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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우중화 (5): 초시삼조 (2) 홍수기연(洪水奇緣)

작자/석방행

【정견망】

요임금 시대에 시작된 대홍수는 세계적이었다. 지금까지 각 민족에 대홍수에 관한 전설이 다 내려오고 있다. 위난이 겹겹이 겹친 지금 시대에 우리는 매우 재미있는 현상이 있음을 발견한다. 후직(後稷)과 계(契) 두 사람은 모두 대우를 따라 치수를 잘한 신하이다.

순임금과 대우 시대에 후직(後稷)은 농사를 책임졌고 계(契)는 사도로서 인력관리를 책임졌다. 그들은 모두 제곡(帝嚳)의 아들(사실 양자라고 함이 더 합당하다)로 내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후직은 나중에 주(周)나라의 시조가 되었고 계는 상(商)나라의 시조가 되었다. 그리고 하나라의 후예들은 바로 대우의 자손이다. 한편 백익은 나중에 진(秦)나라와 조(趙)나라의 시조가 된다.

《사기》는 선한 덕이 복을 받는 각도에서 해독할 수 있다. “천명은 말하기 어렵고 성인이 아니면 볼 수 없다. 순, 우, 계, 후직은 모두 황제의 자손이다. 황제는 천명을 받아 천하를 다스리며 덕택이 후세에 깊었다. 고로 그의 자손이 모두 천자가 되었으니 하늘은 덕에 대한 보답이 있는 것이다.” 천명은 그 신비한 기원이 있으며 오로지 하늘의 뛰어난 기품을 부여받은 성인만이 마음이 밝고 깨끗할 수 있다.

“황제는 다 합해 25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 14명이 분봉하여 성(姓)을 얻었다. 소호, 전욱, 제곡, 당요, 우순, 하나라 상나라 주나라 군주는 모두 황제의 자손이다. 《산해경》에 따르면 대황북경, 대황서경, 대황동경, 북방의 북융, 서방의 견융, 동방의 동이 모두 황제의 후예다.” 《위키백과 “황제” 편》 채동번의 《중화전사연의》에서 말한 설은 더욱 구체적인데 몽골, 만주족, 장족, 회족이 모두 직접 황제의 후예로부터 나왔다고 한다. (책의 17-18쪽)

우리는, 이 마당이 대홍수를 다스림을 통해 중국 수천 년 역사가 종족을 이어받는 것으로부터 발전해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후대에 “몽골의 원나라, 만주의 청나라가 우리 중화를 멸망시켰다”는 주장이 철저히 거짓임을 보여준다. 모두 황제의 자손인데 무엇 때문에 한족만 중원에 들어올 수 있고 다른 민족은 들어올 수 없단 말인가? 게다가 같은 황제의 자손이 무엇 때문에 각종 부동한 문화와 언어습관을 발전시켰겠는가? 이 자체에 신의 요소가 있는 것이다. 이런 기연(機緣)는 보기에 우연 같지만 사실은 현기(玄機)가 숨어있는 것이다.

《사기》 은본기(殷本紀)와 주본기(周本紀) 진본기(秦本紀) 서문에 모두 그 조상 내원의 전설에 관해 말하고 있다. 그중 상나라와 진나라의 시조는 모두 현조(玄鳥)의 알을 삼키고 태어난 것이다. 반면 주나라 시조는 그 모친이 야외에서 거인의 발자국을 보고 그것을 밟은 후 감응하여 잉태했다. 이는 복희의 모친 화서씨의 경험과 매우 유사하다.

이 내용은 매우 재미있다. 역대로 연구자들은 그중 우연처럼 보이지만 필연적 관계가 있는 것에 주의했는지 모르겠다. 복희는 나중에 선천팔괘를 만들었고 주나라 시조는 여러 대를 거친 후에 주 문왕 대에 와서 역시 후천팔괘를 만들었다. 거인 발자국의 ‘소유자’가 다를 뿐이다.

주나라 시조의 모친이 밟은 것은 상제(上帝, 일반적으로 중화문화에서 말하는 상제와 서방에서 말하는 God는 다르다. 기본적으로 ‘천제’라고도 부른다)의 발자국이고 화서씨가 밟은 것은 뇌신의 발자국이다. 등급으로 보면 주나라 시조 모친은 화씨에 비해 더욱 고급적인 신의 요소가 있다.

그것이 일으킨 작용과 영향력은 더욱 심원하다. 더 설명해야 할 점은 신은 감응을 통하여 신의 요소를 인체에 각종 방식으로 나타낸다. 복희에게 하늘이 부여한 책임은 바로 팔괘를 창립하는 것이고 여와(女媧)와 함께 사람 최초의 기초문화를 여는 것으로 사람 층차에서 가장 기본적인 생존 방식을 제정하는 것이다. 주문왕은 그 시조의 여러 대 후손인데 역시 천상의 배치하에 상나라 말기에 후천팔괘를 개창했다. 오직 문화 내포가 매우 풍부해야만 상천은 한 생명에게 일정 범위의 천체 운행의 법칙을 총결해 사람에게 전해준다. 사람이 이로부터 그를 운용해 천상을 이해하고 천명을 전하며 오늘과 후세에 알려주게 한다.

실천으로부터 보면 주문왕이 연역한 후천팔괘는 중화문명의 역사적 전승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많은 역학(易學), 예언은 물론이고 ‘천인합일’, ‘천인감응’ 등의 이론은 모두 문왕 후천팔괘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아울러 주(周) 왕조는 전반적으로 ‘종법(宗法)’ 제도를 수립해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임금 내지는 심지어 사회와의 관계를 규범했다.

신의 요소는 한 사람의 생명과 여러 대 이후의 생명을 통해 나타난다. 이렇게 차이나는 자체가 신의 지혜와 역량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겠는가! 만약 모두 한 가지 표준 모델이라면 풍부하지도 않을 것이며 신의 법력이 무변함을 나타낼 방법이 없을 것이다.

하나라는 사람과 신이 동시에 존재하는 상태의 말기였기 때문에 많은 경우 신과 직접적으로 소통할 수 있었고 신의 뜻에 따라 일을 할 수 있었다. 인간세상에도 수많은 신인(神人)과 신적(神跡)이 나타났다. 바로 이렇기 때문에 수많은 역사 유적들이 신에 의해 일부러 감추어졌고 현재에 이르러 많은 사람들은 하왕조가 존재했던 직접적인 고고학적 증거를 찾지 못했다는 이유로 이 왕조가 실재했음을 승인하지 않는다. 특히 고고학적인 실증을 기초로 하는 서양인들은 중국에서 하나라의 존재를 아예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최근 섬서성 석묘 고성(石峁古城) 유적의 발견은 측정을 거쳐보니 그것이 존재한 시간이 하나라와 겹친다.

이 유적은 1976년 정식 발견되었는데 40여 년을 거친 발굴과 연구 끝에 최근에야 비로소 이 유적은 적어도 4300년 역사가 있음이 증명되었다. 묻힌 지 몇천 년 되는 유적이 현재 발견되고 확인되어 겨우 서방 고고학계의 인정을 받았다. 여기에는 신의 의도적인 배치가 가득 차 있다. 바로 사람들로 하여 전통문화를 다시금 인식하게 하는 것으로서 특별히 상고 시기의 문헌 기록 중에 현대인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 모두 신화 혹은 전설이라고 인식하게 한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하나라 존재의 직접적 증거를 이렇게 깊이 숨겼을까? 지면의 제한으로 단지 간단하게 두 가지 원인만 말해보자. 첫째는 창세주가 인간세상에서 신전문화(神傳文化)를 널리 전한 목적은 지금 시기에 진정으로 사람이 도를 얻어 되돌아 갈 수 있는 수련법을 널리 전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면 우주에는 한 무리 낡고 패괴된 구세력이 규합하여 함께 사람이 진정으로 법을 이해하는 것을 가로막을 것이다. 어떻게 가로막는가? 무신론, 진화론 및 소위 한 세트의 과학 방법과 한 세트의 조잡하고 저속한 문화(당문화)에 중화문화 중 일부 부정적 요소들을 선양하는 것이다. 다른 방면으로는 약간의 문헌기록을 남기되 지금의 과학과 인식 방법으로는 찾지 못하게 한다. 설사 찾더라도 연구자들과 지금 세계인들이 당시의 휘황함에 놀라도록 한다. 이것은 진화론으로 이해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것으로부터 사람들로 하여 지금의 과학(사상 방법 등 각 방면)의 국한성을 반성하게 한다. 당연히 다른 원인도 있다.

《상서(尚書)》등 상고시대의 사정을 기록한 문헌 중에 “태강실국(太康失國-하나라 3번째 군주 태강이 나라를 잃은 것)” 및 “소강중흥(少康中興 소강이 새로 나라를 부흥시킨 이야기)”의 일 및 후예(後羿)와 한촉(寒浞)이 정권을 탈취한 이야기들이 나온다. 또 나중에 공갑(孔甲)이 용을 잡아먹은 일 내지 마지막 왕인 걸이 덕에 힘쓰지 않고 백성을 상하게 한 일 《사기-하본기 제2》 등이 나온다. 우리는 이것으로부터 하 왕조 시기 사람들의 전반적인 자질이 매우 소박했으며 그리 많은 책략이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비록 나쁜 짓을 하더라도 주색에 탐닉하거나 살인 등 모두 아주 직접적이었다.

주색에 탐닉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 구절을 보충해보자. 《전국책, 위책(戰國策.魏策)》에 “옛날 제(帝)의 딸 의적(儀狄)이 술을 만들어 우(禹)에게 바쳤다. 우가 마셔보니 맛이 좋았다. 우는 술을 끊으라고 조서를 내리며 ‘후세에 반드시 술로 나라를 망치게 할 자가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나중에 나라를 망친 자는 여러 원인이 있었지만 술의 요소를 빠뜨릴 수 없다. 하나라 걸(桀)이나 상나라 주(紂) 등이 모두 이와 같다.

또 한가지 내용 중 역사학자들이 주의하지 않은 것이 있다. 태강이 나라를 잃은 후 그의 다섯 형제들이 강가에 가서 《오자지가(五子之歌)》란 노래를 지었다. 그 내용은 조상의 성덕을 찬송하고 회고하며 현실을 슬퍼한 것이었다. 만일 진(秦)나라 이후 조대였다면 누가 감히 이렇게 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바로 ‘백성을 화란’ 시키므로 반드시 죽음에 처해졌을 것이다. 어느 찬탈자도 용납하지 않을 일이었다. 하지만 당시 정권을 잡은 후예(後羿, 요 임금 시기 해를 쏜 예의 몇 세대 후손)는 오히려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고 여전히 사냥에 열중했다. 옆에 있던 사람들 누구도 간언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인심을 얻지 못한 하나라 걸왕은 상나라 탕왕에게 강산을 탈취당하고 추방되었다. 그는 스스로 살아갈 힘이 없어 그 개인은 ‘자립능력’이 떨어져 아내 며느리 여동생 등과 함께 유배지에서 굶어 죽었다. 탕왕이 그를 죽인 것이 아니다. 이처럼 그 후인을 제후로 봉했을 뿐 아니라 나중에 주왕조가 건립된 후에도 여전히 이런 정책을 지속했다. 이는 후세 왕조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나중에는 일반적으로 이전 왕조의 유족들을 모두 몰살시켰다.

하나라는 여기까지 하고 상나라에 대해 말해보자

현재 출토된 갑골문자로부터 보면 상나라는 점복과 무술(巫術)을 숭상하는 왕조였다. 수많은 갑골문에 새긴 것이 점(占)이었다. 이는 하나라 때 신이 직접 인간세상에 대량 출현한 것과 아주 큰 차이가 있다. 점차적으로 신이 직접 나타나는 일은 그리 많지 않게 되었다. 대신 무당에 의지해 점을 치는 방식으로 인간에게 어떻게 하라고 알려주었다. 이때 솥을 주조하는 일은 이미 유행이 되었다. 이런 것은 전문적으로 한편의 글로 설명하자,

문헌기록으로 보면 상나라의 탕은 인덕이 높은 임금이었다. 그는 새마저도 함부로 잡지 않고 ‘그물의 한쪽을 열어놓았다.’ 백성들을 위해 기우제를 지내는데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았다. 집안의 노비였던 이윤(伊尹)을 데리고 무대에 올라 천고의 현명한 지도자의 역할을 해냈다. 이윤은 상탕(商湯)을 도왔고 후세 군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도왔다. 나중에 상탕의 손자 태갑이 그리 밝지 않아서 도덕을 혼란케 하다 이윤에게 유배되었다. 그가 좋게 변했을 때 이윤은 또 그를 불러들여 정사를 맡겼다.

반경(盤庚)이 천도한 후 그의 후손인 무정(武丁)이 즉위했다. 이 왕의 며느리가 바로 유명한 ‘부호(婦好)’다. 그녀의 묘지가 최근 발견되었다. 이 무덤에서 많은 청동기 등 진귀한 물건이 출토되었다. 무정은 한마음으로 당시 은나라의 풍채를 회복하려고 했다. 사처로 사람을 보내 현인을 찾아다녔으나 한참을 찾아도 찾을 수 없었다. 나중에 꿈에서 그에게 실마리를 주었다 . 그는 그 성인을 보았고 그의 이름에 ‘열(說)’이 있음을 알았다. 나중에는 외부 멀리까지 탐방하다 마침내 찾았다. 그(부열)가 무정 앞에 왔을 때 무정은 보자마자 그가 성인임을 알고 즉시 재상에 임명했다. (자세한 내용은 《사기》 은본기 3권)

여기서 왜 부열이란 인물을 말하는가. 그는 은나라 최후의 현명한 재상이라 할 수 있는데 마침 무정의 시대였다. 무정 시대가 특별한 이유는 이전 시기 제왕에 비해 상대적으로 실물과 갑골문 기록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또 무정이 부열을 보자마자 그를 신뢰하고 그에게 큰 권력을 줄 수 있었다는 것은 무정이 얼마나 경건하게 하늘의 뜻을 믿었는지 설명한다. 때문에 무정 시대에 은나라는 비로소 다시 부흥하는 국면이 나타났다.

한편 무정의 여러 대 후세인 무을(武乙)은 하늘을 향해 활을 쏘는 등 오만이 극에 달해 나중에 벼락을 맞고 죽었다. 주(紂)왕 시기에 이르러 그는 자신의 힘이 세고 견식이 넓음을 자랑하고 다른 사람의 간언을 듣지 않았다. 노대를 건설하고 달기를 총애했으며 주지육림에 빠졌다. 또 자신에게 불만을 품은 사람들에게 포락형을 가하는 등 매우 포악하고 잔인했다. 이런 폭군을 대해 일부 사람들은 충신의 역할을 해내었고 박해를 받은 것은 다 잘 알 것이다. 그러나 미래에 ‘충(忠)’의 문화기초를 다지기 위해 그들은 여전히 걸어 나와야 했다. 그중 소사(少師, 관직 명) 비간(比幹)은 진언하다가 심장을 해부 당했다. 태사가 진언했으나 주왕은 듣지 않았고 기자(箕子)가 미친 척해도 주왕을 움직이지 못했고 오히려 감금당했다.

서백후(나중의 주문왕)는 주왕에 의해 유리(羑裏)에 갇혔지만 문왕의 부하들이 미녀와 좋은 말 진귀한 보물을 주왕에게 바치자 주왕은 그를 석방했다. 이 단락 역사는 왕이 열세에 처했을 때의 방법을 다져준 것이다. 그래서 전국시기 월나라의 구천은 자기 부부와 대신이 갇혀 오왕 부차를 모셔야 했고, 한고조 유방이 항우가 주최한 홍문연에서 도망갈 때는 장량이 항우와 범증에게 상응한 예물을 주었다. 또 나중에 유방이 흉노 선우에게 백등산에 포위당했을 때도 사람을 보내 선우의 아내에게 뇌물을 주어 겨우 탈출할 수 있었다.

인간세상은 바로 ‘병정천하, 왕자치국-군대가 천하를 정벌하고 왕이 나라를 다스리는’의 이치대로 간다. 그렇다면 왕이 될 사람이 천하를 다투는 과정 중에 어떤 방식으로 하는가, 바로 이래서 역사를 끊임없이 다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은나라 주왕이 불에 타 죽은 후 비록 주 무왕이 그의 머리를 자르긴 했지만 주(紂)의 아들 무경(武庚)을 제후로 봉했다. 왜냐하면 혈통을 이어 조상에게 제사지내고 제후를 우대하기 위해서였다. 나중에 무경도 채숙, 관숙과 난을 일으켜 주공에게 죽임을 당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紂)왕 후예 미자(微子)를 송(宋)나라에 세웠다. 그렇게 하여 은나라 혈맥과 문화를 이어가게 한 것이다.

상나라의 일부 사람들은 무왕이 주를 벌하는 것을 보고 주나라의 신하가 되길 원치 않았다. 그래서 북쪽이나 남쪽으로 이사갔다. 이중 기자(箕子)는 한무리 사람들을 데리고 한반도로 들어가 따로 나라를 세웠다. 어떤 이들은 베링해협을 건너(당시의 수위는 현재처럼 높지 않아서 아시아와 아메리카를 잇는 대륙교라 부를 수 있었다) 북극과 미주 대륙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에스키모와 인디언이 생겨났다. 또 일부 사람들은 남쪽 호주로 갔고 호주 토착민의 일부가 되었다. (이것은 물론 한 시기의 이주가 아니다. 아동역사백과사전》 20쪽에 근거하면, 대략 13,000년 전 아시아 주에서 한무리 사람들이 북미로 이주했고 9,000년 전에 남미 끝에 도달했다고 한다.) 그래서 나중에 사람들이 인디언 부족 거주지에서 갑골문자를 발견하는 원인이 되었다.

주나라에 대해서 편폭의 제한으로 간단히만 언급한다. 여기서 말하는 주나라는 주로 ‘서주(西周)’를 가리킨다. 동주(東周)는 춘추전국시대와 연결되어 있으므로 우리는 뒤에 다시 논술한다.

《사기》 주본기 권4에서 상나라의 대신 숭후호의 말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서백이 선과 덕을 쌓아 여러 제후들이 그를 따랐다.” 서백후는 한번 점을 쳐서 여상(呂尚, 강태공)을 만났고 그와 이야기 해본 후 곧 재상으로 모셨다. 그러니 서백후 역시 하늘의 뜻을 엄격히 준수했다고 할 수 있다. 나중에 주무왕 때 여상은 태사가 되었고 주공 단(周公旦, 무왕의 동생)이 보조했다. 또 다른 사람들도 도와 함께 주(紂)를 토벌했다. 이 과정에서 두 사람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고죽국의 왕자 백이와 숙제다. 두 사람은 부왕이 세상을 떠난 후 서로 왕위를 사양하다가 마침내 고죽국을 떠나 서백에게 투항했다. 그들은 무왕이 (은나라) 주(紂)를 정벌하러 출병할 때 말을 막고 간청했다. 나중에 주나라 건립 후 주(周)나라 신하가 된 것을 부끄러워하여 주나라 곡식을 먹지 않고 고사리만 먹고 《채미(采薇)-고사리를 캐다》가를 지었으며 수양산에서 굶어죽었다.

이 두 사람은 현대인의 실리적인 눈으로 보면 지능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은 그게 아니다. 당시 역사 환경에서 사람들은 그렇게 지모가 많지 않았고 좋고 나쁨에 대한 표현이 매우 뚜렷했다. 그들은 명리와 생사를 중시하지 않았으며 그저 ‘의’로운 사람이 되려고 했다. 이런 의로움이 당시로서는 지나치게 이상적이며 제한되어 사회발전에 적응할 수 없었다. (예를 들면 무왕이 주를 벌하러 가지 못하게 막는 것은 주왕이 계속해서 백성과 국가를 해치도록 놔두는 것인데 그것이 ‘인’이며 ‘효’인가?) 어떤 사람은 말할 것이다. 그들의 이런 행위와 사상은 ‘의’ 문화가 인간에서 초급적이며 성숙하지 못함의 반영이라고 한다. 나중에 삼국시대에 성숙한 ‘의’ 문화를 다지기 위한 기초였던 것이다.

여상은 나중에 《봉신연의》의 주인공 강자아를 말한다. [강씨의 조상은 순임금과 하나라 시절 여성(呂城)에 봉해졌다] 그는 예언서 《건곤만년가》와 《육도》, 《삼략》 등 병법서가 있고 나중에 제의 땅에 봉해진다.

한편 주공은 무왕과 성왕 시절에 전심으로 왕을 보좌했고 심지어 자기 몸을 담보로 무왕의 병이 낫기를 희망했다. 나중에 성왕이 병환을 앓았을 때 그는 가위로 자기 손가락을 잘라 강에 던지며 신명에게 고하며 죄를 자기의 몸에 다 끌어안고자 했다. (상세한 것은 《사기》의 ‘노주공세가 제3(魯周公世家第三)’ 참조) 주공의 일생의 덕행은 매우 크다. 삼국시대 조조가 《단가행》에서 말한 “주공토포 천하귀심(周公吐哺,天下歸心-주공이 천하의 다양한 인재를 두루 얻기 위해 밥을 먹다가도 음식을 뱉고 급히 인재를 만났다고 한다)”과 같다. 아마 바로 이점 때문에 주공은 각종 꿈 등 현상에 대해 해석할 재능이 있었을 것이다. 원래 노나라 땅에 봉지를 받았는데 도성에서 그가 필요했기에 할 수 없이 그는 아들을 대신 보내 노나라 군왕이 되게 했다. 노나라의 주례(周禮)가 왜 그렇게 잘 보존되어 있는가. 그 원인은 바로 그 시조가 주공 단이기 때문이다.

봉토를 나눠주고 나라를 세운(분봉제) 예는 바로 무왕이 주를 정벌한 후 시작되었다. 하나라 상나라 및 그 이전에도 이런 일이 물론 있었지만 대부분 원래 부락을 다스리던 수령을 추인한 것에 불과했다.

주성왕(成王)을 이어 강왕(康王)이 등극했고 그 후 소왕(昭王)이 왕위에 올랐다. 소왕은 그가 사망하는 과정에서 무의식중에 ‘아교’가 점성과 동시에 물에 잘 녹는 수용성이 있음이 드러났다. 이런 것은 인류문명 발전 중 일으킨 작용이 적다고 할 수 없다. (소왕의 덕이 쇠하자 남쪽으로 정벌하러 한수를 건넜다. 남인들은 아교로 배를 붙여 건너려 했는데 배가 강 중간에 이르자 아교가 녹아서 소왕이 물에 빠져 죽었다. 《사기》 ‘주본기 제4’)

소왕 이후 목왕(穆王)이 나타났다 《목천자전》 권3에 목왕이 곤륜산에 가서 서왕모를 만난 일이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은 청나라 건륭 연간에 편찬된 ‘흠정사고전서’에 들어있다. 서왕모는 순임금 시절 중원에 와서 조정에 보였고 한무제 때도 왔었다. 나중의 역사 기록 중에는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후인들이 역사자료에 근거하여 정리한 《신구기(神龜記)》 에는 서왕모가 목왕을 본 후 얼마 안되어 요지에서 변고가 발생하고 사라졌다고 되어있다. 명나라 소설 《서유기》에 손오공이 왕모낭랑의 반도원에 나타난 것으로 되어있다. 왕모낭랑이란 인물은 역대를 거쳐서 사람들 속에 깊이 들어가 있음을 볼 수 있다.

목왕 이후 몇 대가 후 여왕(厲王)이 즉위했다. 여왕은 이익을 찾고 백성들을 학대하여 모두 그에게 불만이 많았다. 자신에게 불만을 품거나 나쁜 말을 하는 사람을 감시했다. 사람들은 다시는 말하지 못했다. 그러자 여왕은 기뻐했다. 하지만 소공(무왕, 성왕 시기의 소공의 후인)이 한마디 경전에 있는 말을 했다. “백성의 입을 막는 것은 홍수를 막는 것보다 어렵습니다.(防民之口,甚於防水)”사기》. 하지만 왕은 듣지 않았다. 그러다 몇 년 후 폭동이 일어나자 여왕이 도주했다.

이후 소공과 주공(무왕 성왕 시기의 주공 단이 아니라 그 후손)이 공동 집정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기원전 481년이다. 중국 역사상 확실한 기년(紀年, 연호)의 시작이다.

주 유왕(幽王) 2년이 되어 서주 삼천에 모두 다 지진이 일어났다. 백양보가 말했다: “무릇 나라에는 반드시 산천에 의지해야 하는데 산이 무너지고 내가 마르면 망국이 징조입니다. 내가 마르면 산이 무너집니다. 하늘이 그를 버리면 기를 넘지 못합니다.” 나중에 유왕이 미녀 포사(褒姒)에 빠져 태자를 폐한 일 때문에 화를 심어놓았다. 나중에 포사가 봉화로 제후를 놀린 일 이후에 원래 태자의 외할아버지 신후(申候)가 다른 부락과 연합하여 이산에서 유왕을 죽였다. 포사는 포로가 된다.

원래 태자가 자연히 돌아와 평왕으로 세워졌다. 낙양으로 천도하니 그것이 동주의 시작이다.

여기서 보충해야할 것은 이 시기 서남과 동북 지역의 부락들이 모두 주나라에 조공을 바쳤으며 중원과의 관계를 강화한 점이다. 《화양국지. 파지(華陽國志, 巴志)》의 기록에 따르면 주무왕이 군대를 이끌고 제후들과 함께 은나라 주왕(紂)을 멸한 후 자신의 종친을 파(巴) 땅에 봉했다. 이것은 강토가 작지 않은 나라로서 동으로는 어부(魚鳧, 지금의 사천 봉절 동쪽 백제성)에 이르고 서로는 분도(지금 호복 의빈시 서남 안변장) 북으로는 한중(漢中, 지금 섬서성 진령 이남지구)에 접하고 남으로는 검부(黔涪, 지금 사천 부릉지구)에까지 미쳤다. 파왕은 제후로서 이치상 당연히 주무왕에게 조공을 바쳐야 했다.

《파지》에서 우리는 공물 목록을 찾아볼 수 있다. 5가지 곡식과 6가기 가축, 뽕나무 누에, 마, 모시, 단사, 칠, 차, 꿀, 거북, 코뿔소, 특산 조류 및 화장품 등이다. 또 (주무왕) “15년 숙신씨가 손님으로 오다.” 《금본죽서기년》

“매는 멀리서 왔습니다. 이것은 숙신(肅愼)의 화살입니다. 옛날 무왕(武王)이 상(商)나라를 멸한 후 주변의 여러 민족들과 교류하고 각각 그 지방의 특산물을 조공하게 해 자신들의 직책과 의무를 잊지 않게 했습니다. 이에 숙신은 싸리나무로 만든 화살과 돌로 만든 화살촉을 바쳤는데 길이가 1척 8촌이었습니다. 진(陳)나라 선왕께서는 그 미덕을 표창하고자 숙신의 화살을 큰딸 대희(大姬)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그 후 장녀를 우(虞)의 호공(胡公)과 결혼을 시키고, 우 호공을 진(陳)나라에 봉했지요. 동성 제후들에게는 진귀한 옥을 나누어주어 친척의 도리를 다하게 했고, 이성 제후들에게는 먼 지방에서 들어온 조공품을 나누어주어 무왕에게 복종할 것을 잊지 않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진(陳)나라에게는 숙신의 화살을 나누어주었던 것입니다.” 《사기. 공자세가》

여기서 말하는 숙신씨는 중국 동북에 위치한 오래된 소수민족으로 송화강 동쪽에 살았다.(자세한 내용은 《흑룡강성사화(黑龍江省史話)》를 참조)

주나라는 점점 종법제도를 확립했다. 이것이 오늘 발전한 성姓씨와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제도다. 중화민족 문명사에 일대 공헌이었다. 자세한 것은 생략한다.

하, 상, 주의 시조는 모두 홍수와 관련이 있으며 대홍수 시대에 큰 공을 세웠다. 시조가 각기 덕행을 표현해 냄으로 인해 그 후손들이 비로소 한 왕조를 개창하고 발전시키는 중임을 부여받은 것이다.

하, 상, 주 관련 역사자료를 보면 여러 차례 용과 봉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황제는 용을 타고 하늘로 날아갔고 공갑은 용을 키웠으며 포사와 용은 태생 관계가 있다. 대우가 치수에 성공한 후 봉황이 왔다. 나중의 사서에 여러 번 용과 봉의 일이 나온다.(자세한 내용은 인터넷 문장 ‘中國史書典籍中龍的記載’와 ‘史書中記載的神鳥鳳凰’을 참조할 것.)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2467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