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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쩌민의 실체》 2: 명예롭지 못한 집권

제1장 “부도덕한 인생 내력” 제2절

【정견뉴스】

지금부터 14년 전, 《장쩌민의 실체(真實的江澤民)》이 처음으로 독자들과 만났다. 14년이 지난 지금, 장쩌민은 이미 죽었지만 그가 남긴 정치적 독소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오늘날 중국의 많은 혼란과 위기는 모두 장쩌민 집권 시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부패로 국가를 다스리고, 법치(法治)를 짓밟으며, 도덕을 파괴하고, 파룬궁을 박해하는 한편, 그로 인해 팽창된 중공의 전제(專制) 및 폭력 기구는 중국에 끝없는 환란을 남겼다. 오늘날의 중공을 똑똑히 보고, 중국이 어찌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이해하려면 《장쩌민의 실체》를 읽어볼 필요가 있다. 이에 에포크타임스에서는 본문을 다시 게재한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제2절 명예롭지 못한 집권

1989년은 장쩌민의 정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해였다. 의심할 여지 없이 장쩌민은 ‘6·4’ 학살의 최대 수혜자였다. 사실 장쩌민은 ‘6·4’ 사건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로 인해 원래 은퇴를 준비하던 장쩌민은 상하이시 당서기에서 단숨에 당·정·군의 최고 권력을 거머쥔 ‘핵심’으로 임명되었다.

폭풍 전야

1989년 초, 덩샤오핑(鄧小平)이 주도한 경제 개혁은 중국에 새로운 생기를 불어넣는 동시에 불안한 동요도 함께 가져왔다. 국민경제는 끊임없이 성장하고 시장 공급은 점차 다양해졌지만, 중앙정부가 거두어들이는 각 지방의 세수(稅收)는 3분의 1이나 감소했다. 새로운 인플레이션율은 20%에 육박했다. 물가가 치솟았고, 공포에 질린 사재기는 대도시 일상의 한 부분이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점점 더 많은 국영기업이 적자와 도산에 직면했고, 수만 명의 국영기업 노동자들이 실직 시장으로 내몰렸다. 신(新)경제 체제의 기득권층과 구(舊)경제 체제의 기득권층 사이의 모순은 이미 날로 뚜렷해졌다. 장사로 부를 쌓은 이들이 생겨난 반면, 수많은 원래 국영기업의 노동자와 기술자들은 기존에 누리던 온갖 복지와 퇴직 보장을 잃어버렸다. 그들의 막대한 인원 역시 사회 속의 새로운 계층을 형성했다. 사회의 빈부 격차는 급격히 확대되고 있었다.

당시 중국 민중이 가장 분노했던 것은 바로 ‘관도(官倒)’였다. 중국은 1985년부터 농산물 수거 가격, 주요 공업제품 출고 가격, 그리고 품귀 상품에 대해 ‘이중가격제(雙軌制)’를 실시했다. 즉, 국가 계획에서 생산된 부분은 계획 내 가격으로 매입하고, 계획을 초과하는 부분은 계획 내 가격보다 훨씬 높은 시장 가격으로 매입하는 방식이었다. ‘이중가격제’의 목적은 생산재의 수요가 공급을 초과하는 모순을 해결하고, 국가 지령성 계획이 저비용으로 완료되도록 보장하기 위함이었다. 이른바 ‘관도’란 관리들이 비준서(배정 허가서)를 이용해 계획 내의 가격으로 철강재 같은 품귀 상품을 사들인 뒤, 이를 다시 시장 가격으로 되파는 것으로, 그 과정에서 가격 차이는 수배에 달할 수 있었다.

이른바 ‘관도’란 관리들이 별도로 장사에 나설 필요도 없이, 자신의 손에 쥔 권력을 이용해 사회적 재산을 마구 약탈하고 부패를 저지르며 주문, 할당량 등 돈이 확실히 되는 사업들을 모두 친척과 친구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을 의미했다.

점점 더 많은 중공 관료들이 직접 사업에 뛰어들 필요도 없이, 손에 쥔 권력을 이용해 사회적 부를 함부로 탈취하고 탐오부패를 저지르며, 주문이나 할당량 같은 확실히 돈이 되는 사업들을 모두 자신의 친인척과 친구들에게 몰아주었다. 각양각색의 주경사무소(駐京辦事處 지방정부 베이징 연락사무소)와 고급 호텔들에는 특별한 무리가 머물고 있었는데, 이들은 수백만 위안의 돈을 품에 안고 각 부처의 베이징 고위 관료들을 예의 주시했다. 그들의 목적은 이들에게 이 수백만 위안을 써서 수입 지표와 온갖 할당량을 받아내는 것이었다. 단 한 장의 비준서나 할당량만 손에 넣으면, 그들은 수천만 위안에서 심지어 수억 위안에 달하는 돈을 벌어들일 수 있었다.

중공의 절름발이 개혁이 빚어낸 기형적 체제는 수많은 정경유착에 최적의 환경을 조성해 주었다. 이러한 더러운 거래들은 관료와 상인들의 배를 불렸지만 민중을 희생시켰는데, 왜냐하면 가격 차이의 최종 부담자는 바로 평범한 백성들이었기 때문이다. 1988년, 국가가 통제하는 가격 이중가격제의 차액은 3,500억 위안 이상으로, 그해 국민소득의 약 30%를 차지했다. 태자당(太子黨)들은 권력을 이용해 비준서를 불법 거래하며 하룻밤 사이에 벼락부자가 되었다.

‘관도’라는 이 단어는 중공 관료들의 부패를 여실히 반영했다. 전면적인 개혁을 요구하는 민중의 요구는 마치 거칠게 요동치는 암류처럼 사회 전반에 소용돌이쳤고, 이 시점에서는 작은 불씨 하나로도 연쇄 폭발을 일으키기 충분했다.

4월 8일, 당내 양심파로 여겨지던 후야오방(胡耀邦)이 정치국 회의 도중 갑작스러운 심장발작으로 쓰러져 일주일 만에 서거했다. 그의 죽음은 중공 원로 정치에 대해 다년간 쌓여온 민중의 불만과 민간의 분노가 사회적으로 공공연히 폭발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중공 개혁의 앞날에 대한 비애와 실망으로 가득 차게 만들었다.

유명 대학인 베이징대, 칭화대, 런민대, 베이징사범대, 정법대 등의 교내에는 후야오방을 애도하는 대자보와 만장이 무수히 등장했다. 수천 명의 학생이 캠퍼스를 떠나 천안문 광장으로 향했고, 인민영웅기념비 발치에 화환을 바쳤다. 학생들은 ‘후야오방을 애도한다’, ‘부패를 뿌리 뽑자’, ‘법치국가를 실현하자’, ‘관료주의를 타도하자’ 등의 구호를 내걸었다. 동시에 전국 각지의 학생들도 이에 호응하여 대규모 집회, 시위, 청원 등을 개최했다.

4월 25일 저녁부터 CCTV는 전국 TV 뉴스 프로그램을 통해 《인민일보》 사설인 <반드시 기치를 명확히 세워 동란에 반대해야 한다(必須旗幟鮮明地反對動亂)>를 여러 차례 방송했다. 사설은 “이것은 계획된 음모”라며 “그 본질은 중국공산당의 지도와 사회주의 제도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4월 17일 시위 당시, 칭화대학교 행렬의 맨 앞에는 백발의 노교수 몇 명이 흰색 현수막을 들고 섰는데, 그 위에는 “너무 오래 무릎을 꿇었으니, 일어나 걸어보자”라고 적혀 있었다. 많은 노인들이 지난 수십 년간의 풍파 속에서 중국 지식인들이 실제로 무릎을 꿇은 채 당에게 무릎을 꿇고 오직 당을 위한 찬가나 부르며 사회의 양심으로서 독립된 목소리를 낼 척추를 꼿꼿이 세울 기회를 전혀 갖지 못했던 세월을 회고했다. 노교수들이 공공연히 거리로 나와 당권자들에게 항의한 것은 중공 집권 이후 결코 있어 본 적 없는 일이었으며, 동시에 위험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이와 동시에 수만 명의 베이징 시민, 기관 간부, 신문 기자들이 잇달아 거리로 쏟아져 나와 학생들을 지지했다. 중앙 각 신문의 기자들도 “우리는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붉은 현수막을 내걸었다.

《도보(導報)》 숙청

《인민일보》의 ‘4·26’ 사설과 병행해, 전체 사건이 악성으로 변화하도록 촉발한 또 다른 도화선은 바로 상하이시 당서기 장쩌민의 《세계경제도보(世界經濟導報)》 숙청이었다. 이 사건은 당내 원로들 중 몇몇 사람이 이른바 ‘안정’을 맞바꾸기 위해 무력으로 성을 학살할 결심을 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중공 정권은 합법성이 결여되어 있어, 민선 정부처럼 매번 법에 따라 합법적이고 평온하게 권력을 이양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독재 통치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는 늘 중공 마음속 병이었다. 특히 후야오방과 자오쯔양(趙紫陽)의 생각과 사고, 그리고 언행은 모두 중공 핵심층을 만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적절한 총서기를 물색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로 대두되었다. 장쩌민이 《도보》 사건을 처리하는 전 과정은 당내 원로들로 하여금 그야말로 진정한 ‘후계자’라고 느끼게 만들었다.

1989년의 학생 운동은 애초에는 학생들의 참여로만 시작되었으나, 학생 운동에서 전민(全民) 운동으로의 전환점이 된 사건은 바로 장쩌민이 상하이에서 《세계경제도보》를 숙청한 사건이었다.

후야오방이 서거한 지 나흘째 되는 날(4월 19일), 《세계경제도보》 편집진은 좌담회를 개최했다. 4월 20일, 상하이시위원회 선전부는 《세계경제도보》가 후야오방을 애도하는 특별 지면을 개설할 것이라는 소식을 접수했다. 선전부장 천즈리(陳至立)는 즉시 이를 장쩌민에게 알렸다. 21일 오후, 장쩌민은 시위원회 부서기 쩡칭훙(曾慶紅)과 선전부장 천즈리를 보내 《도보》 총편집인 친번리(欽本立)를 불러 면담하게 했다. 친번리는 《도보》가 실제로 이번 호 몇몇 지면에 본지와 《신관찰(新觀察)》 잡지사가 4월 19일 베이징에서 공동 개최한 후야오방 추모 좌담회 내용을 게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쩡칭훙과 천즈리는 그에게 이번 호 《도보》의 교정쇄를 조속히 가져와 심사받으라고 요구했다. 다음 날 저녁 8시 반, 쩡칭훙이 친번리와 제439기 《도보》 교정쇄 문제를 논의할 때 친번리에게 500자를 삭제할 것을 요구했는데, 이는 주로 중국사회과학원에 재직 중인 옌자치(嚴家其), 다칭(戴晴) 등의 발언 내용이었다. 《광명일보(光明日報)》 기자 다칭은 중국공산당 70년 역사와 몇몇 총서기의 운명에 대해 언급했다. 그녀는 당의 총서기들이 모두 좋은 결말을 맺지 못했다고 말했는데, 그 이유가 모두 ‘비정상적인 권력 교체’ 때문이었다고 지적했다.

친번리는 정부가 신문사 총편집인 책임제를 동의했음을 강조하며 이렇게 말했다. “문제가 생기면 내가 책임지겠습니다. 어쨌든 장쩌민 동지는 교정쇄를 보지 않았습니다. 만약 발행되어 어떤 후일담이 있더라도 시위원회나 시위원회 선전부가 책임질 필요는 없습니다.”

쩡칭훙이 크게 노해 소리쳤다. “지금은 어느 한 사람이 책임질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파급 효과 전체의 문제라니까.” 친번리는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고집하며 수정 및 삭제에 동의하지 않았다. 쩡칭훙은 말이 통하지 않자 이 사실을 장쩌민에게 보고하러 갔다.

장쩌민은 친번리가 이토록 완고하게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고, 쩡칭훙마저 실패하고 돌아오자 이 일을 《도보》의 명예이사장인 왕다오한(汪道漢)에게 알렸다. 왕다오한이 곁에 자리한 가운데, 장쩌민은 엄숙하고 살벌한 목소리로 친번리에게 교정쇄를 고치라고 강요했다. 왕다오한 역시 당성(黨性) 원칙을 꺼내 들며 친번리를 압박했다. 장쩌민과 왕다오한이 강경하게 억누르고 부드럽게 권유하며 친번리에게 삭제 동의를 얻어내려 할 때, 그들은 이미 십수만 부의 신문이 전부 인쇄되었으며 400부가 이미 개인 가판대에 도매로 넘어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게다가 이와 동일한 수량의 신문이 베이징으로 곧바로 발송되어, 마지막에 겨우 2만 부를 회수했을 뿐 이미 파장이 빚어진 뒤였다.

4월 22일 오전, 후야오방의 추도회가 인민대회당에서 개최되었다. 의식은 국가주석 양상쿤(楊尙昆)의 사회로 진행되었으며, 중국 대부분의 고위 지도자들이 참석했다. 장쩌민은 한편으로는 상하이에서 후야오방 추모를 반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화환을 보내 ‘추도’의 뜻을 표명했다.

4월 26일 《인민일보》가 <반드시 기치를 명확히 세워 동란에 반대해야 한다>는 사설을 발표한 후, 장쩌민은 이것이 방향 지표라고 판단하고 새벽 1시까지 이어지는 시위원회 서기 긴급회의를 소집해 과감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같은 날 1만 4,000명의 당원이 참석한 대형 집회에서 장쩌민은 친번리의 직무 정지를 선포하고 《도보》를 정돈하기로 결정했다.

4월 27일, 장쩌민은 류지(劉吉)와 천즈리가 책임지는 ‘상하이시위원회 정돈영도소조’를 《도보》에 파견했다. 사람을 징계하는 데 있어서 장쩌민 못지않게 가혹한 천즈리는 장쩌민의 말에 절대복종했다. 그녀는 《도보》 직원들을 해산시켰고, 심지어 《도보》 편집진이 다시는 기자를 하지 못하도록 특별 금지령까지 내렸다.

장쩌민의 심복 천즈리는 친번리가 암 말기여서 침상에서 일어나지도 못할 때,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병실을 찾아갔다. 다른 이들은 그녀가 문병을 온 것으로 생각했으나, 뜻밖에도 천즈리는 갑자기 친번리를 향해 당기율처분 선언문을 큰 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보아하니 그녀는 이 70세 노인을 일찍 죽음으로 내몰고 싶었을 뿐만 아니라,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도 편안히 죽지 못하게 만들려 했던 모양이다.

쿤의 《장쩌민 전》에서는 친번리와 그의 편집진을 “말과 행동이 다르고”, “논리적이지 않으며”, “기만적이고”, 장쩌민에게 “공공연히 도전”하며 “마침내 위장을 내던진” 무리로 추악하게 묘사했으며, 오히려 장쩌민을 피해자로 둔갑시켰으니 참으로 도둑이 몽둥이를 드는 격이었다.

장쩌민 및 그의 심복들이 《도보》를 거칠게 처리한 행동은 상하이를 비롯해 전국 언론계 전역을 휩쓰는 항의 물결을 불러일으켰다. 상하이시위원회의 《도보》 정돈이 불러일으킨 폭풍이 닥쳐온 것이다. 바로 다음 날 상하이 거리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발생해 “내 도보를 돌려달라”는 구호와 함께 친번리의 직무 복귀 및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는 기사와 현수막이 공공연히 내걸렸다. 상하이 문단 일부 명사들도 잇달아 시위에 동참했고, 베이징 지식계와 언론계의 유명 인사들도 장쩌민에게 전화를 걸어 친번리와 《도보》에 대한 처벌 결정을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시청 문앞에 주저앉아 틈틈이 구호를 외치는 학생들의 모습이 이어졌다. 당시 와이탄(外灘)에 모인 대학생들이 약 8,000여 명에 달했다. 이는 이번 학생 운동 중 상하이 학생 시위 규모 사상 최대의 기록이었다.

장쩌민은 겁을 먹었다. 《도보》 숙청이 야기한 항의의 소용돌이에 대해 장쩌민은 “결과가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심각했다”고 시인했다. 일각에서는 그의 행동이 ‘상하이의 대규모 시위’를 촉발했다고 비난했다. 사실 그것은 단순히 ‘상하이의 대규모 시위’를 유발한 데 그치지 않고, 베이징의 대규모 시위까지 거세게 부채질했다.

베이징에서는 두 명의 기자가 수도 30여 개 언론기관에 소속된 1,000여 명의 수도 언론인들이 서명한 청원서를 중화전국신문공작자협회(中華全國新聞工作者協會 전국기자협회)에 제출했다. 청원서는 중앙의 선전 업무를 담당하는 지도자들과의 대화를 요구했으며, 세 가지 대화 내용을 열거했는데 그 첫 번째 조항이 바로 국내외에 거센 파장을 불러일으킨 상하이 《세계경제도보》 총편집인 친번리의 직무 정지 건이었다. 신문사가 총편집인 책임제를 시행한다는 주장은 사실과 부합하지 않으며, 이것이야말로 언론 개혁이 시급히 해결해야 할 최우선 과제였다.

4월 27일 밤, 공포에 사로잡힌 장쩌민은 전(前) 중공 중앙조직부 상무부장이자 당시 중앙고문위원회 위원이었던 리루이(李銳)에게 전화를 걸어 40여 분 동안 통화했다. 장쩌민은 통화에서 리루이에게 베이징의 지인들에게 잘 통용되도록 간청하는 한편, 베이징의 정세가 어떠한지 탐색했다. 장쩌민은 “더는 견딜 수 없다”는 투로 당시의 낙담한 심정을 리루이에게 털어놓았다.

4월 30일, 중공 총서기 자오쯔양(趙紫陽)이 북한 방문을 마치고 귀국했다. 그날 밤 장쩌민과 쩡칭훙은 곧바로 베이징으로 날아가 자오쯔양에게 업무를 보고하려 했다. 자오쯔양은 곧 그를 접견했고, 장쩌민은 보고를 마친 뒤 자오쯔양에게 물었다. “제가 상하이에서 《도보》를 처리한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자오쯔양은 즉각적인 태도를 밝히지 않은 채 도리어 장쩌민에게 되물었다.

“당신 생각은 어떻소?”

장쩌민은 말을 얼버무리며 자신이 자오쯔양과 이미 깊은 괴리감을 느끼고 있음을 깨달았다. 자오쯔양은 장쩌민을 한 번 힐끗 보더니 말을 이었다.

“지금은 이 문제를 이야기할 시간이 없습니다.”

장쩌민은 애원하는 어조로 말했다.

“자오쯔양 동지가 의견을 내놓지 않으시면 저와 쩡칭훙 동지는 업무를 수행하기도 어렵고 상하이에 돌아가 보고할 수도 없습니다.”

자오쯔양은 마지못해 입장을 밝혔다.

“상하이시위원회가 《세계경제도보》 문제를 너무 성급하게 처리하여 작은 일을 큰일로 키우는 바람에 스스로 진퇴양난의 사지로 들어간 것입니다.”

말을 마치고 자오쯔양은 몸을 홱 돌려 가버렸다. 당시 현장에 있던 인사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장쩌민은 자오쯔양이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무려 10분 동안 단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분명 자오쯔양은 장쩌민이 작은 일을 큰사태로 부풀려 결국 대규모 시위를 촉발한 처사에 대해 몹시 불만스러워했고, 그 매서운 말은 장쩌민을 혼비백산하게 만들었다. 장쩌민의 절친인 천즈리가 이렇게 말했다. “만약 중앙에서 책임을 추궁한다면 저 혼자 책임을 지겠습니다. 절대 당신을 연루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이 사건 이후 장쩌민과 이 여자의 관계는 한층 더 밀접해졌다. 사건 이후에도 장쩌민은 여전히 이리저리 연줄을 찾아 당내 원로들의 진짜 태도가 어떤지 알고자 애썼다. 그가 얻은 피드백은 중앙의 의견이 분분하며 자오쯔양의 말이 중앙의 전체 정신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주로 베이징대학에서 온 600명의 학생이 천안문 광장에서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각국 기자들은 점차 카메라와 시선을 이곳으로 집중시켰으며, 일제히 상하이시위원회 서기 장쩌민이 법치를 파괴했다고 비난했다. 상하이에서는 4,000명의 학생이 시청 앞에 모여 시위원회 서기의 공식 입장을 요구했다. 장쩌민은 당연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이는 학생들의 극심한 분노를 샀다. 보슬비가 내리는 가운데 수천 명의 학생이 시청 건물 밖에서 일제히 “장쩌민 멍청이”를 고함치며 외쳤다. 5월 중순 정치국 회의에서 당내 투쟁은 확연히 고조되었고, 자오쯔양은 아예 《도보》 사건이 “상하이시위원회가 도발한 것이니, 상하이시위원회 직접 매듭지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자오쯔양이 천윈(陳雲)과 리셴녠(李先念)이 점 찍어 둔 장쩌민을 공공연히 지목하자, 몇몇 당내 원로들은 치솟는 화를 참지 못했다.

중공을 더욱 난처하게 만든 것은 바로 그날, 소련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전용기를 타고 베이징을 방문했다는 점이다. 이 사건을 취재하기 위해 베이징에 모인 수백 명의 기자들은 자신들이 양국 정상회담보다 훨씬 중대한 뉴스 현장에 직면했음을 직감했고, 전 세계의 시선은 공산당이 가장 보여주기 싫어하는 곳으로 쏠렸다.

정치국 회의는 결렬되었고, 자오쯔양은 자신이 직면할 운명을 예감한 채 눈물을 머금고 천안문 광장으로 들어가 단식 투쟁 중인 학생들을 위로했다. 밤 10시, 리펑(李鵬)이 발표를 통해 중앙의 입장을 거듭 천명하며 “소요 사태를 종식하기 위해 강력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혔다. 두 시간 뒤인 자정 무렵, 천안문 광장에서 대형 확성기를 통해 계엄령 선포가 공표되었다.

20일 새벽 2시, 리펑의 발언 직후 장쩌민은 곧바로 공개 전보의 형식으로 중앙의 결정에 대한 단호한 지지 의사를 표명했다. 이 재빠른 지지 행동은 모든 성·시·자치구 지도자들보다 한 발 앞선 것이었으며, 의심할 여지 없이 장쩌민의 이러한 태도 표명은 당내 원로들이 믿고 맡길 만한 ‘신뢰할 수 있는 후계자’를 찾았음을 의미했다. 쿤이 집필한 영문판 《장쩌민 전》 제162페이지(중국어판에는 이 내용이 삭제되었음)에는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이미 5월 20일, 중공 원로들은 내부 결정을 통해 장쩌민을 신임 중공 총서기 후보로 지명했다.”

‘6·4’ 학살의 수혜자

1989년 5월 하순의 어느 날, 회색 상의를 입고 머리칼을 뒤로 곱게 빗어 넘긴 한 남자가 베이징 난위안(南苑) 군용 공항에 착륙한 전용기에서 내려 곧바로 마중 나온 검은색 산타나 승용차에 올라탔다. 그는 중앙판공청의 긴급 통지를 받고 베이징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불려 올라온 참이었다. 당시의 기이한 정치적 형세는 그의 마음을 내내 불안하게 만들었다. 《세계경제도보》 사건에 대한 그의 강경한 처사는 더 거센 항의의 물결을 격발시켰고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베이징행은 그에게 있어 어쩌면 길(吉)보다는 흉한 일일지 몰랐다. 부인은 근심으로 전전긍긍하며 큰 화가 닥칠 것이라 여겨 작별 인사를 나눌 때 서로를 부여안고 통곡했다. 그는 바로 당시 상하이시 서기 장쩌민이었다. 베이징에 도착해서야 장쩌민은 덩샤오핑이 시산(西山) 별장에서 그를 만나려 한다는 사실을 통보받았다.

당시 63세였던 장쩌민은 본래 앞으로 2년만 더 일하고 은퇴하여 제2의 모교인 상하이교통대학교에서 교수로 여생을 보낼 계획이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일이 겹치며 덩샤오핑은 전혀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던 그의 어깨에 중공 총서기라는 무거운 짐을 지워주었고, 장쩌민은 ‘6·4’ 사건의 최대 정치적 수혜자로 등극했다.

회동 자리에서 덩샤오핑은 장쩌민이 《세계경제도보》 사건을 처리한 방식을 칭찬하며, 상하이가 고르바초프를 접대하는 업무를 베이징보다 훨씬 훌륭하게 수행했다고 치하했다. 장쩌민은 그제야 마음을 놓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만약 자오쯔양의 말을 들었더라면 그 후과(後果)

를 어찌 감당했을까.’

장쩌민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는 것을 지켜보던 덩샤오핑은 그에게 아직 완수해야 할 매우 중대한 임무가 하나 더 남아 있다고 말했다. 덩샤오핑은 그에게 캐나다 방문 임무를 띠고 일찍 귀국길에 오른 전인대 상무위원장 완리(萬里)의 발목을 붙잡으라고 지시했다. 그들은 꼼수를 부려 완리가 탄 비행기가 상하이에 강제로 착륙하도록 유도했고, 장쩌민에게 떨어진 임무는 원로들의 주장에 완리가 동의하도록 설득하는 것이었다. 만약 설득에 실패하면 베이징으로 발을 들여놓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덩샤오핑은 당시 57명의 전인대 상무위원들이 리펑이 선포한 베이징 계엄령의 합법성 여부를 논의하기 위한 회의 소집을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라 설명했다. 만약 완리가 베이징으로 돌아와 전인대 회의를 주재한다면 정세가 그들이 반대하는 방향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매우 높았고, 그렇게 되면 국면은 걷잡을 수 없이 통제 불능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었다.

방금 막 내려놓았던 장쩌민의 가슴속 돌덩이가 다시 몰라왔다. 그는 이 임무가 결코 만만치 않음을 직감했다.

덩샤오핑은 그의 속내를 눈치챈 듯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말투로 이것이 중앙이 장쩌민에게 내리는 하나의 중대한 시험이며, 만약 이 임무를 훌륭하게 완수해 낸다면 이번 일이 장쩌민 정치 생애의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암시했다. 장쩌민은 이 말을 듣고 긴장하면서도 흥분했고, 동시에 만약 조금이라도 실수가 생기면 자신의 앞날은 완전히 물거품이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5월 23일, 장쩌민은 상하이로 돌아왔고 완리를 태운 비행기는 5월 25일 오후 3시에 상하이 공항에 착륙했다. 장쩌민은 공항으로 마중 나가 즉시 ‘덩샤오핑의 친필 편지’를 건넸다. 완리는 덩샤오핑과 함께 카드를 치는 친구 사이였으며, 덩샤오핑은 편지 속에서 “수십 년 친구의 정을 생각해서라도, 이번 비상 시기에 나를 한 번 도와달라”고 애원했다.

상하이에 엿새를 머무는 동안 완리는 엿새 내내 고통스러워했다. 그 기간 동안 장쩌민은 바닥패를 다 까발리며, 완리가 동의하지 않으면 중앙의 지시에 따라 그를 상하이에 계속 묶어둘 수밖에 없다고 압박했다. 결국 5월 27일, 완리는 중앙이 반포한 계엄령에 동의한다는 공개 성명을 발표했다. 장쩌민이 완리를 상대로 벌인 이러한 협박은 전략적 차원에서 자오쯔양의 양팔을 잘라낸 것과 다름없었다.

바로 그날인 5월 27일, 덩샤오핑은 8대 원로를 소집해 회의를 열고 총서기 인선을 결정했다. 애초에 덩샤오핑은 차기 총서기로 차오스(喬石)와 리루이환(李瑞環)을 천거했으나, 천윈이 강력하게 장쩌민을 밀었고, 리셴녠과 보이보(薄一波)가 덩샤오핑으로 하여금 장쩌민을 기용하도록 마음을 돌리게 만드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리셴녠은 이렇게 말했다. “장쩌민은 비록 중앙에서 근무한 경험은 부족하지만 정치적 두뇌가 있고 나이가 한창 젊으니 신임할 만합니다.”

그리하여 황당한 역사 안배가 장쩌민을 권력의 정점으로 밀어올렸고, 그는 ‘6·4’ 진압의 최대 수혜자가 되었다.

5월 30일, 장쩌민은 또다시 중앙의 명을 받고 비밀리에 상경했다. 이번 행보가 자신의 운명을 어떻게 바꿀지 알 수 없었으나, 이번 출장이 보통이 아닐 것임은 어렴풋이 예감할 수 있었다.

베이징에 도착해 잠시 휴식을 취한 장쩌민에게 천윈의 비서가 들어와 통보했다.

“천윈 동지가 기다리고 계십니다.”

천윈과 장쩌민의 대화는 매우 간결했다.

천윈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샤오핑 동지가 나더러 당신에게 전하라고 했소. 당신이 중앙으로 와서 근무하며 자오쯔양 동지의 자리를 대신하라고 말이요.”

장쩌민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이 결정적인 순간에 말실수 하나만 해도 그동안 쌓아온 공든 탑이 무너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베이징에 오기 전, 실질적인 국정 간섭권을 쥔 원로들이 이미 덩샤오핑의 자택에서 두 차례 회의를 열었다는 사실을 전해 들은 터였다.

천윈은 그를 후계자로 가장 먼저 제안한 인물이기도 했다. 천윈은 리셴녠이 자신에게 상하이의 장쩌민은 당성(黨性)이 비교적 강하며 이번 계엄 태도도 매우 단호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장쩌민은 천윈 본인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입은 닫고 귀만 열어둔 채 조용히 몸을 낮추었다.

리셴녠을 찾아갔을 때는 한결 마음이 가벼웠다. 리셴녠은 상하이의 정황을 몇 가지 물어본 뒤 말했다. “샤오핑이 계신 곳에 서둘러 갈 필요는 없소. 이번 결정은 샤오핑 동지의 뜻이니, 당연히 당신을 다시 불러 대화할 것이요.”

장쩌민은 자신이 일찍이 리셴녠에게 바쳤던 온갖 아첨과 굽실거림의 공이 헛되지 않았음을 깨달았으나, 쩡칭훙의 조언을 떠올려 되도록 많이 듣고 적게 말했다. 그리하여 간단한 질문에 답하는 것 외에는 그저 허리를 살짝 굽힌 채 가르침을 경청하는 태도를 취할 뿐이었다.

휴게실로 돌아온 장쩌민은 곧바로 상하이를 향해 세 통의 전화를 걸었다.

첫 번째 통화는 장쩌민의 중요 책사인 쩡칭훙에게 걸었다.

장쩌민은 그에게 알렸다.

“아무래도 나는 돌아가지 못할 것 같아.”

긴장한 쩡칭훙이 물었다.

“2~3일 만에 돌아오시는 것 아니었습니까?”

장쩌민이 말했다.

“나는 여기서 근무하게 될 터이니, 내일 당장 올라오게.”

두 번째 통화는 전(前) 상하이 시장 왕다오한에게 걸었다.

장쩌민은 말했다. “앞으로 보살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세 번째 통화는 부인 왕예핑(王冶坪)에게 걸어 베이징으로 올라올 준비를 하라고 일렀으나, 왕예핑은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세는 이미 정해졌다. 저녁 8시, 리펑과 야오이린(姚依林) 등은 인민대회당에서 예우를 갖추어 장쩌민을 위한 연회를 베풀었다. 장쩌민은 마치 꿈속을 거니는 듯했다.

군대의 시내 진입은 거듭 연기된 끝에 6월 1일에야 새로운 진입 배치안이 마련되었고, 최종 실시일은 6월 3일 밤으로 확정되었다. 신임 총서기 신분이 된 장쩌민은 이미 5월 말부터 공식 문서 결재 업무를 시작하고 있었다.

진상을 은폐하고, 재심 불허

‘6·4’가 지나간 지 얼마나 세월이 흘렀든 간에, 장쩌민은 사람들이 ‘6·4’를 기억 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리기를 원했다. 그러나 매년 이맘때 전후가 되면 사람들은 방대한 사진과 글을 통해 희생자들을 추모했고, 이것이 바로 장쩌민이 가장 보기 싫어하는 광경이었다. 2002년 장쩌민이 총서기와 국가주석직에서 물러날 때 그는 정치국 상무위원들에게 몇 가지 규정을 남겼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6·4’에 대한 재심을 절대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자신이 ‘6·4’ 진압의 가장 핵심적인 참여자이자 최대 수혜자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6·4’ 사건 이후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장쩌민은 각 단위에 명령을 내려 ‘6·4’에 가담했거나, 학생을 지지했거나, 진압에 반대했던 이들을 철저히 색출하게 했다. 밀고와 고발을 장려하여 한 명 한 명씩 끝까지 책임을 물었다. 거짓말과 공포가 결합되면서 민중은 더 이상 감히 ‘6·4’에 대해 입을 열지 못하게 되었다.

어느 한 내외신 기자회견장에서 한 프랑스 기자가 ‘6·4’ 당시 체포되어 쓰촨의 교도소에서 집단 강간 당한 한 여자 대학생의 사연을 묻자, 장쩌민은 대중 앞에서 전 세계를 경악하게 만드는 한마디를 불쑥 내뱉었다. “그녀는 죄를 지어 마땅한 응보를 받은 것입니다!”

장쩌민의 처지도 그리 편안하지만은 않았다. 그는 누군가 ‘6·4’의 진상을 밝히거나 자오쯔양에 대한 재심을 요구할까 봐 늘 공포 속에 살았다. 자오쯔양의 천안문 광장 방문 사진은 군대의 학살을 거부한 산 증거가 되었다. 장쩌민이 가장 증오한 것은 수십 년 동안 사람들이 ‘6·4’ 기간만 되면 이 사진을 이리저리 뒤져가며 거듭 인쇄해 마치 자신의 집권이 얼마나 부정한지를 넌지시 풍기는 듯한 모습이었다. 장쩌민은 자오쯔양이 ‘6·4’ 직전에 자신에게 쏟아낸 비판을 결코 잊지 않았으며, 자오쯔양의 자택에 대한 감시와 통제는 보안부서 관계자들조차 이해하기 어렵고 차마 착수하기조차 괴로워할 정도였다.

장쩌민에게 더욱 중요한 과제는 전체 중국 민중의 ‘6·4’에 대한 기억을 희석시키고 모호하게 만들며, 마침내 완전히 왜곡해 버리는 것이었다. 장쩌민은 TV 프로그램을 제작하라고 지시하며 학생들의 ‘폭력’을 극도록 과장했고, 심지어 군용 차량 일부를 직접 불태우고 현장을 촬영하는 짓마저 마다하지 않으며 전국 민중으로 하여금 군대의 발포가 부득불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고 믿게 만들려 애썼다. 그리하여 현장을 직접 겪지 못한 수많은 민중은 곧 베이징에서 정말 이른바 ‘폭란(暴亂)’이 일어났다고 믿기 시작했다.

2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6·4 사건의 진상은 이미 삼척동자도 다 아는 공공연한 사실이 되었다. 기록으로 남아 있는 사료와 내부 관계자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공산당의 나팔수들이 방송했던 이른바 ‘폭도’들이 군용 차량을 불태우는 영상은 전부 군부가 치밀하게 기획하고 자작극으로 연출한 것이었다. 당시 군대는 구형 차량들을 시창안제(西長安街)로 몰고 온 뒤, 일단의 무장경찰들이 가짜 대학생 행세를 하며 불을 질렀고 그 과정에서 근처에 대기하던 전문 인력이 현장을 촬영했다. 그 목적은 학생과 시민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움으로써 발포 진압의 구실을 확보하려는 것이었다. 사건 당사자였던 군인들 중 상당수가 사석에서 진상을 털어놓았으며, 직접 불 지르는 일에 가담했던 이들은 대부분 사건 이후 전역하거나 해산되었다.

당시 베이징체육대학 이론과에 재학 중이던 졸업반 학생 팡정(方政)의 사연은 더욱 사람들을 오싹하게 만든다. 그의 두 다리는 고속으로 질주하던 탱크에 깔려 두 다리가 절단되는 비극을 겪었다. 나중에는 마음 따뜻한 이들의 도움으로 팡정은 미국으로 건너와 의족을 장착하고 생애 처음으로 두 발로 일어설 수 있었다. 2005년 팡정은 《에포크타임스》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당시를 회고하며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나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쓰러졌고, 탱크가 내 두 다리를 밟고 그대로 밀고 지나갔습니다. 탱크 궤도는 전부 사슬과 톱니로 되어 있었는데, 바지가 궤도의 쇠사슬에 말려들어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주 꽉 조이고 압박하는 느낌이었죠. 당시 나는 의식이 약간 남아 있어서 내 몸이 쿵쿵쿵 소리를 내며 땅바닥에 끌려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 느꼈습니다. 한참 동안 끌려간 뒤 머리, 등, 어깨 부위가 모두 쓸려 상처를 입었습니다(나중에 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들은 말입니다). 탱크의 궤도 사슬이 내 다리를 뜯어내 버렸고 바지도 찢어졌습니다. 나는 궤도 위에서 떨어졌고, 떨어진 뒤 길가로 굴러 떨어져 울타리에 기대었습니다…

이 광경을 나중에 동태망(動態網)을 통해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당시 내 모습 그대로의 장면을 보았죠. 해외 웹사이트에 들어가면 그 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땅바닥에 누워 두 다리가 잘려 나간 채 울타리에 기어 기댄 모습 말이죠. 그 사람이 바로 나였습니다. 내 두 다리는 절단되었는데, 오른쪽은 허벅지 상단까지, 왼쪽은 무릎 위치까지 잘려 나갔습니다…”

이러한 은폐와 누명 씌우기, 그리고 색출 과정을 거치며 장쩌민은 선전과 폭력 기구를 다루는 수법을 완벽하게 터득했다. 누가 상상이나 했으랴, 10년 뒤 장쩌민이 똑같은 기만과 누명, 모함의 낡은 수법을 그대로 꺼내 들어 ‘천안문 분신자살 사건’을 연출함으로써 전국 인민들이 파룬궁을 증오하도록 부추기고, 이를 도화선으로 파룬궁 수련자들에 대한 대규모 박해를 개시하게 될 줄을. 6·4 사건은 장쩌민에게 있어 또 다른 더욱 잔혹하고 지속적인 탄압을 위한 예행연습에 불과했던 것이다.

《장쩌민의 실체》 공동 집필팀

2012년 5월

(에포크타임스에서 전재)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39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