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 용흔(容欣)
【정견망】
북경 서산(西山) 과가탑(過街塔) 입구 서쪽에 공터가 하나 있다. 지금은 흐트러진 바위와 잡초 더미 옆에 건륭(乾隆 1735-1796) 10년에 세운 비석 하나가 쓸쓸히 서 있다. 비록 온전치 못한 비석이긴 하지만 남아 있는 비문에 따르면 서산 108곳의 탄광에서 절을 중수하는데 돈을 기부했다고 한다.
마을 노인들에 따르면 이 곳에는 과거 “석불사(石佛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특이한 것은 이 절에서는 석불(石佛)이나 다른 불상(佛像)이 아닌 검은 석탄 덩어리를 모셨다고 한다. 또 이 석탄에는 몇 줄의 붉은 글씨가 있는 데 강희제의 혈서라고 한다. 때문에 이 돌을 “어혈석(禦血石 역주: 황제의 혈서가 쓰여진 돌)” 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렇다면 대체 왜 이곳 서산에 석불사를 세웠고 또 “어혈석”을 모시게 되었을까? 여기에는 강희제가 몰래 민간을 시찰한 일화가 숨어 있다.
주지하다시피 강희제(康熙帝)는 청나라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성군(聖君)이다. 겨우 8살에 즉위해 재위 기간에 삼번(三藩)의 난을 평정했으며 대만을 병합하고 준가르의 반란을 세 차례에 걸쳐 정벌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남침을 막았다. 문화적으로도 《고금도서집성》과 《강희자전》 등을 편찬했다. 그는 정사에 부지런했고 백성을 사랑했으며 지혜와 마음을 다해 태평성대를 이뤘다. 그의 재위 이후 옹정제, 건륭제로 이어지는 시기는 청나라의 최전성기에 해당하며 역사에서는 “강건성세(康乾盛世 역주: 강희에서 건륭에 이어지는 태평성대)”라고 부른다.
사실 명나라 말년에 이르러 전국적으로 백성들의 원성이 높았고 도처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당시 명나라 황제는 농민들이 북경을 포위하면 겨울에 석탄이 부족해질 것을 두려워하여 황궁 주위의 경산(景山) 일대에 석탄을 저장하려 했다. 때문에 황제는 돈 있는 사람들에게 사설 탄광을 운영해 멋대로 서산의 석탄을 채굴하도록 허락했다. 단 채굴한 석탄은 반드시 황실에 팔도록 하고 경산에 운반하되 다른 곳에는 팔지 못하게 했다. 서산 광산은 수지가 맞는 사업이었기 때문에 1년이 못 되어 과가탑 주변에 수십 개의 작은 탄광들이 생겨났다.
서산의 석탄은 크고 작은 수레 및 낙타 등에 실려 끊임없이 북경 시내로 들어와 경산에 쌓였다. 사람들은 경산을 “석탄산”이라 불렀다.
서산 탄광 업자들은 황제의 은혜로 큰돈을 벌었지만 광부들의 생활이나 생사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리하여 광부들은 모두 수척해지고 피골이 상접해졌다. 게다가 작업환경이 안전하지 않아 사흘마다 한두 번씩 사고가 났으며 갱도에 깔리거가 질식되어 숨지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탄광에 들어가는 사람이 천이면 나오는 사람은 오백”이라고들 했다. 팔다리 부러지고 평생 불구가 된 사람은 그래도 행운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런 광부들은 너무나 견딜 수 없어 사람들이 상의한 끝에 단결하여 어느 날 밤 전부 서산에서 도망가서 다른 살길을 찾아 떠났다.
서산에 살던 사람들이 모두 떠나 석탄을 캐지 못하게 되자 황궁의 석탄산도 더는 쌓이지 않게 되었다. 이에 황제는 새로운 규정을 만들었다.
“각종 범죄를 저지른 자들 중 서산에 가서 채굴을 원하는 자는 감옥에 들어가지 않아도 되며 설사 죽을 죄를 지었더라도 더는 추궁하지 않는다.”
이렇게 되자 각지의 죄수들이 살기 위해 서산으로 달려와 광부가 되었다. 그러나 탄광 주인은 도망가는 것을 막기 위해 그들을 탄광 속에 가두어 살게 하는 비참한 비인도적인 일이 일어났다.
나중에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선 후 경산에서 더는 석탄을 운반하지 않았지만 죄수들이 광부가 되어 탄광에 갇혀 사는 일은 여전히 적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강희제가 이 이야기를 들었다. 그곳에서 희생되는 사람이 많고 그야말로 인간지옥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강희제는 직접 가서 조사해보기로 했다. 그는 민간인으로 분장하고 말을 타고 서산에 올라가 남몰래 과가탑을 방문했다. 몇몇 새로 온 죄수들을 따라 굴에 들어가 본 황제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곳은 시체가 썩는 냄새가 진동했고 등불을 들어 보니 갱도 옆에는 대퇴뼈와 해골로 가득 차 있었다. 강희는 마음속으로 두려움이 일어나 생각했다. “이곳에서 죽은 사람들도 모두 청나라 백성이 아니더냐, 내 빨리 자금성으로 돌아가 이곳의 문을 닫도록 해야 겠다.”
강희는 작은 석등(石燈)을 들고 갱도 입구로 기어 올라갔다. 그러나 그는 이곳이 사람을 가두는 곳으로 석탄만 나올 수 있을 뿐 사람은 나오지 못하는 곳임을 알지 못했다. 광부들은 모두 이곳에서 일상생활을 했으며 한걸음도 떠날 수 없었다. 강희는 굴에 들어가기 전에 채찍에 얻어맞았고 누군가의 발에 채여 아래로 굴러 떨어지기도 했다.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는 어떻게 하면 성지(聖旨)를 써서 대신들이 와서 자신을 구하게 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탄광 속 어디에서 문방사우를 찾을 수 있으며 누가 그를 대신해서 성지를 전해줄 수 있겠는가? 가는 옆에 큰 석탄 덩어리가 있는 것을 주의하여 이를 악물고 중지를 깨물어 선혈로 석탄에 한수의 시를 썼다.
真龍被困關門窯,
過街塔下好心焦。
血染煤石傳聖旨,
快快還我大清朝。
진룡이 탄광에 갇혀있다
과가탑 아래에서 초조하구나
피로 석탄에 성지를 전하노니
빨리 나를 조정으로 돌려보내라
낙관은 “강희어혈제기(康熙禦血題記 역주: 강희황제가 피로 쓴 제목)”라고 적었고 혈서를 다 쓴 다음 강희는 기절했다.
한편 황궁에서는 황제가 사라지자 대신들이 안절부절 했다. 도처에 사람을 보내 찾아보다가 마침내 피로 쓴 석탄 덩어리를 발견했다. 이들은 비로소 황제가 서산 탄광에 갇힌 것을 알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급히 서산으로 병력을 파견했다. 팔기군(八旗軍)이 탄광을 부수고 주인을 체포한 후 탄광을 뒤져 갱도 내에서 강희제를 구출했다.
강희는 이후 성지를 내려 서산의 굴들을 영구 봉쇄했고 또 죄가 많은 업주들은 감옥에 보내거나 참수했다. 또 이후 죄수들을 광부로 삼게 한 조항을 취소시켰다. 대신 황실에서 직접 사람을 파견해 탄광을 경영하게 했다.
이에 감격한 사람들은 과가탑 서쪽 석불사를 세우고 “어혈석”을 모셔 강희제가 목숨을 돌보지 않고 백성들의 고생을 돌봐준 일을 기념하게 되었다. 때문에 과거 이 절은 규모는 작지만 매우 번성하던 사찰었다.
참고자료
1. 《정설청조12제(正說清朝十二帝)》,閻崇年,中華書局出版社 .
2. 《청조의고사(清朝的故事)》,朱鷹,北京燕山出版社 .
3. 《중국고대사(中國古代史)》全一冊(第111頁引言第三行,人民教育出版社出版) .
4. 《중국고대사(中國古代史)》 全一冊(第137頁,人民教育出版社出版) .
발표시간: 2014년 8월 14일
정견문장: http://www.zhengjian.org/2014/08/14/134739.%E5%BA%B7%E7%86%99%E7%9A%87%E5%B8%9D%E5%92%8C%E2%80%9C%E5%BE%A1%E8%A1%80%E7%9F%B3%E2%80%9D%E7%9A%84%E6%95%85%E4%BA%8B.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