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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唐詩) 실루엣: 횐구름에 황학이 고향으로 돌아가네

편주(扁舟)

【정견망】

이백(李白)이 눈앞에 놓인 수많은 시패(詩牌)들을 바라보며 한참 동안 말없이 서 있자, 동행하던 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쏠렸다. 무언가 기대를 하고 있는 눈치였다. 문득 이백은 긴 한숨을 내쉬며 붓을 내려놓고는 나지막이 읊조렸다.

“눈앞에 경치가 있으나 시로 읊을 수가 없구나.”

말을 마치기가 무척이나 바쁘게 그는 몸을 돌려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 나갔다.

시간은 여러 해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 시인이 붓을 들어 시패 위에 칠언율시(七言律詩) 한 수를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이 칠언율시는 후세의 많은 이들로부터 당대(唐代) 최고의 칠언율시로 칭송받게 된다.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서 이 시인의 품행은 흠이 있었고, 온전한 ‘좋은 사람’이라 부르기엔 무리가 있었다. 이 말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당재자전(唐才子傳)》에서는 그를 가리켜 “젊은 시절 시를 지을 때 뜻이 화려하기만 하고 깊이가 없어 경박함에 빠진 적이 많았다”고 평가했다.

그는 타고난 총명함과 비범한 재주를 지녀 현종 개원(開元) 11년(723년)에 진사에 급제했다. 그러나 성품이 경박하고 도박과 투계(鬪鷄 닭싸움), 말 달리기를 즐겼으며 향락에 빠져 살았으니, 소위 부잣집 난봉꾼이 가진 모든 결점을 고스란히 안고 있었다. 아름다운 여인을 사랑했고, 여인을 찬미하는 시를 쓰는 것도 좋아했다. 하지만 한 여자에게 진득하지 못했고 아울러 책임감도 없었다.

자신의 재주를 믿고 오만방자했으며 심지어 약간의 광기마저 있었다. 당대의 명사였던 이옹(李邕)이 그의 재명(才名 재능이 있다는 소문)을 전해 듣고 손님으로 초대했으나, 그는 오히려 시를 지어 이옹을 조롱하기까지 했다. 요컨대 그의 전반생은 흠집투성이에 스스로 잘났다고 으스대던 철부지 도련님 그 자체였다.

하지만 사람은 결코 한결같지 않은 법이다. 그의 변화는 변새(邊塞 변경)로 유람을 떠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변새에는 이렇다 할 오락거리가 없었기에, 드넓은 초원을 말달리며 매를 풀어 새를 쫓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오랑캐 매를 풀어 변방의 새를 쫓고, 대완의 명마로 가을 사냥을 나가네.”

(解放胡鷹逐塞鳥,能將代馬獵秋田)

(《안문호인가(雁門胡人歌)》)

관문 밖 곳곳에서는 오랑캐들이 틈만 나면 침략해 왔기에, 국토를 수호하려는 장수들의 치열한 전투가 끊이지 않았다.

“서로 마주 보며 술잔을 기울일 새도 없이,
잡다한 오랑캐들이 유주와 연주를 침범하네.
봉화는 꺼지지 않고 이어지고,
오랑캐의 먼지는 하늘 높이 솟구치는구나.
동북으로 내달려 구원하니,
전투가 끝나 성 또한 온전해졌네.
나라에 보답하고자 위험을 무릅쓰고 나아가니,
예부터 모두가 그러하였네.”

相看未及飲,雜虜寇幽燕。
烽火去不息,胡塵高際天。
長驅救東北,戰解城亦全。
報國行赴難,古來皆共然。

(《증왕위고(贈王威古)–왕위고에게 주다》)

전쟁은 더 이상 과거의 막연하고 허황된 개념이 아니었다. 그것은 시인의 눈앞에서 시시각각 벌어지는 참혹하고도 잔인한 살육이었다.

군대 생활은 허영을 벗어던지고 마음을 단련하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변방의 혹독한 시련을 겪고 나자, 정신적으로 허영에 찌들어 향락을 좇던 방탕아의 모습은 점차 자취를 감추어 갔다.

물론 시인은 의심할 바 없는 행운아였다. 그가 발을 디딘 시대는 대당 전체를 통틀어 가장 찬란하게 빛나던 전성기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웅장한 기상과 강성한 국력, 번영하는 경제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보다 더욱 소중한 것은 바로 찬란한 문화와 자유로운 신앙의 분위기였다.

당시의 사람들은 왕공귀족(王公貴族)이건 시정의 백성이건 가릴 것 없이 대다수가 부처와 도(道)를 신봉했다. 사회 전반에는 수많은 수련 법문이 성행했는데, 이는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황금기였다. 그리고 이러한 수련 문화는 또 당시(唐詩)라는 이런 예술 형식을 그 누구도 감히 뛰어넘을 수 없는 높이로 끌어올렸다.

사람들이 담론하는 것은 더 이상 세속의 공명리록(功名利祿)에 국한되지 않았다. 도법(道法)의 무위(無為)와 불리(佛理)의 현오함을 마음껏 논했고, 상당한 지면을 할애해 은거하거나 신선을 찾고 도를 닦는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시인 역시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현종은 도(道)를 좋아해 일찍이 회일(懷一) 법사를 궁궐로 불러 불가의 이치를 설파하게 했는데, 시인 또한 조정의 관료로서 기꺼이 그 법문을 듣는 영광을 누렸다. 그의 근기는 아주 좋고 깨달음도 남달라, 회일 법사가 설파한 불리에 단번에 마음을 빼앗기고 수련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싹텄다.

동시에 과거의 방황과 헛되이 보낸 세월을 깊이 뉘우치게 되었다.

“내게 일찍이 가르침이 이르러,
영원히 오묘한 소리를 이어받네.
대나무 방에서 의발을 마주하니,
솔 숲 우거진 곳에서 몸과 마음이 맑아지는구나.
일찍이 배움이 얕음을 후회하니,
늦었으나 나아갈 길을 찾았도다.
훌륭하도다, 원공(遠公)의 뜻이여,
청정하기가 황금과 같도다.”

故我一來事,永承微妙音。
竹房見衣缽,松宇清身心。
早悔業至淺,晚成計可尋。
善哉遠公義,清淨如黃金。

(《증회일상인(贈懷一上人)–회일 상인께 드림》)

상유심생(相由心生)이라 물질적 쾌락만을 좇던 방탕아에서 도를 구하는 구도자로의 변화는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 컸다. 그리고 이러한 가장 직관적인 변화는 그의 시풍에 고스란히 스며들었다. 《유천축사(遊天竺寺)》에서 그는 이렇게 읊었다.

“뜻을 씻어 청정함으로 돌아가고,
마음을 맑게 하여 공(空)을 깨닫노라.
비로소 세상 사람들과
만물이 어찌 그리 소란스러운지 알겠네.“

洗意歸清淨,澄心悟空了。
始知世上人,萬物一何擾。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 속세를 초월한 듯한, 완벽한 수행자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수행이 깊어짐에 따라 명예와 이익을 바라보는 시선 역시 조용히 변해 갔다.

“장안의 화려한 저택들은 구름 속에 솟아 있는데,
어느 집에서 살기에 저리도 곽장군 같은가.
날 저물어 조회 마치고 돌아올 때 수행원들을 거느리니,
길가에서 읍하고 절하는 이들 어찌 그리 많던가.
말하지 마라, 손을 대면 델 듯이 뜨거운 권세라고,
잠시 후 불이 꺼지면 재로 변해 사라질 것을.
말하지 마라, 빈천하다고 가볍게 여길지니,
사람의 부귀는 본래 때가 있는 법이라오.
하루아침에 천자가 은혜로운 낯빛을 내려주시면,
세상의 어리석은 이들도 비로소 깨닫게 되겠지.”

長安甲第高入雲,誰家居住霍將軍。
日晚朝回擁賓從,路傍揖拜何紛紛。
莫言炙手手可熱,須臾火盡灰亦滅。
莫言貧賤即可欺,人生富貴自有時。
一朝天子賜顏色,世上悠悠應始知。

(《장안도(長安道)》)

시인은 부귀공명이 결코 영원한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오늘날에는 권세가 하늘을 찔러 손만 대도 데일 듯 뜨거울지라도, 내일이면 불이 꺼진 재처럼 한바탕 바람에 흩어져 버릴 터였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가치는 무엇인가? 《행경화음(行經華陰)》이라는 시에서 그는 이렇게 탄식했다.

“북으로 진의 험준한 관문을 베고 누운 산과 강,
서쪽으로 한의 사당과 평탄하게 이어진 역참의 길가 나무들.
길가의 명리에 눈이 먼 나그네에게 묻노니,
이곳에서 장생을 배우는 것만 못하도다.”

河山北枕秦關險,驛樹西連漢畤平。
借問路傍名利客,無如此處學長生。

세속의 사람들이 부귀영화와 명예를 좇아 바쁘게 살아가도 결국 남는 것은 텅빈 것뿐이다. 오직 수행만이 진정으로 지혜로운 선택이다.

무한(武漢)에 황학루(黃鶴樓)라는 누각이 있다. 시인이 이곳을 찾기 전까지는 세상에 크게 이름을 떨치지 못했고, 그저 몇몇 신선이 학을 타고 날아올랐다는 전설만이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물론 당대(唐代)에는 이러한 고적들이 비일비재하여 그리 특별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의 발길이 닿으면서 모든 것이 변하기 시작했다.

시인은 무창(武昌)을 지나던 길에 황학루에 올라 멀리 아스라이 시선을 던졌고, 그 순간 암암리에 무언가가 그를 격렬하게 흔들었다. 한양성의 풍경이 눈앞에 선명하게 펼쳐졌고, 앵무주의 푸르른 풀잎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이곳에 얽힌 전설을 떠올렸다.

선인(仙人 신선)이 일찍이 학을 타고 이곳을 지나갔고, 또 전해지기를 비문려는 신선이 되어 학을 타고 돌아와 이 누각에서 쉬었다고 한다.

시인의 마음속에서 파도가 일렁였다.

“황학이여, 황학이여! 그대는 신선을 태워 돌아갔다가 잠시 여기에 머물렀을 뿐, 지금은 신선은 간 곳 없고 누각은 텅 빈 채 오직 저 하늘가의 흰 구름만 아득히 흘러가는구나.”

옛날 신선이 보았던 풍경과 내가 오늘날 바라보는 풍경이 어찌 다를 리 있으랴. 하지만 그대를 목격했던 세상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고, 그대가 떠난 지 천 년이 넘는 세월이 흘러 그 사적은 이미 신화가 되었거늘, 대체 언제 다시 돌아올 것인가?

세상의 사람들은 부귀하든 천하든 바삐 살아가며 한평생 아등바등 살아가지만, 결국은 잠시 머물다 가는 나그네일 뿐 그 무엇 하나 가지고 떠나지 못하는 것을.

문득 신선의 뒤를 이어 저 멀리 떠나가고 싶었지만, 눈앞에는 이미 해가 저물어 갈 길이 아득하고, 강가에는 자욱한 물안개가 시야를 가로막고 있으니 정말로 어찌할 도리가 없구나.

“문장은 본래 하늘에서 이루어지니, 뛰어난 솜씨는 우연히 얻노라(文章本天成,妙手偶得之).”

시상이 밀려올 때는 걷잡을 수 없는 법. 시인은 곧바로 제시판(題詩板)을 가져와 단숨에 시를 써 내려갔다.

옛사람은 이미 흰 구름을 타고 떠나갔고,
이곳에는 덩그러니 황학루만 홀연히 남았네.
황학은 한 번 떠나간 뒤에 다시 돌아오지 않고,
흰 구름만 천년 세월 동안 유유히 흘러가는구나.
맑은 내 가로지르는 한양의 나무들은 역력하고,
춘색 어린 앵무주의 풀들은 푸르르기만 하네.
해는 저무는데 고향은 그 어디인가,
강물 위 자욱한 물안개는 시인의 마음을 수심에 잠기게 하네.

昔人已乘白雲去,此地空餘黃鶴樓。
黃鶴一去不複返,白雲千載空悠悠。
晴川曆曆漢陽樹,春草萋萋鸚鵡洲。
日暮鄉關何處是,煙波江上使人愁。

이 시를 두고 신선이 가지(加持)한 결과가 아니라고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몇 년 후, 이백이 황학루 내부에 걸려 있던 시판을 올려다보았다. 그 시를 지었던 시인의 일생이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이백의 사명은 신전문화(神傳文化)의 기틀을 확고히 다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 이 《황학루》 시 한 수가 이미 모든 것을 완벽하게 설명해 버렸으니, 자신이 어찌 더 이상 붓을 낭비하겠는가?

동행하던 이가 성큼성큼 걸어 나가는 이백을 불러 세우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태백 형, 어찌하여 경치가 있어도 읊을 수가 없다는 겁니까? 도대체 누구의 시를 보신 건가요?”

이백은 뒤돌아보지 않은 채, 그저 낭랑하게 웃으며 소리 높여 대답했다.

“최호(崔顥)가 제목을 달아 쓴 시가 저 위에 걸려 있지 않은가!”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39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