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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화창작: 수도인(修道人)

글 그림/ 천외객

【정견망】

이 그림의 제목은 《수도인(修道人)》으로 종이 위에 그린 수묵화다. 크기는 60cm*101cm로 작년 여름에 창작했다.

창작의 영감은 션윈 무용극 《수도인(修道人)》에서 왔다. 2011년 션윈 공연 중에서 이 작품을 보고 깊은 감촉이 있었다. 프로그램에서는 두 독서인이 인연으로 만나 함께 수련의 길에 오른다. 두 사람은 비록 같은 문에서 수련했지만 결과는 천양지차였다. 그중 한 사람은 입문할 때 수련하려는 마음이 그다지 확고하지 못했고 여전히 속세에 대해 미련이 남아 있었다. 가부좌 중에서도 색관을 넘지 못해 결과적으로 이전에 수련했던 모든 공(功)이 다 폐기되게 했다.

다른 사람은 사부님의 가르침을 부지런히 따르며 각종 교란에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아 마침내 수련해서 정과(正果)를 이뤘다. 무용의 마지막에서는 또 두 사람이 얻은 과보를 대비해서 보여주는데 한 사람이 얻은 것이 세간의 권력과 영예라면 다른 사람은 천국의 수승함과 자유였다.

마지막에 두 사람이 만났을 때 사실 그들이 인연이 다하고 소원을 이룰 때였다. 이미 완전히 속인으로 변한 과거의 그 수련인은 지금 높은 벼슬에 올라 부귀를 누리고 있다. 그의 눈앞에 일부러 누더기 옷을 입은 거지 모습으로 변한 과거의 친구(수도인)가 나타났다. 그러자 친구는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비판하고 비웃었는데 그의 손짓과 몸짓은 마치 “그렇게 고생스레 도를 닦더니만 과연 누가 수련 성취할 수 있는가! 전에 자네가 만약 내 말을 듣고 공명을 구했더라면 지금처럼 이렇게 궁상맞게 되진 않았을 거야! 보게 나는 지금 이렇게 높은 관직에 올라 집을 나서면 앞뒤에서 호송하고 집에는 부리는 하인이 수없이 많고 좋은 옷과 맛난 음식으로 편히 지내면서 또 많은 처첩을 거느린다네. 신선이 되는 것보다 더 좋지 않은가?”라고 하는 듯하다.

바로 이때 이미 정과로 수련성취한 수도인의 누더기 옷이 단번에 사라지면서 신(神)의 휘황한 모습을 드러냈다. 순식간에 깜짝 놀란 고관 친구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 후 수도인은 친구를 이끌고 약간의 신통을 펼쳐 다른 공간으로 그를 데려가 다른 공간의 진실하면서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친구는 눈앞에 펼쳐진 천궁(天宮)의 뛰어난 풍경에 도취되었다. 흐뭇한 가운데 그야말로 아름답기 그지없는 구름 속 선녀가 춤을 한곡 끝내고 하늘거리며 파란 구름 속 선궁(仙宮)으로 날아간다. 수도인 역시 여러 비천들을 따라 떠나자 순식간에 밝은 달만 남아 하늘 높이 걸려있고 또 고관 친구는 하늘을 보며 후회한다.

이상은 션윈 무용극에 대한 필자의 거친 이해에 불과하며 실제 작품 속에는 보다 많은 스토리와 깊은 내함이 있다. 작년에 이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는 나 자신의 수련상태가 때로는 정진하다가 때로는 나태해짐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 그림을 그려 자신을 격려하기 위해서였다. 필자는 파룬따파를 수련한 이래 ‘반본귀진’이야말로 인생의 의미임을 알게 되었다.

사존께서는 《전법륜》에서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왜냐하면 이 사람이 수련의 길을 걷겠다고 생각하는, 이 의념(意念)이 움직이기만 하면 마치 금과 같이 빛나서 시방세계(十方世界)를 진동하기 때문이다. 불가의 우주에 대한 개념은 시방세계 학설이다. 왜냐하면 고급 생명이 볼 때 사람의 생명은 인간이 되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볼 때 사람의 생명은, 사람이 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당신으로 하여금 반본귀진하여 되돌아가게 하는 데 있다. 속인은 이 점을 깨닫지 못한다. 속인은, 속인사회 중에서 그는 바로 속인인지라, 어떻게 발전할 것인가, 어떻게 잘살 것인가를 생각한다. 그가 잘살수록, 그가 더욱 이기적일수록, 더 많이 점유하려고 생각하는데, 그는 우주의 특성과 더욱 어긋나며, 그는 곧 멸망을 향해 나아간다.”

“이 사람이 도를 얻으려는 마음이 있어 수련하려 한다면 이 사람은 그야말로 극히 대단하다고 한다. 이렇게 고생스러운데도 그는 아직 그의 본성이 없어지지 않았으며, 그는 여전히 수련해 되돌아가려 한다.”

그러므로 신불(神佛)이 보기에 수련인은 아주 진귀하며 수련하려는 그 일념은 사람 본성의 진념(眞念)이 소생한 것이다. 하지만 무신론과 진화론이란 사설(邪說)에 갇혀버린 현대에, 특히 중국대륙이란 환경 아래서는 이런 사악한 설들이 모든 중국인들에게 강제로 주입되고 있다. 이런 십악독세(十毒恶世)에서도 여전히 수련해서 반본귀진(返本歸真)하려는 생각이 있다면 그것은 정말 대단한 것이다. 중생에게 무엇이 사람의 진정한 동경인지 제시하고 자신이 수련 정진하도록 격려하는 동시에 속세를 벗어난 수도인의 탈속함을 보여주기 위해 이 그림을 창작하게 된 것이다.

이 그림은 구도에서 션윈무용극 《수도인》의 한 장면을 직접 가져왔다. 화면 앞에는 수도인이 가부좌를 틀고 연공하고 있으며 배경으로 큰 산이 있는데 산 위에 ‘정진(精進)’이란 두 글자가 새겨져 있다. 산과 사람은 표면적으로는 본래 아무 관련이 없지만 사실은 서로 표리가 된다. 왜냐하면 수련계(修煉界)에서 보기에 수련인이 가부좌하고 연공할 때 다른 공간의 신체는 비할 바 없이 거대하게 펼쳐질 수 있어 마치 우뚝 선 큰 산과 같기 때문이다.

사실 역사적으로 일부 ‘열벽조군(列壁朝君 역주: 중국 산수화에서 많은 봉우리들이 마치 임금에게 조회하듯이 가장 높은 정상을 향하는 것)’에서 군(君 임금)이 바로 수도인이며 열벽은 호법(護法)을 대표한다. 다만 이런 표현법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오직 수련계의 사람들만이 알 수 있을 뿐 현대인들은 보아도 모르며 단지 중국화의 구도방식의 하나로만 연구하고 탐구할 뿐이다.

다시 표면의 상징적인 의미에서 말하자면 암석의 투박함은 수도인의 질박함과 서로 비춰준다. 왜냐하면 정법수련은 불가라도 좋고 도가라도 좋은데 비록 표면적인 요구는 다르지만 모두 우주 특성에 동화됨을 중시하고 덕을 중시하고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련인에 대한 요구는 심성이 자비로워야 하며 모습은 상화해야 하는 것이다. 이외에도 산은 또 수도인의 의지가 반석처럼 굳센 것을 대표하는데 산위의 ‘정진’이란 두 글자는 이 점을 명확히 한다. 반본귀진의 길 위에서 수련을 처음처럼 정진하고 확고부동한 바른 믿음으로 한다면 일체 교란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작품을 창작한 종지의 내함을 두드러지게 하기 위해 구도에 있어 ‘정진’이란 두 글자를 의도적으로 화면 중앙에 배치한 것이다.

여기까지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1999년 7월 20일부터 중공사당은 전체 국가기구를 이용해 전 세계적인 범위에서 파룬궁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시작했고 이 박해는 올해로 이미 20년이 되었다. 하지만 파룬궁은 진압당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 20년간 갈수록 더 널리 전해지고 있다. 심지어 중국대륙에서 조차도 사당의 뜻대로 할 능력이 없으며 오히려 사람들이 중공의 사악함을 똑똑히 알게 되어 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중공관련 조직에서 탈퇴하고 있다.

수많은 파룬따파 수련자들이 비록 아주 엄혹한 박해를 받았음에도 여전히 수련을 견지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하는데 박해자를 포함해서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 수련인의 의지와 불법(佛法) 진리에 대한 바른 믿음은 마치 큰 산처럼 확고부동한 것이다. 사실 필자는 사람들이 모두 파룬궁에 대해 한번 알아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설사 수련할 생각이 없더라도 말이다. 도덕이 이미 전면적으로 붕괴된 불행한 지금 시대에 아직도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것을 견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고 심지어 큰 무리의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땅히 불행한 이 시대의 희망이다. 어쩌면 이 희망의 빛이 사람들의 내심에 매몰된 양지(良知)를 불러일으켜 인류문명 역사상 도덕이 가장 어두운 이 시대에 인류를 이끌어 지나갈 수 있게 할 것이다.

끝으로 또 한 마디 덧붙이자면 이 그림을 실내에 걸었을 때의 일이다. 한번은 친구들이 나와 대화를 나누다 우연히 이 그림을 보고는 모두 약속이나 한 것처럼 감탄하면서 그림 속의 수도인이 꼭 나와 같다고 했다. 비록 그림의 수도인은 눈을 감고 입정에 들어간 상태이지만 생생한 모습이라 마치 언제라도 단번에 눈을 뜰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물론 이는 자신을 자랑하는 것이 아닌데 왜냐하면 필자 역시 예상하지 못했던 효과로 의도적으로 추구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보아하니 작품의 표현을 생생하게 하자면 단순히 고상한 내함(內涵)만 있어선 안 되며 뛰어난 기교 및 신의 도움 역시 모두 다 아주 중요하다. 예술의 각 영역에서 인물의 내심세계를 성공적으로 그려내 인물의 형상이 아주 생생하게 표현되게 할 것인가에 대해 사람들은 모두 경험을 총괄하고 각종 기교와 방법을 학습하고 있다. 사실은 어떻게 하면 신불(神佛)의 도움을 얻을 수 있을지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52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