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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개석은 어떤 책을 즐겨 읽었을까?

글/ 단옥성(段玉成)

중화민국 총통 장개석

중국전통 사숙(私塾)에서 엄격한 교육을 받다

장개석은 대대로 부처님을 믿는 집안에서 출생했다. 부친은 독실한 불교신자였고 모친 왕채옥(王采玉) 여사는 현지에서 유명한 ‘호법파파(護法婆婆 역주: 불법을 수호하는 할머니란 뜻)’로 ‘법화경’과 ‘화엄경’을 익숙하게 읽었고 어린 장개석에게도 늘 불경에 대해 설명해주곤 했다.

여섯 살 때 가숙(家塾 집안에서 운영하는 글방)에 들어간 장개석은 엄격한 전통 사숙교육을 받았고 아홉 살 때 ‘대학(大學)’, ‘중용(中庸)’, ‘논어(論語)’, ‘맹자(孟子)’ 등 사서(四書)를 다 배웠고 또 ‘예기(禮記)’를 배웠다. 열 살 때 ‘효경’을 배웠으며 열한 살 때 ‘춘추좌전’을 배웠으며 열두 살 때 ‘시경(詩經)’을 배웠고 팔고문(八股文)과 고문(古文)을 처음으로 배웠다. 열세 살 때 ‘상서(尙書)’를 배웠고 열네 살 때 ‘주역’을 배웠으며 열다섯에 처음으로 책론(策論 역주: 과거 시험 준비를 위한 일종의 논술과목)을 배웠다. 열여섯에 ‘통감강목(通鑑綱目)’을 읽었다. 나중에 그는 비록 신식 교육을 받긴 했지만 전통문화를 중시했다.

장개석과 원 부인 모복매(毛福梅 왼쪽) 및 모친 왕채옥(가운데)와 큰아들 장경국(앞)

일본유학 중 중국 전통문화를 돌아보다

1906년 이후 장개석은 두 차례 일본유학을 떠났다. 그는 일본의 많은 사람들이 늘 왕양명(王陽明)의 ‘전습록’을 읽는 것을 발견했다. 본래 그가 일본에 유학 간 이유는 일본문화를 배우기 위해서였지만 왜 일본에서는 아직도 중국의 전통 경서를 학습하는가? 이것은 그로 하여금 어떻게 중국전통문화를 대할 것인지 반성하게 했다. 장개석은 일본의 부강은 “구미의 과학에 힘입은 게 아니라 중국의 철학에서 힘을 얻은 것이다.”라고 보았다.

항일전쟁 시기 장개석은 일본 침략자들을 이기려면 중국의 민족정신을 충분히 발휘해 “중화민족 고유의 무덕(武德)인 지신인용엄(智信仁勇嚴)을 회복하고 중화민족의 일관된 도통(道通)을 계승해야 한다.”고 보았다. 장개석은 학문을 사업(事業)의 근본으로 보았고 학문이 ‘생사성패(生死成敗)’에 영향을 주는 관건적인 요소라고 보았다.

장개석은 독서를 좋아했으며 송미령과 결혼을 준비하는 기간에는 직접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을 찾아가 책을 구매했고 밀월기간에 틈이 나면 책을 읽었다. 그는 “책을 보지 않고 근면하지 않으면 장차 재앙이 몸에 닥친다”고 했다. 그는 책을 목숨처럼 좋아했고 종종 침식을 잊을 정도였으며 “독서할 여가가 없는 게 가장 두렵다”고 했다.

북벌기간 제남(濟南)에서 참사가 발생해 군사업무에 바빠 독서할 여가가 없었던 장개석은 깊이 고민하다가 앞으로 매일 10페이지 이상 책을 읽기로 맹세했다. 독서를 위해 장개석은 늘 밤늦게까지 깨어 있곤 했고 그러다가 눈병이 났다. 그는 일기에서 “눈병으로 책을 볼 수 없는게 한스럽다!”고 했다. 심지어 “분해서 다시 자살을 생각할” 지경이었다.

일본 유학 당시 장개석 사진

5.4시기 유행한 과학주의와 반전통(反傳統)사상의 영향을 받지 않다

5.4 운동 시기 중국에서는 각종 사회주의 학설이 크게 유행했다. 이런 거대한 시대 흐름 속에서 장개석도 소위 ‘진보’ 간행물 및 마르크스학설 관련 서적들을 읽었고 심지어 헤겔을 연구하다 불면증이 생길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결국 중국전통철학으로 돌아왔다. 그는 “헤겔의 모순학설을 중국의 음양소장(陰陽消長)학설과 비교하면 중국철학이 얼마나 소중한 지 알 수 있다.”고 했다.

1923년 손중산은 장개석을 소련에 파견해 석 달이 넘는 기간 소련을 배우게 했다. 장개석은 처음부터 소련공산당이 중국에 대해 품고 있던 의도를 경계했다. 그는 자유주의자와 공산당은 중국의 전통문화를 존중하지 않으며 맹목적으로 숭배하고 모방하는 것은 다만 서방사상의 껍데기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1925년 장개석이 ‘레닌총서’를 본 다음날 ‘타고르 전기(역주: 인도의 저명한 시인이자 사상가인 타고르의 전기)’를 보았다. 그는 둘을 비교하면서 “타고르는 무한과 불후(不朽)를 인생관의 기점으로 삼았으며 또 사랑과 기쁨을 우주가 활동하는 의미라고 보았다. 반면 레닌은 권력과 투쟁을 세계혁명의 수단으로 삼았으니 하나는 유심(唯心)이고 하나는 유물(唯物)이다. 철학으로 말하자면 나는 정신을 중시한다.”고 했다.

나중에 장개석은 민주・과학 외에 중국의 전통윤리를 제출했고 ‘유심’을 선택해 유물론에 반대했다. 이것이 바로 그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거부하고 공산주의에 반대한 기점이다.

장개석은 또 늘 각국의 혁명사를 보곤 했다. 프랑스대혁명의 자코뱅파에 대해 “그 강고한 신앙으로 질투와 잔혹한 전횡으로 세력을 조성했으니 믿을게 못된다.”고 했다. 레닌과 자코뱅파에 비교하자면 장개석은 제갈량이나 문천상(文天祥)을 좋아했다. 그는 제갈량의 ‘전출사표(前出師表)’와 문천상의 ‘정기가(正氣歌)’를 좋아했고 또 ‘심경(心經)’ 등 불교관련 저작도 좋아했다.

‘신청년(新靑年)’과 큰 차이점은 장개석의 독서는 자신의 도덕완성을 추구하고 실현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는 점이다. 1912년부터 1924년까지 그는 ‘이학(理學 성리학)’의 규범으로 자신을 단속하며 스스로 ‘내성외왕(內聖外王 역주: 안으로는 성인의 덕을 쌓고 밖으로는 왕의 도리를 행한다는 의미)’이 되고자 했다.

1926년 이후 장개석은 철저하게 방향을 전환해 신학문을 완전히 폐기하고 전적으로 옛날 서적과 고문을 보았다. 1932년 그는 매일 새벽마다 고서(古書) 1편을 읽을 것을 규정했고 매번 책을 볼 때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으며 도중에 중단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일부 책들은 반복적으로 읽어 3~5번 심지어 더 많이 읽었다. 1932년 일기에서 그는 “현대의 책은 논할 나위가 없다. 중국 고서야말로 인생에 대해 정확하고 확실함을 알 수 있다.”

집무실의 장개석

경전 외에 장개석이 골라 읽은 책들은 대부분 중국 옛 성현(聖賢)들의 ‘내성수덕(內省修德 안으로 반성하고 덕을 닦음)’의 작품이다. 그는 ‘송원학안(宋元學案)’, ‘명유학안(明儒學案)’, ‘왕형공집(王荊公集 왕형공은 북송의 개혁재상 왕안석을 말함)’, ‘장거정평전(張居正評傳)’ ‘호림익전집(胡林翼全集)’ ‘성무기(聖武記 청나라 말기 위원이 편찬한 경세서)’ 등의 작품을 애독했다. 1936년 쓴 글에서 “전에 (나는) 단지 호걸(豪傑)을 자처할 줄만 알았지 성현(聖賢)으로 자신을 대하려 하지 않았지만 지금에 와서는 성현으로 자신을 대하되 호걸로 자처하고 싶지 않다.”라고 했다.

장개석의 일기 속에는 책을 읽고 난 후 반성하면서 자신을 격려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1929년 7월 18일 일기에는 “오늘 ‘주자전서(朱子全書)’를 보고 처음으로 활연히 자각(自覺)했다. 오랫동안 성현의 책을 보지 않으면 성심(性心)이 날로 떨어지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1932년 12월 13일 일기에는 “오늘 ‘백사학안(白沙學案 명말 황종희가 쓴 학안)’을 보니 자못 얻는 게 있다. 더 빨리 수양하지 못하여 교만하고 조급함이 수시로 변했던 것을 자책했다.”

1941년 9월 30일 일기에는 “날마다 ‘명유학안(明儒學案)’을 보고 성현의 책을 쌓으면서 여전히 스스로 경계하며 힘쓰지 못하는 것이 부끄럽고 가슴 아프다.”

이처럼 중국전통의 전적(典籍)을 정밀하게 연구했기 때문에 장개석은 5.4 시기 유행하던 과학주의와 반(反)전통사상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절할 수 있었다. 그는 신문학과 백화문에 대해서는 냉담한 태도를 보였 신문화사상은 배척했다. 만년에 그는 더 명확하게 중화문화는 “증오와 폭력을 숭상하는 공산주의의 사악한 본질을 절대 용납할 수 없다”고 인식했다. 또한 공산당은 “우리 중화민족 5천년의 숭고하고 우수한 역사문화를 남김없이 타파하고 인애(仁愛)와 평화를 본위로 하는 우리 중국의 윤리를 냉혹하고 잔인한 투쟁으로 바꿔 국제적인 학살에 가담시켰다”고 했다.

아래에는 장개석이 가장 좋아하던 책들을 하나씩 열거해본다.

《대학大學》, 《중용中庸》, 《맹자孟子》

장개석은 유가의 사서오경을 중시했다. 1934년 장개석은 군관들에게 전문적으로 ‘대학의 도(大學之道)’를 강연했다. “내가 어릴 때를 돌아보면 선생님이 ‘대학’ ‘중용’을 가르치실 때 몇번이나 외웠는 지 모른다. 18살 때 선생님이 나더러 대학을 주고 새로 읽게 하셨고 28세 되던 때 총리(손중산)께서 우리에게 대학의 가치를 명확히 말씀하셨기에 나는 새롭게 다시 보았다.”

그는 대학에 대해 “장차 사람이 되고 일을 하는 모든 도리가 전부 남김없이 망라되어 충분히 발휘되고 있다. 그것은 내재적인 덕성의 수양에서부터 외부로 널리 펼치는 사업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일관되며 끊임없이 확장하고 펼쳐지는 과정이 된다. …우리는 정치란 여러 사람의 일을 관리하는 것임을 하는데 ‘대학’은 개인의 내재적인 수성(修省)은 물론이고 외부로 발양하는 도리를 극치까지 발휘한 것으로 정치의 기본적인 원리가 전부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라고 했다.

그는 또 ‘중용’을 아주 높이 평가했으며 만약 ‘중용’의 요지를 알 수 있다면 “이미 우리 나라 고대철학의 정미로운 뜻을 얻은 것이니 밖으로 구할 필요가 없고” 입신(立身)과 처세(處世)에 무궁한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정치적으로 일체의 법률제도와 정치인의 행동태도는 모두 예(禮)에 부합해야 하는데 다시 말해 의(宜 마땅함)에 부합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지나치거나 부족함이 따르게 되고 이렇게 하면 어지러워지며 곧 그 정치를 완성할 수 없게 된다.”

‘대학’과 ‘중용’에 대한 해독에서 장개석의 기점은 입신처세(立身處世)와 수신양성(修身養性)이었다. ‘수기치인(修己治人 자신을 닦아 남을 다스림)’에서 개인의 내재적인 품덕(品德 인품과 덕성)을 강화한 후 대외적으로 발양해 ‘치인(治人)’과 ‘치국(治國)’에 이르고 최종적으로 ‘평천하(平天下)’에 이르게 된다. 그는 이것을 중국에 고유한 정치철학의 정미롭고 박대(博大)하며 고명(高明)하고 확실한 곳으로 여겼으며 외국의 정치철학자는 미칠 수 없다고 보았다.

한편 ‘맹자’에 대해 장개석은 이 책을 몹시 존중했는데 일찍이 아들인 장경국에게 “맹자는 문장이 좋아서 다른 책과는 다르다”라고 했다.

장개석과 장경국(왼쪽 위) 장위국(오른 쪽 위)

《효경(孝經)》

장개석은 전통윤리도덕 중에서 ‘충(忠)’・‘효(孝)’를 강조했다. ‘효경’에 대해 그는 평생 특히 중시했다. 1934년 “저녁에 ‘효경’에 나오는 몸을 세우고 도를 행해 후세에 이름을 날려 부모님을 드러내는 것이 효의 끝마침이다(立身行道,揚名於後世,以顯父母,孝之終也)를 읽었다.”

모친의 기일에 장개석은 직접 효경 중의 개종명의장(開宗明義章)을 써서 “깊이 생각하고 후인에게 남겨 그 효제(孝弟 효와 우애)로 가업을 일으켜 나의 허물을 보충하기 바란다.”라고 말했다. 1943년에는 “이번 주에 ‘효경’을 통독하고 마음에 얻은 게 있다. 만년(晩年)에 경서를 통독하니 성인(聖人)께서 책을 쓰신 요지를 더욱 이해할 수 있다.”라고 썼다.

《역경(易經)》

‘역경’은 장개석의 평생에 아주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어려서부터 ‘역경’을 읽었고 성년이 된 후 이름을 중정(中正) 자를 개석(介石)으로 고쳤다. 예괘(豫卦) 육이 효사(爻辭)에 “절개가 돌과 같이 견고하니 하루를 마치기를 기다릴 것도 없이 바르고 길하다(介于石 不終日 貞吉)”라고 했고 단(彖)사에서 “하루를 마치기를 기다릴 것도 없이 바르고 길한 것은 중정(中正)하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에서 취했다고 한다. ‘역경’의 술수(術數)는 장개석에게 운명의 배치와 모든 것은 하늘이 정하며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음을 믿게 했다.

《관자(管子)》

‘관자’ 역시 장개석의 애독서였다. 1934년 신생활운동을 추진할 때는 연속으로 2달 이상 거의 매일 이 책을 읽었다. 신생활운동에서 강조한 ‘예의염치(禮義廉恥)’의 이론적 기초는 ‘관자’에서 내원한 것이다.

《손자병법》

장개석은 군사작전을 할 때면 반복해서 손자병법을 연구했다. 중국고대의 군사철학 중 손자병법이 가장 정미하다고 보았다.

《증국번전집(曾國藩全集)》

장개석의 책상 옆에 늘 놓여있던 책이 바로 《증국번가서(曾國藩家書)》다. 그는 열일곱 살에 처음 읽은 후 여러 차례 반복해서 읽었으며 평생 손에서 놓지 않았다. 일설에 따르면 젊어서 《증문정공전집(曾文正公全集)》을 너무 탐독했기 때문에 나중에 시력을 손상했다고 한다. 증국번의 입지양기(立志養氣 뜻을 세우고 호연지기를 기름) 입품수행(立品修行 인품을 기르고 도를 닦음)은 장개석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증국번을 나라를 다스리고 정사를 다스리는 좋은 스승으로 여겼다.

《왕양명전집(王陽明全集)》

장개석이 가장 존경했던 인물은 명나라 때의 유학자이자 정치인인 왕양명이었다. 그는 양명이야말로 입덕(立德)・입언(立言)・입공(立功)에 있어 모두 뛰어난 성취를 이룬 유가의 성현으로 중국전통 중의 ‘전재(全才 두루 완벽한 재능을 갖춘 사람)’로 인정했다. 장개석은 만년에 육구연(陸九淵)과 왕양명의 심학(心學)에 상당한 조예가 있었다.

《성경》

송미령과 결혼한 후 장개석은 늘 ‘성경’을 읽었고 일기에도 늘 신약의 복음과 바울서신의 구절을 베껴 쓰곤 했다.

서안사변이 발생한 후 감금되었을 당시 장개석은 매일 성경을 통독했고 항전이 가장 힘겨웠던 시기에는 매일 밤 기도하기 전에 늘 기독교 견증문집인 ‘사막의 시내(Streams in the Desert 중국어 번역본의 제목은 荒漠甘泉)’를 읽곤 했다. 이 책은 그에게 마난(魔難)이란 하나님이 사업을 성취하는 사람에게 주는 고험이라고 볼 수 있게 했다.

장개석과 송미령의 결혼식 사진

1930년 이전 일기에서 장개석은 늘 “사람은 하늘을 이길 수 있다(人定勝天)”고 썼지만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후에는 더 이상 이 네 글자를 쓰지 않았다.

기독교를 통해 장개석은 공산주의는 창세주(創世主)를 비방하는 사교(邪敎)임을 더 확실히 인식했다. “공산당 무리들은 우주만물을 창조한 주재자를 믿지 않고 자신을 숭배하는데 이는 사실 유사(有史)이래 가장 비루한 우상숭배자들이다.”

“허위와 기만적인 수단으로 인심(人心)에 침투해 흉악하고 잔인하며 비인도적인 방법으로 사람의 자유를 박탈하고 제멋대로 패도를 행한다. 공산주의가 하루라도 끝나지 않으면 세상은 단 하루라도 편안할 날이 없을 것이다. 공산주의가 하루라도 소멸되지 않으면 세상에는 단 하루라도 평화가 없을 것이다.”

“공산주의의 반신(反神)사상은 공산세계와 자유세계 사이에 평화가 불가능하게 했다.”

장개석은 생전에 가족들에게 당부해 자신이 죽은 후 관 속에 ‘성경’, ‘사막의 시내’, ‘당시 삼백수(唐詩三百首)’ 등 세 권의 책을 넣어 묻어달라고 했다.

1975년 청명절을 얼마 앞둔 어느 날 89세의 장개석은 간호사를 불러 자신에게 청명에 관한 몇 편의 고시를 읽어달라고 했다. 간호사가 “현명하고 어리석음 천년 후 누가 옳은지 알랴, 눈에 가득한 다북쑥은 함께 언덕이 되었구나(賢愚千載知誰是,滿眼蓬蒿共一丘)”[송나라 때 문인 황정견(黃庭堅)의 《청명(清明)》에서)]를 읽을 때 장개석의 뺨 근육이 갑자기 한두 번 미미하게 떨렸다. 그는 여러 번 읽어달라고 당부하면서 이 시를 잘 썼다고 말했다. 이 두 구절에 담긴 대략적인 뜻은 성현이건 아니면 평범하고 용렬한 사람이건 생명이 끝날 때 인간세상에 남는 것은 모두 눈앞에 들풀로 가득한 작은 언덕과 다름이 없다는 뜻이다.

1950년의 장중정

참고자료:

黃克武《近代中國的思潮與人物》
王奇生《蔣介石的閱讀史》
楊天石《從蔣介石日記看他早年的思想》
王豐《蔣介石父子1949危機檔案》
《先總統蔣公思想言論總集》卷三十二
蔣介石《針對世變匪亂貫徹我們革命複國的決心和行動——對十屆四中全會的指示》
蔣介石《二十世紀的十字軍》
蔣介石《共黨是人類最大的敵人》

(에포크타임스에서 전재)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gb/19/11/21/n11671738.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