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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고난 속에서 선(善)을 택하다

【정견뉴스】

2025년 9월, 제11회 NTD 전 세계 중국 고전무용 대회. 청년 남자부 참가 선수 류쯔싱(劉子幸)이 예선에서 무용 ‘석회음(石灰吟)’을 선보이고 있다.(다이빙/에포크타임스)

3살 때, 그는 병실에서 얼굴이 훼손된 막내 이모를 보았지만 그것이 마지막 만남일 줄은 몰랐다. 어린 시절, 그는 어머니와 둘째 이모를 따라 추적을 피해 이곳저곳을 떠돌았다. 학교에 다닐 때는 붉은 스카프 착용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교사에게 매를 맞았고, 집 앞에서는 경찰의 감시를 받았으며, 거리에서는 몰래 사진을 찍혔다.

이러한 경험들은 한 아이를 극단적인 증오와 절망, 폐쇄적인 성격으로 몰아넣을 수 있었지만, 그는 다른 길을 택했다. 숨 막히는 환경을 떠나 자유세계로 온 그는 페이톈예술학교에서 차근차근 자신을 연마했고, 마침내 션윈(神韻) 무대에 올라 선(善)을 널리 알리는 사절이 되었다.

2025년 7월 20일, 대뉴욕 지역 수천 명의 파룬궁 수련생이 맨해튼 차이나타운에서 ‘파룬궁 박해 중지’ 퍼레이드를 벌였다. 션윈 무용수 류쯔싱이 매체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마크 저우/에포크타임스)

어린 시절 깊이 새겨진 얼굴

2004년 여름, 류쯔싱이 막 3살이 되었을 때의 일이다. 선양의 한 병원 복도에는 경찰들이 가득했고, 공기는 숨이 막힐 듯 긴박했다. 어린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지만, 어른들의 세계에서 느껴지는 긴장과 압박을 막연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어른들을 따라 병실에 들어가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을 보았을 때 그의 눈은 번쩍 뜨였다. 그가 가장 좋아했던 막내 이모 가오룽룽(高蓉蓉)이었다.

하지만 그날 본 막내 이모는 기억 속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

얼굴은 불에 탄 듯 검게 변해 있었고, 목과 귀 주변은 처참한 화상 자국으로 가득했으며, 다리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 온몸은 뼈만 남은 듯 야위어 있었다. 그녀는 간신히 눈을 뜨고 아주 가냘픈 목소리로 불렀다. “얼바오(二寶 류쯔싱의 아명)야……”

당시 3살이었던 쯔싱은 이 장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수년 후, 그가 션윈 예술단 무대 위에서 중국 고전무용수의 신분으로 중공의 신앙 박해에 대한 진실을 세계에 알릴 때 비로소 깨달았다. 그해 여름, 전기 충격으로 훼손된 그 얼굴과 가냘픈 부름은 단순한 상처가 아니라, 그가 ‘무용으로 진상을 알리는’ 길에 들어서게 한 시작점이었다는 것을.

“비록 그때는 어렸지만, 그 기억은 줄곧 남아 있습니다. 커서 다시 생각할 때마다 여전히 매우 슬픕니다.”라고 쯔싱은 말한다.

막내 이모의 얼굴 훼손과 학살

전 선양 루쉰 미술대학 재무처 직원이자 류쯔싱의 막내 이모 가오룽룽 (명혜망)

가족들의 기억 속에 가오룽룽은 온순하고 선량하며 늘 싱글벙글 웃던 사람이었다. 부지런하고 부모님께 효도하며 집안일을 도왔다. 대학 졸업 후 루쉰 미술대학 재무처에서 근무하던 당시, 학교에는 파룬궁을 수련하는 학생이 많았고 그녀는 교내 연공장 보도원이었다.

대학교 내 파룬궁 보도원이라는 신분 때문에 그녀는 당국의 중점 감시 대상이 되었다. 가오룽룽의 언니 가오웨이웨이(高薇薇)는 “룽룽은 1999년 4월 25일부터 이미 불려 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라고 회상했다.

1999년 7월 말부터 가오룽룽은 파룬궁을 위해 공정한 말을 하러 상방(上訪)했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붙잡혀 감금되었다.

2000년에는 집 앞에서 다시 납치되어 악명 높은 마싼자 노동교양소로 직접 보내졌다.

2003년 6월, 그녀는 ‘610 사무실’과 국안에 의해 또다시 납치되었고, 2004년 3월 선양 룽산 교양원에 수용된 상태에서 전향(수련 포기)을 거부했다. “5월이 되자 그녀는 전기 충격으로 얼굴이 훼손되었습니다.”라고 가오웨이웨이는 말했다.

2004년 5월 7일, 파룬궁 수련생 가오룽룽이 선양 룽산 교양원에서 교도관 탕위바오, 장자오화에 의해 약 7시간 동안 전기 충격을 받아 얼굴에 화상을 입었다. 사진은 부상 10일 후 촬영된 것이다(명혜망)

선양시 룽산 노동교양소 악경들의 7시간에 걸친 전기 충격으로 가오룽룽의 얼굴, 귀, 목, 등, 발목 등의 살점은 타버려 커다란 물집이 잡히고 시커멓게 그을렸다. 얼굴은 주먹 하나 높이만큼 부어올랐고, 눈은 겨우 틈만 남았으며, 얼굴에서는 노란 진물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마귀굴을 탈출하기 위해 가오룽룽은 교양원 2층 사무실 창문에서 뛰어내려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겨졌다. 입원 중에도 중공 경찰의 엄중한 감시를 받았으나, 몇몇 파룬궁 수련생들이 성공적으로 그녀를 병원에서 구출해 냈다. 공안부는 이를 ‘26호 대사건’으로 규정했다.

가오룽룽의 얼굴 훼손 사진이 2004년 7월 7일 국제사회에 폭로되자 전 세계가 경악했고, 중공 당국은 심한 공포에 질렸다. 당시 정법위원회 서기이자 ‘610’ 우두머리였던 뤄간(羅干)의 사주 하에 랴오닝성 정법위, 610 사무실, 검찰원, 사법국, 공안국 등이 연합하여 그녀를 추적했다. 사법계의 한 인사는 가오룽룽의 아버지에게 직접 이렇게 말했다.

“뤄간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이 일(얼굴 훼손 폭로)의 국제적 영향이 너무 크니, 우리더러 ‘잘 처리하라’고 하더군요……”

2005년 6월 16일, 가오룽룽은 박해로 사망했다. 향년 37세였다.

그녀의 죽음은 쯔싱의 외할머니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5년 후 외할머니 역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2018년, 미국 워싱턴 DC에서 열린 7.20 촛불 추모 행사에 참석한 류쯔싱의 어머니 가오웨이웨이. (리사/에포크타임스)

정처 없이 떠돌던 유년 시절

가오룽룽의 사망 후에도 류쯔싱 가족을 향한 박해는 멈추지 않았다.

“그때 중공 ‘610 사무실’은 박해의 증거를 은폐하기 위해 막내 이모의 시신을 서둘러 화장하려 했습니다.”라고 류쯔싱은 회상했다. 당국은 외조부모를 찾아가 화장 동의서에 서명하라고 끊임없이 압박했으나 외조부모는 거부했다.

중공 관리들은 가오룽룽의 두 언니 가오웨이웨이와 가오리리(高莉莉)를 체포하겠다고 협박했다.

체포와 소란을 피하기 위해 두 자매는 어린 쯔싱을 데리고 유랑 생활을 시작했다. 베이징 외곽에서 허베이 일대까지 끊임없이 거처를 옮기며 월세방을 전전했다.

“돈은 부족했고 환경은 매우 열악했습니다.”라고 쯔싱은 말했다.

그는 정상적으로 유치원에 다닐 수 없었지만, 어머니는 시골 유치원이라도 찾아 그가 조금이라도 배울 수 있게 노력했다.

그러나 그 짧은 평온함마저 어느 날 새벽, 경찰들이 들이닥치면서 깨지고 말았다.

어느 날 이른 아침, 몇 명의 경찰이 그들이 세 들어 사는 작은 집에 직접 쳐들어와, 그들 일가족을 연행해 갔다.

그날, 그들은 국가보안대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갇혀 있었다.

“오후에, 그들이 제 신분증을 빼앗아 내 호적지가 소재한 공안국에 전화를 걸었으나, 내 호적지 소재 공안국에서는 그들이 이 일을 관여하고 싶지 않다고 응답했습니다.”

장기간 감시하에서 생활

유랑 생활을 마치고 베이징으로 돌아온 후에도 생활은 결코 ‘정상’이 아니었다.

가오웨이웨이는 “집 앞에는 늘 경찰이 상주하며 감시했습니다. 특히 이른바 ‘민감한 날’이 되면 감시는 더욱 심해졌습니다.”라며 감시가 아주 심했다고 말했다.

“가령 올림픽 기간에는 문 앞, 복도와 엘리트베이터 앞에 사복 경찰들이 서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습니다.” “국가안전국과 공안국 사람이 또 찾아와 상방하지 말고 가오룽룽의 시신을 화장하라고 요구했습니다.”

당국은 외국 기자가 그들을 인터뷰하여 진상을 알릴까 봐 두려워했고, 류쯔싱 가족에게는 매일 외출할 때마다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압박감이 계속되었다. 가오웨이웨이는 쯔싱에게 경찰들을 미워하지 말고 지나갈 때 목례라도 하라고 가르쳤다.

하지만 공포 속에 있던 어린 소년에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책가방을 메고 고개를 숙인 채 말없이 걸어갈 뿐이었다.

때로는 가오웨이웨이가 쯔싱을 데리고 거리를 걸을 때면, 사복 경찰이 먼 곳에서 미행하거나 어두운 곳에서 그들을 몰래 촬영하곤 했다. 나중에 한 내부 정보 제공자가 이 상황을 가오웨이웨이에게 알려주었다.

자폐적이고 말 없던 아이, 붉은 스카프 착용 거부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저는 다소 자폐적이고 말이 없었습니다. 감히 친구들과 놀지도 못했고 늘 고개를 들지 못했죠.”

학교에서는 1학년 때부터 전교생에게 소년선봉대 가입과 붉은 스카프 착용을 요구했다. 많은 중국 아이들에게 있어 입대(入隊) 선서를 하고 붉은 스카프를 착용한다는 것은 “공산주의 사업을 위해 분투하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하지만 중공의 박해를 직접 목격하고 가족을 잃은 아이에게 그 붉은 스카프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어머니는 특별히 담임 선생님을 찾아가 “쯔싱은 소년 선봉대에 가입하거나 붉은 스카프를 착용할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강력하게 주장해 쯔싱은 담임 선생님의 동의하에 붉은 스카프를 매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운동장에서 혼자 붉은 스카프가 없는 모습은 눈에 띄었고 이를 못마땅해한 일부 교사에게 매를 맞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릴 때 또래 친구들과 정말 아주 달랐던 것 같아요”라고 쯔싱은 말한다.

모든 가족 구성원에게 뻗친 박해

더 잔혹한 것은 박해가 수련자 본인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수련하지 않는 아버지와 외할아버지 역시 수년간 마찬가지 소란과 감시 대상이 되었다.

공포와 고압 속에서 쯔싱의 아버지는 아들을 미국 뉴욕에 있는 페이톈예술학교로 보내기로 하는 힘든 결정을 내렸다. 아들이 중공의 박해에서 멀어져 자유로운 환경에서 무용수의 꿈을 이룰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아버지는 어머니와 이혼한 후에도 여전히 중공의 괴롭힘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경찰은 여전히 집으로 찾아왔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역시 괴롭힘을 당했다.

쯔싱의 누나는 외국 유학을 가고 싶어 해서 여권도 있고 비자도 있었지만, 매번 해관(출입국 관리소)을 나갈 때 저지당해 “출국 불허” 판정을 받았다. 2012년이 되어서야 그녀는 비로소 성공적으로 중국을 떠날 수 있었다.

그의 가족에 대해 말하자면 중공의 박해는 단지 신문 보도에 나오는 “사건”이 아니라 모든 가족 구성원의 인생에 뻗친 마수였다.

절처봉생(絶處逢生): 온 가족이 수련에 입문

그의 가족이 파룬따파를 만난 것은 1996년, 외할머니가 직장암 말기 진단을 받고 임종을 준비하던 절망적인 때였다. 늘 아주 강인했던 외할아버지마저 눈물을 흘릴 정도였고 온 가족이 심한 무력감에 빠졌다.

바로 이런 절망 속에서 외할머니가 파룬따파를 수련한 후 하루하루 건강이 좋아져 결국 기적적으로 건강을 회복했다. 이는 의학적으로 불가사의한 일이었고 온 가족이 직접 겪은 일이었다.

가오웨이웨이는 “아버지는 비록 수련하지 않으셨지만, 어머니가 말기 암에서 건강을 회복하는 것을 직접 보셨기에, 그는 이 공법에 대해 몹시 감격했습니다.”라고 했다.

그때 가오웨이웨이는 일본에서 생활하며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 그녀의 여동생이 중국에서 그녀에게 《전법륜》 한 권을 보내주었다.

“저도 이 대법이 정말로 너무나 좋다고 느꼈고, 그래서 수련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1999년 파룬궁에 대한 탄압이 갑자기 닥치고 거짓말이 하늘과 땅을 뒤덮었을 때, 이 가정은 너무 당혹스럽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렇게 좋은 대법, 이렇게 좋은 사부님이 왜 갑자기 이런 공격과 모함을 마주하게 되셨을까?”

사실을 똑똑히 밝히기 위해, 그들은 관련 정부 부처에 전화를 걸어 파룬궁을 위해 공정한 말을 했다. ‘7·20’ 이후, 정권이 방대한 선전기구가 파룬궁을 겨냥했을 때, 그들이 생각할 수 있었던 첫 번째 반응은 정상적인 경로를 통해 상황을 반영하는 것—각 시 정부, 성 정부에 상황을 반영하고, 심지어 베이징시 신방 부문에 가서 상방(上訪 청원)하는 것이었다.

한번은 쯔싱의 외할머니, 어머니, 이모가 베이징으로 상방하러 갔다가 결과적으로 모두 붙잡히고 구류되었다.

그때부터 이 가정은 잇달아 닥치는 타격과 박해 속에 휘말리게 되었다. 그러나 파룬따파는 정법(正法)임을 굳게 믿었기에, 그들은 거대한 압력 속에서도 여전히 내심의 신념을 굳게 지켰다.

페이텐 예술학교에 합격

그 시절, 류쯔싱에게 하루하루가 암담하고 희망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션윈 DVD 한 장을 얻었고, 비로소 삶의 방향을 찾았다.

처음 션윈을 보았을 때 그가 본 화면 속 무대는 밝고 넓었으며, 무용수들의 옷자락은 너울거리고 동작은 곧고 깨끗하여, 그가 현실 세계에서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순수함과 장엄함을 보았다. 그는 “그들이 정말 너무나 멋지다”고 느꼈다.

그는 말했다. “그 순간 바로 무용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이 길을 반드시 끝까지 걸어가리라 생각했습니다.”

2013년, 그는 뉴욕으로 건너왔다. 그해 그는 순조롭게 페이텐 예술학교에 합격해 진정한 중국 고전무용 전문 훈련의 길에 들어섰으며, 미래에 션윈 예술단에 가입하기 위한 기초를 닦았다.

무대 위에서 박해를 재현

2019년, 류쯔싱은 파룬궁에 대한 중공의 박해를 폭로하는 션윈 무용극에서 박해받는 파룬궁 수련생 역할을 맡았다. 그에게 있어, 이것은 단지 하나의 배역이나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 짧은 무용극은 우리 집에 일어난 일만 반영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또 중국 대륙에서 박해받는 모든 파룬궁 수련자들을 대표합니다. 저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때문에 그는 연습과 실제 공연을 할 때 아주 몰입할 수 있었다⋯.

션윈은 세상에 진정한 전통을 펼쳐내

류쯔싱에게 있어, 션윈이 세계 각지의 관객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이유는 단순히 아름다운 무용, 음악, 의상 혹은 무대 효과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이 ‘신전 문화(神傳文化)’를 펼쳐보이기기 때문이다.

“전통문화는 신(神)이 전해 내려온 것입니다.” 그는 말한다. “션윈의 매년 프로그램 설계는 사람들에게 전통으로 돌아가라고 말할 뿐만 아니라, 더욱이 사람을 신과 연결된 생명 상태로 돌아가도록 이끌어줍니다.”

션윈 프로그램에서 관객들은 많은 신화 이야기, 역사적 고사들을 볼 수 있으며,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이란 이런 전통 미덕이 구체적인 인물을 통해 펼쳐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모든 프로그램이 단순히 한 편의 문화만 공연하는 것만이 아니라 사람들에 신(神)은 왜 사람에게 이러한 문화를 전해주셨는지 알려주며, 모든 프로그램이 사람에게 큰 도움이 됩니다.”

중국에서 공연할 수 있기를 희망

류쯔싱은 션윈이 지난 20년간 세계 각지에서 공연하며 5천 년 문명의 휘황함을 보여주었고 뜨거운 호평을 받았으며 무수한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다고 했다. 하지만 션윈 단원들에게 있어 마음속에 지워지지 않는 유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많은 중국인이 아직 ‘공산주의 이전의 중국’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류쯔싱은 션윈이 중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반드시 일어날 일”임을 믿는다.

“저는 진심으로 그날이 하루빨리 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에포크타임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0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