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석방행
【정견망】
우리는 이전 글에서 춘추전국시대의 이름이 《춘추》, 《전국》과 관련이 있다고 했다. 아마 암암리에 이미 이 시대의 특징을 정해놓았을 것이다. 각국의 발전, 병합과 동시에 전적을 정리하고, 각종 학설을 창립, 보급하여 후세 왕조에 발전에 길을 닦았다.
먼저 이 시대에서 후세에 영향이 매우 큰 노자와 공자를 보자.
먼저 노자를 말해보자 문헌 기록을 종합하면 노자는 상나라 양갑(陽甲) 시기에 현묘왕(玄妙王) 리(理)씨의 태에 들었다. 리씨는 표면적으로 오얏을 먹고 아이를 잉태했는데 81년 후에 출생했으며 초나라의 고현 빈향 곡인리에서 출생했다. 출생했을 때 이미 머리가 백발이었다. 면상이 평범하지 않아 “노자의 이마에는 서너 개의 주름이 있는데 해나 달과 같다. 코는 단정하고 뼈가 이중으로 불거져 나왔고 귀에는 세 개의 구멍이 있었다. 아름다운 눈썹에 이마는 넓고 귀가 길며 큰 눈에 이빨이 듬성하며 네모진 입에 두터운 입술을 가졌다.” 성은 이(李) 이름은 이(耳),자는 백양(伯陽),호는 노담(老聃)이었다. 주문왕 시기에 사서를 관리하는 수장사(守藏史)를 지냈다. 무왕 때 주하사(柱下史)가 되었고 성왕 때에 서쪽 진나라, 천축국 등으로 유람을 갔으므로 고(古)선생이라 하였고 그 나라를 인도했다.
강왕 때 다시 주하사로 복귀했다. 소왕 때 서역을 개화하려고 함곡관을 지났다. 관령 윤희가 그것을 알고 도를 얻기를 간청했다. 그래서 천고의 명저 《도덕경》을 남긴 후 윤희와 함께 사막을 건넜다. 목왕 시기에 중국으로 돌아왔다. 공자가 노담에게 예를 물었다(세 차례). 열왕 때 진을 지나 진헌공이 역수를 물었다. 진나라 때 협하의 물가로 내려가서 안기생에게 도를 전했다.
한나라 초기의 기록 중에 매우 뜻깊은 단락이 있다. 한 문제 때의 일이다. 노자가 세상에 나타나자 문제는 사신을 파견하여 도에 관해 물었다. 노자는 “도덕이 존귀하니 멀리서 물어서는 안됩니다.” 황제는 즉시 수레를 타고 그에게 왔다. 황제가 말했다. “이 넓은 천하에 왕의 땅이 아닌 곳이 없고 땅을 이끄는 신하가 왕성(王城)이 아닌 것이 없소. 성중에 사대 부중에서 천자가 으뜸이다. 그대가 비록 도가 있어도 여전히 짐의 백성이니 무릎 꿇을 수 없다면 얼마나 높은가! 부귀빈천인 모두 짐 아래 있다.” 그러자 노자는 즉시 손바닥을 툭 치며 앉은 채 도약하여 허공으로 천천히 솟아올라 구름같이 땅에서 백여 장 위에서 한참 동안 내려다보다 대답했다. “지금 위로는 하늘에 이르지 못하고 중간에는 사람이 아니며 땅에 살지 않으니 어느 백성이오? 폐하는 어찌 부귀빈천을 명령할 수 있소!” 그러자 황제가 가마에서 내려 머리를 숙이고 예를 표했다. 노자는 도덕경을 주었다.
이 단락의 기술로부터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득도한 사람과 제왕은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득도한 사람은 더욱 높은 지혜와 능력으로 일체를 부릴 수 있다. 사람 중의 모든 것은 그들이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말하면 사람의 일체는 전혀 그에게 어떤 제약도 할 수 없다. 이것이야말로 생명 경지의 진정한 차별이다.
노자는 또 한나라 환제(桓帝) 때 천태에 내려와 갈효선에게 상청영보 대동저경을 주었고 순제때 도법을 장도릉에게 전했다. 당고조 때 양각산에 내려와 착한 사람이 되고 선행을 할 것을 말하고 당공이 명부를 받았다. 현종 천보초년에 단봉문에 내려와 황제가 친히 흥경궁에서 맞이했다. 송 정화 2년 화양동천에 내려와서 양선생에게 가구천동보명경을 주었다. 등등 어느 세든 나오지 않은 적이 없고 먼저 겁을 다하도록 행한 다음 나중에 끝없이 상존한다. 숨고 나타남이 헤아릴 수 없으며 변화무궁하며 천인을 널리 제도하는 등 다 말할 수 없다.
노자가 지은 《도덕경》 81편은 도가의 경전이 되었다. 이것은 중화 신전문화의 정수가 되었으며 진귀한 보물이다. 《도덕경》은 표면적으로 보면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고 사람이 되는가 하는 등의 일을 말한 것이다. 오성이 있는 사람은 그중에 수행의 방법을 총결해낼 수 있다. 그것으로부터 ‘도’를 깨닫고 생사윤회 해탈의 목적을 얻을 수 있다. 사람이 표상을 뚫고 그 내포의 실질적인 것을 보아낼 수 있는가 본다. 왜냐하면 그 때에는 진정한 도법(道法)을 직접 명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다시 공자를 말해보자. 공자는 주영왕(周靈王) 21년 경술 10월 경자일 하나라 달력으로는 8월 27일 노나라 창평향(昌平鄉)에서 태어났다. 먼저 태어나기 전에 어떤 기린이 궐내에 옥서를 토했다. 그 책에는 “물의 정기의 아들이 쇠한 주나라를 이어 소왕이 될 것이다.” 공자의 어머니 안씨가 그것을 이상히 여겨 수놓은 끈(인장 혹은 패옥을 묶는데 쓰는)을 기린의 뿔에 묶어 놓았는데 이틀 후 떠나갔다. 회임한지 11개월 만에 태어났다. 탄생하는 날 새벽에 두 마리 용이 방을 맴돌았으며 다섯 노인이 마당에 내려왔다. 안씨는 방안에서 하늘에서 도르레가 내려오는 소리를 들었으며 음성이 들려왔다. “하늘에서 성자를 내려보냈다.” 공자는 독특한 상이 있었는데 소 같은 입술에 호랑이 같은 손바닥, 원앙 어깨, 거북이 등…
공자는 전반생에 치국평천하에 뜻을 두고 늘 정치활동에 종사했고 후반생에는 가르침에 노력했다. 이 때문에 배우는 제자가 70여 명이었다. 선배로서 자로, 염유, 자공 등은 모두 정치에 참여하여 바빴고 후배로서 자여, 자장, 자하, 증참 등은 가르침에 종사했다. “공자가 세상을 떠난 후 70여 명의 제자들은 흩어져 제후를 만나러 여행했으며 크게 된 자는 사부경상, 작게 된 자는 사대부를 가르쳤다. 혹은 숨어서 보이지 않았다” 《사기. 유림열전》
전편에서 우리는 두 번 공자가 박학하다고 언급했는데 여기서 예를 하나 들겠다. 기록에 의하면 공자가 31세 때 제경공이 공자를 초빙하여 공자가 제나라로 갔다. 이때 제나라에 다리 한 개밖에 없는 새가 날아와 전당에 앉아 날개를 펼치며 뛰었다. 제공이 공자에게 묻자, 공자는 “이 새는 상양이라고 하는데 비가 올 징조입니다” 하면서 한가지 동화를 인용했다 결과적으로 잠시 후 하늘에서 큰 비가 쏟아졌다. 경공이 칭찬하며 말했다. “성인의 말은 이 증거를 보면 믿을 만하다.” 하지만 나중에 경공은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공자를 중용하지 않았다.
공자와 그 제자들의 언행을 기록한 《논어》 서문 중에 공자는 학습, 교우 관계, 도덕 수양을 한 후의 ‘즐거움’을 말했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유붕자원방래 불역낙호, 등등) 하지만 오늘의 사람들은 당문화의 영향으로 학습이나 교우 간에 무미건조하고 다투고 싸우며 속이는 일로 가득 차 있으며 근본적으로 즐거움을 말하지 않는다.
공자는 이렇게 자로에게 경고한 적이 있다. “어짐을 좋아하되 배우기를 좋아하지 아니하면 그 폐단이 어리석게 되고, 지혜를 좋아하되 배우기를 좋아하지 아니하면 그 폐단이 방탕하게 되고, 미덥기를 좋아하되 배우기를 좋아하지 아니하면 그 폐단이 해를 당하게 되고, 곧기를 좋아하되 배우기를 좋아하지 아니하면 그 폐단이 푸대접을 당하게 되고, 용감하기를 좋아하되 배우기를 좋아하지 아니하면 그 폐단이 난을 일으키게 되고, 굳세기를 좋아하되 배우기를 좋아하지 아니하면 그 폐단이 방자하게 되느니라.” 이 말에서 ‘배움을 좋아하는 것’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공자는 사학을 일으켜 “가르침에 차별이 없다”는 주장을 펼쳤으며 빈민자제를 받아들여 입학시켰다. 이는 ‘사숙-서당’의 효시라고 할 수 있겠다. 당시에도 다른 사람이 사숙을 열긴 했으나 가장 유명한 것이 공자였다.
그가 출생하기 전 그의 험한 운명은 미리 정해져 있었던 것 같다. 《사기. 공자세가》에 보면 (숙량)흘이 안씨와 야합하여 공자를 낳았다. ‘야합’이란 일반적으로 고대에는 정식으로 아내로 취하지 않은 것을 말한다. 상식적인 이치대로라면 도덕 방면(부자, 군신, 제자 등 관계) 에서 천고의 모범을 떨친 성인이 적어도 출신이 마땅히 광명정대해야 일생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환경에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못했다. 공자는 어려서부터 고생을 겪었으며 나중에 그가 주례를 부흥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일련의 이치를 주장했을 때 어느 군주도 채용하지 않았고 심지어 배제되고 배고픔에 처했다. 이러한 예는 후세에 저명 문인의 운명-세상에 용납되지 않는-을 다졌다.
이백, 두보, 소동파 등등이 다 이러했다. 이것도 아마 인간의 상생상극의 이치가 큰 작용을 일으켜 소위 고험으로 사람을 빚어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닐까 한다. 다른 요소도 있을 것이다.
공자는 자기가 하나의 치국 이념을 선양할 때 《춘추》를 말했고 많은 상고의 역사를 말했다. 예로서 “황제사면”과 “삼백년” 내지 “대우가 방풍씨를 주살하다” 등등 (이런 것은 《국어》등의 서적에 기술되어 있다) 이것은 공자의 박학만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공자는 고금을 꿰뚫어보는 능력이 있음을 설명한 것이다. 만일 과거의 일을 아는 것만이 일종 학문이라면 무엇 때문에 다른 사람은 알지 못했을까? 이것이 관건적인 문제다.
공자가 노자에게 세 차례 예를 물어보았다는 설이 있다. 그럼 우리는 공자가 노자가 있는 곳에 가서 많은 학문만 배운 것이 아니라 더욱이 노자의 ‘가지’와 ‘가르침’을 받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 노자에게 일종 초상적인 능력을 부여받았을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그렇게 많은 지식이 있었을 것이다. 다만 공자 본인이 원래 배치되어 인간이 되는 도리를 보급하는 생명이므로 그는 중점적으로 겉모양은 사람의 각도에서 수행의 각도에 서서 문제를 보거나 신적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다.
노자와 공자의 경력으로부터 우리는 공통점을 볼 수 있다. 모두 역사학을 장악하거나 높이 들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늘 연구자들이 생략하는 문제이다. 춘추 전국과 그 이전의 역사를 보면 ‘사실’만 간단히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고급 생명이 부여한 신기한 역량이 있어서 도를 전하는 사람의 중시를 받아(노자, 공자 등) 그에 쓰인 후 중생을 교화한다. 그런 역사의 일은 많은 것이 신의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만일 경건하게 설명하거나 문자로 쓴다면 신의 점화나 보호를 받을 것이다.
(계속)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2481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