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석방행
【정견망】
속담에 천하대세는 나뉘어진 지 오래되면 반드시 합하고 합한 지 오래되면 반드시 나뉜다고 한다. 상고시대 하, 상, 서주 세 왕조는 기본적으로 ‘부락 연맹제’에 속했다. ‘왕’은 여러 부락의 수령들이 공동으로 천거해 이루어졌다. ‘왕(王)’ 혹은 ‘천자(天子)’라고 부를 수 있었는데 이때 만약 인자한 정치를 베풀면 천하가 좀 오래 갈 수 있고 백성들의 생활도 상대적으로 더 낫다. 각 지역에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성분들이 많았다. 이때 사람들의 도덕 표준은 비교적 높았다. 사람들은 매우 자율적이며 이런 환경하에 서주시기에 계통적으로 사람이 되고 관리가 되는 규범인 ‘주례(周禮)’가 형성되었다.
이때 지상에 온 신과 지상에서 수련하는 신이 사람의 일에 참여하는 일이 비교적 많았다. 단지 문헌이 적어서 기록된 문헌을 통해 짐작만 할 뿐이다. 이런 것들은 앞선 몇 편에서 말한 내용이니 중복하지 않는다.
많은 이들이 춘추전국 시대를 이야기할 때 동감하는 한 가지가 있다. 즉 이 시대에 “단번에” 중화문명 수천 년의 각종 방식을 다졌다는 것이다. 예컨대 유가, 도가, 법가, 병가, 종횡가, 의가 등의 사상이다. 육국을 통일한 진(秦)이 설립한 군현제도 모두 이후 수천 년 중화문명 발전에 중요한 작용을 일으켰다. 이속에는 신이나 창세주의 심혈이 자연스레 스며들어있다. 비록 ‘단번에’라고는 했지만 사실 역시 상고시대 세 왕조와 그 이전 많은 성인들의 문화계몽에 대한 일종의 총결적인 집중 반영과 발전이다.
이 시대의 출현을 야기한 일은 이미 있는 문헌으로부터 우리가 보면 다음 몇 단계로 나눌 수 있다.
먼저 하늘은 지진으로 경고한다. 《사기. 주본기》에 근거하면 유왕 3년 서주 삼천에 모두 지진이 있었다. 백양보는 “주나라가 장차 망할 것이다. 무릇 천지의 기운은 그 순서를 잃지 않는다. 만약 그 순서가 어긋나면 백성이 혼란해진다….”라고 했다.
또 지상에는 미녀가 “나라를 혼란케 한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망국의 죄가 한 여인(가령 주나라 유왕의 포사)에 귀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사실 그녀는 주나라를 망하게 할 사명을 지니고 온 것이다.
《사기. 주본기》 중에 포사의 내력이 매우 기이하다고 되어 있다: 하후씨가 쇠약해졌을 때 두 마리 용이 나타났는데 자기는 포 지방의 군주라고 했다. 하나라 임금이 점을 쳐보고 그것의 침을 상자에 담아 남겨놓았다. 나중에 이 상자가 상나라를 거쳐 주나라까지 전해졌는데 아무도 감히 열지 않았다. 주나라 여왕(厲王)에 이르러 열어보니 침이 흘러나왔는데 어떻게 하다가 어느 여인의 태에 들어 나중에 자라서 왕궁에 들어가 후궁이 되었으니 포사라고 했다.
이 기이한 이야기로부터 우리는 두 가지 점을 볼 수 있다.
첫째, 모든 일은 일찍이 배치되어 있다.
둘째 이 두 용과 주 왕조를 안배한 신은 반드시 인연관계가 있다. 무슨 일이든 이유 없는 것이 없다.
이때 만약 주나라 유왕(幽王)이 주나라 선조들의 성덕을 이어받아 덕행을 많이 행하고 백성들을 선하게 했다면 망국의 서막이 열리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유왕은 바로 나라를 망치는 군주의 역할을 맡았을 지 모른다. 그는 하나라 걸왕과 은나라 주왕이 맡은 내용보다 더 풍부하다. 하나라 걸왕과 은나라 주왕은 단지 미색, 미주를 탐하고 자기를 과신하고 백성들에게 악했다 하지만 주나라 유왕은 이런 문제 말고도 장자를 폐하고 서자를 세웠다. (원래 왕후와 태자를 폐하고 포사와 그녀의 아들을 세운 행위는 예법에 어긋난다. 그 시대인들이 용인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봉화로 제후를 놀린 일”과 아첨하는 사람을 임용한 것이었다. 그래서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이래서 망국의 서막이 올랐다. 원래 왕후 신후씨의 가족은 증(繒)나라, 서이(西夷), 견융(犬戎)족과 연합하여 유왕을 공격했다. 주유왕이 이때 다시 봉화를 올렸으나 아무도 믿지 않아서 소용이 없었다. 결과적으로 연합군은 유왕을 여산 아래서 죽이고 미인 포사는 포로로 잡혔다. 서주의 운명도 이것으로 끝났다. 이것이 주 유왕 21 년(기원전 771년)의 일이다.
한편 원래 태자 의구가 신후 및 다른 제후들의 옹립하에 왕위를 계승하니 이가 바로 평왕(平王)이다. 그는 견융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도성을 호경(鎬京)에서 동쪽인 낙양(洛陽) 부근으로 천도했다. 이로부터 동주(東州)가 시작되었다.
동주는 평왕부터 천자의 위신이 조금씩 내려갔고 제후들의 권리는 조금씩 강해졌다.
역사에서 말하는 춘추시대는 일반적으로 노나라 사관이 편찬한 《춘추》에서 내원하는데 (이 책은 후인들은 처음에는 공자가 편한 것이라고 했는데 나중에 노나라 사관이 편찬한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공자가 세상을 떠난 다음의 일이 기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어떤 역사서도 당시에 편찬한 후 나중 사람이 덧붙일 수 있고 공자는 적어도 강의 중에서 이런 문헌을 서술했다) 이 책은 노 은공(隱公) 원년(기원전 722년)부터 시작한다.
후인들은 기술적인 편의상 평왕이 동천한 후부터 노나라 은공에 이르기까지 약 50년도 춘추시대의 범위에 넣는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역사는 노나라 사관이 지은 《춘추》를 시대의 표지로 삼았을까? 내가 보기에 당시 매우 인덕이 높고 사심이 없는 주공 단의 봉지가 노나라였고 주례 문화의 분위기를 비교적 잘 계승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공자가 이곳에서 “주례부흥”을 시작해 어진 정치 등을 선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나라 사관이 쓴 《춘추》가 역사에서 선택받은 것이다.
후인들이 “춘추시대”를 언급할 때 주도 생각하는 것은 유도(儒道 유가와 도가) 사상의 발전과 전파 및 제자백가의 쟁명과 다툼이다. 비록 이따금 제2위로 처해지긴 했지만.
여기까지 쓰니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다. 나중에 맹인 좌구명(左丘明)이 《춘추》에 주를 달아 《춘추 좌씨전》을 만들었다. 무엇 때문에 이 문화를 남겼는가? 내 생각에 사람들에게 ‘사람의 눈으로만 역사를 보지 말고 마음으로 역사를 보아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려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만 표상에 미혹되지 않을 수 있고 비로소 진상과 그 배후의 진실한 원인을 알 수 있다. 풍자적인 의미는 나중에 많은 눈이 좋은 사관들이나 사학자들이 역사를 고쳐 통치자를 위해 봉사한 점이다. 역사의 진실성을 잃어버리고 후세에 위해를 끼쳤다. 공산당이 정권을 잡은 국가는 더욱 심하다.
‘전국시대’라는 설은 원래 서한의 유향(劉向)이 당시에 남겨진 문헌에 근거해 편찬한 《전국책(戰國策)》에서 내원한다. 이 책은 주나라 위열왕(威烈王) 23년(기원전 403년) 진(晉)나라가 한, 위, 조 세 나라로 나누어졌을 때부터(송나라 때 사마광이 편찬한 자치통감도 이 시기부터 시작된다) 진시황이 6국을 통일한(기원전 222년)까지를 기록했다. 전국 시대의 시작 연대에 대해서는 약간의 논쟁이 있지만 여기서는 한 가지 설만 선택한다.
무왕이 주(紂)를 정벌한 시기에 《사기》에서는 “제후들이 약속하지 않고 맹진에 모인 자가 800명이었다.” 비록 당시 8백이란 것도 대략 숫자이지만 당시 제후들이 매우 많았음을 알 수 있다. 후인들이 춘추에 근거해서 쓴 제후국의 명칭의 통계는 124개가 있다고 한다. 주나라 왕실이 소유한 직할 영토는 매우 작았고 이렇게 기타 제후국에 대해 특히 큰 제후국에 대해 지배능력이 매우 작았다.
여기서 우리는 “왕”이란 글자의 변화에 대해 한번 이야기 해보자
갑골문에 따르면 ‘왕(王)’은 원래 ‘도끼’라는 뜻이다. 그것을 들고 산을 쪼개고 길을 만들며 영토를 개척했다. 신하를 상주고 벌하는 사람이 바로 ‘왕’이었다. 이 속에는 또 왕은 신으로부터 이런 용기와 지혜를 부여받은 사람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상고시대에 민심이 아직 완전히 개화되지 않았을 때는 더욱 그랬다. 나중에 계통적으로 상고 문헌을 정리한 춘추시기가 되자 이 글자는 더욱 심각한 의미를 부여받았다. 공자는 “하나로 셋을 꿴 것이 왕이다.”라고 했다. (서한의 대유학자 동중서는 “옛날 문자를 만든 사람은 세 획을 긋고 그 중간을 연결해 왕이라고 했다. 셋이란 천, 지, 인이니 셋을 두루 통하게 하는 자가 왕이다”라고 했다.)
춘추전국 시대에 유행한 것은 ‘금문(金文)’이었고 나중에 진나라가 문자를 통일한 후 개정한 글자체가 ‘소전(小篆)’이었다. 박식하기로 유명한 공자가 이 글자의 최초의 뜻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공자가 살던 시대는 금문의 시대라 금문으로부터 이 글자에 도끼라는 뜻이 있음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에 공자는 “한줄에 셋을 꿰면 왕이다” 것은 이 글자의 드러난 배후의 진상을 말한 것이라고 느낀다. 즉 하늘이 왕을 부여한 본래 뜻은 진정으로 하늘을 이어받아 땅에 받아 중간에서 사람을 화합하는 사명을 이행하며 하늘의 부탁을 완성하며 한 강토의 중생을 관리하는 것이다. 결코 위의 사람에 처하게 하여 마음대로 생사여탈하고 온갖 나쁜 짓을 하라는 것이 아니었다.
‘왕’이란 글자는 공자가 이 뜻을 해독했고 중화 오천년 이 글자의 진정한 의의를 다졌다. 동시에 공자는 하늘이 배치하여 내려와 사람이 되는 이치를 설명한 고층의 생명이므로 그의 해독을 거쳐서 ‘왕’자는 인간세상에서 이런 종류의 깊은 문화적 내포가 있게 된 것이다.
사는 모두 중화문화의 각 방면에 계통적으로 바탕을 깔기 위함이었다. 춘추 이후 하늘이 안배한 일부 지자(智者), 성자(聖者), 각자(覺者)들의 다짐을 거치면서 중화 문화의 각 방면은 비로소 점점 계통적으로 기록되어 후인을 위한 참조가 되기 시작했다.
춘추 시기에 이런 왕들이 출현하여 후세인들이 인식할 수 있는 시야에 들어왔고(상세한 것은 문헌 기록에 있다) 이것은 바로 이 생명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는 것이다. 사람들은 “참새가 비록 작지만 오장이 다 갖춰져 있다”고 한다. 국가 역시 그렇다. 주왕실의 왕권이 각 대 제후국 국군國君의 수중에 내려갔을 때 이 제후왕은 어떻게 이 나라를 다스리는가, 어떻게 백성을 대하는가 보아야 한다. 좀 깊이 말하면 어떻게 이 문화와 역사를 개창하는가를 본다. 당연히 배후에 많은 신의 요소가 있다. 어떤 사람은 많은 신이 참여해 들어와서 그들 자신의 문화를 나타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선택을 받고 역사 창세주의 선택을 받아 장차 통일 왕조시기에 역사 발전에 일종의 바탕이 되기 위한 것이며 더 좀 깊이 말하면 오늘날 사람들이 생명이 되돌아가게 하는 우주대법을 위한 바탕을 깔기 위한 것이다. 이런 것을 말하여 사실 역사의 일체는 이와 같지 않은가 하나도 예외가 없다.
(계속)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2481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