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부도덕한 인생 내력” 제3절 제4절
【정견뉴스】
지금부터 14년 전, 《장쩌민의 실체(真實的江澤民)》이 처음으로 독자들과 만났다. 14년이 지난 지금, 장쩌민은 이미 죽었지만 그가 남긴 정치적 독소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오늘날 중국의 많은 혼란과 위기는 모두 장쩌민 집권 시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부패로 국가를 다스리고, 법치(法治)를 짓밟으며, 도덕을 파괴하고, 파룬궁을 박해하는 한편, 그로 인해 팽창된 중공의 전제(專制) 및 폭력 기구는 중국에 끝없는 환란을 남겼다. 오늘날의 중공을 똑똑히 보고, 중국이 어찌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이해하려면 《장쩌민의 실체》를 읽어볼 필요가 있다. 이에 에포크타임스에서는 본문을 다시 게재한다.
장쩌민이 덩샤오핑과 당시 세력을 잡았던 보수파 간의 각축전에서 승리해 부상한 것은 많은 이들의 안경을 박살 냈다. 과거 중공 중앙서기처 판공실과 중앙판공청에서 근무했던 우자샹(吳稼祥)은 나중에 장쩌민과 그 세력을 ‘다크호스 집단(黑馬集團)’이라고 불렀다. 그는 다크호스 집단에 대해 “아첨을 최고 정치 경지로 삼고, 어떠한 정치적 태도 표명도 하지 않는 것을 가장 올바른 정치적 태도로 삼는”, “철저하게 공리(功利)화된 철두철미한 권욕주의자(權欲主義者)들”이라고 묘사했다. 이런 인물이 당두목이 되었으니, 실로 그릇된 정당이 그릇된 시기에 그릇된 방식으로 그릇된 지도자를 임명함으로써 그릇된 길로 들어선 셈이었다.
이것도 그럴 만한 것이, 장쩌민에게는 인류가 마땅히 가져야 할 어떠한 우수한 품성도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떠한 재능도 없었으며, 모든 일은 닥쳐야만 극도로 이기적인 셈법으로 행동했고, 자신의 권력을 지키는 것을 모든 목적과 수단으로 삼았다.
장쩌민이 집권한 후 전국의 정치 환경은 1989년부터 1991년 사이에 일제히 좌경화되었고, 이로 인해 개혁은 한때 정체에 빠졌다. 1989년과 1990년의 국민총생산(GDP) 연간 성장률은 5%에도 미치지 못했다.
양다리를 걸치다
장쩌민이 당시 보수파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은 그만한 심층적 원인이 있었지만, 장쩌민이 천하를 호령하던 덩샤오핑에게 아첨하려 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그에게 억울한 일이다. 마오쩌둥, 덩샤오핑, 후야오방, 자오쯔양 등 중공의 다른 지도자들과 비교할 때, 장쩌민에게는 어떠한 국정 운영 방략도 없었고 독자적으로 일을 처리할 만한 경험이나 능력도 없었다. 평생을 두고 볼 때, 그가 아는 것이라곤 세력을 얻기 전에는 남의 비위를 맞추며 아첨하는 것과, 세력을 얻은 뒤에는 남들이 자기 비위를 맞추게 강요해 자신의 욕구를 채우는 것뿐이었다. 덩샤오핑이 고심하던 난제들에 대해 장쩌민은 실로 아는 것도 따르는 것도 없었으며, 비록 열심히 덩샤오핑의 담배에 불을 붙이고, 차를 나르고, 신발을 들었지만 끝내 덩샤오핑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
장쩌민은 덩샤오핑의 비위를 맞추려 했으나 마땅한 길이 없었지만, 리펑의 비위를 맞추어 싼샤 댐 건설을 지지했고, 이로 인해 리펑 계파가 싼샤 프로젝트로부터 막대한 이익을 얻게 함으로써 즉각적이고 두터운 보답을 받았다. 한동안 ‘장-리 체제’는 보수 원로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고, 그리하여 장쩌민이 총서기에 오른 처음 3년 동안 강조한 것은 모두 ‘평화적 변화 반대’였으며, 허무맹랑한 ‘사회주의 성향’ 혹은 ‘자본주의 성향’의 ‘두 가지 개혁관’을 떠벌리며 “개인사업자들을 처벌해 집안을 파산하게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외부에서는 이 때문에 장쩌민을 보수파로 여겼으나, 이 역시 그에게는 억울한 일이었다. 이는 장쩌민이 훗날 돌변하여 개혁파가 된 뒤 리펑을 마치 헌신짝처럼 내팽개친 것으로 명백히 증명된다. 만약 장쩌민이 애초에 덩샤오핑의 비위를 맞추는 데 성공했더라면 일찌감치 ‘개혁파’가 되었을 것이다.
‘6·4’ 사건으로 인해 중공은 국제사회로부터 무역 및 무기 금수 조치를 당하며 국제적으로 극도로 고립되었다. 1991년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진영의 해체는 중공과 이제 막 높은 자리에 오른 장쩌민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덩샤오핑은 개혁개방을 계속 추진하고 시장을 활성화하여 경제적 측면에서 민심을 다시 얻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권을 쥔 장쩌민은 왜 이렇게 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고, 개방할수록 백성들을 통제하기 어려워진다고 여겼다.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덩샤오핑의 ‘경제 건설 중심’ 노선을 내팽개치고, ‘자유화 반대, 평화적 변화 반대를 중심’으로 강력히 시행해 사상적·이념적 통제를 다그쳤다. 장쩌민은 심지어 이론상으로 “개혁개방 중에도 노선 투쟁이 있다”라고 주장하며 비판의 화살을 직접적으로 덩샤오핑에게 겨누었다.
1992년 봄과 여름, 장쩌민은 마오쩌둥의 《옌안 문예 좌담회에서의 연설》 발표 40주년을 맞아 전국적으로 일련의 고위급 기념행사를 조직하며 중국을 문화대혁명 이전으로 되돌리려 시도했고, 정치 운동을 통해 국내의 거듭되는 모순들을 해결하려 했다. 톈지윈(田紀雲)이 나중에 회고한 바에 따르면, “사상이 극도로 경직된 일부 사람들은 ‘풍파’가 가져온 기회를 이용하여 개혁개방의 거대한 성취를 부정하고 중국을 다시 옛길로 되돌리려 했다… 그 찬바람이 몰아치던 시절에 광범위한 간부들과 군중은 분개하며 중국의 앞날을 걱정했다.”
1991년 말, 덩샤오핑은 장쩌민의 소행에 완전히 격분해 소위 ‘제3세대 지도 핵심’이라는 장쩌민에게 완전히 신뢰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더는 참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덩샤오핑은 명목상 어떠한 직함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여전히 군권(軍權)을 단단히 장악하고 있었다. 군부는 덩샤오핑의 가장 친밀한 오랜 친구인 양상쿤(楊尚昆)과 그가 매우 신임하는 부하 양바이빙(楊白冰)이 관리하고 있었다. 양상쿤과 덩샤오핑은 1932년에 알게 된 60년 지기 친구였다. 양바이빙의 상장(上將) 계급은 1988년 9월 덩샤오핑이 직접 수여한 것으로, 그는 군 내에서 덩샤오핑의 정치 노선을 줄곧 충실하게 집행해 왔다. 또 다른 군위 부주석인 류화칭(劉華清)은 덩샤오핑의 오랜 부하로서 그에게 충성심을 다했다.
군부 경력이 전혀 없는 장쩌민은 1989년 11월 군사위원회 주석에 임명되었으나, 늙은 군벌들이 총 한 번 제대로 잡아본 적 없는 그를 어떻게 기꺼이 지휘에 따르게 하겠는가? 장쩌민은 당시 덩샤오핑처럼 상장을 몇 명씩 진급시킬 엄두도 못 냈고 군 내에 자신의 인맥이나 기반도 없었기에, 군부에 거액을 주어 소련으로부터 낡은 무기를 사들인 것 외에 매국노 부친에게 배운 선전 기술을 떠올렸다. 그는 인민해방군을 찬양하는 영화 몇 편을 제작하라고 지시했는데, 한편으로는 군부에 아첨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6·4’ 이후 해방군을 뼛속까지 증오하는 백성들을 세뇌하기 위함이었다. 장쩌민은 직접 몇몇 영화의 제목을 친필로 썼는데, 그중에는 거액이 투입된 3부작 전쟁 영화 《대결전(大決戰)》도 포함되어 있었다.
덩샤오핑은 ‘제3세대 지도 핵심’ 장쩌민이 감히 개혁개방을 가로막으려 드는 것을 보고, 이에 통곡하며 군권을 이용해 마지막 승부를 걸기로 결심했다. 그는 다가올 중공 제14차 전국대표대회에서 개혁을 반대하는 총서기 장쩌민 등을 교체하고 개혁개방을 결연히 집행할 인물을 집권시키려 준비했다. 덩샤오핑은 차오스(喬石)로 하여금 장쩌민을 대신해 중공 중앙총서기를 맡도록 기획했으며, 덩은 일찍이 이 방안을 두고 양상쿤, 완리와 의견을 나눈 바 있다. 동시에 차오스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기 위해 덩샤오핑은 각지에서 행한 차오스의 연설을 높이 평가했다. 이는 장쩌민으로 하여금 또다시 질투에 눈이 멀게 만들었고, 차오스를 원수이자 라이벌로 여기게 만들었다.
덩샤오핑은 또한 연금 상태에 있던 자오쯔양을 다시 기용하여 전국정협 주석을 맡길 준비를 했다. 덩샤오핑은 자오쯔양의 개혁 고수 태도를 의심하지 않았으나, 문제는 ‘6·4’가 덩샤오핑 말년의 가장 큰 마음의 병이었다는 점이다. 이에 덩샤오핑은 사람을 보내 자오쯔양에게 안부를 전하며, 그가 다시 일하러 나오기 전에 ‘6·4’ 사건에서의 잘못을 스스로 시인함으로써 나중에 그가 ‘6·4’의 명예회복을 시도하는 것을 막으라고 요구했다. 연락책이 돌아와, 자오쯔양은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고 고집하며 반성문을 쓰려 하지 않는다고 보고했다. 자오쯔양은 “내가 왜 물러나면서 반성문을 쓰지 않았는가? 이것이 바로 내 선택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왜 반성해야 하는가? 반성하는 순간 사실의 진상을 밝힐 수 없게 된다”고 말했다. 보고를 다 들은 덩샤오핑은 만감이 교차하여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다.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이 실권한 후 덩샤오핑은 개혁개방을 추진할 가장 든든한 조력자를 잃었다. ‘제3세대 지도 핵심’이라는 장쩌민이 개혁개방을 추진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론상으로 개혁개방을 비판하는 것을 본 덩샤오핑은 어쩔 수 없이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다. 딸 덩난(鄧楠)의 도움을 받아 남순(南巡)을 감행하며, 늙은 몸을 이끌고 멈춰 선 개혁개방의 수레바퀴를 돌리기로 한 것이다. 1992년 1월 17일, 특별열차 한 대가 베이징을 출발해 남쪽을 향해 질주했다. 열차 안에서 덩샤오핑은 88세의 고령으로 다시 남하하여 부인, 딸, 그리고 오랜 친구이자 국가주석인 양상쿤의 수행을 받으며 1월 18일부터 2월 21일까지 우창, 선전, 주하이, 상하이 방문 길에 올랐는데, 이를 역사적으로 ‘덩샤오핑의 남순(南巡)’이라 부른다.
겉 다르고 속 다른 태도로 덩샤오핑을 격노케 해
1월 18일, 덩샤오핑은 우창에 도착해 직접 장쩌민의 이름을 거론하며 현지 책임자들에게 장쩌민의 ‘중앙’에 말을 전하라고 요구했다. “제13차 당대회 노선을 반대하는 자는 누구든 물러나라.” 장쩌민은 이에 깊은 원한을 품었고, 이후 덩샤오핑의 남순 연설에 대해 끝내 지지 의사를 표명하지 않았다.
19일, 열차는 선전 특구에 도착했다. 평소 말수가 적던 덩샤오핑은 장편 연설을 발표하며 장쩌민을 향해 명백한 최후통첩을 날렸다. “개혁개방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며 전당과 전국 인민의 옹호를 받았다. 개혁하지 않는 자는 물러나라.” 동시에 덩샤오핑은 양상쿤과 완리에게 1992년 말에 열릴 중공 제14대 ‘인사 진용’을 조율하도록 지시하며, 총서기를 포함한 새로운 인사 명단을 짜게 했다. 그의 절친이자 당시 국가주석 겸 군위 제1부주석인 양상쿤이 덩샤오핑의 남행을 수행한 것 외에도, 덩샤오핑은 이번 시찰 활동 기간 동안 차오스, 류화칭, 예쉬안핑(葉選平), 주룽지(朱鎔基), 양바이빙 등을 개별적으로 접견했다. 이는 한편으로는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을 위해 대대적으로 세를 불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차오스를 발탁하고 장쩌민을 해임하려는 덩샤오핑의 의도를 반영한 것이다.
덩샤오핑은 남순 도중에도 거듭해서 자오쯔양 관할하의 경제 업무 5년이 “고속 성장에 공로가 적지 않았다”라고 언급했다. 남순에서 돌아온 뒤에도 덩샤오핑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다시 사람을 보내 자오쯔양과 접촉했다. 자오쯔양은 여전히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장쩌민이 총서기에 오른 지난 2년여 동안 극좌(極左) 노선을 밀고 나가며 ‘평화적 변화 반대’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덩샤오핑의 “개혁하지 않는 자는 물러나라”는 말은 장쩌민의 아픈 곳을 깊이 찔렀고, 장쩌민은 이를 줄곧 뼛속 깊이 품고 있었다.
2월 20일 오전 장쩌민이 소집한 정치국 확대회의에 덩샤오핑의 연설이 전달되었다. 덩샤오핑의 일련의 담화를 중공 중앙 파일로서 공식적으로 전당(全黨)에 전달할 때, 장쩌민은 “당내 간부들의 사상적 불안을 쉽게 야기한다”는 구실을 대며 덩샤오핑 남순 연설의 방대한 내용, 특히 “개혁개방은 대세의 흐름이며 전당과 전국 인민의 옹호를 받았다. 개혁하지 않는 자는 물러나라”와 같은 내용을 대거 삭제해 버렸으며, 덩샤오핑 남방 여행의 상세한 내용을 보도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 전국의 대다수 사람들은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중 덩샤오핑의 두 가지 발언은 장쩌민에 의해 20년 동안 봉쇄되었다. 2012년 1월 18일, 중공이 덩샤오핑 남순 연설을 기념할 때 신화망은 <남방일보(南方日報)>의 보도인 ‘덩샤오핑 남순 담화 중 보도되지 않은 두 마디 말’을 다시 게재했는데, 그 하나는 “정치 운동을 하지 말고, 형식주의를 하지 말며, 지도부의 머리가 깨어 있어야 하고 업무에 지장을 주지 말아야 한다”였고, 다른 하나는 “나이가 들면 스스로 물러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실수를 저지르기 쉽다. 나와 같이 나이가 들어 기억력이 떨어지고 말까지 더듬으니, 우리 같은 노인들은 물러나서 온 마음을 다해 젊은이들이 올라오도록 받쳐주어야 한다”였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장쩌민은 이 두 마디 말에 유독 예민하게 반응했다. 하지만 그 후 10여 년 동안 장쩌민은 실제로 문화대혁명보다 더 지속적인 전국적 규모의 파룬궁 박해 정치 운동을 발동했고, 게다가 자리에 찰싹 붙어 내려오지 않으면서 덩샤오핑이 점찍은 후계자 후진타오를 곳곳에서 견제하여 당내 분열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게 만들었다.
1992년 2월 하순의 어느 날, 이념을 총괄하던 정치국 상무위원 리루이환(李瑞環)이 <인민일보> 사장 가오디(高狄)에게 물었다. “<인민일보>는 어째서 (덩샤오핑 남순 연설을) 싣지 않는가, 어째서 아무런 반응이 없는가?” 가오디는 뻔뻔하게 반문했다. “샤오핑 동지는 지금 단지 일개 평당원일 뿐인데, 우리가 어떤 톤으로 보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가오디가 감히 리루이환에게 대들 수 있었던 것은 장쩌민을 배경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장쩌민의 총서기 자리가 덩샤오핑이 준 것이며, 덩샤오핑은 군대를 뒷배로 두고 있어 언제든지 이 임명을 거두어들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1992년 3월 20일부터 4월 3일까지 베이징에서 제7차 전국인민대표대회(이하 전인대) 제5차 회의가 개최되었는데, 개혁을 하느냐 마느냐가 대회의 초점이었다. 장쩌민이 덩샤오핑 남순 연설 내용을 압박하며 감추자, 중공 역대 정치 투쟁에서의 비장의 카드인 ‘군부’가 입을 열었다. 전인대 회의에서 중공 중앙서기처 서기이자 중앙군사위원회 비서장 겸 총정치부 주임인 양바이빙이 가장 먼저 목소리를 높였다. “개혁개방을 든든하게 보호하고 지켜내자.”
동시에 양바이빙은 직접 <해방군보(解放軍報)>에 ‘개혁개방을 든든하게 보호하고 지켜내자.’라는 제목의 사설을 발표하도록 지시하며 “샤오핑 동지의 호소에 결연히 호응해 개혁개방의 호위무사가 되자”라고 공개적으로 표명하고, 덩샤오핑을 지지하는 깃발을 높이 들었다. 총참모부 시스템에서 가장 먼저 이에 호응한 이는 부총참모장 허치쭝(何其宗)이었다. 양바이빙의 ‘개혁개방을 위해 호위무사가 되자’라는 구호는 직격탄을 날리듯 장쩌민을 겨냥했고, 이때부터 장쩌민은 양바이빙과 허치쭝 두 사람을 뼛속까지 증오했는데 두 사람은 훗날 모두 장쩌민에게 숙청당했다.
비슷한 시기, 전인대 회의 기간인 3월 26일 <선전특구보(深圳特區報)> 1면 머릿기사에 장편 통신 <동쪽 바람 불어오니 눈에 가득한 봄빛 – 덩샤오핑 동지 선전 기행>이 실렸고, 이는 덩샤오핑의 남순과 중요 연설 발표 사실을 세상에 폭로했다. 같은 날 오후, <양성만보(羊城晚報)>는 드문 규격으로 이 보도를 거의 전문에 가깝게 발췌 보도했다. 3월 28일 상하이의 <문회보>, <중화공상시보> 모두 이 글 전문을 전재했다. 3월 30일이 되어서야 장쩌민 계파가 통제하는 신화사가 비로소 이 글을 전문 송고했는데, <선전특구보>보다 나흘이나 늦은 것으로 장쩌민의 강렬한 저항 심리를 고스란히 반영한다.
어쩔 수 없이 대세에 따르다
양바이빙이 군부를 대표해 공식적으로 남순 연설에 대한 지지를 공개 표명하면서 군부는 덩샤오핑의 가장 든든한 방패막이가 되었다. 인민해방군의 강력한 지지는 개혁을 반대하는 무리들을 극도로 두려워 떨게 만들었고, 정세가 급변하면서 장쩌민은 경악을 금치 못하며 군부의 칼끝이 자신을 직접 겨누고 있음을 느꼈다. 겁에 질린 나머지 장쩌민은 또다시 정치적 양다리란 얄팍한 술수를 꺼내 들었다. 4월 1일 일본인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말로만 덩샤오핑의 연설에 동조하는 척했다. 하지만 덩샤오핑은 장쩌민의 말이 완전히 빈말이며 진정성이라고는 전혀 없고 그저 땜질용일 뿐이라고 여겼다.
이때는 중공 제14대 공식 권력 이양을 불과 몇 달 앞둔 시점이었다. 양바이빙이 군부의 패를 꺼내 들고 강력하게 공세를 펼치자 중공 고층부의 정치 지형은 험악하기 짝이 없었다. 남순 이후 장쩌민의 평범함과 정치적 투기, 겉 다르고 속 다른 이중적인 행태는 이미 덩샤오핑의 인내심을 한계에 다다르게 했다. 1992년 5월 22일, 덩샤오핑은 베이징의 찌는 듯한 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직접 서우강(首鋼 수도철강)을 시찰하였으며, 현장에 있던 모든 간부와 노동자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불만을 터뜨렸다. “내 연설에 대해 일부 사람들은 건성건성 대충 나를 상대하고, 또 일부 사람들은 아주 침묵을 지키는데 사실은 반대하는 것이며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오직 아주 적은 사람들만이 진정으로 움직였다.” 덩샤오핑은 당시 수행을 맡았던 베이징시 지도자 리시밍(李錫銘)과 천시퉁(陳希同)에게 “중앙에 말을 전하라”라고 요구했다. 이 ‘중앙’이란 당연히 장쩌민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 시기 정치국 상무위원이자 정법위원회 서기 겸 중앙당교 교장이었던 차오스는 여러 차례 덩샤오핑의 연설에 대해 ‘큰소리나 빈말’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지적하며 장쩌민을 비판했다. 부총리 톈지윈은 덩샤오핑의 개혁을 강력히 지지한다는 의사를 뚜렷이 밝혔다.
톈지윈은 차오스의 요구에 응해 1992년 5월 중앙당교에서 장쩌민을 직접 거론하지 않은 채 비판하는 연설을 했다. “‘좌(左)’의 영향을 제거할 때에는 특별히 저런 풍향계 같은 인물들을 경계해야 한다. 이런 자들은 손바닥 뒤집듯 권력을 주무르고, 사람을 보면 사람 말하고 귀신을 보면 귀신 말하며, 기회만 오면 튀어나와 개혁개방을 반대한다. 이런 자들이 일단 국가 대권을 쥐게 되면 국가와 인민에게 모두 재앙이 될 것이다.”
이 말들은 장쩌민을 뼛속까지 치가 떨리게 만들었다. 그는 형세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다시 개혁파의 탈을 뒤집어쓰려 준비했으나, 톈지윈의 몇 마디 말에 그 가면이 홀랑 벗겨지고 말았다. 하지만 장쩌민이 속수무책이었던 것은, 톈지윈이 장쩌민의 양다리 걸치기 행태를 폭로하는 연설을 할 당시 장쩌민의 가장 거대한 뒷배이자 평소 톈지윈과 으르렁거리던 리셴녠이 병으로 입원해 있었다는 점이다. 5월 말, 전문 치료팀은 리셴녠의 병세가 위독하다고 보고했다. 장쩌민은 이때 자신의 지위가 백척간두에 처해 있으며 정세가 자신에게 매우 불리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어쩔 수 없이 장쩌민은 바람 불면 돛을 달듯 또다시 태도를 바꿨고, ‘자산계급의 개혁관’을 반대하던 목소리를 낮추기 시작했다.
1992년 6월 9일, 중공 중앙당교는 삼엄한 경계 속에 마치 큰 적이 닥친 듯 살벌했다. 장쩌민은 차오스와 수많은 군인 및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당교(黨校) 강당으로 걸어들어갔다. 당교 교원들과 수강생들은 이 살벌한 광경을 보고 수군거리며 비웃었다. “장쩌민은 분명 차오스가 동원한 공권력에 의해 압송되어 온 게 틀림없어.” 장쩌민은 차오스의 압박에 못 이겨 당교에서 덩샤오핑의 남순 연설을 지지한다고 표명했으나, 차오스에게 떠밀려 개망신을 당했다고 여겨 마음속으로 차오스를 더욱 깊이 원망했다. 사람들은 회의가 끝난 뒤 뒷말로 수군거렸다. “저 꼬락서니를 보면 장쩌민에게 진정성이 없다는 걸 딱 알 수 있지.” 하지만 겉보기에는 장쩌민이 훨씬 고분고분해졌다.
1992년 봄과 여름 사이, 중공 총서기 장쩌민의 정치적 시세는 단번에 바닥까지 떨어졌고, 어떤 이들은 장쩌민의 총서기 자리를 과연 지킬 수 있을지 논의하기 시작했다. 6월 21일, 리셴녠이 베이징에서 병사했다. 장쩌민은 정세에 밀려 태도를 바꿀 수밖에 없었고, 진심에도 없는 말로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노선을 지지한다고 선언했으나 다른 사람들보다 여전히 한참이나 늦었다. 장쩌민은 나중에 자신이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소문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겁에 질려 잠을 설치며, 언젠가 옛 장부와 새 장부가 한꺼번에 청산되어 당내 대대적인 비판이라도 받지 않을까 더욱 두려워했다. 그리하여 장쩌민은 몰래 다시 덩샤오핑을 찾아가 ‘뼛속 깊이 반성’하고 눈물을 글썽이며 덩샤오핑을 죽을 힘을 다해 따르며 개혁개방을 끝까지 완수하겠다고 다짐했다. 덩샤오핑의 태도가 벼랑 끝으로 내몰자 장쩌민은 마지못해 시장경제 개혁을 지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후 십여 년의 역사가 증명하듯 장쩌민의 지지도 어디까지나 겉치레일뿐, 실질적으로는 덩샤오핑의 염원을 배반했다.
제4절 입만 살고 속은 텅 비어
덩샤오핑의 ‘흑묘백묘(黑貓白貓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잡으면 된다는 의미)’ 실용 정책과는 달리, 장쩌민은 새로운 공산당 이념을 ‘발전’시키기 위해 온 힘을 짜냈다. 1995년 말, 장쩌민은 ‘삼강(三講)’을 제기했다. 이것이 그의 첫 번째 ‘이론’ 발명이라 할 만하다. ‘삼강’ 중에서도 장쩌민이 가장 많이 떠들어댄 것은 ‘정치 강조(講政治)’였다. 장쩌민 자신의 설명으로는 “정치를 강조하는 것은 정치 방향, 정치 입장, 정치 규율, 정치 감별력, 정치 예민성을 포함한다”는 것인데, ‘정치 투기술(아첨과 술수)’만 빼고 모두 갖다 붙인 셈이었다.
‘삼강’은 실상 장쩌민이 개인 권위를 세우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이른바 ‘정치를 강조한다’는 것은 다름 아닌 ‘공산당의 영도(領導)를 견지한다’는 것으로 즉 ‘당의 핵심’인 장쩌민의 영도를 견지한다는 뜻이다. 당시 덩샤오핑이 아직 사망하지 않았던 터라 장쩌민의 지위는 결코 반석같이 견고하지 못했고, 그렇기에 ‘삼강’이 발표된 뒤 이에 호응하는 이는 극히 드물었다.
장쩌민이 쇼를 하기 위해 내놓은 물건들은 모두 몇몇 문인 참모들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텅원성(滕文生)은 장쩌민 사상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삼강’ 중 하나인 ‘정치 강조’를 떠받친 인물이다. 마오쩌둥을 연구하는 전문가였던 텅원성은 장쩌민에게 마오 주석의 스타일로 정치국을 통제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즉, 권한을 특정 심복에게 몰아주는 것이 아니라 두세 명의 고위 참모들이 내부에서 서로 싸우게 만들고 결국에는 모두 자신에게 찾아와 중재를 구하도록 판을 짜라는 것이었다.
‘3개 대표’의 출현
‘3개 대표’의 원작자 왕후닝(王滬寧)은 1955년 10월 6일 상하이에서 태어났다. 1995년 중공 중앙정책연구실에 들어가기 전에는 푸단대학 국제정치과 교수였다. 장쩌민이 상하이시당 서기로 있을 때 왕후닝이라는 이름을 아주 잘 알고 있었는데, 비록 만난 적은 없지만 그의 이름을 무척 숭배했고 그의 저서에 푹 빠져 있었다. 수년 뒤 왕후닝이 중앙정책연구실로 발탁되어 들어왔을 때, 처음 마주한 총서기 장쩌민은 뜻밖에도 첫마디부터 왕후닝 저서의 원문을 대목대목 줄줄 외워 내려가 왕후닝을 깜짝 놀라게 했다.
장쩌민이 남의 글을 줄줄 외우는 데 열을 올린 것은, 첫째로 자기 머릿속에 든 게 없어서 공개적으로 쇼를 할 때 동문서답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애초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도무지 몰랐던 것이다. 둘째로는 자신의 ‘박식함’을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장쩌민은 그것으로 자신의 격을 높일 수 있다고 믿었으며, 기어코 당헌(黨憲)과 헌법에 밀어 넣으려 했던 ‘3개 대표’의 원작자가 바로 왕후닝이었다. 장쩌민은 또 틈만 나면 남의 글이나 심지어 고시(古詩)와 외국 고전의 구절을 읊어대며 자신의 몸값을 올리려 애썼고, 이는 결국 중국인들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당시 왕후닝을 중앙정책연구실로 불러들인 것은 쩡칭훙의 적극적인 추천 덕분이었다. 우방궈(吳邦國) 역시 왕후닝을 장쩌민의 정치 고문으로 앉히고 싶어 했다. 우방궈는 베이징으로 진입한 후에도 왕후닝을 베이징으로 불러올려 장쩌민을 보좌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잊지 못해 장쩌민 앞에서 여러 차례 거듭 언급했다. 왕후닝이 중난하이로 들어왔을 때 장쩌민은 그를 만나며 농담 삼아 말했다. “당신이 더 이상 베이징으로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이 양반들이 나랑 아주 한바탕 뒤집어졌을 거요.” 장쩌민의 심복인 쩡칭훙과 우방궈가 장쩌민의 무능함에 얼마나 속이 타들어 갔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2000년 3월 초, <인민일보>는 평론 기사를 통해 세 가지 문구, 즉 ‘3개 대표’를 내놓았으며, 이는 장쩌민의 ‘사상’ 이론으로서 처음으로 전국적 범위에 출시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떠들썩한 선전은 한바탕 소동에 불과했음이 드러났다.
‘3개 대표’가 도대체 어떻게 튀어나오게 된 것인지, 처음에는 일반인들 중 누구도 명확히 설명하지 못했다. 나중에 ‘3개 대표’가 가장 잘나갈 때 왕후닝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진실을 털어놓으며 자신이 원작자라고 밝혀 큰 소동을 일으켰다. 사실 이는 전혀 이상할 것도 없다. 장쩌민이 상하이시당 서기로 있을 때부터 왕후닝의 글을 대목대목 외워댔던 이였으니 말이다.
“‘3개 대표’로 우리의 도살 업무를 지도하자”
모든 관영 매체의 보도를 샅샅이 뒤져봐도, 장쩌민 본인을 포함해 그 누구도 ‘3개 대표’가 무엇을 뜻하는지 명확히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아랫사람들 중 그 누구도 이런 문제들을 따져 묻지 않았다. 탐관오리들은 온종일 먹고 마시고 놀고 매춘하고 탐욕을 부리는 일에만 골몰했고, 윗사람들이 무엇을 떠받들라고 시키면 모두 그에 장단 맞춰 떠받들었을 뿐, 사단이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에 대해선 아무도 개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3개 대표’는 그저 아무런 실질적 내용도 없는 빈말 몇 마디에 지나지 않았다. 웬만큼 낯이 두꺼운 사람이 아니고서야 낯부끄러워 대놓고 치켜세우기 힘들었다. 그러나 ‘3개 대표’는 장쩌민에게는 실로 목숨처럼 중요한 것이었다. 그 자신이 이론을 가져야만 발을 붙이고 버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장쩌민은 또한 자신을 위해 기념비를 세우고 싶어 안달이 났고, 수단과 방법을 가지지 않고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의 이론과 나란히 반열에 올려놓음으로써 장쩌민이라는 ‘제3세대 이론의 권위자’ 이미지를 빚어내고자 했다. 그리하여 이 텅 비고 알맹이라곤 없는 ‘3개 대표’는 장쩌민의 명령에 따라 관영 나팔수들에 의해 하늘 높은 줄 모르게 떠받쳐졌다. 장쩌민이 집권하고 있을 때 이 세 마디를 당헌과 헌법에 기어코 집어넣으려고 애를 썼다. 지금은 현직 총서기이자 국가주석, 군위 주석인 후진타오가 반드시 ‘3개 대표’를 높이 치켜들어야 했고, 어떤 간부의 연설이든 ‘3개 대표’를 입에 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장쩌민이 무슨 생각을 하든, 언론이 어떻게 떠받들며 각종 회의에서 학습하고 관철하든 간에, ‘3개 대표’를 진심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여전히 많지 않았다.
전국적으로 ‘3개 대표’ 학습 열풍이 불어 닥쳤을 때 중앙방송(CCTV)은 매일 특집 코너를 통해 일반 시민들을 인터뷰했다. 어떤 늙은 농부는 “우리 마을에 다리를 하나 놓았는데, ‘3개 대표’ 덕분입니다”라고 말했고, 어떤 아줌마는 “우리 며느리가 우량아를 낳았는데, ‘3개 대표’ 덕분입니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들은 ‘3개 대표’를 지침 삼아 일류의 국제 표준 공중화장실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어느 농촌의 흙담 벽에는 떡하니 커다란 표어가 나붙었다. “‘3개 대표’로 우리의 도살 업무를 지도하자.” 오색찬란하게 온갖 기괴한 주장들이 다 튀어나왔다.
중공에 의해 3년간 옥살이를 한 에포크타임스 전 베이징 주재 기자 왕빈(王斌)은 감옥에서 풀려난 뒤 한바탕 진짜 우스개 소리를 들려준 적이 있다. 교도소 당국이 죄인들을 동원해 강제 노역을 시켜 이윤을 남기게 했는데, 어떤 죄인들은 특별히 지정되어 음란 서적을 묶고 제작하는 일을 도맡아 사회에 내다 팔아 공안 시스템에 돈을 벌어주었다. 그 시기 ‘3개 대표’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정법 계통의 입버릇 같은 유행어가 되어, 무슨 일에든 다 ‘3개 대표’를 갖다 붙여야 했다. 죄인들이 음란 서적을 초과 생산해 냈을 때도 자신들이 ‘3개 대표’의 지도 아래 그토록 큰 작업 의욕을 불태울 수 있었다고 떠들어댔다.
광범위한 비판에 직면
《구시(求是)》 잡지 연구실과 중앙당교 이론연구실은 ‘3개 대표’ 사상 학술 세미나에서 이렇게 제기했다. “‘3개 대표’ 사상은 도대체 어느 시기에 형성된 것인가? 당내에서도 미스터리이고, 이론계에서도 미스터리이다.” 회의에서 어떤 이들은 “‘3개 대표’는 당내에서 인위적으로 장쩌민의 ‘위대하고, 영명하고, 탁월한’ 이미지를 빚어내기 위한 것이다”라고 밝혔다. 또 다른 이들은 “당내에서 ‘3개 대표’ 사상의 학습과 실천 선전은 대다수 경우 과제를 때우고, 형식주의를 하며, 교조적이고, 정치적 기만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전 중공 중앙정치체제개혁연구실 주임 바오퉁(鮑彤)은 3개 대표론이 요괴를 비추는 거울인 조요경(照妖鏡)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시종일관 가장 광범위한 인민을 대표한다”는 것은 빈말이고, “시종일관 선진 문화를 대표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며, “시종일관 선진 생산력을 대표한다”는 것은 관료와 상인이 하나로 융합된 정경유착과 동의어이기 때문이다.
중국사회과학원의 학자들은 3개 대표 사상은 공허하고 시대에 뒤떨어졌으며 형식주의를 하는 것이라는 의견을 냈다. 지방 당위원회와 지방 정부 대다수는 적당히 대응했다. 3년이 넘는 실천 동안 도대체 얼마나 많은 문제를 해결했는가? 형식주의를 하는 것은 나라를 그르치고 백성을 해치는 짓이다…….
어떤 이들은 이른바 ‘선진 문화’, ‘선진 생산력’이란 실상 타락한 문인들과 전제(專制)의 나팔수들, 그리고 신흥 관상(官商 관료자본가)과 자본가들의 집합체에 불과하며, ‘가장 광범위한 인민의 근본이익’ 운운하는 것은 철저한 거짓말이라고 지적했다. 가장 광범위한 농민들 가운데 수많은 이들이 피를 팔고, 신장을 팔고, 몸을 팔아 연명하다 에이즈에 걸려 죽어가도 돌봐주는 이는 아무도 없다. 중공이 늘 입에 올리는 ‘노동자 계급 큰형님’들도 최소 3천만 명이 실직당했는데, 장쩌민은 단 한 번도 그들을 대표해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나중에는 4중전회를 코앞에 두고 출간될 예정이던 <장쩌민 군사사상 문선(文選)>마저 보류되는 사태가 빚어졌다. 군부의 장전(張震), 훙쉐즈(洪學智), 양바이빙 등 10여 명의 원로 장성들이 장쩌민이 자신을 적절치 않은 위치에 올려놓았다고 상서를 올려 반대했기 때문이다. 양바이빙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공개적으로 ‘3개 대표’는 쓰레기 사상이라고 깎아내렸다.
2002년, 중공 제16차 당대회는 연기되었다. 내부 폭로에 따르면 그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당정 내부에서 ‘3개 대표’ 사상에 대한 인식과 관철 면에서 ‘상당한’ 간극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 떠들썩했던 선전 소동은 결국 장쩌민의 ‘위대하고, 영명하고, 탁월한’ 이미지를 완성해 주지 못했다. 사방에서 조롱을 받던 이런 빈말 몇 마디는 결국 억지로 중공 헌법과 당헌에 처박혔고, 이로 인해 중공의 정치 무대에는 한바탕 웃음거리와 추문이 얹어지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3개 대표’의 진정 위대한 공헌일지도 모르겠다.
《장쩌민의 실체》 공동 집필팀
2012년 5월
(에포크타임스에서 전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