 이러한 능력을 ‘본능’이라 부른다. 이 단어는 물론 하나의 현상을 묘사할 수 있다. 즉, 새가 사람의 훈련을 거치지 않고도 적절한 때가 되면 자신의 생존과 번식에 상응하는 행동을 해낸다는 것이다. 하지만 ‘본능’이라는 두 글자는 그것이 나면서부터 할 줄 안다는 점은 말해주지만, 또 다른 더 깊은 질문에는 대답하지 못한다. 왜 그것은 타고나기를 그렇게 할 수 있으며, 하필이면 그토록 알맞게 할 수 있는 것일까?

군거베고니아새 촬영/Yathin S Krishnappa (공유 영역)

한 마리의 새가 창조될 때는 단순히 한 쌍의 깃털과 날개, 부리 한 개와 두 개의 발톱을 얻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무엇을 먹을 수 있는지, 어디서 먹이를 찾을 수 있는지, 천적을 어떻게 피하는지, 언제 구애하고 번식하는지, 어떻게 둥지를 짓고 알을 품으며 새끼를 기르는지 알아야 한다. 날개와 부리, 발톱은 눈에 보이는 부여이며, 생명과 함께 따라오는 이러한 능력들은 마치 또 다른 눈에 보이는 않는 부여와 같다. 창세주께서 생명을 창조하실 때는 그에게 단지 형체 하나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지혜까지 함께 부여하신 것이다.

이러한 지혜는 군거베고니아새(sociable weaver)에 이르면 더욱 사람을 탄복하게 만든다.

아프리카 남부의 군거베고니아새는 크기는 참새만 하지만, 함께 거대한 영구적 풀 둥지를 지을 수 있다. 멀리서 바라보면 그 둥지는 거대한 마른풀 더미가 수관(樹冠) 위에 얹혀 있는 것 같다.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면 내부로 통하는 많은 입구들이 보인다. 거대한 둥지 몸체 안에는 독립된 둥지 방들이 서로 분산되어 있어 최대 500마리의 새와 수십 개의 베고니아새 가족을 수용할 수 있으며, 때로는 다른 새들에게 무료 아파트가 되어주어 베고니아새가 천적을 방어하는 것을 돕기도 한다.

군거베고니아새의 둥지는 아파트처럼 생겼다. 촬영: Maresa Pryor, 내셔널 지오그래픽 이미지 컬렉션

이것이 가장 매혹적인 이유는 단순히 ‘크다’는 점에 있지 않다.

그토록 많은 새가 함께 살아가면서도 거대한 빈 공간 속에 마구 섞여 있는 것이 아니다. 전체는 하나의 공동 둥지이지만, 각 가정은 저마다 자신만의 둥지 방을 가지고 있다. 새 무리는 끊임없이 풀줄기를 물어와 이 공동 구조물을 유지, 보수, 확장한다. 어떤 거대한 둥지는 수년 혹은 수대에 걸쳐 계속해서 사용된다. 그리하여 황량한 아프리카 황야 위에서, 하찮은 풀 한 가닥 한 가닥이 수많은 작은 생명들에 의해 연결되어 백 년 동안 이어질 수 있는 ‘생명의 도시’를 이루어낸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거대한 둥지가 단순히 ‘살 만하다’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거대한 둥지의 외층은 대개 비교적 거칠고 단단한 나뭇가지와 풀줄기로 이루어져 있어 일정한 방호 작용을 하는 구조를 형성하며, 천적이 내부 둥지 방으로 접근할 기회를 줄여준다. 안쪽에 있는 독립된 작은 둥지 방들은 비교적 부드러운 풀과 깃털이 깔려 있어 훌륭한 단열과 보온 작용을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 새들이 물어온 풀과 나뭇가지 한 가닥 한 가닥은 마침내 하나의 ‘집’을 구성할 뿐만 아니라, 함께 모여 생명이 거주하기에 더욱 적합한 환경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새들은 물론 보온층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온도와 열전달을 계산할 줄도 모른다. 그러나 생명 속에 이미 존재하는 방식에 따라 풀과 나뭇가지를 알맞은 위치에 갖다 놓음으로써, 마침내 둥지 전체가 자연스럽게 이러한 기능들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거대한 둥지는 번식에 사용될 뿐만 아니라, 온도 조절, 방어, 육아, 집단 생활 및 생태계 공생이 하나로 어우러진 거대한 생명 지지 시스템이다.

이것은 더 이상 둥지를 짓는 기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욱 깊은 능력, 즉 함께 살아가는 능력이다.

어떤 생명이 무리를 지어 살아간다면, 그에게 필요한 것은 혼자서 먹이를 찾고 위험을 피할 줄 아는 것만이 아니라, 집단 속으로 들어가 다른 생명들과 함께 어떤 질서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군거베고니아새는 이러한 눈에 보이지 않는 질서가 눈에 보이도록 만들어 준다. 전체를 함께 소유하면서도 그로 인해 각자의 위치를 잃지 않고, 서로 의지하면서도 서로를 대체하지 않는다. 모든 생명이 전체 속에서 자신의 그 한 부분을 완성하기 때문에, 단 한 마리의 새의 능력을 훨씬 뛰어넘는 저 거대한 둥지가 비로소 형성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조물(造物)’이라는 두 글자를 새롭게 인식하게 만든다.

만약 단지 새 한 마리만 만들어냈다면 턱없이 부족하다. 그것은 나뭇가지가 둥지를 받쳐주어야 하고, 풀줄기가 재료로 필요하며, 씨앗이나 곤충이 식량으로 필요하다. 그 자손은 적절한 온도와 보호를 필요로 하며, 그 개체 수는 다시 식량, 천적, 환경의 제약을 받는다. 나무 자체 역시 토양, 수분, 햇빛 및 다른 생명들이 그 생장과 번식에 참여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하나의 생명이 다른 생명과 끊임없이 이어지며 마침내 형성된 것은 단순한 사슬 하나가 아니라, 거의 다 헤아릴 수 없는 생명의 그물망이다.

그러므로 생명의 오묘함은 아마도 생명 그 자체에만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누에를 보면 그 작은 몸이 뽕잎 속의 물질을 어떻게 실로 변환시키는지 경탄하게 되고, 새를 보면 풀줄기를 어떻게 엮어 둥지를 만드는지 경탄하게 된다. 하지만 계속해서 더 살펴보면, 생명과 생명 사이에도 숨겨져 있는 더 큰 오묘함들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왜 어떤 생명에게 필요한 것이 하필이면 다른 생명들과 환경으로부터 얻어질 수 있는 것일까? 왜 서로 다른 생명들은 서로 베풀면서도 서로를 제어하는 것일까? 왜 천차만별의 생명들이 더 넓은 범위 속에서 어떤 동적인 균형을 이룰 수 있는 것일까?

이때 다시 머리를 돌려 풀잎을 물고 있는 저 작은 새를 바라보면, 눈앞의 광경이 달라진다.

그것은 건축학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재료의 강도를 계산할 줄도 모르며, 나뭇가지 위에 서서 거대한 군거 둥지가 어떻게 운영되는지 생각할 줄도 모른다. 그것은 단지 자신의 생명 속에 이미 존재하는 방식에 따라 풀 한 가닥을 그것이 있어야 할 위치에 놓을 뿐이다. 다른 새도 그렇게 하고, 또 다른 새도 그렇게 한다. 수많은 미세한 행동들이 서로 이어져, 마침내 개별 생명 하나로는 완성할 수 없는 전체가 되는 것이다.

아마도 진정으로 경탄할 만한 것은 새 그 자체나 새 둥지 그 자체가 아니라, 생명이 창조될 때 지니고 있던 그 완전성일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어떻게 ‘나’ 자신이 되는지 알 뿐만 아니라, 다른 생명들과의 관계 속으로 들어갈 줄도 알며, 더 큰 질서 속에서 생존하고 번식하며, 또 다른 생명을 성취해 준다.

그리하여 “누가 새들에게 둥지 짓는 법을 가르쳤는가”라는 이 질문은 마침내 우리의 시선을 새 둥지보다 훨씬 더 광대한 곳으로 이끌어간다.

새 한 마리로부터 능력을 볼 수 있고, 능력으로부터 관계를 볼 수 있으며, 관계로부터 질서를 볼 수 있고, 다시 그 질서 속에서 조화(造化)를 보며, 최종적으로 창세주의 위대함을 보게 된다. 하나의 생명을 인식하는 것은 그러므로 그 자체만을 보아서는 안 되며, 그것이 온 세상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함께 보아야 한다.

만물을 인식하는 과정 자체가 곧 생명과 천지, 그리고 조화를 새롭게 인식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4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