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본선생
【정견망】
요진은 천병천장(天兵天將)을 이끌고 구름 뒤에 은신한 채 공공(共工) 마족과의 암투를 시작했다.
공공은 틈만 나면 마족을 보내 전욱(顓頊)의 군대를 기습하게 했고, 요진은 그때마다 천병천장을 보내 이를 막아냈다. 전욱의 군대가 밤새 평온히 잠든 사이, 신들은 그들을 위해 밤새도록 피 튀기는 혈투를 벌인 셈이었다.
공공은 왕자야(王子夜)의 몸을 빌려 전욱과 직접 맞붙었는데, 육신범태(肉身凡胎)의 전욱이 공공을 당해낼 리 만무했다. 요진은 전욱의 등 뒤에 숨어 그의 정념(正念)을 가다듬어 주었고, 전욱의 손발이 자신의 신통 법력과 맞물려 움직이도록 하여 공공과 싸우게 했다. 전욱은 매번 전투를 아주 시원하게 치렀고 스스로 왕자야를 이겼다고 생각했으나, 사실은 정신(正神)의 도움이 있었음을 알지 못했다.
몇 차례 교전을 치르며 요진은 공공의 공력이 확실히 예전보다 강해졌음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 공력은 매끄럽지 못하고 거칠며 뒷심이 부족했는데, 이는 필시 무슨 단약을 복용한 탓일 거라 짐작했다.
또한 공공의 머리가 어찌 된 일인지 매우 단단해졌음을 알게 되었다. 스승님으로부터 사숙(통천교주)이 예전에 ‘강석단(鋼石丹)’이라는 약을 제련했는데, 이를 먹으면 머리로 커다란 산을 부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요진은 공공이 혹시 또 사숙의 단약을 먹은 것이 아닌지 의심했다.
하지만 요진은 걱정하지 않았다. 머리만 단단해서 무엇 하겠는가? 요진의 법력(法力)은 여전히 공공보다 위였다. 다만 지금 공공이 인간의 몸에 빙의해 있고 요진은 인간 세상에서 신적(神跡)을 드러낼 수 없기에, 전욱의 손을 빌려 싸워야 하는 점이 매우 불편했다. 본래 한 달이면 끝낼 전쟁이 1년이나 걸리고 있었다. 하지만 며칠간 관찰한 결과 요진은 승리를 확신했다. 시간이 조금 더 걸릴 뿐, 반도가 익기 전에는 충분히 이 전쟁을 끝낼 수 있을 터였다.
요진은 종종 꿈을 통해 전욱에게 일부 병법(兵法)을 점화해 주었다. 전욱은 꿈속에서는 도취되어 병법을 들었지만, 깨어나면 7할은 잊어버리고 남은 3할을 스스로 깨우쳐야 했다. 요진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신선(神仙)이 범인을 점화할 때는 너무 명확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규칙이 있기 때문이다.
전욱은 비록 정직하고 선량했으나 다소 미숙하고 지혜가 부족했다. 공공은 허장성세에 능하여 공포와 기만으로 군심(軍心)을 어지럽히는 데 선수였다. 전욱은 이런 방해를 마주할 때마다 평정심이 흔들리곤 했다.
요 며칠간 공공은 전욱 군대의 사기를 꺾기 위해 한밤중에 악귀(惡鬼)들을 풀어 놓았다. 악귀들은 전욱의 군막 주변을 기어 다니며 처절하고 괴이한 비명을 질러댔고, 병사들은 잠을 설쳐 다음 날 전투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연일 계속되는 괴성에 전욱 자신도 등골이 오싹해졌고 조바심이 났다. 이에 요진이 그의 꿈속에 나타났다. 전욱은 꿈에서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터널 속에 있었고 주변에서는 기괴한 소음이 들려와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이때 꿈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두려워하지 말라. 본래 어둠이 빛을 두려워해야 하는 법이다. 네가 곧 빛인데 무엇이 두려우냐?”
점화를 들은 전욱은 무언가 깨달은 듯했다. 그러자 갑자기 수많은 반딧불이가 날아와 칠흑 같던 밤을 환하게 밝히기 시작했다……
잠에서 깬 전욱은 무릎을 탁 쳤다.
“그렇다! 어둠이 빛을 무서워하는 것이었어!”
그리하여 다음 날 밤, 전욱은 병사들에게 아궁이의 불을 끄지 말라고 명했다. 공공의 악귀들이 다시 기어 나와 소란을 피우자, 전욱은 병사들에게 화살촉에 불을 붙여 소리가 나는 어둠 속을 향해 일제히 쏘게 했다. 악귀들은 불빛을 가장 무서워하기에 혼비백산하여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전욱은 감탄하며 말했다.
“어둠은 빛을 두려워하고, 빛은 거칠 것이 없으니 사는 정을 이길 수 없다[邪不勝正]!” 말을 마친 그는 땅에 무릎을 꿇고 신선의 점화에 감사를 표했다. 요진은 구름 위에 앉아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음모가 실패하자 공공은 다른 공포 작전을 구상했다. 귀졸(鬼卒)들의 형상을 더욱 흉측하고 혐오스럽게 바꾸어 송곳니를 드러낸 소름 끼치는 모습으로 만든 것이다. 이 괴물들은 직접 싸우는 대신 교전 중에 상대방을 겁주는 역할을 맡았다.
전투가 벌어지면 이 흉측한 괴물들이 공중에 떠올라 전욱의 병사들에게 귀신 낯짝을 들이대며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눈에 익어 무섭지 않더라도 그 소란스러움에 정신이 팔려 군심(軍心)이 흐트러질 수밖에 없었다.
전욱제는 다시 고민에 빠졌다.
“군자가 소인과 싸우기가 이토록 어렵단 말인가! 에휴!”
한창 고민하던 전욱의 코끝에 문득 맑고 은은한 향기가 스쳐 지나갔다. 전쟁터는 온통 피비린내뿐인데 어디서 이런 향기가 난단 말인가? 그는 향기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한참을 걷던 전욱은 향기의 근원을 찾아냈다. 누군가 쑥 더미에 불을 붙여 쑥향을 피우고 있었다.
전욱이 발길을 돌리려는데 웬 노인 하나가 술병을 들고 노래를 부르며 다가왔다.
“쑥향은 은은하고 웅황(雄黃)은 강렬하네!”
쑥 한 점 태우고 술 한 잔 들이키니,
악귀들 간담 서늘해 도망가네!”
전욱이 물었다.
“어르신, 그 노래의 뜻이 무엇입니까?”
노인은 대꾸도 없이 노래만 다시 반복했다.
“쑥향은 은은하고 웅황은 강렬하네!
쑥 한 점 태우고 술 한 잔 들이키니,
악귀들 간담 서늘해 도망가네!”
그러더니 쑥 더미 옆에 누워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전욱은 곰곰이 생각하며 주변을 살피다 정말로 그 근처에는 귀군(鬼軍)의 흔적이 없음을 발견했다. 그는 즉시 병사들에게 쑥과 웅황을 채집해 오라고 명했다.
술에 웅황을 타고 쑥을 태워 연기를 피웠다. 전욱은 병사들에게 쑥향을 쐬게 하고 웅황주를 몇 모금씩 마시게 한 뒤 전쟁터로 나가게 했다. 과연 괴물들은 이 냄새를 맡자마자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 전욱은 쑥과 웅황에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는 효능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전욱제가 대신들에게 말했다.
“듣기로 상고 시대에 한 여신(女神)이 계셨는데, 어떤 법기도 쓰지 않고 오직 꽃과 풀만으로 인간 세상의 요괴들을 물리치셨다더구나. 그 여신의 손에 들어가면 평범한 풀들도 법기가 된다고 하니, 필시 이 쑥과 웅황도 그 옛날 여신께서 쓰시던 법기였을 것이다. 이토록 귀신을 쫓는 힘이 대단한 걸 보니 말이다!“
말을 마친 전욱은 하늘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구름 위 요진은 그저 미소만 지었다.
전욱이 여전히 미숙하여 병법을 유연하게 쓰지 못하자 공공과의 전투는 지지부진했다.
요진이 등 뒤에서 법력을 실어주기는 했으나, 전욱의 생각 자체를 지배할 수는 없었고 지혜를 억지로 넣어줄 수도 없었다. 모든 것은 전욱 스스로 깨우쳐야 했다.
공공의 머리가 워낙 단단해서 빙의된 왕자야의 머리 역시 무쇠 같았다. 하지만 전욱은 고집스럽게도 매번 왕자야의 목을 베려 했고, 그때마다 번번이 실패했다. 나중에는 공공도 전욱의 수법을 파악하고는 일부러 머리를 내밀어 칼을 맞게 했고, 전욱의 병기는 부러져 패퇴하기 일쑤였다.
전욱이 돌아와서도 어떻게 하면 그 머리를 벨까만 궁리하자, 그의 머릿속에 갑자기 날카로운 호통 소리가 들렸다.
“고집스럽고 우둔하구나! 강한 곳을 피해 약한 곳을 치거라!”
이 소리는 분명 요진의 호통이었다.
정신이 번쩍 든 전욱은 방금 전의 외침이 신(神)의 점화임을 깨달았다.
그는 생각했다.
‘왕자야는 머리가 가장 단단하니 그 머리만 해결하면 끝날 일 아닌가? 내가 틀렸단 말인가?’
그때 점심시간이 되어 시녀가 식사를 들고 왔다. 마침 덩치가 산만 한 장군 한 명이 군사 보고를 하러 들어오다 시녀의 긴 옷자락에 발이 걸리고 말았다. 그 장군은 맥없이 자기 발에 걸려 요란하게 넘어졌다.
그 광경을 본 전욱이 하하 웃으며 말했다.
“전쟁터를 누비는 용맹한 장군이 저토록 부드러운 비단 자락에 넘어지다니! 하하하!”
장군은 흙을 털고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대답했다.
“폐하, 소신의 몸이 무쇠 같아 강 대 강으로 맞붙는 건 두렵지 않사오나, 저런 여인네들의 부드러운 물건에는 맥을 못 추겠습니다!”
전욱은 웃다가 돌연 무언가를 깨달았다.
“강 대 강은 무섭지 않으나 부드러운 것에는 약하다고…. 짐이 깨달았노라!”
다음 날, 전욱은 공공과 맞서기 전 손에 익은 신부(神斧) 대신 긴 채찍을 들고 나갔다. 요진은 그 모습에 흡족해했다.
전욱은 채찍을 휘둘러 왕자야의 단단한 머리가 아닌 목을 집요하게 공략했다.
전욱의 지혜가 열리고 그의 정념이 강해지자 요진은 더욱 수월하게 법력을 실어줄 수 있었다 전욱의 공격에 ‘왕자야’는 비명을 지르며 목을 보호하느라 공격할 틈을 잃고 연신 뒤로 밀려났다.
이에 독이 오른 공공은 왕자야의 시신을 찢어발기고 자신의 본체인 마체(魔體)를 드러냈다.
인면사신(人面蛇身)에 푸른 불꽃을 내뿜는 괴물이 나타나자 전욱은 겁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공공이 전욱의 머리를 낚아채려 달려들자 전욱은 어찌할 바를 몰라 고꾸라졌다.
전욱이 뒤로 물러나 정념을 잃는 순간, 요진은 ‘아차’ 싶었다. ‘전욱의 정념이 사라졌으니 더 이상 은밀히 도울 수 없겠구나! 이제 사람의 형상으로 직접 나서야겠다!’
공공의 손이 전욱의 머리에 닿으려던 찰나, 하늘에서 나무 지팡이 하나가 떨어져 공공의 손을 후려쳤다.
이어 한 여장수가 나타나 지팡이를 휘두르며 푸른 불꽃을 내뿜는 악마와 맞붙었다. 전욱은 넋을 잃고 이 광경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방금 전의 왕자야는 어디 가고 저 괴물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잠시 후 공공이 패해 달아났다.
요진은 서둘러 전욱을 부축하며 다정하게 물었다.
“용체(龍體)에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전욱은 멍하니 고개를 저었다. 요진은 그가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을 보고 말했다.
“우선 폐하를 장막으로 모시겠습니다.”
군막으로 돌아와 안정을 찾은 전욱이 물었다.
“은인(恩人)께서는 누구시며 어디서 오셨습니까?”
요진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소녀는 곤륜산에서 수행하는 도고(道姑)이온데, 마침 이곳을 지나다 폐하께 변고가 생긴 것을 보고 도우러 왔습니다.”
전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곤륜에서 오신 신고(神姑)셨군요. 바다 너머 곤륜이라는 산이 있다는 전설은 들었으나 가본 이는 보지 못했는데 정말로 있었군요! 도호가 어찌 되시는지요, 짐이 어찌 불러야 하겠습니까?“
요진이 말했다.
“요은(瑤隱)이라 부르시면 됩니다.”
그제야 전욱은 ‘요은 고고(姑姑)’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연한 대나무 빛깔의 긴 치마에 달빛처럼 하얀 망토를 걸치고, 허리에는 용머리가 새겨진 검은 나무 지팡이를 찼다. 폭포처럼 긴 머리를 높이 묶은 그녀는 꽃다운 나이의 용모를 지녔으나 말투와 기색은 성숙하고 중후했다. 차가울 때는 빙산 같아 위엄이 서려 있었고, 온화할 때는 봄바람 같아 미소가 싱그러웠다……
전욱제는 조용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요진을 살피다가 정신을 차리고 조금 전의 상황을 떠올리며 물었다.
“참으로 그렇군요, 고고(姑姑). 방금 왕자야는 어찌하여 보이지 않는 것입니까? 또 갑자기 나타난 그 푸른 뱀은 도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이에 요진이 답했다.
“폐하, 왕자야는 이미 죽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저 푸른 뱀이 왕자야의 시신에 붙어 있은 지 이미 수일이 지났습니다. 저 푸른 뱀의 이름은 공공(共工)으로, 황제(黃帝) 시기 치우의 잔당이었으나 이후 마왕(魔王)으로 수련한 자입니다. 이번에 왕자야의 몸에 붙은 것은 제위를 찬탈하여 인간 세상을 통일하려 한 것입니다.”
전욱은 크게 분노했다.
“비열한 놈! 살려둘 수 없구나!”
이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요은’에게 공손히 읍을 했다.
“요은 고고님, 당신은 짐의 마음속에 하늘이 보내주신 전신(戰神)이십니다. 고통받는 백성을 구할 희망이시니, 부디 짐을 도와 공공을 멸하고 귀졸(鬼卒)들을 소탕해 세상에 빛을 되찾아 주시겠습니까?”
요진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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