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견망】
혜가(慧可 487-593년)는 승가(僧可)라고도 하는데 속성은 희(姬), 이름은 광(光)이었다. 호는 신광(神光)이다. 하남 낙양(洛陽) 호뢰(虎牢) 사람이다. 혜가는 중국 선종(禪宗)의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로 흔히 선종의 이조(二祖)로 추존된다. 107년을 살았고 나중에 무고를 당해 관부의 박해로 사망했다.
소년 시절 혜가가 유생일 때 온갖 책을 두루 읽었고 매우 총명했다. 출가 후 숭산 소림사에서 달마를 스승으로 모시고 선(禪)을 수행했다. “한쪽 팔을 잘라 법을 구한다(斷臂求法)”는 일화의 주인공이 바로 혜가다.
천평(天平) 초년(534년) 혜가가 당시의 업도(鄴都 지금의 하북성 한단 임장현 부근)에 왔다. 북제(北齊) 시기 업도에는 모두 4000개의 사찰이 있었고 승려만 8만 명이 넘었다. 가히 북방 불교의 중심지라 할만 했다. 혜가는 늘 업도와 위(衛) 사이에서 활동했다.
북주(北周) 무제(武帝)가 멸불(滅佛)운동을 시작한 후 300만 명의 승려를 환속시키고 일만 여 곳의 사찰과 수많은 불상을 파괴했다. 종교박해를 피하기 위해 혜가는 곧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나중에 무제가 사망한 후 다시 소림사로 돌아갔다. 589년 혜가는 다시 업도로 돌아와 선종학설을 널리 펼쳤다.
혜가는 수나라 초기(개황 9년) 한단 성안현(成安縣) 광교사(匡教寺)에 와서 선종학설을 가르쳤다. 당시 이곳에서 멀지 않은 성산사(聖山寺)에 변화(卞和)라는 승려가 있었는데 역시 불학을 강의하고 있었다. 선종 학설은 세간의 철학과 가까웠기 때문에 혜가의 강의를 듣는 사람이 점점 많아졌다. 심지어 변화의 많은 제자들도 앞 다퉈 혜가가 있는 곳으로 가서 강의를 들었다. 변화는 이에 광교사 주지에게 혜가를 쫓아내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주지가 거절하자 성안현 현령 적중간(翟仲侃)에게 혜가가 이단사설(異端邪說)을 퍼뜨리며 사람들을 모아 반역을 꾀한다고 무고했다.
그는 과거 북위(北魏)에 법경(法慶)이라는 승려가 있었는데 사람들에게 대승불교를 가르친다는 구실로 사람들을 끌어 모아 반역을 꾀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지금 혜가가 스스로를 대승이라 부르는데 사실은 반역을 하려는 것이다. 이에 현령은 혜가를 체포해 법을 위반했다며 매를 때렸다. 또 수문제(隋文帝)에게 모함해 혜가가 옳지 않은 학설을 퍼뜨렸으며 모반을 기도했다고 말했다. 마침 수문제는 새로 왕조를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아 대중들에게 변고가 생길까 염려하던 차라 혜가를 참수하라고 명령했다.
이리하여 수나라 개황 13년(593년) 3월 16일 107세의 혜가선사가 한단 동남 12킬로 되는 성안현에서 참수 당했다. 역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혜가가 참수된 후 목에서 흰 우유가 솟아났고 몸은 평소와 같았다고 한다. 현령은 명령을 내려 혜가의 시신을 성 남쪽 황량한 곳에 며칠간 묻지 말고 방치해두라고 했다. 그런데 시신이 부패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기이한 향기가 먼 곳까지 퍼졌다. 현 백성들의 의논이 분분해지자 현령 적중간은 두려움을 느껴 혜가의 시신을 강물속에 던져버리라고 새로 명령했다. 그러나 시신은 도리어 강물 위에 가부좌 하고 앉아서 18리나 역류하여 상류로 올라갔다. 성안현 노촌(蘆村)에 이르러 멈추었고 제자들이 언덕으로 끌어올려 노촌 북쪽에 안장했다. 이곳이 바로 오늘날 성안현 이조촌(二祖村)이다.
혜가의 제자들은 그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온갖 방법으로 조정에 억울함을 호소했다. 수문제는 본래 불교를 신봉하던 사람이라 여러 경로로 알아본 후 후회막급이었다. “이 사람은 진짜 보살이구나.” 이에 전지를 내려 혜가가 피살된 사건을 재조사하고 관원들을 엄중하게 징벌했으며 제사를 지내게 했다. 동시에 그를 정종보각대사(正宗普覺大師)에 봉했다.
당나라 정관(貞觀) 16년 당태종은 위지경덕을 파견해 혜가를 위해 절과 탑을 짓고 사리를 봉안하는 공사를 맡겼다. 송나라 인종(仁宗) 때는 사찰에 “광자선원(廣慈禪院)”이란 명패를 하사했다. 송나라 철종 때는 “원부사(元符寺)”라는 이름을 내렸다.
하지만 1949년 중국이 공산화 된 후 중공 무신론자들이 불상을 부수고 절을 점령했다. 그들은 혜가가 설법했던 광교사를 열사사당으로 바꾸었다. 1966년 문화혁명 기간에는 혜가선사의 사리를 안치한 원부사를 다 해체 철거했다. 중공 문물보관소는 원부사 지하궁의 혜가의 관을 열어 혜가의 진신사리를 훔쳐갔다.
중공이 권력을 잡은 기초는 무신론인 반면 중화민족의 뿌리는 신전문화(神傳文化)다. 때문에 중공은 필연코 신과 부처가 사람들의 마음속에 뿌리내리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불법(佛法)을 박해하는 일은 전부 중공이 저지른 것으로 중공이 바로 마교(魔教)이다.
출처: 명나라의 만력 연간 《성안현지(成安縣志)》, 《조당집(祖堂集)》 , 《역대법보기(曆代法寶記)》
http://www.zhengjian.org/2015/11/25/149488.禪宗二祖因何死在邯鄲.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