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이백의 작품은 시 외에도 약간의 사(詞)가 있는데 《존전집(尊前集)》에 12수, 《화엄절묘사선(花庵絕妙詞選)》에 7수가 수록되어 있다. 그중 《청평조(清平調)》 “운상의상화상용(雲想衣裳花想容)” 3수(역주: 《청평조》 3수는 전편을 볼 것)는 칠언절구 형식으로 당시 이원(梨園)의 악사들이 음악에 맞춰 노래 불렀다.
이백의 산문(散文)은 현재 60여 편이 남아 있다. 대구를 많이 사용하면서도 언어가 자연스럽고 유창해서 시가의 풍격과 유사하다. 그중에서도 《여한형주서(與韓荊州書)》와 《춘야연종제도리원서(春夜宴從弟桃花園序)》 두 작품이 후대에 널리 읽히거나 암송되고 있다.
이외에도 이백은 아름다운 경지의 산수시를 많이 지었다. 아래에 몇 가지 예를 들어본다.
“사람은 바다 위 달을 타고 오니 돛단배는 호수 속 하늘로 떨어지네.”
人乘海上月(인승해상월)帆落湖中天(범락호중천)
(《심양송제창거파양사마작(尋陽送弟昌峒鄱陽司馬作)–심양에서 동생 이창동 파양사마를 보내며 짓다》)
“달은 푸른 산을 따라 돌고 물은 푸른 하늘과 맞닿아 돌아가네.은하수는 하늘 위에서 아득하고 구름 낀 숲의 그윽함만 깨닫네.”
月隨碧山轉(월수벽산전)水合青天流(수합청천류)杳如星河上(묘여성하상)但覺雲林幽(단각운림유)
(《월야강행기최원외종지(月夜江行寄崔員外宗之)–달밤에 강을 가다 원외랑 최종지에게 부치다》
“금릉(金陵)의 밤 고요한데 서늘한 바람이 일어나니 홀로 높은 누대에 올라 오월(吳越) 땅을 바라보네.흰 구름은 물에 비추고 가을 성(城) 그림자를 흔들고흰 이슬 구슬처럼 맺혀 잠긴 가을 달에 떨어지네.”
金陵夜寂凉風發(금릉야적양풍발) 獨上高樓望吳越(독상고루망오월)白雲映水搖秋城(백운영수요추성)白露垂珠滴秋月(백로수주적추월)
(《금릉성서루월하음(金陵城西樓月下吟)–금릉성 서루 달 아래서 읊다》)
《송우인(送友人)–친구를 보내며》
청산은 북쪽 성곽 가로지르고,맑은 물은 동성을 휘돌아나간다이곳이 바로 이별하는 곳,그대는 바람에 날리는 마른 쑥처럼 멀리 떠나는구려.뜬 구름이 떠나는 그대 마음이라면지는 해는 오랜 친구 나의 정이라네.손 흔들며 이곳을 떠나니,그대 태운 말도 쓸쓸히 우는구나.
青山橫北郭(청산횡북곽)白水繞東城(백수요동성)此地一爲別(차지일위별)孤蓬萬里征(고봉만리정)浮雲遊子意(부운유자의)落日故人情(낙일고인정)揮手自茲去(휘수자자거)蕭蕭班馬鳴(소소반마명)
이 시에서 떠나는 벗은 바람에 날리는 마른 쑥처럼 멀리 떠나면 뜬구름처럼 정처 없이 떠다니눈데 오랜 친구인 나의 석별의 정은 지는 해처럼 아쉽고 애틋하다. 아쉬운 석별의 정과 서로 경치가 어우러져 읽으면 읽을수록 운치가 있다.
이백은 과거 오나라 왕 부차(夫差)가 미녀 서시(西施)와 밤새 술을 마시며 놀던 고소(姑蘇)에 올라 영사시(詠史詩 역사를 소재로 하는 시) 《오서곡(烏棲曲)》을 지었다. 이 작품의 악부 구제목은 《청상곡사(清商曲辭)‧서곡가(西曲歌)》다. 같은 제목의 작품으로 남조 양(梁)나라 간문제(簡文帝), 서릉(徐陵) 등의 시가 있는데 형식은 모두 칠언사구로 두 구마다 운을 바꾸는 방식이다. 《당송시순(唐宋詩醇)》에서는 이백의 이 시에 대해 “즐거움이 극에 달하면 슬픔이 생기는 뜻을 완곡하게 표현해 어느 덧 고소대에서 사슴이 뛰어노는 듯하다. 모든 것을 말하지 않았지만 감흥이 깊고 미묘하다 할만하다⋯⋯. 마지막을 한 구절로 끝맺은 것은 이루 다할 수 없는 오묘함이 있다.”라고 평가했다. 하지장은 이 시에 대해 “귀신도 울릴 수 있다”며 찬사를 보냈다.
《오서곡(烏棲曲)–까마귀 깃드는 노래》
고소대 위에 까마귀 깃들일 때,오나라 왕 부차는 서시에 취해 있네.오나라 노래 초나라 춤에 즐거움 끝이 없는데,청산은 지는 해를 반이나 삼켰더라.물시계에는 떨어진 물이 많이 쌓였고, 일어나 가을 달을 보니 강물에 떨어지네.동쪽은 점점 밝아오는데 이 즐거움 어이할꼬.
姑蘇台上烏棲時(고소대상오서시)吳王宮裏醉西施(오왕궁리취서시)吳歌楚舞歡未畢(오가초무환미필)青山欲銜半邊日(청산욕함반변일)銀箭金壺漏水多(은전금호루수다)起看秋月墜江波(기간추월추강파)東方漸高奈樂何(동방점고내락하)
이백과 마찬가지로 하지장 역시 도인이었다. 고대전기소설 《원화기(原化記)》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하지장은 서경(西京 장안) 선평방(宣平坊)에 집이 있었다. 대문 앞에 작은 판자문이 있었는데 한 노인이 나귀를 타고 드나드는 것을 늘 볼 수 있었다. 이렇게 5~6년이 지났지만 노인의 안색과 의복은 예전 그대로였고 또 가족도 없었다. 이웃에 물어보니 모두들 서시(西市)에서 장사하는 왕노인(王老)으로 다른 직업은 없다고 했다. 하지장은 그의 비범함을 알고 시간이 나면 늘 찾아가곤 했다. 노인은 그를 아주 공경하게 맞이했고 오직 동자 하나만 따르게 했다. 하지장이 직업을 묻자 노인은 마음대로 대답했다. 이렇게 서로 왕래가 깊어지면서 공경하는 예(禮)가 점점 더해졌고 말은 더 적어졌으며 마침내 도가수련(黃白之術)에 뛰어나다고 말했다. 하지장은 평소 믿음이 두터웠기에 배우고 싶었다. 나중에 부인과 함께 평소 아끼던 명주(明珠)를 가져다 노인에게 바치며 도법(道法)을 알려달라고 청했다. 노인은 즉각 동자를 시켜 시장에 가서 구슬을 팔아 떡을 사오게 했다. 동자가 명주를 30여 개의 떡으로 바꿔오자 하지장을 불렀다. 하지장은 진귀한 구슬을 너무 가볍게 쓴 것이 마음에 걸려 속이 편치 않았다. 노인이 “무릇 도(道)란 마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지 어찌 힘써 다투려 하는가, 계속 아까워한다면 술(術)을 이룰 수 없다네. 마땅히 깊은 산 외진 계곡에 들어가 부지런히 구해야지 시장이나 조정에서 줄 수 있는 게 아니라네.”라고 말했다. 하지장이 바로 깨닫고는 감사하며 떠났다. 며칠 후 노인의 거처가 사라졌다. 하지장은 이에 벼슬을 내려놓고 시골로 돌아가 도에 입문했다.
이렇게 신선 왕노인(王老)의 점오(點悟 역주: 점화를 받아 깨우친다는 뜻)를 거친 후 천보 3년(744년) 하지장은 도사가 되고 싶다는 상소를 올리며 고향에 돌아가 원래 살던 집을 도관(道觀)으로 만들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현종은 이를 허락하고 그의 아들을 조산대부(朝散大夫) 회계군사마(會稽郡司馬)로 삼아 가까이서 부친을 봉양하게 했다. 또 황태자 이하 조정의 문무백관들이 모두 참석한 성대한 송별식을 열어주었다.
송별식 중 이백은 《송하빈객귀월(送賀賓客歸越)–월로 돌아가는 빈객 하지장을 전송하며》을 지었는데 이 시에서 그는 왕희지의 고사를 인용했다.
경호에 흐르는 물 푸른 물결 출렁이고 사명광객(하지장) 돌아가는 배에 흥겨운 일 많으리라. 산음도사를 만나게 된다면 마땅히 황정경 써주고 거위와 바꾸리라.
鏡湖流水漾清波(경호류수양청파)狂客歸舟逸興多(광객귀주일흥다)山陰道士如相見(산음도사여상견)應寫黃庭換白鵝(응사황정환백아)
진대(晉代)의 대서예가 왕희지가 저 유명한 난정(蘭亭) 모임을 쓴 장소가 바로 하지장의 고향인 산음(山陰)이었다. 또 하지장 본인 역시 당시 저명한 서예가였다. 《태평어람(太平御覽)》에 따르면 왕희지는 평소 흰 거위를 아주 좋아했다. 산음의 어떤 도사가 이를 알고 왕희지에게 도교 경전인 《황정경》을 붓으로 써주면 대신 자신이 키우던 거위를 보수로 주겠노라고 했다. 이에 시선 이백은 하지장이 귀향하는 것을 알고 어쩌면 왕희지처럼 도사가 찾아와 책을 써달라고 요청할지 모른다고 한 것이다. 과거 왕희지가 《황정경》과 거위를 바꾼 일화가 발생한 장소가 바로 산음이었다. 때문에 뒤의 두 구절은 왕희지의 고사를 인용해 간접적으로 하지장의 서법이 몹시 뛰어남을 찬양한 것이다.
현종 황제도 친히 《송하지장귀사명(送賀知章歸四明)–사명으로 돌아가는 하지장을 전송하며》이란 시를 지어 그를 송별했다.
부귀영화를 버리고 도에 입도하고자노쇠를 핑계로 끝내 벼슬을 버렸네.어찌 현달한 인재를 아끼지 않으랴만(그대의) 고상한 마음을 어찌하랴!세상에서 비결을 얻어 세상 밖에서 고아한 흉금을 펼치네.홀로 청문(장안성 남동문)에서 전별하나니여러 신하들 이별을 아쉬워하는 정이 깊구나!
遺榮期入道(유영기입도)辭老竟抽簪(사로경추잠)豈不惜賢達(기불석현달)其如高尚心(기여고상심)寰中得秘要(환중득비요)方外散幽襟(방외산유금)獨有青門餞(독유청문전)群僚悵別深(군료창별심)
또 친히 서문을 썼다. “천보 3년 태자빈객(太子賓客) 하지장이 안분지족을 거울로 삼고 노쇠를 구실로 관직에서 물러나 도에 입문할 뜻을 상소했다. 짐은 점점 나이가 듦에 따라 관직을 물러나는 관례를 따라 적송자처럼 노닐게 하노라. 5월 5일 회계로 돌아가니 동로(東路)에서 전별하고자 육경(六卿)과 여러 신하들에게 명해 청문(靑門)에 장막을 설치하고 먼 길을 배웅하고자 한다. 덕과 나이를 숭상할 것인가 아니면 세속을 따를 것인가? 이소(二疏 역주: 한 선제 때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소광(疏廣)과 소수(疏受)를 가리킨다)에게 한나라 책만 밝히게 할 수는 없구나. 이에 시를 지어 가는 길에 주노라.”
나중에 태자였던 숙종이 제위에 오른 후 과거 자신의 스승이었던 하지장을 떠올리며 건원(乾元) 원년(757년) 11월 고 하지장에게 예부상서를 추증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하지장은 신선 왕노인을 만나 운명을 바꿨고 마지막에는 관직을 버리고 도를 닦았다. 하지장은 또 고향에 돌아온 후 《회향우서(回鄉偶書)–고향에 돌아와 우연히 겪은 일》를 지어 유명해졌다.
《회향우서》 1수
어려서 고향 떠나 늙어 돌아오니 사투리는 그대로건만 귀밑머리 다 빠졌네.아이들은 나를 몰라손님은 어디서 오셨냐고 웃으며 묻네.
少小離家老大回(소소리가로대회)鄉音無改鬢毛衰(향음무개빈모쇠)兒童相見不相識(아동상견불상식)笑問客從何處來(소문객종하처래)
《회향우서》 2수
고향 떠난 지 오래되어 모든 것이 거지반 사라져버렸네오직 문밖 경호의 물만 봄바람에 예전처럼 물결이누나
離別家鄉歲月多(이별가향세월다)近來人事半消磨(근래인사반소마)惟有門前鏡湖水(유유문전경호수)春風不改舊時波(춘풍불개구시파)
후인들은 대부분 이 두 편의 시가 감상적이라고 본다. 하지만 이 시에 담긴 진정한 의미는 인생을 확실히 깨닫고 적극적으로 향상하려는 의지에 담겨 있다. 왜냐하면 당시 하지장은 이미 신선의 점오(點悟)를 받고 수도하려는 자신의 마음이 이미 너무 늦었음을 느꼈지만 필경은 생명이 귀의할 바에 대해 분명히 알게 되었다. “손님은 어디서 오셨냐고 웃으며 묻네(笑問客從何處來)”에서 웃을 ‘소(笑)’는 득도한 후 하지장의 기쁜 심정을 유감없이 표현한 것이다.
천보 6년(747년) 이백은 특별히 하지장을 만나보기 위해 그를 찾아갔지만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난 상태였다. 시선이 남긴 두 편의 시는 시우(詩友)이자 도우(道友)였던 하지장을 그리워하는 정을 잘 보여준다.
《대주억하감(對酒憶賀監)–술을 마주하고 하지장을 회억하며 2수 및 서문》
태자빈객 하공은 장안 자극궁(紫極宮)에서 나를 한번 보고는 ‘적선인(謫仙人 하늘에서 귀양 온 신선)’이라 불렀다. 금 거북을 풀어 술과 바꿔 마시며 즐겼다. 그가 떠난 후 술을 대하니 슬픈 느낌이 들어 이 시를 짓는다.
1수
사명산에 미치광이 있으니바로 풍류객 하계진이라.장안에서 처음 만나나를 적선인이라 불렀네.지난날 술을 그리 좋아하더니지금은 소나무 아래 흙이 되었네.금 거북을 술로 바꾸던 곳생각하니 눈물이 수건을 적시네.
四明有狂客(사명유광객)風流賀季真(풍류하계진)長安一相見(장안일상견)呼我謫仙人(호아적선인)昔好杯中物(석호배중물)翻爲松下塵(번위송하진)金龜換酒處(금구환주처)卻憶淚沾巾(각억루첨건)
2수
미치광이(하지장)가 사명에 돌아오니산음도사들이 맞이했다네.칙명으로 경호의 물을 하사하시니그대의 누대와 못을 위한 영예였네.사람은 죽고 옛집만 남아허망히 연꽃만 피어 있네.이를 생각하면 아득한 꿈만 같고쓸쓸히 내 맘 아프게 하네.
狂客歸四明(광객귀사명)山陰道士迎(산음도사영)敕賜鏡湖水(칙사경호수)爲君臺沼榮(위군대소영)人亡餘故宅(인망여고택)空有荷花生(공유하화생)念此杳如夢(염차묘여몽)淒然傷我情(처연상아정)
이백의 시가는 “진실로 입만 열면 완성되니 소위 기교를 부리려 의도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기교가 없는 것도 아니다.(信口而成,所謂無意於工而無不工)”(명나라 호응린胡應麟의 말) 또 마치 두보이 자신의 시에서 표현한 것처럼 “이백의 시는 당할 이 없어, 자유분방한 그 생각 워낙 뛰어나다.(白也詩無敵,飄然思不群)” 즉 시단에서 이백은 워낙 독보적이라 비교 상대가 없었고 참신하고 뛰어나며 구상이 민첩했다.
“말은 천지 밖을 나서고 생각은 귀신의 표현을 벗어난다. 읽어보면 정신이 팔극을 달리고 헤아리면 마음이 천하를 품는다.(言出天地外,思出鬼神表.讀之則神馳八極,測之則心懷四溟.)” 이는 이백 시가예술의 풍격에 대해 만당(晩唐)시기 피일휴(皮日休)가 한 말이다.
“(이백의 시는) 마치 동정의 들판에서 연주하는 것과 같아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늘 머물지 않는 까닭에 시인이나 글자를 새기는 사람이 의론할 바가 아니다.(如張樂於洞庭之野,無首無尾,不主故常,非墨工槧人所可擬議.)” 이는 이백 시가에 대한 북송 진사도(陳師道)의 평론이다.
한편 당나라의 문장가 백거이(白居易 백낙천)는 《이백묘(李白墓)》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채석강가 이백의 무덤 무덤을 덮은 풀은 구름에 닿을 듯 자랐네. 가련하다 무너진 무덤 속에 뼈만 남아 있겠지. 일찍이 하늘과 땅을 울리던 문장 허나 시인은 대개 박명하고 뜻을 잃고 떠도는데 그대도 비껴가지 않았구나.물가의 풀과 이끼는 잘도 견디는데대아(大雅)의 가르침 더는 들을 수 없구나.
采石江邊李白墳(채석강변이백분) 繞田無限草連雲(요전무한초연운) 可憐荒壟窮泉骨(가련황롱궁천골) 曾有驚天動地文(증유경천동지문) 但是詩人多薄命(단시시인다박명) 就中淪落不過君(취중윤락불과군)渚蘋溪藻猶堪薦(저빈계조유감천)大雅遺風已不聞(대아유풍이불문)
당송팔대가의 한명인 북송의 증공(曾鞏)은 《대인제이백문(代人祭李白文)–사람을 대신해 이백에게 제사를 올리는 글》에서 “그대의 문장은 걸출함이 사람을 뛰어넘었도다. 땅을 가르고 하늘이 열리며 구름이 오르고 비가 내리는구나. 만물을 뿌리고 낳음에 아름다우면서도 기이하도다. 너무나 큰 기교는 자연스러워 사람의 힘으로는 미칠 수 없구나. 또 장하(長河)처럼 크고 분방하다 만 리에 한번 쏟아내니 마지막 기세가 더욱 웅장하구나. 그 문장이 너무나 커서 이에 이르렀구나. 뜻과 기개가 표연하니 웅대함을 발양시켰노라.”라고 썼다.
두보는 《기이십이백이십운(寄李十二白二十韻)–이백의 20운에 부치며》에서 이백의 시가에 담긴 뛰어난 예술적 영향력과 후세에 유전된 거대한 명성을 표현했다.
전에 사명광객 하지장이그대를 하늘에서 귀양 온 신선이라 불렀네.붓을 대면 비바람 놀라게 하고시를 지으면 귀신을 울게 했었네.명성이 이로부터 커져서 부침하다가 하루아침에 신세 폈었지.문채는 각별한 임금 은혜 입었고 흘러 전하는 것마다 절륜했었네.
昔年有狂客號爾謫仙人筆落驚風雨詩成泣鬼神聲名從此大汩沒一朝伸文采承殊渥流傳必絕倫
세상을 뒤덮은 이백 시가의 예술적 매력과 거대한 명성이 후세에 유전됨을 한마디로 지적했다.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1544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