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제2장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
1. 6대에 걸쳐 부강해진 진나라
기원전 361년 진 효공(孝公)이 왕위에 오른 후 마치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는 것처럼 현인을 구하자 순식간에 천하 인재들이 서쪽으로 몰려왔다. 진나라가 등용한 승상과 주요 모사(謀士)들은 다수가 타국에서 온 ‘객경(客卿)’인데 예를 들면, 범수(範睢), 여불위(呂不韋), 이사(李斯) 등이다. 이들은 본국에서는 비록 중용되지 못했으나 진에 들어와 유명한 재상이나 상경(上卿 고위관리)이 되었다.
전국시대 중기에 들어오면 진(秦), 제(齊) 양 강대국이 동서로 대치하는데 군사력은 진나라가 가장 강했다. 이에 강한 불안감을 느낀 각국은 소진(蘇秦)이 제시한 ‘합종’전략을 받아들여 서로 연합해 진나라에 대항했다. 진나라는 장의(張儀)가 주장한 ‘연횡’전략으로 이에 맞섰다.
기원전 318년부터 269년까지 진나라는 다른 6국과 몇 차례 정복전쟁을 벌이면서 나날이 강성해졌다. 6국이 여러 차례 합동으로 진나라를 공격했으나 진나라의 기세를 막을 수는 없었다. 진나라는 이미 6대(代)에 걸쳐 여러 왕들의 노력을 통해 나라가 강력하고 부유해진 상태였고 이는 진시황이 마지막에 천하를 통일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초가 되었다.
2. 시황 탄생과 대진(大秦) 건립
진시황은 기원전 259년 정월 조(趙)나라의 수도 한단(邯鄲)에서 태어났다. 《사기·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에는 “태어났을 때 이름은 정(政) 성은 조(趙)씨였다”라고 기록했다.
《동주열국지(東周列國志)》에서는 진시황의 탄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태어날 때 온 방 안에 붉은빛이 가득했고 온갖 새들이 날아올랐다. 태어난 아이를 보니 코는 오똑하고 눈은 가늘고 길며, 이마는 각지고 눈동자가 두 개였다. 입안에는 치아가 여러 개 있었으며 뒷목과 등에는 용 비늘이 돋아 있었다. 울음소리가 아주 커서 길 가는 사람들이 모두 들을 수 있었다.”
진나라에서 천하를 통일할 웅주(雄主 위대한 군주)가 탄생할 것이라는 예언은 사실 일찍부터 있었다. 진나라 사람들은 문공(文公) 4년(기원전 762년)에 견하(汧河)와 위수(渭水)가 만나는 지점에 도시를 건설하고 정주하기 시작했다. 《사기·봉선서(封禪書)》에는 이런 기록이 전해졌다.
“어느 밤, 문공이 꿈에 황사(黃蛇 누런 뱀)를 보았는데 그 몸이 하늘에서 땅까지 이어져 있었고 입은 부(鄜 지명)의 산비탈까지 뻗어 있었다. 문공이 태사 돈(敦)에게 자문하니 돈은 ‘이는 상제(上帝)의 조짐이오니 임금께서 그분에게 제사를 지내십시오.’라고 했다. 이에 문공은 부치(鄜畤)란 제단을 세우고 3가지 희생(소 양 돼지)를 바쳐 백제(白帝 서쪽을 관할하는 천신)께 교외에서 제사를 지냈다.”
《사기·봉선서》에는 문공 19년 ‘진보(陳寶)’를 얻은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부치를 세운 지 9년, 문공이 옥석을 하나 얻게 되어 진창산(陳倉山) 북쪽의 산비탈에 성을 짓고 그것을 제사지냈다. 옥석의 신령은 어떤 때는 한 해가 다 가도록 오지 않았고 어떤 때는 몇 년 만에 오기도 했다. 오는 때는 항상 밤이었는데 마치 유성처럼 광채를 발했다. 동남쪽에서 사성(祠城)으로 들어왔는데 모습은 수탉 같았으며 밤중에 큰 소리를 내니 들꿩들이 놀라 울었다. 짐승을 한 마리 바쳐 제사 지내고 옥석을 가리켜 진보라고 했다.”
《봉선서》의 여러 주석 중에는 이 돌에 대해 “질감이 마치 돌과 같고 폐(肺)를 닮았다”거나 또는 모양이 ‘옥계(玉雞)’ 혹은 ‘석계(石雞)’라고 했다. 또 진보에 제사 지내는 사당을 가리켜 보계신사(寶雞神祠)라고 불렀는데, 오늘날의 섬서(陝西)성 보계(寶雞)시의 지명이 여기서 유래했다. 진보를 얻은 자가 패주(霸主)가 될 수 있다.
또 “이외에도 진 문공이 사냥을 나갔다가 흑룡(黑龍)을 얻었는데 이는 그 수덕(水德)의 길조(瑞)였다.”(《사기·봉선서》)고 했다. 이는 장차 진나라가 수덕에 힘입어 화(火)로 상징되는 주(周)나라를 대신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진 헌공(獻公) 11년(기원전 374년), 헌공이 주열왕(周烈王)의 태사 담(儋)을 접견했다. 담은 헌공에게 “옛날에 주나라는 진나라와 하나였다가 분리된 것이니, 오백 년 후 다시 합쳐질 것입니다. 또 17년 후 패왕(霸王)이 출현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후 진나라에 패왕이 나타나 진나라 사람이 천하를 통일한다는 이런 주장이 진나라 역대 왕들 사이에 비밀리에 전승되었다.
하늘의 뜻이 이와 같았으니 사람의 힘으로 좌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진시황은 천운에 따라 탄생해 마침내 강산을 통일하고 중국 역사상 최초의 대일통(大一統) 황조(皇朝)를 건립하는 놀라운 위업을 달성했다.
진시황은 조나라에서 출생한 이후 여러 차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결국은 다시 진으로 돌아왔다. 13세의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다.
“13세 때 장양왕(莊襄王)이 죽자 정이 왕위를 계승해 진나라 왕이 됐다. 이때 진의 영토는 이미 파(巴), 촉(蜀), 한중(漢中)을 병합하고 완(宛)을 넘어 영(郢)을 차지하고 남군(南郡)을 설치했다. 북으로는 상군 동쪽을 거두어 하동(河東), 태원(太原), 상당(上黨) 등의 군을 점령했으며 동으로는 형양(滎陽)에까지 이르러 이주(二周 동주와 서주)를 멸하고 삼천군(三川郡)을 설치했다. 여불위(呂不韋)가 재상이 되어 10만 호를 봉토로 받았고 문신후(文信侯)라 불렸다. 널리 빈객, 유사(遊士 천하를 떠도는 지식인)를 초빙해 천하를 하나로 아우르려고 했다. 이사(李斯)가 사인(舍人)이 되었고, 몽오(蒙驁), 왕의(王齮), 표공(麃公) 등이 장군이 됐다. 왕은 나이가 어린 데다 막 즉위한 터라 국사를 대신들에게 맡겨 처리하게 했다.”(《사기·진시황본기》)
나이가 어렸던 진시황이 친정하기 전 9년간 주요한 나랏일은 상국인 여불위가 도맡았다. 여불위는 백가의 언론을 집대성해 《여씨춘추(呂氏春秋)》를 지었다. 진시황이 성년이 되어 친정을 시작한 후 여불위는 노애 및 조태후와 한패가 되어 후궁을 교란시켰다 죄를 처벌받을까 두려워 자살하고 만다.
“(진시황) 5년, 장군 몽오가 위(魏)나라를 공격해 산조(酸棗), 연(燕), 허(虛), 장평(長平), 옹구(雍丘), 산양성(山陽城)을 평정하고 모두 함락시켜 20개 성을 빼앗았다. 처음으로 동군(東郡)을 설치했다. 겨울에 천둥이 쳤다.
진시황 6년 한, 위(魏), 조, 위(衛), 초나라가 함께 진나라를 공격해 수릉(壽陵)을 빼앗았다. 진나라가 출병하자 5국은 군사를 거두었다. 위(衛)나라를 점령하고 동군을 압박하자 임금 각(角)이 수하들을 이끌고 야왕(野王)으로 옮겨 험한 산세에 의지해 위나라의 하내(河內) 땅을 지켰다.
7년 혜성이 먼저 동쪽에서 나타났다가 북쪽에 출현했으며, 5월에는 서쪽에 나타났다. 용(龍), 고(孤), 경도(慶都)를 공격하던 장군 몽오가 죽자 (진나라는) 군사를 돌려 급(汲)을 공격했다. 혜성이 다시 서쪽에 16일간 나타났다. 하태후(夏太后 진시황의 친할머니)가 서거했다.
8년 진왕의 아우 장안군(長安君) 성교(成蟜)가 군대를 이끌고 조나라를 공격하다가 도리어 반란을 일으켰으나 둔류(屯留)에서 죽었고 그 군관들도 모두 목을 베었다. 또 둔류 백성들을 임조(臨洮)로 옮겨 살게 했다.”(《사기·진시황본기》)
진시황 9년(기원전 238년), 진시황은 22세의 나이로 옛 수도 옹성(雍城)에서 대관식을 거행하고 정식으로 친정(親政 황제가 직접 정치에 나서는 것)을 시작했다. 진시황이 성년이 되어 직접 나라를 다스리자 그동안 노애(嫪毐), 조태후(趙太后 진시황의 모친)와 어울리며 후궁들을 이간질했던 여불위는 처벌이 두려웠던 나머지 자결했다.
친정을 시작한 지 1년 되던 진시황 10년, 진시황은 신속하고 단호하게 내란을 다스렸다.
진시황은 각국이 연합으로 행동할 기회를 주지 않고 6국을 하나하나 빠른 속도로 정벌했고 합종전략을 철저히 무너뜨렸다. 6국을 멸한 진시황의 전체적인 전략방침은 가까운 곳에서 멀리까지 힘을 집중해 각개격파(各個擊破)하는 것이다. 먼저 북으로 조나라를 정복하고 중간에 위(魏)나라를 멸망시켰다. 또 남으로 한나라를 친 후 다시 연나라, 초나라, 제나라를 차례대로 멸망시켰다.
진시황이 가장 먼저 공격한 목표는 조나라였다. 당시 조나라는 6국 가운데 실력이 가장 강해 진나라가 천하통일로 나아가는 길목에서 최대의 장애물이었다. 진나라는 여러 차례 조나라를 공격했지만 조나라에 이목(李牧)과 방난(龐煖) 등의 명장이 버티고 있어서 성공하지 못했다.
진시황은 주력부대로 조나라를 공격하는 동시에 한나라에 대해서는 조금씩 나누어 공격하는 책략을 취했다. 기원전 231년 한나라 남양군(南陽郡)의 ‘가수(假守 임시 군수)’ 등(騰)이 진나라에 관할지역을 바쳤다. 진시황은 등을 내사(內史)로 임명했고 나중에 그에게 군대를 이끌고 한나라를 공격하게 했다. 진시황 17년(기원전 230년) 한나라 왕 안(安)을 포로로 잡자 한나라가 멸망했다.
진시황 18년(기원전 229년), 대장군 왕전(王翦)에게 군사를 이끌고 조나라를 치게 했다. 조나라는 이목과 사마상(司馬尚) 등에게 병력을 주어 방어하게 했고 양국은 약 1년간 대치했다. 나중에 조나라 왕이 간신들의 모함을 믿고 사람을 보내 이목을 죽이고 동시에 또 사마상마저 살해했다. 이후 진나라 군대는 무주공산에 진입하듯 순조롭게 조나라를 칠 수 있었다.
이듬해 진나라 군대가 조나라 수도 한단을 격파했다. 조나라 왕이 조나라 지도를 바치며 진나라에 투항했다. 그러나 공자(公子 조왕의 아들) 가(嘉)가 대군(代郡 지금의 하북성 위현)을 빠져나가 이목의 이름을 이용해 인심을 얻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진나라 군대는 진시황 25년(기원전 222년) 연나라를 멸망시킨 후 그를 포로로 삼았다. 이로써 진나라는 북방을 통일할 수 있었다.
진시황 16년(기원전 231년), 위나라의 경민왕(景湣王)이 진나라의 강대한 세력에 못 이긴 나머지 자진해서 진나라에 여읍(麗邑)을 바치고 공격을 늦춰주길 청했다. 이때 한창 조나라를 치고 있던 진시황은 병력을 분산시킬 여력이 없었기에 땅을 받고 협상에 응했다. 이로써 위나라는 다만 몇 년이나마 더 연명할 수 있었다.
진의 주력 부대가 남하해 초나라를 공격하던 진시황 22년(기원전 225년), 진시황은 왕분(王賁)을 파견해 위(魏)의 수도 대량(大梁 지금의 개봉)을 치게 했다. 위나라 군대는 성문을 굳게 닫아걸고 지키기만 하면서 나서지 않았다. 진나라 군대의 강공도 소용이 없었다. 이때 제나라가 원병을 보내 위나라를 돕지 않자 위나라는 고립무원의 상태였다. 왕분은 연일 큰 비가 내리는 것을 보고 황하와 변하(卞河)의 물을 이용해 성을 공격했다. 물길을 터서 두 강의 강물을 끌어와 대량성으로 흐르게 한 것이다. 대량성벽이 침수되어 무너지자 위왕 가(假)는 투항할 수밖에 없었다. 위나라는 이렇게 멸망했다.
남쪽의 초나라는 영토가 넓고 자원이 풍부해 ‘갑옷을 입은 군사만 백만(甲士百萬)’이라고 자칭했다. 그러나 왕과 대신들이 권력다툼으로 내란이 끊이질 않았다. 진시황 19년(기원전 228년) 초나라 유왕(幽王)이 사망하자 동모(同母) 아우 유(猶)가 왕위를 계승해 애왕(哀王)이 되었다. 하지만 불과 두 달 만에 이복형인 부추(負芻)에게 살해당했다. 부추가 초나라 왕이 됐다. 부추 재위 3년, 진시황 21년(기원전 226년)에 시황이 젊은 장군 이신(李信)의 말을 믿고 그에게 20만 병사를 주어 남하해 초나라를 치게 했다. 자신만만했던 이신은 초나라 군의 항연(項燕)과 굴정(屈定)에게 패하고 말았다.
이에 진시황은 친히 노장 왕전(王翦)을 다시 찾아가 결국 60만 대군을 이끌고 초나라를 치도록 설득했다. 초나라 영토로 쳐들어간 왕전은 병사들에게 군사훈련만 시키면서 진지를 굳게 지키고 나서지 않았다. 자신은 쉬면서 힘을 비축하는 대신 적군을 지치게 만드는 책략이었다. 그렇게 1년이 흐르자 진나라 병사들은 초나라의 지형에 충분히 적응한데다 훈련과 휴식으로 체력과 사기가 드높아 초나라와의 결전만 바라는 상태가 됐다. 반면 초나라는 상황을 오판했다. 왕전이 너무 늙어 몸을 사리고 있으며 진나라 병사들도 싸움을 두려워하고 있는데다 군량미가 부족해 철수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여긴 것이다. 지휘부의 오판에 따라 초나라 병사들의 기강도 해이해졌다. 왕전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전군에 출격을 명령했고, 진나라 병사들은 앞을 다퉈 용맹을 뽐내며 연전연승으로 초나라 군대를 물리치며 파죽지세로 쳐들어가 초나라 총사령관 항연을 죽이고 초나라 왕 부추를 포로로 잡은 후 새로운 왕을 세웠다. 이렇게 초나라가 멸망한 때는 바로 진시황 24년(기원전 223년)이었다.
왕전의 대군이 석산(錫山 지금의 무석)에 이르렀을 때의 일이다. 병사들이 밥솥을 묻으려 땅을 파던 중 오래된 돌비석을 하나 발견했다. 비석에는 ‘주석이 날 때는 천하 병사들이 몰려들어 다투고, 주석이 나지 않게 되면 천하가 맑아진다(有錫兵, 天下爭, 無錫寧, 天下清)’고 쓰여 있었다. 이를 본 현지 백성들은 “이 산에서는 주나라 평왕 때부터 납과 주석이 많이 났기 때문에 석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생산량이 갈수록 적어지고 있다. 이 비석은 누가 만든 것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이에 왕전은 “이 비석이 나타났으니 이제부터 천하는 점차 평온해질 것이다. 이 비석은 운명을 꿰뚫어본 옛사람이 후세 사람에게 알려주기 위해 묻은 것이다. 이 지역의 이름은 이제부터 무석(無錫)이라고 한다,”고 말했다. 지금 무석현의 지명이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진나라의 천하통일은 오래전부터 하늘이 정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조나라를 멸망시키는 중에 진나라 군대는 이미 연나라 국경까지 이르렀다. 이에 연나라 왕 희(喜)는 종일 좌불안석이었다. 태자 단(丹)이 전광(田光)의 추천을 받고 형가(荊軻)에게 진시황을 암살하는 모험을 의뢰했다. 이것이 바로 역사적으로 유명한 ‘형가의 진왕 암살’로 시기는 진시황 20년(기원전 227년)이었다. 그러나 암살은 실패로 돌아갔다.
진시황 22년(기원전 226년), 진시황은 왕전(王翦)과 왕분(王賁) 부자에게 군사를 이끌고 연나라 수도 계(薊 지금의 북경)를 치도록 명령했다. 연왕 희는 태자 단과 함께 요동군으로 피난했다. 진나라 장군 이신(李信)이 군사 수천 명을 이끌고 태자 단을 연수(衍水)까지 쫓아갔다. 태자 단은 물속에 잠수해 겨우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이후 연왕 희가 휴전을 위해 사람을 파견해 태자 단을 죽이고 그 머리를 진나라에 바쳤다.
연왕 희가 요동으로 피난한 이후 진나라의 주력 부대는 남부 전선으로 이동해 초나라를 공격했다. 진시황 25년(기원전 222년) 왕분이 요동에서 연나라의 잔여 세력을 치라는 명을 받들어 연왕 희를 포로로 잡자 연나라는 완전히 멸망했다. 같은 해 남방에서 초나라 대군을 물리친 후 승기를 타고 월나라 군주를 항복시키고 회계군(會稽郡)을 설치했다. 이로써 장강 유역은 전부 진나라 판도에 편입됐다.
진시황 26년(기원전 221년) 진시황은 왕분에게 남쪽으로 내려가 동방 6국 가운데 최후로 남은 제나라를 치게 했다. 춘추시대부터 전국시대 중기에 이르기까지 제나라는 산동(山東) 여러 나라들 중에서 비교적 강대했다. 그러나 기원전 284년 연나라, 조나라, 한나라, 위(魏)나라, 초나라 5개국이 제나라를 공격했고, 특히 연나라 장수 악의(樂毅)가 한바탕 휩쓸고 지나가면서 제나라는 거의 멸망할 뻔했다. 이후 제나라는 이전의 강성함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시기 제나라 왕 건(建)은 무능한 인물이었다.
왕분이 남하해 파죽지세로 제나라를 공격하고 치(淄)까지 이르자 제왕 건이 후승(後勝)과 함께 진나라에 싸우지 않고 투항하면서 제나라가 멸망했다. 이로써 진나라는 군웅을 완전히 평정하고 6국을 통일하는 마지막 단계를 완수했다.
진시황이 십여 년간 6국을 정복하고 통일 패업(霸業)을 완수하는 여러 차례 정복전쟁 과정에서 적군을 파묻어 죽이거나 항복한 성민을 학살하는 등의 악행을 저질렀다는 기록이 하나도 확인되지 않는다. 사실상 그는 중국 역대에 가장 인자한 군왕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후대 역사와 많은 문인들이 진시황이 6국을 쓸어버린 것을 ‘폭력(暴)’이라고 묘사한 바 있는데, 이는 망국의 한을 품은 6국의 일부 후손들이 인자하게 목숨을 살려준 진시황의 은혜는 망각하고 도리어 진시황에게 ‘잔인하고 포악하다’는 오명을 씌운 것이지 진실이 아니다. 만약 진시황이 정말 이렇게 ‘잔인하고 포악’했다면, 6국 후손들은 벌써 예전에 씨가 말랐을 것이다.
22세에 친정을 시작해 39세에 산동의 제나라를 격파하고 더 나아가 중국통일이란 역사적 대업을 완수하기까지 진시황은 불과 17년 만에 무려 수백 년간 지속되었던 춘추전국시대 제후들의 혼전국면을 신속히 종식시켰다. 또한 통일에 적합한 일련의 법령과 조치들을 시의적절하게 제정하고 반포함으로써 중국 역사상 최초의 대일통 황조(皇朝)를 건립하고 완벽하게 했다. 그의 이런 기백(氣魄)은 일반적인 제왕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전례 없이 비상한 용기와 담력에서 나온 과감한 행동은 마침 천시(天時)에 응하고 민심을 따른 것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태평성세를 누리게 했다.
3. 능력 위주 인재등용과 깊은 신뢰
영토 개척에는 과감하고 망설임이 없었던 진시황은 또 아주 열린 사고의 소유자로 평생 인재를 몹시 중시하고 중용했다. 인재를 쓰는 그의 안목과 식견 및 대범함은 남다른 데가 있었고 또 일단 기용한 인재는 충분히 신뢰해 시작부터 끝까지 과업을 원만히 수행할 수 있게 했다. 또 사람을 대함에 진솔하고 관용적인 태도는 일반 제왕들을 훨씬 뛰어넘었다.
진시황 10년(기원전 237년), 한(韓)나라의 치수(治水)기술자 정국(鄭國)이 한왕(韓王)의 명을 받고 진나라의 수로 공사에 협조하는 척하면서 사실상 간첩 활동을 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에 진나라 종실과 대신들이 모두 이 기회를 이용해 진시황에게 국내에서 활동 중인 타국 출신 ‘객경(客卿)’들을 전부 추방할 것을 건의했다. 이에 진시황이 마침내 ‘축객령(逐客令)’을 반포해 진나라에서 관리로 있던 모든 ‘객경’들에게 반드시 정해진 시간 내에 진나라를 떠날 것을 명령했다.
이사(李斯)는 진나라를 떠나는 도중 진시황에게 《간축객서(諫逐客書)–축객령에 대해 간언하는 글》라는 상소문을 올려 ‘객경’이 진나라에 기여한 공헌과 이들이 진나라에 남는 중요성 및 축객령이 초래할 폐해에 대해 역설했다. 진시황은 이를 읽고 즉시 ‘축객령’을 취소하고 추방했던 객경들을 다시 진나라로 불러 관직을 돌려주었다. 또 얼마 후 이사에게 정위(廷尉) 벼슬을 내리고 중용했다. 이사와 정국의 설득 하에 이익과 손해를 따져 본 진시황은 그들의 건의를 과감히 받아들였다. 특히 진나라를 피폐하게 하려던 음모사건의 주모자 정국을 사면시켜 계속해서 정국거(鄭國渠 수로) 건설을 지휘하게 했다. 정국은 10년에 가까운 시간을 들여 마침내 진나라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의 수리공정인 정국거를 완성시켰다.
진시황이 사람을 쓰는 도리는 오직 능력만을 보았고 국적은 따지지 않았다. 예를 들어 모략으로 유명한 군사가이자 당시 위나라 장군으로 있던 위료(尉繚)를 초빙하기 위해 진시황은 특별히 이사를 위나라로 파견해 설득시켰고 마침내 위료를 진나라로 데려와 6국 정벌의 주요 모사 가운데 하나로 삼았다.
또 한번은 한나라 공자 한비(韓非)가 쓴 서찰이 진나라로 전해졌는데, 한비가 쓴 《고분(孤憤)》, 《오두(五蠹)》 등을 읽은 진시황은 “아아, 과인이 이 사람을 만나 함께 교류할 수만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라며 감탄해 마지않았다. 그 후 진시황은 온갖 방법을 다해 한비를 진나라로 초빙했다.
또 초나라를 멸망시키는 전쟁에서 진시황은 병을 핑계로 집에 있던 대장군 왕전(王翦)에게 출사할 것을 몸소 청하기도 했다. 결국 왕전을 설득해 정초대통수(征楚大統帥 초나라 정벌 최고사령관)를 맡기는데 성공했고 초나라 정벌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죄를 짓고 갇혀 하던 지방 현의 하급관리(胥吏) 정막(程邈)이 감옥에서 문자 개혁에 관해 연구했다. 그는 이사가 만든 소전(小篆)의 둥근 글씨체를 네모나게 바꾸고 번잡한 획을 간단히 했다. 10년의 노력 끝에 마침내 새로운 글자체를 만들어냈으니 이것이 바로 예서(隸書)다. 나중에 누군가 이 글자로 상주했는데 진시황이 보고나서 무척 실용적이라고 인정했다. 이에 정막을 사면하고 아울러 어사시(禦史寺)의 관직을 내렸다.
진시황 주변에는 다재다능한 ‘객경’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이중에는 승상 이사(초나라 출신), 군사가 위료(위나라 출신), 장군 조타(趙佗 조나라 출신), 상경(上卿) 감라[甘羅 제나라 출신으로 진나라 장군을 지낸 감무(甘茂)의 손자], 장군 몽무(蒙武)와 그의 아들인 대장군 몽염(蒙恬) 및 몽의(蒙毅) 형제[몽무는 원래 제나라 출신인 몽오(蒙驁)의 아들이다], 수리 전문가 정국(한나라 출신), 제왕권모의 이론가 한비(한나라 출신), 객경 모초(茅焦 제나라 출신) 등이 있었다. 이들 객경들은 모두 훗날 진시황이 천하를 평정하고 국정을 다스리는 데 있어 중신이 되었다.
진시황은 인재를 극히 존중했고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 융통성이 있었으며 인정과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위료를 얻기 위해 제왕으로서의 존엄도 서슴없이 내려놓은 진시황은 “위료를 자신과 동등하게 대우(與之抗禮)”하게 했고 “의복과 음식도 똑같이 주었다”(《사기 진시황본기》). 또 비록 위료가 진시황의 사람 됨됨이에 대해 여러 차례 불만을 표시했음에도 진시황은 귀를 닫고 개의치 않았으며 계속해서 위료를 믿고 신임했다.
적국 첩자였던 정국에 대해서도 진시황은 그를 죽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를 중용해 저 유명한 ‘정국거’를 완성케 하여 진나라의 경제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또 형가의 진시황 암살 시도를 도왔던 고점리(高漸離)는 암살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민간을 떠돌아다녔는데, 그 음악적인 재능을 아낀 진시황은 그를 특별 사면하고 궁정악사로 임명했다.
진시황 용인술의 가장 큰 특징은 최대한의 재량권을 주는 것이다. 일단 사람을 기용한 후에는 의심하거나 간섭하지 않았으며 수하의 장군이나 승상에게도 재량권을 극대화시켜 주었다. 이신에게는 이십만 대군을 맡겼고, 왕전에게는 육십만 대군, 몽염에게는 삼십만 대군을 주었으며 그들의 권한을 제한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지휘과정에 간섭하지도 않았다. 젊은 패기로 이십만 대군을 이끌고 초나라를 쳤던 이신은 초나라에 패배했으나, 진시황은 책임을 묻지 않았고 계속해서 이신을 신임했으며 나중에 이신이 왕분과 함께 연나라를 쳐서 연나라 왕을 포로로 잡는 공적을 세울 수 있도록 했다.
전국을 통일한 후에도 진시황은 이들 공신과 노장들을 계속 중용했으며 이사나 왕전, 몽염 등 중요 인물들과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대표적으로 진시황과 이사는 삼십 년간 군신 관계로 있으면서 시작도 좋고 끝도 좋은 전형적인 사례가 되었다.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1521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