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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 북주(北周) 무제(武帝)가 멸불(滅佛)정책을 시행하여 지옥에 떨어진 이야기

유신우(劉新宇) 정리

[정견망 2002년 11월 13일]

남북조(南北朝)시대에 북주(北周)와 북제(北齊)는 불교가 아주 흥성하였다. 북주를 개국한 황제인 효민제(孝閔帝) 우문각(宇文覺)과 명제(明帝) 우문육(宇文毓)은 아주 경건하게 부처님을 믿었기에 나라가 오랫동안 태평하고 쇠퇴하지 않았다. 도교 또한 이시기에 신속하게 발전하였다.

명제 우문육이 사망한 후에 우문옹(宇文邕)이 북주의 무제로 등극하였다. 그는 북주 효민제(孝閔帝)와 명제(明帝)의 뒤를 이은 세 번째 황제로서 18년(기원후 561∼578)간 재위하였다.

북주의 무제는 정치에 대단한 노력을 기울인 야망이 큰 황제였다. 의지가 굳고 지혜와 모략이 있었으며 자신을 극복하고 정성을 다해 노력하였으며 태만하지 않았고 밝은 통찰력이 있었으나 은혜를 베푸는 데는 인색한 편이었다. 무릇 큰 정책을 시행하거나 명령을 내릴 때도 모두 자기방식대로 했으며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따르지 않았다. 그는 평상시에 검소한 옷을 걸쳤으며 금은보화로 장식을 하지 않았다. 궁궐 안에도 기이하고 화려한 장식이 있으면 바로 철거하도록 명령하였다. 또한 후궁도 겨우 10여명에 불과하였으며 근면하고 겸손하게 아랫사람들을 대하여 스스로 굳세어 쉬지 않았다(自强不息). 그는 나라를 다스리는데 있어서도 예리하고 진취적이었다. 군사훈련에 힘을 기울였으며 걸어서 방방곡곡 산골까지 찾아다닐 정도로 온갖 고생을 겪었는데 모두 일반인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매번 정벌(征伐)전쟁을 할 때마다 다른 병사들의 선두에 섰기에 장수(將帥)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의 성격은 과감하고 결단력이 있어서 큰 일도 단호하게 결정하였는바 천하를 통일하려는 웅심(雄心)이 있었다.

무제는 생각하기를 “백성들이 부처를 믿고 출가인(出家人)들에게 공양을 하기 때문에 생산(生産)에 전력을 기울이지 않느다. 또한 출가인들은 재산도 없고 생산도 하지 않아 세금도 내지 않기에 국가재정에도 영향을 끼친다.” 그는 이에 불교를 없애기로 결심을 했다. 그리하여 무제는 모든 신하들과 유명한 승려 및 도사(道士)들을 초빙하여 삼교(三敎)의 장단점을 토론하여 우열을 가리게끔 하였다. 그는 불교의 지위를 억압하려는 의도에서 유교(儒敎)를 선두에 세우고 도교(道敎)를 그 다음에, 불교(佛敎)는 맨 마지막에 서게 하였다. 토론회에서 불도(佛道) 양교(兩敎)는 아주 격렬하게 논쟁을 벌였다.

<<속고승전·지현(智炫)전>>에 보면 지현(智炫)이 변론에서 도사 장빈(張賓)을 힘껏 꺽어 버리자 무제는 도교의 단점을 덮어두고 불교가 깨끗하지 않다며 배척하였다. 이에 지현은 “도교의 부정(不淨)이 더 심합니다”라고 답변하였다.

북주 무제는 도사들이 힘써 다투지 않았다면서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불교와 도교 두 종교를 금지한다. 경전(經典)과 불상(佛像)을 모두 없앨 것이며 승려와 도사를 모두 평민으로 환속시킨다.” 이 조서는 반포된 직후부터 바로 시행에 들어갔다. “불상을 녹이고 경전을 불태우며 승려들을 구타하고 탑을 파괴하고…… 보찰(寶刹) 가람을 모두 속인의 주택으로 삼으며 승려들은 흰옷을 입혀 평민으로 환속시킨다.”

이때 촉신주(蜀新州) 과원사(果愿寺)의 승려인 승맹(僧猛)은 수도에 가서 무제와 멸불정책의 부당성을 논(論)하였고, 정애(靜 ) 법사(法師)도 또한 무제를 직접 만나 멸불정책의 잘못을 지적하였으나 모두 밖으로 축출되었다. 의주(宜州)의 승려인 도적(道積)은 다른 7명과 함께 단식하여 목숨을 끊었는데 그 사적(事跡)이 아주 장렬하였다.

건덕(建德) 6년(577년)에 북제(北齊)를 멸망시킨 이후 북주의 무제는 멸불정책을 원래 북제(北齊)의 영토까지 확대 실시하였다. 무제는 친히 북제의 수도인 업성( 城, 지금의 하북성 임장현(臨 縣) 남서쪽 20km 지점 장수( 水)에 인접해있다)에 가서 승려들을 궁전에 불러들인 후 폐불령(廢佛令)을 내려 원래 북제 국경내에서도 멸불할 것을 명령했다. 사원이 훼멸될 위기에 처하였으나 참가한 500여명의 승려들은 모두 머리들 숙이고 명령을 듣고 있었는제 오직 혜원(慧遠) 화상만이 소리를 높여 항변하였다.

“폐하! 지금은 권력을 믿고 계시지만 삼보(三寶, 불법승(佛法僧)을 말한다)를 파괴하시면 곧 사악한 사람으로 간주되어 귀천(貴賤)을 막론하고 아비지옥(阿鼻地獄, 불교에서 말하는 18층 지옥의 이름이다)에 떨어지게 되는데 폐하께서는 두렵지 않으십니까?”

무제가 이 말을 듣고는 매우 화가 나서 두 눈을 부릅뜨고 화상을 바라보면서

“짐은 단지 백성들이 편안하다면 지옥의 고통이라도 사양하지 않겠다.”

혜원화상이 반박하면서 “폐하께서 사법(邪法)으로 사람들을 인도하여 지금 고업(苦業)을 짓고 있으니 백성들도 모두 폐하와 같이 지옥에 떨어질 터인데 그들이 어디에 즐거움이 있겠습니까?”

무제는 이 권고를 듣지 않고 폐불정책을 원래 북제땅까지 확장하여 실시하였다. 결과적으로 4만여 개의 사찰이 모두 왕공(王公)들의 집으로 하사되었고 일체 경전이나 불상이 불더미 속으로 들어갔다. 사원의 재산은 모두 관(官)에 귀속되었으며 승려들은 칙령에 의해 평민으로 환속되었다.

오래지않아 무제는 몸에 악질(惡疾)을 앓게되어 전신이 문드러지다가 죽었다. 새로운 황제인 주정제(周靜帝)가 등극한지 3년도 채 되지 않아 황제가 양견(楊堅, 수(隨)나라를 세운 개국황제이다)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었고 북주(北周)는 이로써 멸망하였다.

수나라 황제가 새로 나라를 세운지 11년째 되던 해에 대부시승(大府寺丞) 조문창(趙文昌)이 갑자기 죽었는데 오직 심장부위에만 온기(溫氣)가 남아있었다. 집사람들이 감히 염(殮)을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한참 후에 다시 소생하였다. 그는 소생한 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처음에 죽었을 때 어떤 사람이 나를 염라대왕에게 끌고 갔는데, 염라대왕이 내게 “너는 일생동안 무슨 좋은 일을 했느냐?”라고 물었다. 나는 “저는 집안이 어려워서 특별히 공덕(功德)을 세운 일이 없고 단지 매일 근면하게 불경을 묵념했을 뿐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염라대왕이 이 말을 듣고는 합장을 하며 머리를 숙이고는 찬양하면서 “아주 훌륭하십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염라대왕은 사람을 파견하여 나를 남문(南門) 밖으로 나가게 해주었다. 입구에 도착했을 때 무제(武帝)가 문간방안에 있는 것을 보았는데 3겹이나 되는 족쇄를 몸에 두르고 있었다.

그는 내게 “당신은 우리나라 백성 같은데 잠시 이곳에 왔다가면 내가 할말이 있소이다.”라고 하였다. 나는 즉각 절을 하고 무제를 배알했다.
무제가 “나를 아는가?”하고 묻기에
“저는 과거에 폐하의 시위(侍衛)였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무제는 곧 “과거에 내 신하였다면, 지금 돌아가서, 나를 대신하여 황제에게 말해주게나. 내가 지은 허다한 죄에 대해 모두 능히 명확히 설명할 수 있었지만 단지 불법을 없앤 무거운 죄만은 벗어날 방법이 없다고. 바라건데 수나라 황제께서 나를 위해 자그마한 공덕을 세워주셨으면 하네.”라고 말했다.

남문 밖을 나가기 위해 기다리고있는데 한사람이 똥통 속에 머리만 남긴 채 잠겨있는 것을 보았다. 길가의 사람에게 물으니 바로 진(秦)나라의 대장이었던 백기(白起)가 이곳에 잡혀와서 아직 죄를 다 갚지 못한 것이라고 하였다.

문창은 집에 돌아온 후에 곧 부활하였다. 이에 곧 황상(皇上)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설명 드리니 황제가 천하사람들에게 명령하여 사람마다 돈을 약간씩 내어 무제를 초도(超度)하기 위한 법사(法事)를 베풀 자금을 마련하게 하였다. 당시 3일 동안이나 큰 제사를 치렀는데 이 일이 수사(隨史)에 기록되어있다.

후기: 지금 중국대륙에서 고금(古今)의 모든 고문방법을 총 동원하여 법륜불법(法輪佛法) 수련생들을 박해하고 있는 사람들은 단지 18층 지옥뿐이 아니라 몇 백층, 몇 천층, 만만(萬萬)층 지옥에 떨어져도 지나치지 않다.

자료내원 : 《태평광기(太平廣記)》, 《구도석도(九都釋道)》, 《중국에 영향을 끼친 100가지 사건(影向中國的100次事件》 등을 참조하였다.

발표 시간 : 2002년 11월 13일
문장 분류 : 중국고대문화>도덕예의
원문 위치 : http://zhengjian.org/zj/articles/2002/11/13/1919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