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부도덕한 인생 내력” 제5절 제6절
【정견뉴스】
지금부터 14년 전, 《장쩌민의 실체(真實的江澤民)》이 처음으로 독자들과 만났다. 14년이 지난 지금, 장쩌민은 이미 죽었지만 그가 남긴 정치적 독소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오늘날 중국의 많은 혼란과 위기는 모두 장쩌민 집권 시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부패로 국가를 다스리고, 법치(法治)를 짓밟으며, 도덕을 파괴하고, 파룬궁을 박해하는 한편, 그로 인해 팽창된 중공의 전제(專制) 및 폭력 기구는 중국에 끝없는 환란을 남겼다. 오늘날의 중공을 똑똑히 보고, 중국이 어찌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이해하려면 《장쩌민의 실체》를 읽어볼 필요가 있다. 이에 에포크타임스에서는 본문을 다시 게재한다.
제5절 어릿광대의 등장
상하이 사람들이 장쩌민을 놀릴 때 하는 특별한 유머가 있었다. 1980년대 장쩌민이 상하이에서 집권할 당시 커다란 검은 안경을 끼고 스스로 국보(國寶)인 양 잘난 체하며 큰소리만 칠 뿐 실무는 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하이인들은 그를 ‘대왕판다’, ‘큰 두꺼비’라고 조롱했다. 장쩌민은 총서기에 오른 뒤 거의 모든 해외 순방을 문예 공연과 쇼로 만들어 버렸으며, 전 세계 국가원수들 가운데 익살극의 어릿광대 배우로는 단연 으뜸이었다.
‘장 배우(江戲子)’
1996년 6월 하순, 장쩌민은 스페인을 방문했다. 스페인 국왕 후안 카를로스는 장쩌민과 함께 3군 의장대를 사열하자고 청했다. 카를로스를 경악케 한 것은, 장쩌민이 느닷없이 이 순간 갑자기 빗을 꺼내 국왕 앞에서 머리를 빗어 정돈하기 시작한 것이다. 저녁 국빈 환영 만찬에서 장쩌민은 왕비의 오른쪽에 앉아 다시 한번 카메라 앞에서 머리를 빗었다. 6월 25일, 스페인 제1의 일간지 <엘 파이스>와 다른 여러 신문들은 1면 톱기사로 “카를로스 국왕이 장쩌민이 머리 빗는 것을 지켜보다”라는 뉴스 사진을 실었다. 곧이어 전 세계 수많은 신문들이 이를 전재했다.
장쩌민이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서 머리를 빗은 기록은 이외에도 여러 차례 있었다. 1993년 3월, 베이징에서 전국인민대표대회가 개최될 때 장쩌민은 주석단 중앙에 앉아 곁에 사람이 없는 것처럼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머리를 빗는 데만 몰두했다. AFP는 이 사진을 전 세계로 타전했다. 1995년 10월 24일, 장쩌민은 유엔 ‘세기보정(世紀寶鼎 중국이 유엔 창립 50주년을 기념해 선물한 대형 청동 솥)’ 앞에서 연설을 하던 중 전 세계 각국의 사진 기자들 앞에서 또다시 양복 안쪽 주머니에서 빗을 꺼내 머리를 빗었다.
장쩌민은 1996년 필리핀을 방문했을 때 남사군도(스프래틀리 군도)의 영유권 분쟁을 포기하고 공동으로 경제 개발을 하자고 주동적으로 제안했다. 그날 밤 필리핀 대통령 라모스는 요트 위에서 장쩌민을 위해 연회를 베풀었다. 장쩌민은 그가 방금 만났던 여성 상원의원 아로요(아로요는 나중에 2001년 필리핀 대통령에 당선되어 국민들로부터 ‘미녀 대통령’으로 불렸다)를 떠올리고는 여운이 가시지 않아 마이크를 잡고 엘비스 프레슬리의 <러브 미 텐더(Love Me Tender)>를 목청껏 불렀다.
1999년 10월 24일, 장쩌민은 프랑스의 한 박물관을 관람하던 중 문득 흥이 치밀어 프랑스 대통령 시라크가 방심한 틈을 타 영부인 베르나데트의 손을 잡아끌고 왈츠를 추기 시작했다. 시라크가 어이없어하는 사이 장쩌민은 다시 베르나데트의 손을 잡은 채 고개를 뒤로 젖히고 껄껄 웃어댔다. 이 일로 시라크는 대단히 불쾌해하며 자신에게 큰 망신을 주었다고 여겼다.
2000년 4월 19일, 장쩌민이 튀르키예를 방문했을 때 튀르키예 대통령 데미렐이 장쩌민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모두가 알다시피 이런 자리에서는 정상적인 의전에 따라 주인이 손님인 장쩌민에게 훈장을 달아주어야 마땅했다. 뜻밖에도 장쩌민은 한 발 앞서 훈장을 집어 들더니 스스로 자기 가슴에 달았고, 그 자리에 있던 손님과 주인 모두 눈이 휘둥그레져 말문이 막혔다.
2002년 2월 21일, 장쩌민은 인민대회당에서 연회를 베풀어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을 환영했다. 장쩌민은 그 자리에 있던 백여 명의 귀빈이 지켜보는 가운데 ‘오 솔레 미오’를 목청껏 불렀다. 미국 대통령 부시는 곧바로 박수를 쳤고, 이어서 반농담 삼아 콜린 파월 국무장관에게 세레나데를 한 곡 불러달라고 청했으나 파월은 정중하게 미소를 지으며 거절했다. 만찬 도중 장쩌민은 또다시 미국 영부인 로라를 잡아끌고 춤을 췄으며, 춤이 끝난 뒤에도 흥이 가시지 않은 장쩌민은 잇따라 미국 국가안보보좌관 라이스와 베이징 주재 미국 대사 부인 사라와도 차례로 춤을 추었다.
2002년 장쩌민이 아이슬란드를 방문했을 때는 그야말로 엄청난 망신을 떨었다. 국빈 만찬에서 밥을 먹다 말고 중간에 불쑥 일어선 장쩌민이 목청껏 노래 한 곡을 뽑자, 그 자리에 있던 주빈들은 모두 어리둥절해 마지않았다. 장쩌민의 부인 왕예핑은 당시 표정이 대단히 난감했으며, 이 광경은 아이슬랜드 최대 일간지에 대형 컬러 사진으로 상세히 보도되었다.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광범위하게 유전되는, 장쩌민이 몹시 화가 나서 홍콩 기자들을 향해 악을 쓰며 욕을 해댄 동영상이다. 관영 매체가 출간한 쿤의 《장쩌민 전》조차도 장쩌민의 이 같은 추태 스캔들을 차마 비켜가지 못하고 장쩌민이 한 차례 화를 낸 것으로 축소해서 다뤘다. 사실 장쩌민의 인성과 됨됨이는 그때의 돌발적인 통제 상실 속에서 낱낱이 드러났다.
2000년 10월 27일, 홍콩 기자들이 중난하이에서 장쩌민에게 2002년 홍콩 행정장관 선거에서 퉁젠화(董建華)가 이미 ‘지명’되었는지 묻자, 장쩌민은 즉시 격분해서 불같이 화를 내고 홍콩 기자들을 향해 ‘순진하고’, ‘단순’하다고 훈계했다.
기자: 장 주석님, 퉁젠화의 연임이 좋다고 보십니까?
장: 좋지!
기자: 중앙에서도 그를 지지합니까?
장: 당연하지!
기자: 이것이 홍콩의 자치에 영향을 미칠까 걱정되지 않습니까?
장: 내 말뜻은, 내가 그를 지명하겠다는 게 아니야. 당신들이 나한테 지지하느냐 안 하느냐고 물었잖아? 난 지지한다고 말했지, 명확히 말해주겠는데, 너희들 말이야, 내 생각에 너희 언론계도 공부를 좀 해야 해. 너희들은 아주 서구 방식을 배우려 드는데, 너희들은 확실히 너무 젊어(Too Young), 무슨 뜻인줄 알겠어?
내가 너희들에게 말하는데, 나는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이야. 별걸 다 봤다고. 서구의 그 어떤 나라를 내가 가보지 않았겠나. 너희들도 미국의 월리스를 알지. (수준이) 너희들보다 몇 수는 위인지 몰라. 나는 그와 담소하며 웃음을 나눴지. 단지 언론들도 자신의 지식수준을 높여야 해. (광동어로) 알아들었어!
너희들에게는 좋은 점이 하나 있지. 전 세계 어디든 너희들이 가장 빨리 달려간다는 거야. 하지만 이리 묻고 저리 묻는 질문들이 말이야, 너무 단순해(Too simple), 가끔은 너무 철이 없어(Sometimes naive), 알아들었나? 나는 오늘날 어른으로서, 볼 거 못 볼 거 너무 많이 봤어. 너희들에게 인생의 경험을 조금 말해줄 수 있어. 중국인들에게 ‘소리 없이 큰돈을 번다’는 말이 있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데 이게 가장 좋은 거야. 하지만 내 생각에 너희들이 이렇게 열정적인데 한마디도 안 하는 것도 좋지 않을 것 같아. 너희들이 방금 선전하는 데 있어서, 장차 너희들이 보도에 편향이 생긴다면 너희들이 책임을 져야 해…….
다음 날인 10월 28일, 홍콩 언론들은 전례 없이 일치된 목소리로 장쩌민을 규탄했다. 이는 홍콩이 1997년 중국에 반환된 이후 현지 언론이 중국 국가원수를 향해 이처럼 대규모 규탄을 제기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현지 신문들은 장쩌민을 가리켜 ‘마음이 찔려 켕기면서도 오만하다’고 비판했다. 거의 모든 언론이 장쩌민이 화를 내는 사진과 함께 장쩌민과 기자들의 문답 내용을 전문 게재했다.
국제 정치에서 한 나라의 지도자가 이토록 적나라한 감정 표현을 언론에 그대로 기록된 경우는 드물다. 이 전형적인 문답은 당시 장쩌민의 얼굴 표정과 손짓 몸짓이 곁들여져, 조금이라도 연륜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장쩌민의 인품에 대해 대충 90% 이상 판별해 내기에 충분했다. 장쩌민이 언급한 월리스야말로 직접적이고 단도직입적으로 장쩌민의 아픈 곳을 찔렀다. 월리스는 미국 토크쇼 ‘60분’의 전설적인 진행자였으며, 그의 프로그램은 오랫동안 미국의 시청률 10위 프로그램 안에 확고히 자리를 잡았다. 미국 언론계에서는 그를 ‘뉴스 개척자’로 추앙했으며, 그는 2012년 4월 7일 향년 93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월리스와 장쩌민은 과연 2000년에 만난 적이 있다. 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당시 월리스가 다룬 질문들이 전부 대단히 민감한 것들이었다는 점이다. 6·4 사건이나 파룬궁 같은 문제들을 그는 서슴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두 사람 사이의 대화는 ‘담소하며 웃음을 나눈 것’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바늘과 송곳의 맞대결’에 가까웠다.
월리스: “당신은 내게 있어서 독재자이자 권력주의자입니다.”
장쩌민: “솔직히 말해, 나는 당신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월리스: “당신이 동의하지 않을 거란 건 압니다. 하지만 미국 속담에 ‘만약 오리처럼 걷고, 오리처럼 꽥꽥 소리를 낸다면, 그것은 오리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독재자란 강제로 억압하는 자를 말합니다. 대상이 언론의 자유이든, 종교의 자유이든, 기업의 자유든 말입니다. 당신은 지금 거기에 꽤 가까워져 있습니다.”
이 명대사는 월리스가 세상을 떠났을 때 인터넷상에서 다시 한번 널리 퍼졌다. 월리스의 담대함과 지혜를 추억하고 경외하게 만드는 한편, 오리 같은 독재자의 추태를 똑똑히 보게 만들었다.
그전부터 장쩌민은 잦은 구설수와 망신으로 큰 소동을 일으켰고, 심지어 국제적인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 국가의 존엄을 대표하는 일국 원수에게 있어 이러한 어릿광대 공연은 중국인들로 하여금 극심한 혐오감을 불러일으켰다.
국모 추문: 장쩌민과 그의 여인들
2009년 홍콩에서 출간된 《중국 고위 간부 정부(情婦) 파일》이라는 책은 장쩌민과 쑹쭈잉(宋祖英)의 스캔들 전말을 파헤쳤다.
2002년 후난성 사오둥의 한 민간 서적상은 《국모 쑹쭈잉》이라는 책을 출간했다가 장쩌민의 진노를 샀고, 결국 저자는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며 출판에 연루된 50여 명이 화를 입어 처벌을 받았다.
장쩌민과 쑹쭈잉의 이야기는 이미 1998년부터 베이징에 소문이 퍼져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베이징의 택시 기사들은 길에서 차가 막힐 때의 지루함을 달래며 손님들과 흥미진진하게 이 이야기를 수다 떨곤 했다.
사람들은 쑹쭈잉에게 중난하이를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특수 통행증인 ‘붉은 카드’가 있다고 말했다. 1997년 어느 날, 베이징으로 차출되어 온 한 여가수가 쑹쭈잉의 차를 함께 타고 중앙방송국 녹음실로 가 데모 테이프를 녹음하던 중, 차 안에서 이 여가수가 무심코 공구함을 열어보다가 놀랍게도 ‘중난하이 붉은 카드’가 들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 자리에서 눈이 휘둥그레져 넋을 잃었다. 입이 가벼워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던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소문을 총정가무단(總政歌舞團 인민해방군 총정치부 가무단) 전체에 퍼뜨렸고,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인민해방군 계통, 광전(廣電 광고방송영화) 계통의 일부 문예 부문에서는 간부, 당원, 군중 회의를 거듭 소집해 관련 인원들에게 “유언비어를 만들지 말고, 유언비어를 퍼뜨리지 말고, 유언비어를 믿지 말라”고 요구하며 이를 하나의 정치적 규율로 삼아 엄히 준수할 것을 요구했다. 그 여가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소속 단위에 의해 원래 고향인 톈진으로 쫓겨나듯 송환되었다. 소문에 따르면 톈진으로 돌아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녀는 누군가에 의해 베란다 아래로 밀려 떨어져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2003년 정협 지도부를 다시 선출할 때, 어떤 정협 위원이 투표용지에 쑹쭈잉의 이름을 ‘정협 부주석, 비서장’의 기타 선택인 명단에 적어 넣었다. 개표위원이 “쑹쭈잉(가수) 1표”라고 읽자, 단상 아래에서는 의미심장한 폭소가 터져 나왔다. 흥미로운 것은 쑹쭈잉의 뒤를 이어 호명된 이름은 “리루이잉(李瑞英 CCTV 뉴스 진행자) 1표”였다는 점이다. 단상 아래 사람들끼리 서로 눈을 찡긋거리며 곁눈질을 했다. 대표들도 후보를 누구로 뽑을지 자신들이 도리어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아예 대놓고 장쩌민을 놀려 먹으며 회포를 푼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중국 특색의 민의(民意) 표현’이었다.
장쩌민이 득세하던 시절, 쑹쭈잉은 매년 춘완(春晚 설날 특집 공연)에 의심의 여지없이 출연하는 단골 출연자였을 뿐만 아니라, 군 계급이 가장 높은 예인이자 1급 배우(사단장 급) 대우를 받는 보기 드문 스타)이었다. 쑹쭈잉이 데뷔하기 전 중국에서 가장 잘나가던 여가수인 펑리위안(彭麗媛 시진핑의 부인)은 늘 춘완의 마지막을 장식하곤 했으나, 나중에 쑹쭈잉이 등장하면서 그 기세가 펑리위안을 훨씬 능가했다.
2006년 10월, 장쩌민과의 관계를 믿고 쑹쭈잉은 미국에서 ‘아, 곱고 아름다운 쟈스민이여’라는 타이틀로 콘서트를 열었다. 내부 관계자의 폭로에 따르면 이번 미국 콘서트의 각종 투자 총액은 300만 달러를 훌쩍 넘었다. 중국 측은 문화부, 주미 대사관, 중앙텔레비전(CCTV)을 주최로 내세워 요란하게 판을 벌였고,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띄웠으며, 미국 국립교향악단의 반주와 워싱턴 합창단의 코러스까지 동원했다. 쑹쭈잉은 ‘황비(皇妃)’, ‘국모(國母)’의 대우를 받는다고 조롱당했다. 20달러에서 60달러짜리 표를 두고 쑹쭈잉은 표가 ‘매진’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한 달 전에 미리 ‘티켓 판매 통제’를 시행했다고 주장했다. 내부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수많은 관객들의 표는 영사관이 엄격한 정치적 심사를 거친 뒤 공짜로 나누어준 것이었으며, 일부 표는 영사관이 통제하는 화교 단체에 ‘도급’으로 주었다.
그녀의 지위가 치솟을수록 쑹쭈잉과 장쩌민의 스캔들은 민간은 물론 고층부에서도 갈수록 널리 퍼져나갔다.
2004년 2월 21일, 장쩌민에 반대하며 친후진타오 성향으로 유명한 중국 2차대전사 연구회 회원 뤼자핑(呂加平)은 중공 중앙 지도부와 전인대 대표, 정협 위원들에게 편지를 보내 법에 따라 장쩌민의 스캔들을 조사 처리해 줄 것을 희망하며 자신의 웹페이지에 이를 공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뤼자핑은 미행을 당했다.
공개된 ‘반영(反映)’이라는 글에는 장쩌민의 과거 이력과 입당 문제 외에도 상당한 지량을 할애해 “장쩌민과 쑹쭈잉에 관한 일들”을 폭로했다. 글은 장쩌민이 수시로 쑹쭈잉의 콘서트를 관람했다고 지적했다. 어느 날 공연이 끝난 뒤 장쩌민은 쑹쭈잉과 악수를 나누며 몰래 쑹쭈잉에게 쪽지 한 장을 건넸는데, 그 쪽지에서 스스로를 ‘오빠’라 칭하며 이렇게 적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면 오빠를 찾거라. 오빠가 네 모든 일을 해결해 줄 수 있단다.” 나중에 쑹쭈잉이 이 쪽지의 내용을 다른 사람에게 발설했다.
문장에서는 더 나아가, 전 CCTV 문예부장이자 다년 간 춘완을 연출해 온 자오안(趙安)이 2001년 일부 유명 여배우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던 자리에서 쑹쭈잉이 술김에 기세를 타 자신과 장쩌민의 염문을 떠벌렸고, 이것이 자오안을 통해 외부로 퍼져나가는 바람에 자오안은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았다.
그에 앞서 자오안이 장쩌민의 스캔들을 기록한 원고를 장쥔이(張俊以)가 입수하게 되었고, 장쥔이는 이 원고의 내용을 근거로 관련 부문과 지도자들에게 200여 통의 익명 투서 편지를 보내 자오안과 쑹쭈잉이 장쩌민 등의 지도자들을 비방했다고 고발했다. 그러나 장쥔이는 도리어 장쩌민이 직접 내린 체포령에 의해 구속되어 법정에 회부되었다. 하지만 ‘당과 국가 지도자’를 비방했다는 점에 대해 법원과 신화망은 두루뭉술하게 얼버무릴 뿐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
2002년 여름, 쑹쭈잉은 쓰촨성의 어느 도시로 단독 공연을 하러 갔다. 장쩌민의 심복이자 중앙경위국 국장인 유시구이(由喜貴)의 비준을 받아 당시 쓰촨성 당 서기 저우융캉(周永康 후에 공안부장, 중앙정법위 서기 역임)은 쑹쭈잉에게 부총리급 이상의 국가 지도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1급 경호 대우를 해주었다.
이번 콘서트에서는 4만~5만 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체육관이 발 디딜 틈 없이 꽉 들어찼는데, 모두가 장쩌민의 어린 정부(情婦)를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었다. 쑹쭈잉이 부른 노래 중에는 후베이 민요 <용선조(龍船調)>가 있었는데, 가사 도중에 대화하는 대사가 끼어 있었다. “아가씨가 강을 건너려 하는데, 누가 나를 업어줄래요?” 결과적으로 그녀가 이 질문 대사를 부를 때 단상 아래 관객들이 일제히 한목소리로 합창하듯 응답했다. “장 할아버지가 업어줄게요!” 쑹쭈잉은 오도 가도 못하는 망신을 당했지만 그렇다고 공연을 중단할 수도 없었다. 수만 명의 관객들이 돈을 내고 표를 사서 노래를 들으러 온 터라 이를 악물고 끝까지 부를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절에 이르러 쑹쭈잉이 또다시 이 질문 대사를 읊조리자마자 단상 아래 수만 명의 관객들은 다시 천지를 진동하듯 우레와 같이 음성으로 대답했다. “장 할아버지가 업어줄게요!” 화가 머리끝까지 난 그녀는 그날 밤 호텔로 돌아와 눈시울이 붉어지도록 울었다.
다음 날 쑹쭈잉은 곧바로 베이징으로 날아가 장쩌민에게 이 일을 일러바쳤다. 장쩌민은 몹시 화를 내며 해당 시의 당 서기에게 이 일을 낱낱이 철저히 조사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당 서기 역시 짬밥이 있어서 이 일 때문에 백성들의 원성을 사고 싶지 않아 며칠을 질질 끌다가 중앙의 유관 부문에 보고를 올렸다. 그날 밤 공연 당시 시 텔레비전국과 공안국 모두 현장 녹화를 하긴 했으나 카메라 렌즈가 모두 무대 위를 향해 있었고 단상 아래를 향하지 않아 수만 명의 관객 중에서 ‘소요 분자’를 찾아낼 도리가 없다고 둘러댔다…… 이 일은 결국 그대로 얼버무려져 무마되고 말았다.
쑹쭈잉은 국가 1급 배우로서 국무원의 ‘정부 특수 수당’을 누리고 있었으며, 전국정협 위원, 전국부녀연합회 집행위원, 전국청년연합회 위원 및 중국음악가협회 이사까지 꿰차고 있었다. 쑹쭈잉 역시 장쩌민의 통치를 수호하기 위해 온갖 재간을 다 짜냈다. 그녀가 부른 노래들은 모두 중공과 장쩌민의 치적을 분칠하고 태평성대를 노래하는 것들뿐이다. 가령 <좋은 날(好日子)>, <갈수록 좋아지네(越来越好)>, <과거를 이어 미래로 나아가는 영도자(繼往開來的領路人)>, <영원히 당신을 따르리(永遠跟你走)> 같은 것들이었다. 뤼자핑의 부인 위쥔이(于鈞藝) 여사는 “장쩌민과 쑹쭈잉에 관한 일들”은 이미 수년 전에 널리 퍼졌으며 이 일은 “근거가 있고”, “꽤 신빙성이 있다”라고 밝혔다. 왜냐하면 자오안과 장쥔이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두 사람의 관계를 폭로했다가 비밀리에 체포되었기 때문이다.
2011년 5월 13일, 뤼자핑은 중공 전 총서기 장쩌민의 문제들을 폭로했다는 이유로 베이징시 제1중급인민법원에 의해 ‘선동 및 국가정권 전복죄’로 비밀리에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친구 한 명과 뤼자핑의 아내 위쥔이 역시 같은 죄명으로 유죄를 선고받았다.
중국의 언론 통제는 늘 살벌하기 짝이 없었기에, 중국 민간에서 현재 집권 중인 지도자의 스캔들을 이토록 사방에서 확산시키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흥미진진하게 논의한 적은 아예 없었다. 그 원인을 꼽자면, 첫째로 그 스캔들이 진실이기 때문이고, 둘째로 전국의 민중이 장쩌민을 보편적으로 혐오하며 장쩌민의 민의 지수가 과거의 ‘요부(妖婦)’ 장칭(江青 마오쩌둥의 후처)과 동급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일국의 당당한 국가원수가 주석단에 앉아 한 여성 종업원을 3분 동안이나 뚫어져라 쳐다볼 수 있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이 장면은 기자들이 다 사진으로 찍어놓았다!
쑹쭈잉 외에도 장쩌민에게는 몇 명의 여인이 더 있었다.
전인대 부위원장을 지낸 천즈리(陳至立)는 등급이 가장 높은 인물이었다. 그녀는 과거 장쩌민의 큰아들 장몐헝(江綿恒)과 같은 연구소에 있었고, 장쩌민이 상하이시당 서기로 임명된 뒤 장쩌민에 의해 당 선전부장으로 임명되었으며, 1989년 천즈리는 온 힘을 다해 <세계경제도보>탄압에 압장섰다.
장쩌민이 중난하이를 접수한 후 1998년 교육에 종사한 경력이 전혀 없는 천즈리를 교육부장에 임명했고, 나중에는 교육을 총괄하는 국무위원으로 승진시켰다. 천즈리가 밀어붙인 교육 산업화 개혁은 교육계에서 덧대로 돈을 거두고, 가짜 학위 위조와 매매가 갈수록 기승을 부리게 만들었다. 일부 고위 간부들은 그녀를 등 뒤에서 ‘창녀 천’이라고 불렀다.
천즈리는 또한 장쩌민이 파룬궁을 탄압하고 박해하는 정책을 캠퍼스로 끌어들였고, 캠퍼스 내 백만 명 서명 운동을 통해 학생들의 마음속에 증오와 거짓말의 씨앗을 뿌렸다. 그녀가 교육부를 총괄한 10년 동안 교육 풍토는 해이해지고 타락했으며, 매춘(嫖), 도박(賭), 표절(抄)의 3대 악풍이 캠퍼스를 뒤덮었다. 칭화대, 베이징대 등 수십 개 대학의 총장들이 거듭해서 그녀의 사퇴를 강력히 요구했다.
리루이잉은 CCTV의 뉴스 앵커였다. 리루이잉은 몇 년 동안 장쩌민이 해외를 순방할 때마다 반드시 대동하는 여성 앵커였다. 어느 날 장쩌민이 해외 순방을 할 때 리루이잉이 장쩌민을 인터뷰하는 화면이 중앙텔레비전 저녁 뉴스에 방송되자 시청자들이 왈가왈부하며 리루이잉이 인터뷰를 하는 게 아니라 마치 어리광을 부리는 것 같다고 수군거렸다.
황리만(黃麗滿)은 선전시당 서기였다. 1980년대 초 장쩌민이 전자공업부 장관으로 임명되었을 때 황리만은 판공청에서 일했다. 장쩌민이 총서기 자리를 굳힌 후 황리만을 선전으로 불러들여 잇따라 광둥성당 부서기와 선전시당 서기를 맡겼으며, 당시 광둥성당 서기이자 장쩌민의 심복인 리창춘(李長春)조차도 그녀에게 곳곳에서 예를 갖추어 양보할 정도였다.
황리만의 남편은 10억 위안 이상의 공사비가 소요된 선전 ‘연합광장’ 등의 공사를 도맡았고, 황리만의 여동생 몇 명도 그 뒤를 따라 출세가도를 달렸다. 황리만은 선전에서 제멋대로 권세를 휘두르며 탐욕스럽고 부패하게 돈을 물 쓰듯 낭비했다.
중국 행위예술가 아이웨이웨이의 《일호팔내도(一虎八奶圖)–역주: 한 남자와 4 여성이 나체로 8개의 유방을 드러낸 사진》는 장쩌민과 각각 남편이 있는 천즈리, 황리만, 리루이잉, 쑹쭈잉이 집단으로 음란하게 노는 모습을 풍자한 것이라고 한다. 장쩌민의 띠가 호랑이(虎)인 데 반해 네 명의 첩이 합쳐서 젖꼭지가 여덟 개(八奶)이기 때문이다. 장쩌민의 심복 저우융캉은 장쩌민의 ‘경제적으로 무너뜨리는’ 수단을 동원해 아이웨이웨이를 박해했다. 11월 17일, 아이웨이웨이의 촬영 조수 자오자오(趙趙)는 ‘음란 사진 촬영’ 혐의로 베이징시 공안국의 ‘성매매(黃)·도박(賭)·마약(毒) 소탕 전담반’에 끌려가 아이웨이웨이가 시켜서 찍은 것인지 심문을 받았다.
제6절 “도둑이 제 발 저리다”
장쩌민은 현직에 있으면서 자서전을 출판한 최초의 중공 총서기이다. 일반적으로 철의 장막 뒤에 숨은 독재자들은 살아생전에 자서전을 출판하는 일이 드물다. 이것이 ‘당과 국가의 최고 기밀’에 저촉되기 때문이다. 장쩌민의 전기를 쓰려면 상층부에 깊숙이 파고들어야 하고, 몇몇 자료들을 읽어야만 한다. 여기에는 보통의 중국인들이 알도록 허용되지 않는 ‘기밀’ 자료들도 포함되며, 일부 고위층 인사들이나 측근 인사들을 인터뷰해야 한다.
“그래도 양놈들이 다루기 좋아”
이상하게도 장쩌민의 전기는 모두 외국인이 썼다. 게다가 ‘당과 국가의 최고 기밀 누설’을 두려워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두 차례나 서양인들에 의해 전기가 저술되었다.
첫 번째 《장쩌민 전》은 명경(明鏡) 출판사가 출간하고 중국 문제 전문가인 캐나다인 두린(로버트 로렌스 쿤이 아니라 초기 저작의 다른 저자)이 저술했다. 그가 이 책을 쓰기 시작한 계기는 화장실에서 장쩌민과 우연히 한차례 마주친 것이 계기가 되어, “유창한 중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두린이 《장쩌민 전》을 쓰게끔 ‘자극’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두린은 ‘머리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비록 이 책이 그 화장실에서 뚝딱 무르익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나와 장쩌민의 우연한 만남은 확실히 그를 내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나게 만들었다. 공식 색채가 너무나 짙은 중국 매체만 추적하는 것으로는 때때로 이런 인상을 형성하기 어렵다. 그때 나는 이 사람의 일생을 탐구해 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6년 동안 재임하며 중공 중앙총서기를 지냈으나 삶의 궤적은 세상에 거의 알려진 바가 없었고 기자나 학자들도 거의 다루지 않았다. 나와 그의 일면식은 나로 하여금 빨리 글을 쓰도록 독촉했다. 내가 이 책을 완성했을 때 장쩌민은 이미 10년 동안 집권한 상태였고 덩샤오핑은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나 장쩌민을 이해하도록 우리를 이끌어줄 만한 것이 거의 없었다.”
두린은 또 이렇게 말했다.
“신중을 기하기 위해 나는 (중공) 관방 정보 소스와 1차 자료만 채택했다. 내가 자주 인용한 두 곳의 홍콩 잡지인 《경보(鏡報)》와 《광각경(廣角鏡)》은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위원들이 출판한 것으로 관방 배경의 지원을 받고 있으며, 대륙에서 발행되는 유일한 두 곳의 홍콩 잡지이기도 하기에 나는 그들의 정보가 신뢰할 만하다고 여겼다. 나는 이 두 잡지와 중공이 홍콩에서 운영하는 《문회보》와 《대공보》를 ‘관방’ 정보 소스로 간주했다.
수년이 지난 2001년, 이번에는 미국의 쿤이 장쩌민을 위해 전기를 집필했다. 쿤은 전기 작가도 아니고 기자도 아니었으며 중국 문제 전문가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는 미국 씨티그룹의 전무이사였으며, 씨티그룹은 중국에 지점을 개설한 바 있다.
탄로난 거짓
《아주주간(亞洲周刊)》은 전기 작가 예융례(葉永烈)가 쓴 ‘나와 《장쩌민 전》 안팎의 비밀’이라는 글을 게재하여 그 내막과 글을 쓰게 된 전후 과정을 폭로했다. 예융례에 따르면 2001년 3월 12일, 그는 베이징으로부터 장거리전화를 받았는데 중공 중앙 직속 기관의 모 사무실 Y 선생이라고 소개하며 중요한 일로 의논할 것이 있다고 했다. 예융례는 곧바로 베이징으로 달려갔고, 거기서 미국인 쿤과 함께 공동으로 《장쩌민 전》을 저술하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이것은 매우 민감한 임무였기에 ‘001 공정’을 암호명으로 삼았다. 지금 쿤이 중국인 작가 한 명을 찾아 함께 협력하기를 원했고, 예융례가 당국에 의해 1순위로 물색된 것이다.
예융례의 글에 따르면 Y 선생은 《장쩌민 전》을 집필하게 된 이유를 이야기하며, 현재 해외에서 출판된 각양각색의 《장쩌민 전》이 매우 많지만 그 내용은 이리저리 긁어모았거나 중국에 반대하고 공산당에 반대하는 것들이나 영향이 매우 나쁘다고 했다. 반드시 해외에서 관점이 올바르고 사실 관계가 정확한 《장쩌민 전》을 출판해야 한다. 그들의 사무실은 대외 선전의 책임을 띠고 있으나 관영의 신분으로 직접 나서서 《장쩌민 전》 집필을 조직할 수는 없다. 때마침 쿤이 미국의 우호 인사로서 스스로 영어로 된 《장쩌민 전》을 저술하여 미국 출판사를 통해 출판하겠다고 자청했다. 그리하여 그 사무실에서 예융례를 협력자로 골라 책이 민간의 색채를 띠도록 하려 했다는 것이다.
Y 선생과의 대화로부터 예융례는 《장쩌민 전》 집필의 발단이 장쩌민 본인이 아니라 중공 중앙 직속의 대외 선전 기구라는 점을 깨달았다. 그들은 ‘아래에서 위로’ 조작을 진행했으며 ‘장쩌민 사무실’의 묵인을 얻길 희망했다. 이것은 과거 마오쩌둥이 스노우와 직접 대화하고 장청이 위트케의 인터뷰를 직접 수용한 것과는 전혀 달랐다.
예융례는 곧바로 이틀 동안 시간을 내어 쿤 및 그의 조수와 함께 《장쩌민 전》 집필 계획과 인터뷰 명단을 토론했다. 이어서 예융례는 상하이로 돌아가 다시 《장쩌민 전》에 관한 구상, 3000자의 개요와 15페이지의 연보, 방대한 참고 도서 목록과 백여 명의 인터뷰 명단을 초안으로 잡았다. 쿤은 이에 만족을 표시했다. 양측의 협력은 애초에는 아주 순조로웠으나 계획서를 초안하는 과정에서 의견 갈등이 빚어졌다. 그 위에는 “쿤은 단독 저자”라고 적혀 있었고, 예융례는 단지 ‘수석 인터뷰어 겸 수석 연구원’일 뿐이었다.
예융례는 자신이 상하이작가협회의 전업 작가이므로 중국 작가의 존엄을 지켜야 하며, 자신과 쿤은 ‘고용주’와 ‘대필자’ 관계가 아니라 대등한 협력자여야 한다고 여겼기에 《장쩌민 전》 계획서에 서명할 수 없었고, 양측의 협력도 이로써 중단되었다. 나중에 관련 인사가 얘융례에게 알려준 바에 따르면 사실 이것은 쿤의 뜻이 아니라 ‘윗선의 의견’이었다. 윗선에서 외국인이 단독으로 《장쩌민 전》을 쓰는 것이 비교적 적절하다고 여겼기에 예융례가 두 사람의 공동 명의를 계속 고집하지 않기를 바랐던 것이다.
예융례의 폭로에 따르면 쿤은 일찍이 자신과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고 한다. “‘당신의 대화, 당신이 제공한 <장쩌민 연보> 및 기타 수많은 자료들은 내게 엄청난 도움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우리가 협력을 이어가지 못한 이유는 착잡하고 복잡했으며, 내가 마음대로 좌우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여기까지 말하자 쿤은 한숨을 푹 내쉬며 진심을 털어놓았다. ‘중국은 블랙박스(Black Box)입니다!’ 그는 ‘블랙박스’에 대해 어찌할 도리가 없음을 토로했다! 그는 서로 협력을 계속할 수 없었던 것은 자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 ‘블랙박스’ 때문이라고 밝혔다.”
쿤의 위와 같은 발언은 얘융례에게 전기의 전체 집필 과정이 한바탕 블랙바스 작업, 즉 세계를 기만한 사기극이었음을 의심할 여지없이 말해주는 셈이다. 그렇다면 민주와 자유의 젖을 먹고 자란 사람이자 국제적으로 저명한 투자 은행가이자 기업 전략가가 갑자기 전기를 저술하는 데 흥미가 생겨, 중국 위아래를 막론하고 온 세상 사람이 다 욕하는 물건을, 전기를 통해 찬양해야 했고, 그것이 블랙박스임을 뻔히 알면서도 여전히 양심을 속이고 중공과 계속 협력하려 했던 내막은 우리로 하여금 깊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장쩌민 전》을 저술하면서 자오쯔양을 비켜갈 수는 없었다. 이치대로라면 저자는 자오쯔양을 인터뷰해야 마땅했다. 자오쯔양은 ‘직책을 떠나 한가로이 지내며’ 베이징시 푸창후통 6호에 살고 있었기에 찾기도 매우 쉬웠고 대화를 나눌 시간도 널려 있었으나, 쿤은 애초에 그 귀찮은 일에 휘말리려 하지 않았다. 쿤은 또한 톈안먼 어머니 딩쯔린(丁子霖)을 인터뷰하러 가지도 않았고, 반체제 인사나 인권수호 활동의 대표 인물들을 인터뷰하러 가지도 않았다. 파룬궁 탄압은 장쩌민이 재임 중에 저지른 거대한 사건이었지만 저자는 박해받는 파룬궁에 대해서도 인터뷰하지 않았다. 저자의 수준이 이 지경까지 도달해 있다면 이 책이 과연 얼마나 가치가 있을지, 또 어떤 종류의 가치를 지닐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베이징 정계의 권위 있는 인사의 폭로에 따르면 예융례의 글에서 모호하게 언급된 ‘중앙의 모 부문’은 바로 국무원 신문판공실(대외 명칭은 중공 중앙대외선전국으로 하나의 기구에 두 개의 간판이 있다)을 가리키며, Y 선생의 진짜 이름은 신문판공실 산하의 국장 양양(楊揚)이다. 양양은 고위 간부의 자녀로 일찍이 미국에서 유학한 바 있다.
어느 공안·검찰·법원 요인의 폭로에 따르면 《아주주간》의 예융례 기사는 정계에 한바탕 풍파를 일으켰고, 윗선에서 ‘용안이 대노’했고 예융례는 곧바로 ‘내부 통제’ 명단에 올라갔다.
속일 수 있을 때까지 속인다
《공산당에 대한 9가지 평론》에는 중공이 “거짓말을 폭력의 윤활제로 삼는다”는 유명한 명언이 나온다. 오늘날 중공 통치의 합법성은 서구로부터 인증받을 필요가 있다. 한편으로는 주문과 공공관계(PR) 수단을 통해 서구의 비위를 맞추고, 다른 한편으로는 ‘수출을 내수로 전환’하는 선전 수단을 가동해야 한다. 이것은 전통적인 의미에서 근본주의를 지향했던 중공보다 더 교활하고 이해관계와 더욱 맞물려 있다.
장쩌민은 의심할 여지 없이 ‘수출을 내수로 전환’하는 선전 수단에 능통했다. 2005년 초 로버트 로렌스 쿤(Robert Lawrence Kuhn)이 저술한 《장쩌민 전》 중문판과 영문판이 국내외에서 동시에 출시되었다. 과연 대륙 매체들은 이를 대대적으로 선전했고, 상하이의 《해방일보》, 《문회보》, 《신민만보(新民晚報)》는 전면을 할애해 《장쩌민 전》을 발췌 연재하며 쿤을 ‘신시대의 스노우’라고 치켜세웠고, 이는 대륙 언론들이 띄워 올린 술수의 핵심을 한마디로 꿰뚫었다. 쿤은 인정미 넘치는 묘사로 장쩌민의 역사적 공적을 덩샤오핑과 나란히 반열에 올려놓았고, 이어서 “그는 때때로 과도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는데 마치 ‘파룬궁’ 문제를 다룰 때처럼 말이다. 때로는 그의 반응 역량이 부족하기도 했는데 처음 ‘사스(SARS)’를 대할 때처럼 말이다”라고 썼다. 마치 가벼운 한 마디 말로 문화대혁명식의 박해를 슬그머니 넘겨버릴 수 있고, 수만 명의 생체 장기 적출이라는 죄악을 ‘무시’할 수 있다는 식이었다.
물론 중문판은 영문 원작에 비해 수많은 삭제가 가해졌으므로 이 두 가지 버전을 각각 국내판과 해외판이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하나는 중국 백성들을 속이기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외국인들을 홀리기 위한 것이다.
지금은 인터넷 시대인데 이렇게 눈 가리고 아웅하는 얄팍한 술수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 점을 장쩌민이 모를 리 만무했다. 어차피 속일 수 있을 때까지 속이고, 속일 수 있는 만큼 사람들을 속여보자는 심산일 뿐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중국 2차대전사 학자 뤼자핑은 2003년부터 장쩌민의 생부가 일본 침략 시기의 매국노(漢奸)였으며 장쩌민 본인도 일제 부역자 한간 노릇을 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1950년대 소련 유학 시절 장쩌민은 KGB에 의해 스파이로 포섭되기도 했다.
2003년 3월 12일, 중공 전인대 회의에 참석한 장쩌민은 후베이성 대표단의 토론에 참석했다. 장쩌민은 이렇게 말했다. “1966년부터 1970년까지 나는 우한 보일러 연구소에서 소장을 지냈다. 당시 마침 문화대혁명 시기였는데…… 조반파(造反派)들이 나의 인사 기록을 샅샅이 뒤져 밑바닥까지 털어보았다니까. 잘된 일이지, 나의 역사적 결백을 증명해 주었으니까.” 총서기의 신분으로 그가 구태여 자신의 ‘역사적 결백’을 변명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것은 스스로 역사가 결백하다는 말인가, 아니면 결백하지 않다는 말인가?
1999년 12월 11일 자 《인민일보》 보도에 따르면 장쩌민은 옐친과 함께 베이징에서 중러 국경 의정서에 서명했다. 하지만 쿤이 쓴 전기에서는 이 회동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장쩌민은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어떤 노래를 불렀는지 같은 사소한 쪼가리 일들까지 전기에 거창하게 한 줄 큼직하게 남겨두는 사람이었으며, 다른 국가원수들과의 만남은 단 한 번도 빼놓지 않고 기록했던 자인데, 어째서 하필이면 옐친과 함께 영토 국경에 서명한 민족 사직과 관련된 이 중대한 사건만 쏙 빼먹었단 말인가?
미국으로 망명한 민주화 운동 인사 우판(伍凡)은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이것을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보건대, 중국과 러시아가 국경 조약을 체결할 시점에 이르러 그는 러시아 대통령 옐친과 조약을 체결하고 중국 북방의 영토, 무려 150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큰 면적의 땅을 러시아에 고스란히 갖다 바쳤습니다. 그는 가장 큰 매국노이며, 게다가 이 일을 전국에 공표하지도 않았고 중공 당내에 널리 전하지도 않았습니다.”
장쩌민이 전기를 통해 자신에게 금칠을 하려고 끌어다 쓴 어휘들 가운데 가장 출현 빈도가 높은 것은 책 전체에 가득 찬 ‘애국(愛國)’이란 두 글자였다. 심지어 그가 일제 괴뢰 대학에 다녔던 그 시절의 역사 제목조차 ‘나는 애국자’라고 붙여놓았다. 기본적인 사실 하나는 장쩌민의친부가 일제에 부역해 일하던 매국노였다는 점이다. 장쩌민이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후의 일생 동안, 심지어 그가 남에게 쓰게 시킨 전기 속에서조차 그의 친부 이야기는 입에 올리기도 겁을 내며 전력을 다해 회피했고, 고작 “친부는 1973년에 사망했다”라는 달랑 한 줄만 남겨두었을 뿐이다.
앞서 장쩌민이 13살 때 이미 사망한 공산당원 숙부 장상칭에게 양자로 입적되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장쩌민이 21살에 대학을 졸업했으니, 13살부터 21살까지의 이 ‘양자로 들어간’ 8년의 기간 동안 과연 누가 장쩌민을 먹여 살렸는가? 장상칭의 딸 장쩌후이가 쿤에게 말한 바에 따르면 그녀의 가족은 “끝없는 빈궁과 허기” 속에서 살았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과연 누가 장쩌민에게 비싼 학비를 대주어 귀족 중학교와 난징 중앙대학을 다닐 수 있게 했으며, 누가 그 혼란스러운 전쟁 통에 물가가 미친 듯이 치솟던 시절에 악기 연주와 바둑, 서예와 그림을 배울 수 있도록 허락했으며, 누가 그로 하여금 졸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상하이에서 미국식 지프차를 몰며 미친 듯이 쏘다니게 만들어 주었단 말인가(쿤의 책에 언급된 내용들임)? 이 20여 년 동안 그를 키우고 먹여 살린 이는 과연 그의 매국노 친부가 아니란 말인가?
참고 문헌:
[1]吕加平:关于江泽民的“二奸二假”和政治诈骗问题与要求调查的呼吁
(https://www.epochtimes.com/gb/10/1/9/n2781579.htm)
[2]《江泽民其人》,大纪元时报编辑部。博大出版社,2005年9月出版。ISBN1932674233
[3]《江泽民传》,杜林着,杨鸣镝译。明镜出版社,1999年3月出版,ISBN1-896745-97-0
[4]《他改变了中国──江泽民传》,库恩着,于海江、谈峥译,上海译文出版社,2005年1月出版。ISBN7-5327-3655-5
《장쩌민의 실체》 공동 집필팀
2012년 5월 첫 발행
(에포크타임스에서 전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