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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 송이송이 사람을 돌아오라 부르네

흔열(欣悅)

【정견망】

매화는 산 위에서 시냇물을 건너오니,
가까이는 청계를 사랑하고 멀리는 매화를 사랑하네.
시냇물 소리소리 나를 머물라 잡아끌고,
매화 송이송이 사람을 돌아오라 부르네.

梅從山上過溪來,
近愛清溪遠愛梅。
溪水聲聲留我住,
梅花朵朵喚人回。

양만리(楊萬里)는 자가 정수(廷秀), 호는 성재(誠齋)이며, 길주(吉州) 길수(吉水) 사람으로 남송의 저명한 시인이다. 소흥(紹興) 24년(1154년)에 진사에 급제해 국자박사, 태상박사, 태상승, 광동제점형옥(廣東提點刑獄), 이부원외랑(吏部員外郎)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그는 육유(陸遊), 범성대(範成大), 우무(尤袤)와 함께 “남송 4대가(四大家)”로 불렸으며, 또는 “중흥(中興) 4대 시인”으로도 불렸다.

송대는 비록 사(詞)로 유명하지만, 양만리가 가장 큰 성취를 이룬 것은 시(詩)였다. 그의 시는 참신하고 활달하며 생동감 있고 재미있어서, 흔히 평범한 풍경 속에서 풍성한 생기를 발견해 내곤 했다. 이 시 《남계농수회망산원매화(南溪弄水回望山園梅花: 남계에서 물놀이를 하다 산원의 매화를 돌아보며)》는 읽기에 가볍고 자연스러워 조금도 꾸며낸 느낌이 없으면서도 그렇다고 깊은 뜻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시 속에 흘러나오는 것은 시인의 자연에 대한 애착이며, 또한 사람들에게 희망과 아름다움을 가져다준다.

“매화는 산 위에서 시냇물을 건너오니,
가까이는 청계를 사랑하고 멀리는 매화를 사랑하네.”

산 위의 매화가 진짜로 시냇물을 건너올 리는 당연히 없으며, 날아온 것은 아마 매화의 옅고 은은한 향기일 것이다. 눈앞에는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먼 곳에는 하얀 매화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으니, 두 가지 모두 시인이 사랑하는 바다.

이 두 구절에서 화룡점정(畫龍點睛)은 바로 “과계(過溪: 시냇물을 건너다)” 두 글자에 있다. 매화 향기가 바람을 따라 시냇물을 건너오니, 마치 산 위의 매화가 시인을 찾기 위해 일부러 시냇물을 건너온 듯하다. 시인과 매화 역시 이로 인해 더 이상 서로 무관한 존재가 아니라, 오랫동안 헤어졌다 다시 만난 친구처럼 서로 친근해지고 서로를 부른다.

시인의 눈에는 이곳에 두 친구가 있다. 하나는 곁에 있는 청계(清溪 맑은 개울)이고, 한 명은 먼 곳에 있는 매화이다. 시에는 동행한 사람을 적지 않았으니, 시인은 아마 혼자 산수 사이를 거닐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냇물이 함께하고 매화가 맞아주는데, 어찌 외로움을 느끼겠는가?

“시냇물 소리소리 나를 머물라 잡아끌고,
매화 송이송이 사람을 돌아오라 부르네.”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가 마치 소리마다 시인의 걸음을 머물도록 한사코 잡는 듯하고, 매화가 흐드러지게 피어나니 또 송이마다 모두 그에게 돌아오라고 부르는 듯하다. “나를 머물라 잡아끌고(留我住)”와 “사람을 돌아오라 부르네(喚人回)”는 시냇물과 매화에 사람의 감정을 부여했다. 하나는 정성스레 잡아끌고, 하나는 깊은 정으로 부르니, 전체적인 그림이 생동감 넘치는 정취로 가득 찬다.

시냇물과 매화가 부르는 것은 어쩌면 시인의 발걸음뿐만 아니라 그의 마음일 것이다. 그것들은 마치 시인에게 속세의 번뇌를 멀리하고 조용하고 순진(純真)한 자연으로 돌아오라고 권하는 듯하다. 진정으로 산수에 미련을 갖는 것은 물론 여전히 시인 자신이다. 그는 어쩌면 이미 관장(官場)의 아귀다툼에 싫증이 나서, 청계와 매화 사이로부터 내면의 평온과 본진(本真)을 찾아 되돌리고 싶었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불공평함을 당했을 때 흔히 불평을 가득 품어, 지어낸 시문 역시 분노와 원한으로 가득 차곤 한다. 그러나 양만리는 인생의 우여곡절을 맞아 도리어 복잡한 감정을 청계, 매화와 봄바람 속에 융합시켜 낼 수 있었다. 그의 시는 옅은 구름이나 가벼운 바람처럼 원망과 노여움이 드물어, 읽으면 마음이 환하고 따뜻해진다. 이것은 어쩌면 바로 시인의 도량과 경지를 체현한 것일지도 모른다.

고인은 흔히 “만물에는 영이 있다(萬物有靈)”고 말한다. 무신론을 굳게 믿는 사람에게는 이러한 주장이 어쩌면 이해하기 어려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마음을 고용히ㅣ 하고 세심히 체험해 본다면, 그 속에 절로 깊은 뜻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시인이 시냇물이 산돌을 지나며 내는 맑고 울리는 소리를 듣고, 매화가 보내오는 옅고 그윽한 향기를 맡으면, 자연히 마음이 탁 트이고 기분이 좋아지기 마련이다. 청계와 매화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조금도 남김없이 사람에게 바쳐, 사람에게 위안을 주고 또한 사람에게 기쁨을 준다. 이것이 바로 친구와 동반이나 친인(親人)의 배려와 같지 않은가? 우리가 어찌 그것들에게 아무런 영성이 없다고 단정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아직 사람이 느낄 수 있는 일종의 표상에 불과하다. “만물에는 영이 있다”의 더욱 깊은 한 층 함의는 세상 만물이 결코 아무런 지각이 없는 물질이 아니며, 그것들도 스스로의 생명 상태가 있고 어쩌면 사상이 있고 감정이 있으며 즐거움이 있고 슬픔도 있다는 것이다.

양만리의 시를 읽으면 언제나 밝고 참신하며 생기로 가득 찬 힘을 느낄 수 있다. 비록 역경에 처할지라도 그의 시는 사람을 소침하게 만드는 경우가 드물며, 비록 지극히 어두운 시각을 맞이할지라도 미래에 대한 믿음을 잃게 하지 않는다.

그의 시는 마치 어둠 속의 한 자락 여명과 같아서, 수백 년의 세월을 뚫고 지나와 여전히 오늘날의 사람에게 온기와 희망을 가져다준다.

이제 여명의 빛이 이미 출현하였고, 기나긴 어둠도 곧 지나가려 한다.

정법(正法)은 이미 끝자락에 접근했고, 생명의 가장 아름다운 모든 것이 곧 시작되려 한다. 그러나 매 하나의 생명 역시 모두 스스로의 선택에 직면해 있다. 대법 사부님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대법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대법제자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하는 것은 모두 한 생명의 미래와 관계된다. 이 중대한 선택에 직면해, 사람이 편견을 내려놓고 청성(淸醒)을 유지하며 진지하고 신중하게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3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