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석방행
【정견망】
하상주(夏商周) 시대의 매우 큰 특징은 바로 청동기의 응용과 발전이었다. 《혜안식보(慧眼識寶) (2)》 31페이지에는 “치우가 병기를 만든 일과 황제가 솥을 만든 일은 고증에 근거하면 모두 지금부터 5-6,000년 전이다. 고고학적 발견 역시 중국에서 청동의 제련 및 청동기 주조가 발명된 것이 황제(黃帝) 시대였음을 증명한다.” 황제는 형산(荊山)에서 세 발(천지인 삼재를 상징) 달린 솥을 주조한 후 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이 ‘솥’은 사람들에게 나중에 방사들이 연단에 사용한 화로와 유사한 느낌을 준다.
대우가 치수에 성공한 후 구리를 채집해 아홉 개의 솥[구정(九鼎)]을 만들어 각각 구주(九州)를 진압했다. 솥에는 정(正)을 받들고 사(邪)를 물리치는 천신(天神)과 사람을 해치는 도깨비(鬼魅) 형상을 새겨놓았다. 사람들에게 이것을 단단히 기억해 선악을 잘 구별하게 하려던 것이다. 아울러 진귀한 금수 등의 도안을 새겨 각지의 풍속과 산물을 표시했다. 이 솥은 매우 영기가 있어서 스스로 구름을 만들 수 있었고 만일 이상한 일이 있으면 스스로 소리를 내었다. 이때부터 ‘솥’은 통치자의 권위의 상징이 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구정은 3왕조에 걸쳐 전해졌다. 《전국책》에 따르면 당초 주나라 무왕이 솥 하나를 도성으로 가져왔는데 구만 명의 사람을 동원했다고 한다. 9개 솥이면 81만 명의 사람이 필요했다. 물론 이 기록을 다 믿을 수는 없는데 위아래 문맥을 보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문장 제목이 “진나라 흥사가 주나라에 와서 구정을 구하다.” 인데 진나라가 주를 공격하고 주나라 천자가 있던 곳에서 구정을 찾아 천하의 주인임을 인가받으려 했다. 천자는 안솔(顏率)이라는 사람을 제나라로 보내 병사를 빌리며 아울러 제나라에게 구정을 주기로 약속했다. 그래서 제나라에서 군대를 파견했고 진나라 군은 물러갔다. 그러나 주의 천자는 구정을 제나라에 주고 싶지 않았다. 안솔은 제나라 왕에게 이 솥은 매우 무겁다고 말했다. 그래서 “무왕이 9만 명의 인력으로 솥 하나를 움직였다”는 설이 생겨난 것이다.
나중에 전설에 따르면 이 몇 개의 솥은 야심가들과 제왕에게 불만을 품고 동시에 주 왕실이 쇠약한 것을 보고 스스로 날아서 사수(泗水) 중에 날아 들어가서 종적이 없어졌다고 한다. 진시황과 한무제가 끌어 올리려 했으나 실패했다고 한다.
만일 하상주 시대 배경으로 구정의 일을 본다면 구정은 절대 일반적인 기물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것을 보통 청동기로 보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수에 은닉하여 아마 장래 사람의 도덕이 되돌아 올라와 아주 좋은 시기를 기다려 우연한 기회에 사람들에게 재차 발견될 수 있다. 그때가 되면 구정이 포함한 신기한 힘과 신명과 소통하는 수승함을 다시 한번 세인들에게 드러낼 것이다.
하상주 시대의 청동기는 일반적으로 예기(禮器-천신, 하신 또는 조상 등에 지내는 제사용)로 사용했다. 사회에 실용적으로 사용했으며 예컨대 수레를 만들거나 물건을 넣은 기물에도 사용했다. 또 많은 청동기에는 당시 사람들이 문자를 주조해 일부 일을 기술하는데 사용되었다. 이는 청동기가 구하기 어렵고 진귀한 것임을 더 두드러지게 한다.
한편, 봉선(封禪)이란 제왕이 하늘과 땅에 자신이 천명을 받았다는 일종의 상징을 표명하는 것이다. 동시에 중화의 제왕이 하늘을 공경하고 천명을 아는 태도를 나타낸다. 《사기》 봉선서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환공이 “과인은 북으로는 산융(山戎)을 정벌하고, 고죽(孤竹)을 지났으며, 서로는 대하(大夏)를 정벌하고 멀리 유사(流沙)를 건넜으며, 온갖 위험을 감수하고 비이산(卑耳山)에 올랐소. 남으로는 소릉(召陵)까지 정벌했고 웅이산(熊耳山)에 올라 장강(長江)과 한수(漢水)를 조망했소. 반란을 평정하는 군사적 회맹이 3번, 그 외 평화적인 회맹 6번 했으니 모두 9번이나 제후들을 소집해 천하를 바로잡았으나 여러 제후들이 나를 거역하지 않았소. 옛날 3대에 천명을 받아 제왕이 된 것과 어찌 다르단 말이오?”라고 했다.
관중은 말로는 환공을 설득시킬 수 없음을 알고, 제단설치를 구실로 대며 말했다. “옛날에 봉선할 때에는 호상(鄗上)의 기장과 북리(北里)의 벼로 하늘에 제사를 지냈고 장강와 회수 사이에서 자라는 귀한 띠풀로 자리를 엮었습니다. 또 동해에서 바친 비목어(比目魚)와 서해에서 바친 비익조(比翼鳥)가 있었고, 또 스스로 바친 상서로운 물건이 15종이었습니다. 지금 봉황과 기린도 오지 않았고 좋은 곡식도 생산되지 않았으며, 들판에는 쑥과 잡초만 무성하며 흉조인 올빼미만 나타날 뿐입니다. 그럼에도 봉선하려 하신다면 가능하겠습니까?”
이에 환공은 봉선의식을 중단했다.
백여 년 후 공자(孔子)가 육예(六藝 육경을 지칭)를 논술했다. 경전에서는 성(姓)을 바꾸고 새로 왕이 되어 태산에서 봉하고 양보에서 선한 왕이 70여 명이었다고 간략히 기록했다. 하지만 의식에 사용했던 제기 음식 등은 기록이 없는데, 아마 말하기 곤란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사람이 체제(諦祭, 천자가 시조의 묘에 올리는 제사)에 대해 물으니 공가는 “모르오. 만약 체를 잘 안다면 천하가 손바닥을 보는 것처럼 쉬울 것이오.”라고 했다.
시경(詩經)에는 “주왕(紂王)이 재위에 있을 때에 문왕(文王)이 천명을 받았지만 영향력이 태산에까지 미치지 못했다. 무왕은 은나라를 멸한 뒤 2년 만에 천하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을 때에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주나라는 성왕 때 이르러서야 제대로 된 정치를 펼칠 수 있었으니 성왕이 봉선을 한 것은 그나마 도리가 있다. 하지만 이후 제후국의 신하가 집권해 노나라의 실권자 계씨(季氏)가 태산에서 제사를 지내자 공자가 이를 비난했다.”라고 하였다.
한편 진시황이 태산에 가서 봉선할 때 마음이 겸허하지 못한 바가 있어 큰 비를 만나 어느 소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했다. 나중에 진시황이 이 소나무에 오대부란 관직을 내려 ‘오대부송(五大夫松)’으로 봉했다. 후인이 오해하여 소나무 4그루를 더 심어 5란 숫자를 채웠다.
태산은 고도로 보면 그리 높은 것이 아닌데 무엇 때문에 제왕은 그곳에 가서 봉선하려 했을 까? 어떤 사람은 제왕이 태산에 간 것은 그들이 “국태안민”을 기도하거나 어려움이 사라지고 태평이 오도록 미래가 좋아지길 기도하는 것이라고 한다. 나는 이런 것은 표면적이며 실질적인 것은 이렇다. ‘제왕이 봉선을 통해 하늘을 대신해 인간세상을 다스리는 기회를 더 소중히 하라는 것이다. 사람과 하늘 사이의 연결 통로를 까는 것이다.’ (태산은 옛날부터 제왕의 산으로 불렸으며 산 아래서부터 ‘홍문(紅門)’으로 진입하여 ‘18반’을 지나 마지막에 ‘천가(天街)’에 도달한다. 이 과정은 바로 수련과정을 상징한다.)
지금까지 개괄적으로 일부 중화 역사상 최초 삼 왕조의 일을 써보았다. 아래는 사상쟁명의 춘추 제후들이 다투는 전국시대를 써보겠다.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246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