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守正)
【정견뉴스】
한 사회가 주류(主流)와는 다르지만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는가는 종종 그 사회의 진정한 문명 수준을 가장 잘 보여주는 척도가 된다.
오늘 부당한 대우를 받는 이들은 어쩌면 당신이 잘 알지 못하거나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집단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국가가 정치적 필요에 따라 특정 집단에 먼저 성격을 규정짓고, 언론, 공안, 사법, 나아가 사회 전체가 그 성격 규정에 따라 그들을 대하도록 허용한다면, 이 문제는 결국 그 집단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모든 사람과 관련된 진정한 질문은 이것이다. ‘법(法)은 과연 사람이 행한 바에 따라 판가름하는가, 아니면 권력이 그를 어떤 사람이라 칭하는가에 따라 판가름하는가?’
이러한 논리는 오늘날 중국 대륙에 여전히 광범위하게 존재한다. 고위층 권력투쟁 속의 정치적 성격 규정부터, 권리 침해에 맞선 일반 백성들의 청원(信訪), 신앙, 언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순간 여전히 사실을 먼저 보기보다 ‘네가 누구인가’를 먼저 따진다. 정치적 풍향이 바뀔 때, 자신이 다음에 징발될 ‘적(敵)’이 되지 않으리라고 그 누구 장담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의미에서 1999년 파룬궁(法輪功) 수련자들에게 일어난 일은 결코 파룬궁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모든 중국인과 연결되어 있다.
국가 권력 앞에서 한 일반인이 진정 청원할 권리가 있는지, 한 개인이 자신의 양심과 신앙에 따라 살아갈 수 있는지, 그리고 정부가 이견(異見)과 사회적 갈등, 대규모 민중의 요구에 직면했을 때 경청과 법치, 소통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정치적 성격 규정과 적대 구도 형성, 그리고 진압을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1999년, 중국은 바로 이 두 갈래 길 사이에서 매우 명확한 역사적 순간을 맞이한 바 있다.
그해 중국은 20여 년의 개혁개방을 거쳐왔다. 비록 그 과정에서 1989년 6·4 천안문 진압이라는 중대한 정치적 후퇴를 겪었으나, 시장경제가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사회 구조가 변화하며 민중의 자율 의식도 성숙해가고 있었다. 수십 년간의 정치 운동을 겪은 후, 중국 사회에는 어쩌면 사회적 갈등을 다시 적대 투쟁으로 격상시키지 않고, 민중의 요구를 청원과 행정 조정, 나아가 법적 절차를 통해 해결할 수도 있다는 일종의 가능성이 존재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1999년 4월 25일, 베이징에서는 훗날 심대한 영향을 미치게 될 한 장면이 펼쳐졌다.
톈진의 한 매체가 파룬궁을 부당하게 비방하는 기사를 게재하자, 약 5천 명의 파룬궁 수련자들이 톈진사범대학 《청소년박람(青少年博覽)》 잡지사를 찾아가 해당 기사에 대해 학교 측과 대화하고 자신의 체험을 통해 사실을 바로잡고자 했다. 그러나 현장에는 약 300명의 진압 경찰이 출동해 수련자들을 강제로 쫓아냈고, 일부 수련자들은 폭행을 당했으며 45명이 체포되었다. 톈진에서 발생한 상황을 알리고 체포된 이들의 석방과 정상적인 수련 환경을 요구하기 위해, 1999년 4월 25일 1만 여 명의 파룬궁 수련자들이 국무원 청원부서 근처로 모여 정상적인 채널을 통해 요구사항을 전달하고자 했다.
당시 국무원 총리였던 주룽지(朱鎔基)가 직접 나와 상황을 파악하고, 상방(上訪)자들의 대표를 선출해 중난하이로 들어와 소통하도록 조치했다. 관련 부서는 이어서 톈진에 구금되어 있던 파룬궁 수련자들을 석방했다. 그날 저녁, 사안에 대한 답변을 들은 1만 여 명의 파룬궁 수련자들은 질서정연하고 조용하게 현장을 떠났다.
오늘날 이 장면을 다시 돌아볼 때, 진정 기억해야 할 것은 단순히 ‘1만 여 명이 베이징에 모여 청원했다’는 사실만이 아니다. 매우 복잡하고 민감하며 자칫 중대한 정치적 위기로 이어질 수 있었던 집단적 사안이, 단 하루 만에 소통을 통해 평화롭게 해결되었다는 핵심적인 사실이다.
이 사건은 당시 중국이 중대한 사회적 갈등을 정상적인 방식으로 해결할 능력이 없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정부는 무너지지 않았고 사회도 혼란에 빠지지 않았다. 총리가 직접 나와 인민의 목소리를 들었고, 주민들은 대표를 통해 뜻을 전달했으며, 해결 가능한 문제는 해결된 후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그 누구도 ‘적’이 될 필요가 없었고, 정치 운동을 벌일 필요도 없었다.
10년 전인 1989년의 역사는 민중의 요구가 최고 권력에 의해 정치적 위협으로 규정될 때 중공이 진압이라는 수단을 쓴다는 것을 보여주었으나, 1999년 4월 25일은 대규모 민중 집회에 직면했을 때 평화롭고 이성적인 또 다른 해결 방식이 실제로 존재함을 입증해 주었다. 역사적 방향을 결정짓는 것은 ‘방법이 있는가’가 아니라, 역사의 갈림길에서 최고 권력을 쥐고 있던 이가 어떤 방법을 선택했는가였다.
역사가 이 길을 따라 계속 흘러갔다면, 4월 25일은 중국 사회의 거버넌스가 이성과 관용, 법치로 나아가는 이정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는 바로 이 지점에서 방향을 틀고 말았다.
1. 4·25: 중대한 사회적 갈등도 평화롭게 해결될 수 있었다
4월 25일 당일, 주룽지가 직면했던 것은 구체적인 문제였다.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왔는가? 톈진에서는 왜 사람들을 잡았는가? 이들의 요구는 무엇이며 정부는 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이러한 사고방식의 출발점은 단순했다. 상대방이 대화가 가능한 주체이며 요구를 표현할 권리가 있는 일반 민중임을 먼저 인정하고, 사실에 기반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자칫 정치화되기 쉬웠던 사건이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방식으로 마무리될 수 있었다.
이 날이 남긴 역사적 의의는 바로 여기에 있다.
정부가 대규모 민중 집회에 직면했을 때 선택지가 ‘진압’만 있는 것은 아님을 증명한 것이다. 비록 인원이 많고 사안이 민감할지라도, 사람들이 폭력을 행사하지 않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정부는 경청과 소통, 행정적 처리를 통해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다.
물론 이것이 주룽지가 훗날 파룬궁 탄압에 끝까지 반대했다는 뜻은 아니다. 박해가 중공의 기정방침이 된 이후 그는 체제와 공개적으로 결별하지 않았다. 따라서 오늘날 4·25를 다시 거론하는 것은 주룽지를 체제에 저항한 영웅으로 미화하기 위함이 아니다.
진정 중요한 것은, 그날 그 자리에 인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 남겨졌다는 점이다.
중국은 본래 박해라는 방식을 쓰지 않고도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심지어 그 길은 실제로 실행 가능함이 증명되기까지 했다. 그렇기에 이후에 벌어진 일들에 대해 더더욱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2. 이미 해결된 문제를 왜 다시 ‘적’으로 만들어냈는가
만약 4월 25일 당일에 폭력이 발생했거나, 정부 기관을 습격했거나, 정권 퇴진과 같은 정치적 요구를 내걸었다면 정부의 안보 조치는 논의해 볼 수 있는 사안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날 일어난 일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1만 여 명이 모였으나 질서를 유지했고, 대표가 들어가 대화를 나누었으며, 문제가 해결되자 사람들은 스스로 자리를 떠났다. 즉, 4월 25일 그 자체로 이미 답을 제시하고 있었다. 이 갈등은 얼마든지 평화적으로 처리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미 잘 해결된 사안을 왜 훗날 다시 전국적인 정치 위기로 조작해 낸 것일까?
이것이야말로 1999년을 이해하는 핵심 열쇠일 것이다.
주룽지가 본 것은 ‘사안’이었다. 사람이 잡혔고, 억울함을 호소하러 왔으니, 정부가 상황을 파악하여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시각이었다.
그러나 장쩌민(江澤民)이 본 것은 ‘위협’이었다.
사회 내의 중요한 역량이 최종적으로 공산당의 조직과 정치적 통제 하에 놓여야만 하는 체제 속에서, 당이 직접 조직하지 않았음에도 인원이 많고 독자적인 신앙과 도덕적 기준, 사회적 유대감을 지닌 집단은 통제 불가능한 세력으로 간주되기 쉬웠다. 파룬궁 수련자들이 따르는 ‘진·선·인(真·善·忍)’은 공산당이 부여한 것도 아니며 정치 권력의 승인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사람은 정치 조직에 의존하지 않고도 자신의 신앙에 따라 스스로 좋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할 수 있다.
사회의 자율적 존재를 허용하는 정상적인 정부라면 이것이 위협이 되지 않겠지만, 정치적 통제를 사회 자율보다 위에 두는 공산 체제에서는 독립성 그 자체가 문제가 될 수 있다.
이로 인해 질문의 본질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기존의 질문: “이 사람들이 무엇을 했는가?”
바뀐 질문: “이 사람들은 어떤 부류인가?”
원래는 사실과 법률에 따라 사람의 행위를 판단해야 했으나, 먼저 정치적 성격을 규정한 후 국가가 그들을 어떻게 대할지 결정하는 방식으로 바뀐 것이다.
이는 중공의 역대 정치 운동에서 반복해서 나타난 논리다. 반우파 투쟁이든 문화대혁명이든 유사한 방식을 사용했다. 먼저 적을 규정하고, 선전을 통해 적의 이미지를 조작하며, 조직체계를 통해 사회 전체의 입장을 강요한 뒤, 공안·사법·직장·학교·가정에 이르기까지 정치적 목표에 따라 작동하게 만드는 것이다.
1999년이 진정 경각심을 주는 지점은, 중국이 20년의 개혁개방을 거치며 이러한 운동식 거버넌스에서 점차 벗어나는 듯 보였으나, 파룬궁 문제에 이르러 다시 이 옛길로 되돌아갔다는 사실이다.
장쩌민이 작동시킨 것은 결코 새로운 정치적 방식이 아니었다. 그가 다시 끄집어낸 것은 공산당이 가장 익숙해하던 옛 방식, 즉 먼저 적대 구도를 만들고 국가 기구 전체를 동원하여 그 조작된 ‘적’을 소탕하는 방식이었다.
3. 장쩌민 — 역사의 갈림길에 선 죄인
이후 20여 년간 지속된 박해를 장쩌민 한 사람의 손으로 전부 완수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수많은 당정 간부, 공안, 선전 기구, 사법 시스템, 기초 조직들이 여기에 동참했다. 이 거대한 국가적 행위를 단 한 사람의 행위로만 설명하는 것은 역사의 복잡성을 다 담아내지 못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장쩌민의 죄책이 경감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1999년의 가장 중요한 사실 중 하나는, 다른 길이 이미 존재했었고 그것이 가능하다는 점이 입증되었다는 사실이다.
4월 25일 당일의 처리는 소통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으며, 폭력이나 정권 위기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 길을 따라 계속 처리했다면, 이 일은 정상적인 사회 관리 문제로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장쩌민은 이 길을 부정하기로 선택했다.
그는 이미 평화롭게 해결된 사안을 다시 정치화했고, 한 신앙 집단을 타격해야 할 대상으로 재규정했으며, 국가 기구를 전면적인 진압으로 내몰았다.
성공적인 평화 해결의 선례가 이미 존재했기 때문에, 이후 발생한 일들을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할 수는 없다.
방법은 있었고, 이미 시도되었으며, 성공했었다. 단지 그 길을 계속 걷지 않았을 뿐이다.
따라서 1999년이라는 역사의 갈림길에서 가장 직접적인 정치적 책임을 묻는다면, 장쩌민이라는 이름은 역사 속에서 흐릿해져서는 안 된다.
그의 책임은 단지 박해를 발동했다는 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중국에 잠시나마 다른 가능성이 열렸을 때 스스로 그 방향을 다시 공산당의 익숙한 정치 운동의 길로 되돌려놓았다는 점에 있다.
그러나 장쩌민의 책임을 묻는 것은 첫 번째 단계일 뿐이다.
더 깊은 질문은 이것이다. ‘왜 최고 지도자 한 사람의 개인적 의지가 이미 평화롭게 해결된 문제를 전국적인 정치 운동으로 바꿀 수 있었는가?’
‘왜 최고 권력이 결정을 내리자마자 선전, 공안, 사법, 조직, 학교, 직장, 나아가 기초 사회까지 신속하게 그 결정을 중심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었는가? 왜 법은 이를 막지 못했는가? 왜 당 내에 이견이 존재했음에도 끝내 견제 장치를 형성하지 못했는가?’
답은 아마도 그 정치 운동 기구가 단 한 번도 진정으로 사라진 적이 없었다는 데 있을 것이다.
최고 권력이 다시 “누가 적이다”라고 선언하기만 하면, 언제든 재가동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장쩌민 개인의 선택과 공산당 체제 자체는 서로 분리된 별개의 문제가 아니다. 바로 이러한 체제였기에 한 사람의 악념(惡念)과 악행(惡行)이 국가 기구 전체의 행동으로 신속하게 전환될 수 있었던 것이다.
4. 한 국가가 ‘진·선·인’을 박해하기 시작할 때
1999년 7월 20일, 파룬궁에 대한 전면적인 탄압이 시작되었다. 수많은 파룬궁 수련자들이 신앙을 지킨다는 이유로 구금, 노동교화, 형사처벌, 고문, 나아가 사망에 이르렀고 강제 장기적출까지 당했다.
그러나 박해받은 이들의 숫자와 비극적 경험으로만 이 탄압을 이해한다면, 그것이 중국 사회 전체에 입힌 상처를 여전히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이 박해가 겨냥한 대상이 다름 아닌 ‘진·선·인(真·善·忍)’이었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사회라면 정직함은 존중받아야 하고, 선함은 보호받아야 하며, 이익과 압박 앞에서 참되게 자제하는 것 역시 덕목으로 여겨져야 한다. 그러나 진·선·인을 신앙의 기준으로 삼는 집단이 국가 기구에 의해 소탕되어야 할 대상으로 규정되면서, 극도로 위험한 선악의 전복이 일어났다.
일반인이라면 주변의 파룬궁 수련자가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며, 수련을 통해 오히려 더 선하고 절제된 사람이 되었음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TV, 신문, 직장에서는 지속적으로 그와 완전히 반대되는 주장을 주입했다. 간부들은 입장을 표명해야 했고, 직장은 정치적 과업을 완수해야 했으며, 학교·지역사회·가정까지 이에 휘말렸다. 상황이 잘못되었음을 알면서도 직장, 안전, 가정, 현실적 이익을 위해 침묵을 선택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회에서 가장 위험한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선악(善惡)을 몰라서가 아니라, 권력 앞에서 자신의 선악 판단을 포기하는 데 점차 익숙해진 것이다.
분명 좋은 사람임을 알면서도 그를 위해 정당한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언론의 선전이 눈으로 본 사실과 다름을 알면서도 따라 되풀이하며, 죄 없는 사람이 이런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됨을 알면서도 “위에서 이미 규정했다”는 이유로 더 이상 묻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가 일단 형성되면 파룬궁 수련자들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한 사회의 도덕은 결코 추상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수많은 일반인의 일상적인 선택으로 구성된다. 한 사람이 정직을 선택하고, 상인이 가짜를 만들지 않으며, 의사가 환자를 속이지 않고, 기업이 유독 식품을 팔지 않으며, 관리들이 권력을 이용해 사익을 취하지 않는 이 모든 행동은 하나의 공통된 전제에 의존한다. 바로 ‘사람은 이득이 되더라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도덕(道德)이다.
그러나 국가 자체가 정치적 목적을 위해 흑백을 뒤바꿀 수 있고, 권력의 필요에 따라 좋은 사람을 나쁜 사람으로 만들 수 있으며, 정치적 성격 규정만 마치면 사실과 법, 나아가 인간의 존엄성마저 뒷전으로 밀려날 수 있음을 사회에 계속 보여준다면, 이러한 본보기가 주는 영향은 정치 영역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상업, 관료 사회, 교육, 의료,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로 스며든다.
사람들은 “무엇이 옳은가” 대신 “어떻게 해야 자신에게 가장 안전한가”를 배우기 시작하며, “무엇을 해서는 안 되는가”를 먼저 생각하기보다 “어떻게 해야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가”를 계산하게 된다.
오늘날 중국 사회를 돌아보면 수많은 이들이 깊은 불안감을 느낀다. 사기, 가짜 상품, 식품 안전 문제가 끊이지 않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기본적인 신뢰가 결여되어 있으며, 상업·교육·의료·공공생활에서 이익이 시비(是非)보다 앞서는 경우가 허다하다. 부당함에 직면했을 때 사람들의 첫 번째 반응은 몸을 사리는 것이며, 타인을 경계하고 때로는 명백히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고도 책임 추궁이 두려워 발길을 돌린다.
이러한 난맥상에는 각기 직접적인 경제적·제도적·사회적 원인이 있겠으나, 더 깊은 차원에서 보면 한 사회가 장기간 선악(善惡)의 전복, 사실보다 우선하는 거짓말, 양심보다 위에 서는 권력을 강제로 수용하게 될 때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도덕적 기반은 지속적으로 침식될 수밖에 없다.
《9평 공산당》 제5평에서 지적했듯, 장쩌민과 중공 체제는 이 박해 속에서 ‘상호 이용’의 관계를 형성했다. 장쩌민은 중공이 정치 운동을 통해 축적한 폭력, 선전, 조직 기구를 이용해 박해를 추진했고, 이 기구는 새로운 ‘적’을 통해 다시 전면적으로 가동되었다.
1999년 장쩌민과 중공 정치 기구가 상호 이용하여 파룬궁과 진·선·인에 대한 박해를 개시한 것은, 바로 이러한 도덕적 붕괴 과정에서 매우 중대한 전환점이었다.
진실을 말하면 처벌을 받고 거짓말을 되풀이하는 것이 안전하다면, 선량(善良)을 고수하는 사람은 타격을 받고 부당한 명령을 집행하는 사람은 이득을 얻는다면, 강권(强權) 앞에서 양심을 지키는 데는 참혹한 대가가 따르고 원칙을 포기해야 현실적 안전을 얻을 수 있다면, 이러한 가치의 전복이 오래 지속될수록 한 사회의 도덕적 마지노선은 조금씩 허물어지게 된다.
한 사회가 ‘진(真)’조차 보호하지 못한다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어떻게 신뢰가 구축되겠는가?
‘선(善)’이 강권 앞에서 오히려 위험 요소가 된다면 사람이 왜 선(善)을 고수하려 하겠는가?
위협 앞에서 원칙을 지키는 데 대가가 따르고 양심을 버리는 편이 살아가기 쉬워진다면, 이 사회는 결국 어떤 사람들에게 상을 주게 되겠는가?
이것이야말로 1999년 이후 중국의 도덕이 급격히 하락한 과정에서 매우 중요하면서도 오랫동안 간과되어 온 맥락일 것이다.
파룬궁에 대한 박해는 단지 한 신앙 집단만을 해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 전체로 하여금 선악이 전복된 광경을 목도하고, 참여하며, 나아가 이에 익숙해지도록 강요했다. 진·선·인을 지키는 이들은 타격 대상이 되고, 박해에 동참한 이들은 정치 과업을 완수했다는 이유로 안전과 이득, 권력을 얻게 된 것이다.
이러한 논리가 장기간 존재할 때 한 사회가 잃어버리는 것은 비단 일부 사람들의 신앙의 자유뿐만이 아니다. 그것은 무엇이 존경받을 만하고 무엇이 부끄러운 일인지를 판단하는 사회 전체의 공통된 잣대마저 침식해 버린다.
5. 말살된 것은 한 집단이 아니라 중국의 미래였다
27년이 지난 지금, 세상을 떠난 주룽지를 다시 언급하고 4월 25일을 돌이켜볼 때, 진정 물어야 할 것은 당시 주룽지가 일을 잘 처리했는가에만 머물지 않는다.
4·25 그 자체가 이미 답을 남겨주었기 때문이다.
그날 1만 명의 민중이 참여한 극도로 민감한 청원 사건이 폭력에 의존하지 않고 해결되었다. 정부와 민중이 대화할 수 있었고, 갈등은 소통을 통해 풀 수 있었으며, 인민이 다른 신앙을 가졌다 해서 국가가 그들을 정치적 적대 세력으로 몰아세울 필요는 없었다.
1999년 4월 25일, 중국은 하나의 답을 제시했다.
“그들의 말을 들어주라.”
몇 달 후, 장쩌민은 또 다른 답을 내놓았다.
“그들을 적으로 만들어라.”
이 두 답 사이에 놓인 것은 단순히 사회 갈등을 처리하는 두 가지 방법의 차이가 아니라, 완전히 서로 다른 선악(善惡)의 선택이었다.
전자의 선택은 인간을 우선 인간으로 인정하고, 당의 조직 체계에 속하지 않거나 자신만의 신앙을 지녔다 할지라도 정상적인 채널을 통해 요구를 표현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후자의 선택은 적대 정치를 다시 가동하여 한 사람의 신분을 그의 행위보다 위에 두고, 권력이 그를 ‘적’으로 선포하기만 하면 국가 전체를 동원해 그를 개조하고 압박하며 파괴하는 것이었다.
그 후로 상처를 입은 것은 비단 파룬궁 수련자들만이 아니었다.
사회 전체가 거짓말 앞에서 자신을 보호하는 법, 선량 앞에 침묵하는 법, 정치적 성격 규정이 사실을 대신하고 현실적 이익이 양심을 압도하게 만드는 법을 강제로 배워야 했다. 한 국가가 진·선·인으로 스스로를 다스리려는 이들을 박해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이 파괴한 것은 결코 단일 신앙 집단에 그치지 않는다.
그들이 끝내 파괴한 것은 선과 악을 구분하는 사회 전체의 공통된 잣대였다.
오늘날 중국에서 벌어지는 안타까운 난맥상에는 저마다 복잡한 이유가 있겠으나, 27년 전을 돌아볼 때 1999년은 결코 우회할 수 없는 역사적 균열점이다. 그해 중국은 다른 길을 분명히 보았고, 그 길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사실까지 입증해 냈었다.
그리고 훗날 장쩌민이 그 길을 끊어버렸다.
그러나 역사가 중국인들에게 남긴 진짜 질문은 여기서 멈출 수 없다.
단지 한 악인이 잘못된 결정을 내린 것이라면, 그 사람을 교체하는 것으로 문제가 끝났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진정 불안을 자아내는 지점은 이것이다. ‘어떻게 한 사람이 이미 평화롭게 해결된 사안을 전국적인 박해 운동으로 바꿀 수 있었는가? 왜 최고 정치 권력이 다시 적대 선을 긋기만 하면 국가 기구 전체가 즉각 그에 따라 움직였는가? 왜 법과 제도, 사회는 이것이 벌어지는 것을 막지 못했는가?’
이 질문을 끝까지 파고들 때,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것은 장쩌민 개인의 죄책만이 아니다. 하나의 제도가 어째서 끊임없이 적을 만들어내고 선악을 뒤바꾸며, 국가 기구 전체를 그 전복된 행태에 복종하게 만들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것이야말로 1999년이 오늘날 중국에 남긴 가장 무거운 반성일 것이다.
한 문명의 진정한 마지노선은 결코 얼마나 많은 부를 창출했는지, 얼마나 많은 고층 빌딩을 세웠는지, 혹은 세계 무대에서 얼마나 막강한 힘을 가졌는지에 있지 않다. 아무런 무기도 없이 오직 자신의 신앙과 양심을 지키고자 하는 한 사람이 권력 앞에 섰을 때, 이 국가가 과연 그를 어떻게 대하는가에 달려 있다.
1999년 4월 25일, 중국은 잠시나마 증명했었다.
“그들의 말을 들어줄 수 있다.”
그러나 몇 달 후, 또 다른 선택이 그 길을 잘라버렸다.
이로 인해 말살된 것은 한 집단이 누려야 할 정상적인 삶과 신앙의 권리뿐만이 아니었다.
말살된 것은 중국 전체에 희망을 가져다줄 수도 있었던 미래 그 자체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