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 덕혜(德惠)
【정견망】
북송(北宋) 시기 왕길(王吉)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단주(單州 지금의 산동 단현 일대)의 노병이었다. 그는 한여름에 늘 뜨거운 햇빛 아래 누워 있고 한겨울에는 전신을 차가운 계곡물 속에 담그고 그저 머리만 내밀고 있었다. 그곳 사람들은 일반인들과는 전혀 다른 그의 거동을 보고 많은 이들이 그가 도력이 있는 선비라고 생각했다.
당시 단주 태수에게 묵기허(萬俟虛 역주: 성이 萬俟mòqí로 묵기로 읽고 이름이 허다.)란 아들이 있었다. 그는 비록 왕길의 사적에 대해 듣긴 했지만 마음에 두지 않았고 도를 구하는 마음이 강렬하지 않았다. 송 휘종 숭녕(崇寧) 초년(1102년) 왕길이 묵기허 앞을 한번 지나갔다. 묵기허는 일시적으로 흥취가 일어나 그를 자신이 독서하는 서관(書館)으로 초청해 함께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신 후 왕길은 붓을 들어 일부 병을 고치는 처방을 써주었다. 묵기허가 시험해보니 과연 일부 난치병을 고칠 수 있었고 효과가 아주 좋았다. 그러나 자신은 병이 없으므로 마음에 두지 않았고 시간이 오래되자 그만 잃어버렸다.
한 단락 시간이 흘러 왕길이 또 묵기허를 찾아와서는 말했다.
“당신들 부귀한 집안의 자제들이 늘 술을 마시는 것은 비위(脾胃)에 해롭고 오래되면 병에 걸릴 것입니다. 내가 안마술을 하나 가르쳐줄 테니 병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꼭 기억할 것은 절대 함부로 남에게 몰래 전해주면 안됩니다.”
묵기허는 이에 동의하고 안마술을 배웠다.
얼마 안 되어 왕길이 또 와서 말했다. “나는 곧 떠날 것입니다.”하고는 다음 날 죽어버렸다. 묵기허가 그를 장사지냈다. 몇 달이 지나 어떤 사람이 다른 지방에서 왕길을 보았다고 했다. 묵기허가 얼른 묘를 파헤치고 관을 열어보니 그 속에는 시신은 없고 신발만 있었다. 즉시 왕길이 득도한 고인임을 알았다. 이것은 시해의 법으로 득도하여 떠난 것이었다.
나중에 묵기허는 늘 이 안마술을 연습해 70이 되었음에도 얼굴이 복사꽃처럼 윤택이 났다. 식사량도 많았고 또 술도 마실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늘 소년 시절에 도 닦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기연을 놓친 것을 후회했다. 묵기허는 이 안마술을 그 어떤 사람에게도 전해주지 않았다. 심지어 형에게도 전해주지 않았다. 그의 형은 바로 악비를 모함한 진회를 도운 묵기설(萬俟卨)이다. 지금까지도 절강 항주의 악왕묘 앞에는 철로 만든 상이 네 개가 있는데 두 손이 뒤로 묶여 있고 얼굴을 묘를 향해 꿇어앉아 있는데 그중 한명이 묵기설이다.
왕길은 병을 고치는 약방을 묵기허에게 주었는데 아마 그가 병자를 도우려는 착한 마음이 있는가 관찰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애석하게도 없었는데 이 역시 그는 단지 건강하게 하는 안마술만 얻은 원인이 아닐까. 이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도가의 것은 비록 병을 고치는 안마술이라도 모두 표준에 부합하는 사람만을 선발해야만 가르칠 수 있어서 널리 전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중생을 널리 제도하자면 오직 불가 대법(大法)만이 가능하다. 묵기설은 당연히 동생이 안마술을 얻은 사정을 알았을 것이고 신선의 존재도 알았을 것이다. 이는 또 그에 대해 일종 점화였지만 그는 결국 자기 이익을 위해 충신 악비를 박해했고 나중에 백성들이 침을 뱉는 대상이 되었으니 진실로 이익과 욕심에 물든 마음이 미혹에 빠져 방향을 잃은 것이다.
자료출처:《역세진선체도통감(曆世真仙體道通鑒)》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533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