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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론 사기 (2) 자바 원인의 탄생, 파탄, 그리고 억지

화펑밍, 장윈샤

【정견뉴스】


(에포크타임스)

전편에서 우리는 41년 동안 세계를 속인 ‘필트다운인'(Piltdown Man)의 시말을 서술했다. 바로 이 ‘완벽한’ ‘원인’이 진화론을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박히게 하고 주류 여론이 되게 하였다. 왜냐하면 허점투성이인 ‘자바 원인'(Java Man)보다 훨씬 강력했기 때문이다. 필트다운인이 탄로나자 학술 전문가들은 앞다투어 ‘고백과 책임 회피’를 한 차례 벌인 뒤, 즉시 그것을 잊으려 노력하며 다시 자바 ‘원인(猿人)’, 베이징 ‘원인’ 등을 ‘철증’으로 내세웠다. 이는 이 두 ‘원인’의 만신창이가 된 신분을 완전히 은폐한 것이다.

14. 진화의 꿈을 찾아 혈기 왕성하게 나서다

“진화론의 증거는 어디에 있는가?” 160여 년 동안 사람들은 끊임없이 물어왔다.

많은 사람은 반문할 것이다. “설마 그 많은 사실이 모두 진화의 증거가 아니란 말인가? 다윈의 두툼한 『종의 기원』에 서술된 내용이 모두 증거가 아니란 말인가?” — 이것이 바로 세상 사람들이 성공적으로 미혹된 표현이다.

사실 다윈의 『종의 기원』이 세계를 놀라게 한 것은 대담한 진화적 가설이었다. 예를 들어 A는 B와 닮았고, C는 D와 닮았으며, E는 F와 닮았다는 식이다. 가혹한 생존 조건 아래에서 자연은 우승자를 선택했으므로(적자생존), A→B, C→D와 같은 진화 관계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고래는 고대 사족수(四足獸 네 다리 가진 동물)에서 진화했을 수 있고, 말은 작고 왜소한 짐승(아예 시조마라고 이름 붙임)에서 진화했을 수 있으며, 사람은 고대 원인에서 진화했을 수 있다는 것 등이다. 이 모든 것은 가능성, 추측, 가설이며, 일련의 가설로 쌓아 올린 상상이고 증명할 수 없는 가설이다.

1859년판 『종의 기원』 속표지 (공유 영역)

유일하게 대체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아주 긴 시간을 대표하는 화석이다. 그래서 학술계는 지금까지도 화석으로 명확한 진화 서열을 제시하고 중간 단계를 나열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러한 서열이 충분히 많다면 진화를 증명할 수 있다고 여긴다. [엄밀히 말하면 이것으로도 증명할 수 없다. 후술하겠지만, 진화론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이는 육종(育種)이나 유전자 돌연변이도 종 내의 변화만을 증명할 뿐 종 외의 진화는 증명하지 못하며, 단지 억지로 진화라고 우길 뿐이다.]

다윈은 확실한 진화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만약 A가 B로 진화했다면 반드시 중간 과도기의 종이 존재해야 하는데, 현실에서는 중간 단계의 생물을 찾을 수 없고 화석에서도 진화 서열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윈은 이에 대해 “화석 기록이 불완전하다”라고 해명했다. 설마 모든 중간 단계의 종이 화석으로 형성되지 않았단 말인가? 이것은 너무나도 공교로운 일이 아닌가?

다윈은 이에 대한 보완책으로 예언을 내놓았다. 장차 반드시 진화의 중간 단계 종을 찾아내어 진화론을 증명할 것이라고 했다. 이로부터 진화론을 신봉하는 혈기 왕성한 청년들이 세계적인 꿈 찾기를 시작했다.

15. 자바에서 꿈을 찾은 네덜란드 소년

뒤부아(E. Dubois)는 네덜란드의 한 중학교 교사로 해부학을 가르쳤다. (공유 영역)

뒤부아(Eugène Dubois)는 네덜란드의 중학교 교사로 해부학을 가르쳤다. 그는 다윈의 열렬한 팬이었으며, 원인 화석을 찾아내어 진화를 증명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가 보기에 동아프리카와 인도 동쪽이 원인의 발상지여야 했고, 당시 인도 동쪽은 마침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다. 그는 그곳에 가서 운을 시험해 보기로 했으나, 안타깝게도 연구 신청이 거절당했다. 1887년, 그는 수마트라의 군의관을 신청하여 동남아시아로 꿈을 찾아 떠났다.

16. 원인의 두개골 발굴

1888년, 뒤부아는 부인과 함께 수마트라에 도착했다. 그는 작은 군 병원에서 근무하는 틈틈이 동굴에 가서 화석을 팠다. 1891년 건기에 그는 사람들을 고용해 자바의 솔로 강변에서 많은 동물 화석을 파냈다. 9월에 영장류의 어금니 하나를 발굴했는데, 그는 이것이 멸종된 침팬지의 일종이라고 생각했다. 10월에는 또 두개골 하나를 파냈는데, 전형적으로 눈썹 능선이 높이 솟아 있었다. 그는 이것이 원인의 일종이라고 단정하고 그해 『광산 공보』에 성과를 발표했다.

17. 45피트 떨어진 곳에서 사람의 다리뼈 하나를 골라내다

우기가 지난 후, 1892년 건기에 뒤부아는 계속해서 구덩이를 팠다. 8월에 사슴, 코뿔소, 하이에나, 악어, 돼지, 호랑이 및 멸종된 코끼리 화석들 사이에서 사람의 대퇴골 화석 하나를 발견했다. 해당 다리뼈는 작년에 발견된 침팬지 두개골에서 45피트(13.7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나중에 두개골 발견 지점 10피트 거리에서 또 다른 어금니 하나를 찾아냈다.

18. 대담한 조합, 놀라운 “가정”

뒤부아는 당시 어금니, 두개골, 대퇴골이 동일 개체의 것이며, 이것이 일종의 멸종된 대형 침팬지라고 굳게 믿었다. 이는 너무나도 “대담”한 것이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① 45피트나 떨어진 두 종류의 뼈를 무슨 근거로 한 개체의 것이라고 단정하는가? 한 종류의 생물이라고 단정하는 것조차 너무나 터무니없다.

② 10개월 간격의 두 차례 발굴에서 모두 지층 기록이 없는데, 어떻게 이 두 화석이 동일한 시간의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가? 오직 동일 지층의 원위치에 매장되어 있어야만 같은 시기일 가능성이 있다.

진정으로 고생물학을 배운 사람이라면 이렇게 노골적으로 짜 맞추기를 감히 하지 못한다.

19. 사기꾼의 계몽, “원인”의 탄생

“뒤부아는 두개골을 침팬지로 명명하려 했으나… 예나 대학교 동물학 교수인 헤켈(Ernst Haeckel)과 서신을 주고받은 후, 그것이 간절히 찾던 진화의 ‘잃어버린 고리’라고 선언했다.” 1963년, 캐링턴(Richard Carrington)은 『백만 년 전의 인류』(A Million Years of Man)라는 책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뒤부아가 선언하자 헤켈은 즉시 전보를 보냈다. “직립 원인의 발명가에서 행운의 발견자가 된 것을 축하하네.” — 이것은 확실히 뒤부아의 발명이었다. 엄격한 학자라면 45피트 떨어진 두 화석을 결코 일체로 단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헤켈 교수는 누구인가? 현재 학술계는 그가 학술 사기꾼이며 조작이 너무 많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후술하겠지만, 당시에는 아직 탄로나지 않았고 여전히 진화론의 큰 권위자 중 한 명이자 뒤부아가 존경하는 원로 선배였다.

20. 몇 차례의 대대적인 감정, “원인”은 모두 파훼되다

1895년, 뒤부아는 자바 ‘원인’ 화석을 유럽으로 가져왔다. 그는 학술계의 인정을 받는 것이 급선무였기에 화석 발굴의 원시 기록을 철저히 비밀에 부쳤고, 사람들로 하여금 두개골과 대퇴골이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발굴된 것처럼 느끼게 했다.

레이던(Leyden)에서 개최된 제3회 국제 동물학 대회(The Third International Zoological Congress)에서 헤켈처럼 광적으로 ‘원인’을 고취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여전히 그것이 단지 원인일 뿐이라고 단정하는 사람도 있었고, 두개골과 대퇴가 서로 다른 종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뒤부아는 자신의 보물을 파리, 런던에서 잇달아 전시했으나 여전히 공통된 의견은 없었다.

1895년 12월, ‘자바 원인파’는 치밀하게 계획하고 배후에서 조종하여 독일 베를린에서 ‘고인류학, 인종학, 선사학 학회’ 주관으로 대회를 열었다. 목적은 분명했다. 바로 ‘원인’이라는 감정을 통과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학회 회장인 루돌프 피르호(Rudolf Virchow)는 위조품을 위해 들러리를 서고 싶지 않았기에 대회 주재를 거부했다.

조종된 대회 토론에서 스위스 해부학자 콜만(Julius Kollmann)은 여전히 자바 화석이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피르호 박사는 “자바 원인의 대퇴골은 전형적인 인류의 대퇴인 반면, 두개골의 눈썹 위에는 아주 깊은 골봉이 있는데 이는 전형적인 원인으로 두 가지는 관련이 없다”라고 단정했다.

21. 감정 조작은 실패했으나 여론 조작은 “대승”

감정 조작은 실패했고 학술계의 공통된 의견도 없었지만, ‘자바 원인파’는 아랑곳하지 않고 직접 선전을 시작했다. 1859년 『종의 기원』 탄생 이후 33년 동안의 기다림 끝에 진화의 잃어버린 고리를 마침내 찾아냈다는 것이다! 진화 신앙은 더 이상 추측이 아니라 ‘증거’가 있는 ‘과학’이며, 전문가들에게 ‘공인’받았다고 홍보했다. 동시에 진화론이라는 이 갓 태어난 ‘진리’를 믿지 않는 것이야말로 무지한 것이라는 여론을 널리 조성했다.

“뒤부아가 발견한 직립 원인은 진리를 위해 싸우는 전국(戰局)에 근본적인 전환을 가져왔다”라고 헤켈은 선언했다. “그는 내 이론이 예언한 원인을 찾아냈다. 그것의 인류학적 중요성은 X선이 물리학에 갖는 의미보다 더 중대하다.”

즉, 헤켈이야말로 최대의 승리자이자 수혜자였다. 그는 앞을 내다본 이론가였고 뒤부아가 그의 예언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이는 앞 장의 필트다운인 대사기극에서 도슨(Charles Dawson)의 ‘발견’이 대전문가 권위자인 우드워드(Arthur Smith Woodward)의 ‘원인 예언’을 증명한 것과 어찌 그리 흡사한가!

22. 치명적인 6대 의혹

당시 ‘자바 원인파’가 아무리 선전하고 현재의 생물학계가 아무리 은폐하더라도, 당시 자바 ‘원인’에 대한 6대 치명적 의혹을 막을 수는 없었다.

① 45피트 떨어진 두 종류의 뼈를 무슨 근거로 한 개체의 것이라고 단정하는가?

② 10개월 간격의 두 차례 발굴에서 모두 화석 매장 지층 기록이 없는데, 어떻게 그것들이 동일한 시간의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가?

③ 자바 ‘원인’의 대퇴는 사람의 것이고 원인의 모습이 전혀 없으며, 두개골은 원인의 것이고 사람의 모습이 전혀 없다. 중간 단계 과도기 물종의 징후가 없으며 명백히 두 물종을 짜 맞춘 것이다.

④ 발굴 현장의 짐승 뼈 화석 더미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중 사슴, 코뿔소, 하이에나, 악어, 돼지, 호랑이, 고대 코끼리 화석이 마구 뒤섞여 있는데, 이는 원고 인류가 사냥해서 먹은 후 뼈를 버린 장소에 더 가깝다. 만약 그렇다면 사람은 그때 이미 존재했던 것이고(원고 인류 문명의 유적은 사실 많다), 원인을 찾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⑤ 왜 원인의 머리덮개와 사람의 다리만을 골라 조합했는가?

⑥ 뒤부아가 유럽으로 운반해 온 화석 상자 안에는 또 다른 3개의 인류 대퇴골이 있었다. ‘원인’ 시대에 이미 현대적 체형의 인류가 존재했다는 증거인 이것들을 왜 비밀에 부치고 알리지 않았는가?

23. 참으로 대담한 “악어 가설”

위의 앞선 두 가지 치명적 의혹에 직면하자 뒤부아는 “악어 가설”을 내놓았다. “45피트 떨어진 두개골과 대퇴는 원래 한 개체의 것인데, 아마도 악어가 그것들을 떼어놓았을 것이다.”

— 우습지 않은가? 진화론은 줄곧 이런 식이다. 끊임없이 새로운 가설과 환상으로 옛 가설을 보완(해명)하며 고리마다 가설뿐이다. 만약 이것이 법정이었다면 누구라도 그것을 기만으로 판정했겠지만, 이것들은 과학 명가와 권위 있는 전문가들이 한 말이기에 오늘날 사람들은 분별하려 하지 않는다.

“악어 가설”을 믿는가? 사실 당시의 ‘자바 원인파’도 믿지 않았으며, 그들은 심지어 언급하는 것조차 감히 하지 못했다. 나머지 세 가지 의혹에 대해 이 진화론자들은 정말로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었다.

24. 끝까지 인정하지 않고 억지로 버티다

당시 사람들은 지금과는 달랐다. 그때 진화론은 단지 하나의 유행하는 사조였을 뿐이며, 사람들은 진화론의 대담함에 놀라워했을 뿐 믿는 사람은 많지 않았고 뒤부아의 “악어 가설”은 더더욱 인정하지 않았다.

계속되는 의혹에 면박을 당하고 냉정을 되찾은 뒤부아는 논쟁에서 물러나 화석을 지하실에 넣고 25년 동안 세상에 내놓지 않았다(필트다운 ‘원인’의 시조인 우드워드가 화석을 움켜쥐고 사람들이 감정하지 못하게 한 것과 같다). 그러나 ‘자바 원인파 학자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이 열혈 팬들은 사실 이미 물러설 길이 없었다. 잘못을 인정하여 학계의 웃음거리가 되느니 차라리 억지로 버티며 선전을 계속하고 시간으로 논란을 소멸시키려 했다.

25. 20년을 억지로 버티다 필트다운 “원인”이 구원해주다

‘자바 원인파’는 이렇게 20년을 억지로 버텼다. 필트다운 ‘원인’이 화려하게 등장하자 그들의 압박이 완화되었다. 허점투성이인 자바인은 필트다운인의 그림자 속에 숨어 들러리와 보조 증거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필트다운인이 독보적인 인기를 구가하던 41년 동안,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사실’ 앞에서 진화론을 믿기 시작했고, 진화론이 주류 사상이 됨과 동시에 사람들은 자바 ‘원인’의 논쟁을 잊어버렸다.

26. 감정에 동의하자 자바 “원인”이 순식간에 붕괴

학자는 노년에 이르면 젊었을 때의 급진적이고 조급함이 사라지고 더욱 이성적이고 냉정해진다. 노년의 뒤부아도 그러했다. 의사의 권유로 뒤부아는 마침내 감정에 동의했고,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자바 ‘원인’: 두개골과 치아는 원인류에 속하며 암컷의 것도 있고 수컷의 것도 있다. 대퇴는 사람의 것이었고 나이도 달랐다!

27. 뒤부아는 잘못을 인정했으나 진화론은 오리발

어찌 됐든 노년 뒤부아의 정직함과 용기는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그는 솔직하게 공개 성명을 발표하여 자신의 ‘원인 발견’을 철회했다. 45피트 떨어진 두 개의 뼈가 한 물종에 속하지 않음을 인정했으며, 그중 두개골은 이미 멸종된 대형 침팬지의 일종이라고 했다.

진화론의 첫 번째 ‘강력한 증거’가 이렇게 철회된 것인가?? 그렇다면 진화론이 어떻게 발을 붙일 수 있겠는가? 현재의 진화론은 그것이 없으면 발을 붙일 수 없다!

그래서 당시의 ‘자바 원인 학파’와 현재 거의 전적으로 (진화론 기초 위에 세워진) 생물학계는 뒤부아 노년의 솔직함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뒤부아가 늙어서 망령이 난 것이라고 말하지만, 뒤부아가 치매에 걸렸다는 증거는 내놓지 못한다. 아니면 뒤부아가 변절하고 배신하며 말을 바꾼 것은 거대한 압력에 굴복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 압력이 바로 과학은 엄격해야 하고 검증받아야 한다는 것이라는 말은 감히 하지 못한다.

지금까지도 진화론계는 사실을 은폐하며 뒤부아가 ‘자바 원인 발견을 철회’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바 ‘원인’ 화석을 다시 꺼내와 여전히 진화론의 철증으로 삼고 있으며, 이를 뒤부아의 공으로 돌린다. 나중에 ‘자바 원인’을 철회한 그를 오히려 ‘고인류학자’라고 칭송한다.

28. 필트다운 원인이 파탄나자 자바 원인이 우뚝 서

1940년, 82세의 뒤부아가 사망했다. 13년 후인 1953년 필트다운 ‘원인’이 탄로나자 자바 ‘원인’은 다시 유일한 진화론의 ‘철증’이 되어 홀로 대들보 역할을 하게 되었으니, 어찌 다시 패배할 수 있겠는가?

뒤부아는 젊은 시절 자신의 ‘원인 화석’ 꿈을 스스로 깨뜨리고 솔직하게 잘못을 인정하며 학술적 엄격함의 정신을 따랐기에 감탄을 자아내지만, 진화론 학계와 오늘날 진화론 기초 위에 세워진 생물학계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뒤부아의 꿈을 이루어 주려 한다 — 어떻게 하는가? 진상을 은폐하고 다음 단락의 거짓 역사를 만들면 그만이다.

주목할 점은 이번 감정자 역시 진화론 전문가가 아니라 의사였다는 점이다. 앞서 말한 필트다운 ‘원인’ 대사기극도 처음에는 치과의사 마스턴에 의해 간파되었으나, 진화론 전문가들은 알지 못했고 믿지 않았으며 인정하지 않았다. 사기극이 버틴 41년 동안 필트다운 ‘원인을’ 연구하고 토론하며 인정한 과학 연구 논문과 예술품이 쏟아져 나왔고, 각종 과학적 해석과 도표가 끊이지 않았으며 박사 논문만 500여 편이 나왔다. 또한 학술계는 지금까지도 사기를 밝혀낸 치과의사 마스턴의 혜안을 은폐하며 언급하려 하지 않고, 마치 진화론 전문가들이 영명하여 41년 만에 진상을 밝혀낸 것처럼 행동한다.

지금 진화론 전문가들은 의사들의 자바 ‘원인’ 감정 결과를 더더욱 언급하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진화론의 시조 격인 ‘철증’을 수호해야 하기 때문이며, 더욱이 후속 ‘원인’ 화석들의 엄격함은 오히려 ‘자바인’만도 못하기 때문이다!

(에포크타임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03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