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열(欣悅)
【정견망】
산 비와 시내의 바람 낚싯줄을 휘감고,
질그릇 술병에 배안에서 홀로 술을 마실 때.
취하여 잠이 들어도 깨우는 이 하나 없고,
시냇물 따라 앞쪽 시내로 흘러가도 전혀 알지 못하네.
山雨溪風卷釣絲,瓦甌篷底獨斟時。
醉來睡著無人喚,流到前溪也不知。
두순학(杜荀鶴)은 당대(唐代) 시인으로 자는 언지(彥之), 호는 구화산인(九華山人)이며, 지주(池州) 석태(石埭 현재 안휘 석태) 사람이다. 대순(大順) 연간에 진사에 급제했고 시로써 이름을 떨쳤으며, 작품이 독자적인 일가를 이뤘고 특히 궁사(宮詞)에 뛰어났다.
《계흥》은 한가롭고 또 훌쩍 세속을 벗어난 시냇가에서 홀로 낚시하는 그림을 묘사하고 있다. 전체 시에는 복잡한 의론도 없고, 억지로 마음속 감정을 쏟아내지도 않으며, 오직 산비, 시내 바람, 낚싯줄, 조각배와 홀로 술 마시는 사람만을 적었을 뿐이다. 그러나 뜻밖에도 자연에 순응하며 외부 사물의 견인을 받지 않는 일종의 인생 경지를 나타내고 있다.
“산 비와 시내의 바람 낚싯줄을 휘감고,
질그릇 술병에 배안에서 홀로 술을 마실 때.”
산 비가 시내의 바람을 따라 다가와 물속에 드리워진 낚싯줄을 휘감았다. 기꺼이 비바람이 이미 닥쳐왔으니 계속해서 낚시질을 하기에 마땅치 않아, 시인은 배의 덮개 아래로 건너와 소박한 질그릇 술병으로 홀로 술을 마신다.
날씨가 맑으면 낚시를 하고 산비탈에 비가 오면 술을 마시며, 모든 것은 인연을 따라 행할 뿐 억지로 구하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인연을 따른다(隨緣)’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며, 소극적으로 기다리는 것은 더욱 아니다. 그것은 노력한 후에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할 수 있을 때는 곧바로 행하고, 할 수 없을 때는 의연하게 내려놓으며, 한때의 득실로 인해 번뇌하지 않는 것이다.
“급히 서두르면 오히려 도달하지 못한다(欲速則不達)”는 말이 있다. 많은 일들이 만약 억지로 추구하기만 한다면 그 결과는 종종 정반대로 되기 쉽다. 바꿀 수 없는 일에 대해 불안해하며 안달하기보다는 차라리 자연에 순응하는 편이 낫다. 낚시할 때 낚시하고, 술 마실 때 술 마시며, 쉴 때 마땅히 편안히 쉬는 것이다. 평상시와 다름없어 보이는 행동은 사실 외부 사물과 아등바등 다투지 않는 일종의 여유로움을 체현해 낸다.
“취하여 잠이 들어도 깨우는 이 하나 없고,
시냇물 따라 앞쪽 시내로 흘러가도 전혀 알지 못하네.”
시인은 술을 마신 후에 취기가 점점 짙어져 배의 지붕 아래 깊은 잠에 빠져든다. 자신을 깨우러 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조각배는 시냇물을 따라 천천히 흘러간다. 앞쪽 시내로 흘러들 때까지도 그는 여전히 어렴풋이 깨닫지 못한다.
여기서 ‘깨우는 이 없다(無人喚)’는 것은 반드시 시인이 마음 써주는 이가 없거나 혼자 살아간다는 뜻은 아니며, 이 순간 아무도 방해하는 이 없고 마음에 걸리는 일이 없는 자유로운 상태를 더욱 잘 드러내 준다. 그는 어딘가로 서둘러 갈 필요도 없고, 누구에게 행적을 보고할 필요도 없으며, 조각배가 어디로 떠내려갈지 걱정하지도 않는다. 사람은 배 안에서 편안히 잠들고 배는 물 위에서 흐름에 따라 흘러가니, 사람과 자연이 마치 하나로 융합된 듯하다.
어떤 이들의 눈에는 이러한 삶이 너무나 의기소침하게 비쳐질지 모른다. 공명을 쫓지도 않고 앞날을 경영하지도 않으며, 오직 시냇가에서 술을 마시고 취해 잠들며 조각배가 물결 따라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기만 하니 말이다. 하지만 두순학은 진사에 급제했고 재능 또한 풍부했으니, 세속에 나아갈 능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진사 급제가 반드시 벼슬길의 순탄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으며, 특히 만당(晩唐)의 혼란한 난세를 살아갈 때 개인의 재능과 포부는 종종 제대로 펼쳐지기 어려웠다.
그러므로 시 속에 표현한 것은 진정한 은거 생활이 아닐 수도 있으며, 어쩌면 시인이 현실의 번잡함 외딴곳에서 스스로를 위해 찾아낸 한 조각의 안녕일 수도 있다. 그는 아마도 세상사의 곤란함을 겪어보았고 공명의 허황함을 목격했기에, 더 이상 외적인 득실이 수시로 자신의 마음을 뒤흔들도록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취하여 잠든 모습을 썼으나, 그 깊은 곳에서는 일종의 내려놓음을 쓰고 있다. 조각배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묻지 않고, 앞길에 어떤 득실이 있을지 근심하지 않으며, 반드시 특정한 곳에 도달해야 한다는 집착도 더 이상 품지 않는다.
이것은 먹고살기 위해 빈둥거리며 세월을 허비하는 것도 아니고, 자포자기하는 것도 아니며, 세간의 명리에 대해 담담히 초탈한 뒤에 오는 일종의 여유로움이다.
역사상 수많은 재능이 뛰어난 이들은 관료 사회의 부침과 세상사의 변천을 겪은 뒤에 종종 분쟁을 멀리하고 산림으로 은거하는 길을 택했다. 그들에게 공명을 쫓을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종일 바쁘게 뛰어다니는 것이 결국 명·리·정(名·利·情) 속에서 전전하며 뜬구름처럼 떠도는 것에 불과함을 점차 깨달았기 때문이다. 얻으면 기뻐하고 잃으면 고통스러워하며, 오늘 다투어 얻었다가 내일 또 잃어버리니 일생은 그렇게 허겁지겁 지나가 버린다.
진정으로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만약 역사를 읽어낼 수 있고 인생을 꿰뚫어 볼 수 있다면, 인간 세상의 수많은 분쟁이 비록 천변만화하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 근본으로 돌아가면 명, 리, 정이라는 굴레를 벗어날 수 없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만약 진정으로 이러한 집착을 담담히 내려놓을 수 있다면, 사람은 또한 그 속에서 초탈해 나올 수 있게 된다.
역사는 늘 끊임없이 반복된다. 왕조가 어떻게 교체되든, 문화가 어떻게 전승되든, 또 인생이 얼마나 많은 곤란을 겪든 간에 세상 사람들은 대개 여전히 명리의 득실 속에서 순환하며 되풀이하고 있다. 고대의 지자(智者)들은 이미 문제를 보았고, 또한 은거, 청수(淸修), 혹은 세속을 멀리하는 방식을 통해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시도했으나, 진정한 기회가 아직 도래하지 않았기에 이 모든 것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었다.
오늘날 대법이 널리 전해져 인간 세상의 수많은 천고의 비밀이 이미 밝혀졌다. 인생의 의미는 명리 속에서 득실을 따지며 안달복달하는 것도 아니고, 세속의 영욕을 따라 희로애락으로 떠돌며 부침을 겪는 것도 아니며, 바로 명·리·정에 대한 집착 속에서 진정으로 걸어 나오는 것이다.
물론 진정으로 ‘걸어 나온다’는 것은 사회를 떠나 산림에 은거하는 것도 아니고, 현실 속의 책임을 본체만체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세간에서 생활하고 일하며 책임을 다하는 동시에, 대법의 표준에 따라 자신을 수련하고 끊임없이 집착을 내려놓으며 심성을 제고하여 마침내 대법에 동화(同化)하는 것이다.
고인(古人)은 대법의 홍전을 만나지 못하여 근본적으로 초탈하는 방법을 찾지 못했기에, 차선책으로 산림에 은거하고 홀로 왕래하는 방식을 택해 분쟁을 멀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이미 그들이 당시 상황에서 해낼 수 있었던 드문 선택이었다.
만약 두순학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인간 세상에 살아 있다면, 그는 과연 법을 얻을 인연을 만날 수 있었을까?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이미 영화(榮華)를 담담히 여길 줄 알고 다툼을 내려놓을 줄 아는 이라면, 자연스럽게 세간 명리의 굴레를 훨씬 더 쉽게 벗어날 수 있을 것이며, 대법이 밝혀준 생명의 진리를 더욱 쉽게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대법을 위해 왔으니, 법을 얻고 수련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지혜의 체현이다. 인생이 이토록 덧없고 명리 또한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리는데, 우리는 어찌하여 또 가져갈 수 없는 저 물건들을 위해 애써 마음을 썩이고 자신을 해친단 말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