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 상룡(翔龍)
[정견망] 명나라 13릉은 북경 창평(昌平)구 천수산(天壽山) 아래 40평방킬로미터의 작은 분지에 있다. 이 땅이 황릉으로 선택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풍수 고사가 있다.
영락(永樂) 7년(1409년) 명나라 성조(成祖) 주체(朱棣)가 문무대신을 이끌고 북방을 순시할 때 풍수가를 몇 명 데리고 가서 백년 후의 능의 자리를 고르려 했다. 이 날 창평현(昌平縣) 용모장(龍母莊)에 도착했을 때 마을에 어떤 집에서 결혼 잔치를 하는 것을 보았다. 성조는 속으로 생각했다. ‘오늘은 길일(吉日)도 아닌데 어떻게 결혼식을 하지?’ 그래서 멈추고는 그 집에게 물어보았다. 그래서 이 마을 스님인 요광효(姚廣孝)가 선정한 날임을 알았다.
성조는 사람을 시켜 요광효를 찾아가 왜 이 날을 잡아주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요광요가 대답했다. “오늘은 확실히 길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반드시 귀인이 올 것이라고 점을 쳤습니다. 그러니 용호상박하면 흉살 귀신은 자연히 물러갈 것이니 이것을 봉흉화길(逢凶化吉-흉한 것이 길한 것으로 바뀌는 것)이라고 합니다.”
성조는 그가 자기의 신분을 간파한 것을 보고 고인(高人)임을 알았다. 그래서 그를 선릉후(選陵候 능을 선정하는 벼슬)에 봉해 함께 능지를 보러다녔다.
능지를 선택하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요광효가 능지를 찾는데 2년을 뛰어 다녔다. 처음에 몇 군데 아주 좋은 풍수를 보았으나 선택하지 못했다. 가장 먼저 선택한 곳은 돼지 도살장을 하던 곳이었는데 성조의 성이 주(朱)인데 발음이 돼지 저(豬)와 같아서 도살장으로 간다는 뜻이니 길하지 않았다. 또 낭아곡(狼兒穀)을 찾았는데 돼지 옆에 늑대(狼)가 있으니 더욱 위험했다. 그래서 연가대(燕家臺)를 찾았는데 연가(燕家)는 바로 안가(晏駕-황제가 붕어한다는 뜻)와 발음이 비슷하여 역시 안됐다.
최후에 황토산(黃土山)이 있는 곳을 찾았는데 이곳은 동서북 삼면에 산이 우뚝 솟아있고 남쪽은 망산(蟒山)과 호욕산(虎峪山)이 서로 대치해서 있는데 용과 호랑이가 대문을 지키고 있는 모습이었다. 중간에 굽은 물로 둘러 싸여 있어 물이 맑고 수려했다. 산간에는 명당이 넓고 여러 산들이 문을 봉하듯이 막고 있으며 중간에 물과 땅이 깊고 두터워 확실히 지극히 좋은 땅이었다. 일부 풍수 선생들은 각자 자기의 재지를 발휘해 온갖 그럴듯한 말을 동원하며 망산과 호산이 청룡백호이며 능을 잘 지킬 수 있다고 말했다.
성조는 요광효에게 물었다 “이 땅에 능을 선택하면 나의 몇대 자손까지 매장할 수 있겠소?”
요광효는 “이곳은 산이 밝고 넓으니 바람을 간직하고 기운을 취하니 만세까지 매장할 수 있습니다(萬紫重孫).” 사실 이것은 은어로서 만력황제(萬曆皇帝)의 손자인 숭정제(崇禎皇)가 되면 명나라가 멸망한다는 뜻이었다. 성조는 이 은어를 이해하지 못하고 매우 기뻐하며 어지를 내려 이곳 80리 구역을 능 지역으로 금하고 황산을 천수산으로 개명해 능을 지으라고 했다.
성조 주체의 능묘는 이곳 정중앙에 위치해 있고 기타 능묘는 다 같이 산에 의지해 지었다. 부채꼴 모양으로 나뉘어 있으며 동서북 삼면에 산기슭에 체계를 갖추고 규모가 광대하며 기세가 드높은 건축물이다. 여기에 명나라 13명의 황제가 매장되어 있기 때문에 흔히 13릉이라 부른다.
원래 왕조를 바꾸는 일은 이미 하늘에서 정해놓은 것으로서 요광효가 은어로 말한 것처럼 명나라 13릉은 숭정제를 끝으로 마지막임을 예시했으며 13릉 묘역 내의 묘지에 숭정제를 매장한 후 다시는 다른 황제를 안치하지 않았다.
마치 요광효가 명나라의 멸망을 말한 예언처럼 중국의 역사는 각 조대(朝代)가 변하려 할 때는 예언이 있다. 귀주(貴州) 망당석(亡黨石) 같은 것은 중국공산당이 필연코 망한다는 것을 예언했는데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 공산당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남은 시간이 많지 않으니 빨리 중국 공산당의 조직을 퇴출해 순장당하지 말아야 한다.
발표시간: 2012년 7월 28일
정견문장: http://www.zhengjian.org/node/1120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