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2. 하늘을 찌르는 검협의 의기
이백을 언급할 때 시가(詩歌)와 함께 논할 수 있는 것은 그의 검술(劍術)과 협의(俠義)의 기다. 그는 일찍이 스스로를 소개하면서 “열다섯에 검술을 좋아해 두루 제후들을 뵈었다(十五好劍術,遍幹諸侯)”고 말한 적이 있다. 류전백(劉全白)은 《당고한림학사이군갈기(唐故翰林學士李君碣記)》에서 “젊었을 때 생산에 종사하지 않고 협객으로 경성에 이름이 알려졌다.”고 했다.
위호(魏顥)는 《이한림집서(李翰林集序)》에서 “젊었을 때 협객으로 몇 사람을 베어 죽였다.”라고 했다. 그 자신도 “머리 묶고 아직 세상일 알지 못해도 사귀는 바는 모두 호걸영웅이라네(結發未識事,所交盡豪雄)”, “시퍼런 칼날에 몸을 맡기고 속세에서 사람을 죽였네(托身白刃裏,殺人紅塵中)”(《증종형양양소부호(贈從兄襄陽少府皓)–종형인 양양소부 이호에게 드림》)라고 했다.
중년에 장안을 떠나 옛날 제(齊)나라와 노(魯)나라 지역을 유람한 이유도 도를 닦는 것 외에 검술을 배우기 위함이었다. 또 강양(江陽) 현령으로 있던 옛 친구 육조(陸調)에게 주는 시에는 일찍이 오릉의 호족과 맞서다 겹겹이 포위당한 사건을 재미있는 추억삼아 말하고 있다. 자세한 것은 《서구증강양재육조(敘舊贈江陽宰陸調)》를 참조.
협간의담(俠肝義膽 협객의 간 의사의 담)
이백은 자신을 ‘젊은 협객(少任俠)’으로 ‘재물을 가볍게 여기고 잘 베풀었다.’ 이백은 평생 협객을 찬양하는 수많은 시를 지어 나라가 위급한 상황에 용감하게 몸을 내던져 공을 세우고도 공을 자처하거나 작위나 봉록을 탐하지 않는 호협(豪俠)들을 찬미했다. 《고풍》 제10수에서는 노중련(魯仲連)에 대해 “진(秦)나라 군사를 물리치고 명성 떨치니 후세에 남긴 빛을 우러르네(卻秦振英聲,後世仰末照)”라고 찬사를 보냈다. 또 “나 또한 호탕한 사람이니 옷을 털고 벗으로 삼을 만하다네(吾亦澹蕩人,拂衣可同調)”라고 말했다. 그는 역사 속의 이런 협의인물들에게 찬동하면서 자신의 의로운 성격을 드러냈다.
이백은 어려서부터 칼춤을 좋아했다. 열다섯 때 좌린(左鄰)의 격검(擊劍)노인으로부터 검술을 배웠으며 스물에는 늘 말을 타고 칼을 찬 채로 큰 도시를 다니곤 했다.
《결객소년장행(結客少年場行)–젊은이들 모여서》
자연마(紫燕馬 명마) 황금빛 눈동자 히힝 거리며 푸른 갈기 흔드네.날 밝자 서로 내달리며 낙양성 동문에서 의리 맺었네.젊은이가 검술을 익히니 백원공(白猨公)쯤은 우습게 알지.구슬 옷에 비단 띠 끌며 비수로 오홍검(오나라의 보검)을 찼다네.전부터 만 명을 대적할 용맹에 이것까지 지녔으니 거친 바람 일어났네.친교 맺고 극맹(劇猛 한나라 때 협객)을 따르며 술 마시러 신풍에 갔네.웃으며 술 한 잔 비우고 도성 저자에서 사람을 죽였네.역수 차갑다는 노래에 부끄럽게 부질없이 무지개가 해를 뚫었네.연나라 태자의 일 이루지 못하고 헛되이 진시황 궁궐에서 죽었네.안색이 잿빛이 된 무양과 어찌 함께 공을 이루랴.
紫燕黃金瞳(자연황금동) 啾啾搖綠鬃(추추요록종)平明相馳逐(평명상치축) 結客洛門東(결객낙문동)少年學劍術(소년학검술) 淩躒白猿公(능력백원공)珠袍曳錦帶(주포예금대) 匕首插吳鴻(비수삽오홍)由來萬夫勇(유래만부용) 挾此生雄風(협차생웅풍)托交從劇孟(탁교종극맹) 買醉入新豐(매취입신풍)笑盡一杯酒(소진일배주) 殺人都市中(살인도시중)羞道易水寒(수도역수한) 從令日貫虹(종령일관홍)燕丹事不立(연단사불립) 虛沒秦帝宮(허몰진제궁)舞陽死灰人(무양사회인) 安可與成功(안가여성공)
촉 땅을 나선 후 그는 남쪽으로 동정호로 놀러갔다 수레를 타고 오월(吳越)을 유람하며 안륙에 정착했다. 나중에 또 동로(東魯)의 문양(汶陽 지금의 산동 사수泗水 이백장李白莊)으로 이주했다. 각 지역을 두루 다니는 기간에 그는 늘 검을 차고 다니며 열심히 연마했다. 그는 많은 시에서 보검을 언급한다. 가령 “높은 관에 칼을 차고서 한 형주께 허리 굽혀 인사드렸지(高冠佩雄劍,長揖韓荊州)”, “허리춤에 연릉검 차고 옥허리 띠에 구슬 장식 도포 입었네(腰間延陵劍,玉帶明珠袍)” 등이다. 이백의 보검 사랑은 유별나서 마치 몸과 그림자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협객행(俠客行)》
조나라 협객 무늬 없는 갓끈 매고 오구검이 서릿발처럼 빛났네.은빛 안장 백마를 비추니 유성처럼 빠르게 달리네.열 걸음에 하나씩 죽이며 천리를 가도 멈추지 않네. 일 끝낸 후 훌훌 옷 털고 떠나 신분과 이름 깊이 숨겼네.한가로이 신릉군 둘러 술을 마시면 칼을 풀어 무릎 위에 뉘어 놓는다.고기를 집어 주해를 먹이고 술잔 들어 후영에게 권했네.세 잔에 그러마고 응낙하면 오악이 오히려 가벼울 정도였네.눈이 어지럽고 귀가 후끈거린 후 의기는 흰 무지개로 생겨났고조나라 구하려 쇠몽둥이 휘두르자 한단이 먼저 놀라 흔들렸다네.천추에 빛날 두 장사(주해와 후영) 대량성에 이름 떨쳤네.죽어서도 남을 협객의 향기 세상 영웅들에 부끄러움 없어라.그 누가 서재에 틀어박혀 흰머리 나도록 태현경이나 지으리.
趙客縵胡纓(조객만호영) 吳鉤霜雪明(오구상설명)銀鞍照白馬(은안조백마) 颯沓如流星(삽답여류성)十步殺一人(십보살일인) 千里不留行(천리불류행)事了拂衣去(사료불의거) 深藏身與名(심장신여명)閑過信陵飲(한과신릉음) 脫劍膝前橫(탈검슬전횡)將炙啖朱亥(장자담주해) 持觴勸侯嬴(지상권후영)三杯吐然諾(삼배토연락) 五嶽倒爲輕(오악도위경)眼花耳熱後(안화이열후) 意氣素霓生(의기소예생)救趙揮金槌(구조휘금추) 邯鄲先震驚(한단선진경)千秋二壯士(천추이장사) 烜赫大梁城(훤혁대량성)縱死俠骨香(종사협골행) 不慚世上英(불참세상영)誰能書閣下(수능서각하) 白首太玄經(백수태현경)
이백은 문양에서 3년간 검술을 배웠는데 철저마침(鐵杵磨針 쇠몽둥이를 갈아 가는 바늘을 만듦)의 정신으로 밤낮으로 고생스레 연마하길 장기간 해이해지지 않아 검술에서도 노화순청(爐火純青 최고의 경지)의 지경에 도달했다. 일찍이 여러 차례 배민(裴旻)의 칭찬을 들을 정도였다. 여기서 배민은 대당삼절(大唐三絕)의 하나다. 삼절이란 이백의 시가, 배민의 검무, 장욱의 초서를 말한다. 그는 또 활쏘기에도 능해서 유주(幽州)에서 사냥할 때 “한 화살로 호랑이 두 마리를 꿰뚫고(一射兩虎穿)” “등 돌리니 솔개 두 마리 떨어지네(轉背落雙鳶)”(《증선성우문태수겸정최시어(贈宣城宇文太守兼呈崔侍禦)–우문 선성태수에게 드리며 아울러 최 시어에게 주다》)
검술을 배우러 산동에 온 이백은 폭력을 없애고 양민을 편안케 해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도와 각 지역 호걸들의 존경을 받았다. 위호는 《이한림집서(李翰林集序)》에서 이백이 불공정한 일에서 늘 약자 편을 들고 백성들을 위해 해악을 제거했으며 일찍이 여러 명을 베어죽인 적이 있다고 했다. 또 협객들과 교류하는 중에 강남 친구로부터 용천검(龍泉劍)을 얻었다고 한다. “금빛 말굴레 쓴 준마에 비단 허리띠에 용천검 비껴차네(金羈絡駿馬,錦帶橫龍泉)”(《유별광릉제공(留別廣陵諸公)–광릉에 남은 여러분을 떠나며》)
이백은 또 노중련(魯仲連)을 아주 좋아했다. 예를 들어 《증종형양양소부호(贈從兄襄陽少府皓)》에서는 “막 머리 묶고 세상일 알지 못할 때 사귄 이들은 모두 호걸영웅이었네. 노중련은 진(秦)나라 물리치고 상도 받지 않았는데 진비를 죽인 일이 무슨 공이 되겠는가?(結發未識事,所交盡豪雄. 卻秦不受賞 擊晉寧爲功)”라고 했다. 이백은 벗을 사귈 때 의리를 중시하고 권력가에게 허리 숙여 아첨하는 일은 용납하지 않았다.
《결말자(結襪子)–버선 끈을 매며》
연나라 남쪽의 장사(고점리)와 오나라 호걸(전저)은축(筑)에 납덩이 넣고 생선 속에 칼 숨겼네.임금의 두터운 은혜에 감격해 군명을 따르거늘태산 같은 목숨도 기러기 털처럼 가볍게 던졌네.
燕南壯士吳門豪(연남장사오문호)築中置鉛魚隱刀(축중치연어은도)感君恩重許君命(감군은중허군명)太山一擲輕鴻毛(태산일척경홍모)
이백은 일찍이 촉 지역을 유람한 후 검을 메고 고향을 떠나 남으로는 창오(蒼梧) 동으로는 명해(溟海)에 이르렀다. 또 장안을 떠나 고향에 돌아온 후 동로를 떠돌았는데 심지어 10년을 유람하기도 했다. 그의 일생은 그야말로 두루 떠돌아다니는 일생이었다. 가는 곳마다 신선을 찾고 도를 방문한 자취를 남기고 또 가무(歌舞)와 연음(宴飲)을 남겼으며 벗들과 사귄 협의(俠義)와 호기(豪氣)를 남겨놓았다.
이백은 재물을 경시하고 베풀기를 좋아했다. 젊어서 멀리 원유를 떠날 때는 비교적 경제적 여유가 있었지만 매번 자신이 교제했던 실의에 빠지거나 곤경에 처한 여러 사람들을 돕다보니 불과 1년 사이에 삼십만이 넘는 금을 다 써버렸다.(《상안주배장사서(上安州裴長史書)》). 하지만 돈을 다 쓰고 나서 더 이상 돈이나 재물로 벗을 도울 수 없었을 때에도 이백은 의기를 버리지 않았다. 권세에 맞서 정직하고 비굴하지 않았으며 벗을 대함에 속을 터놓고 진심으로 대했다.
이백이 강릉에 온 후 첫 번째 원유(遠遊 장거리 여행)에서 촉 땅의 동창 오지남(吳指南)과 함께했다. 이백은 나중에 이 여행을 ‘남궁창오(南窮蒼梧)’라 했는데 전설에 따르면 창오는 순(舜)임금을 장사지낸 곳이라고 한다. 창오에서 돌아와 동정호를 유람할 때 친구 오지남이 갑자기 병에 걸려 급사했다. 이백은 시신을 지키며 통곡했는데 심지어 피를 토할 정도로 심하게 울었다. 길을 가던 행인이 그의 곡소리를 듣고 마음이 슬퍼질 정도였다. 한번은 시신을 지킬 때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났는데 이백은 오지남의 시신을 지키며 한걸음도 물러나지 않았다. 나중에 오지남의 시신은 임시로 호숫가에 매장했다.(《상안주배장사서(上安州裴長史書)》)
3년 후 이곳을 다시 찾아온 이백은 벗의 유해를 찾아낸 후 칼로 호수에서 유골을 하나하나 깨끗이 씻은 후 악성(鄂城)까지 등에 메고 갔다. 그곳에서 돈을 빌려 오지남을 후하게 장사 지냈다.
호연정기(浩然正氣)
오지남의 장례를 후하게 치른 후 얼마 되지 않아 이백은 안륙(安陸)에서 살았다. 당시 그의 벗인 원구단도 안륙에서 은거하고 있었다. “안륙에서 술로 숨어 지내며 허송세월한 지 십 년(酒隱安陸 蹉跎十年)” 기간에 이백은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다. 부근에 단구생, 호자양 등 도를 닦든 벗들과 친하게 사귀었고 양양에 놀러갔을 때는 녹문산(鹿門山)에 은거 중이던 맹호연(孟浩然)과도 친분을 맺었다. 그는 이백보다 12세 연상으로 당시 이미 멀리까지 시인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이백과 맹호연은 둘 다 산림에 은거하며 시와 술을 낙으로 삼았고 정과 의리를 중시했으며 권력자들에게 허리를 굽히려하지 않았다.
《신당서》에는 맹호연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한번은 맹호연이 벗과 술을 마시며 담소하다 깜빡하고 조정 대신 한조종(韓朝宗)과의 약속을 잊은 적이 있다. 한조종이 이 때문에 크게 화를 내 맹호연에 대한 추천을 미뤘을 뿐만 아니라 장안에서 쫓겨나야 했다. 하지만 맹호연은 이 일에 대해 나중에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이백은 《증맹호연(贈孟浩然)–맹호연에게 드리다》이란 시에서 맹호연의 태연자약하고 호방한 태도로 “임금도 아니 섬긴다(不事君)”며 크게 칭찬했다. 이 시에서 이백은 맹호연에 대한 존경이 단순히 그의 문학적 재능이 뛰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공명에 얽매이지 않고 차라리 푸른 솔과 흰 구름 사이에서 은거하려 한 그의 덕행을 존경한다고 표현했다.
《증맹호연(贈孟浩然)–맹호연에게 드리다》
내가 사랑하는 맹호연은풍류로 천하에 이름을 날렸네.젊은 시절 벼슬을 버리고백발 되어 산속에 누웠구나.달에 취해 노상 술만 마시고꽃에 홀려 임금도 아니 섬기네.높은 산을 어이 우러르랴!다만 이 맑은 향기에게 경의를 표할 뿐.
吾愛孟夫子(오애맹부자)風流天下聞(풍류천하문)紅顏棄軒冕(홍안기헌면)白首臥松雲(백수와송운)醉月頻中聖(취월빈중성)迷花不事君(미화불사군)高山安可仰(고산안가앙)徒此揖清芬(도차읍청분)
수년 후 이백은 다시 강하(江夏)에서 맹호연과 해후했다. 이별할 때 두 사람은 황학루에 올라가 술을 마시며 즐겁게 대화를 나눴다. 이때 이백이 쓴 시가 저 유명한 《황학루송맹호연지광릉(黃鶴樓送孟浩然之廣陵)–황학루에서 광릉으로 떠나는 맹호연을 보내며》로 우정을 중시하고 오랜 벗을 생각하는 이백의 깊은 정이 여실히 드러난다.
《황학루송맹호연지광릉(黃鶴樓送孟浩然之廣陵)–황학루에서 광릉으로 떠나는 맹호연을 보내며》
옛 친구 서쪽으로 황학루에서 이별하고완연한 춘삼월 양주로 내려가네.외로운 돛단배는 푸른 하늘로 사라지고보이는 건 하늘에 맞닿아 흐르는 장강뿐.
故人西辭黃鶴樓(고인서사황학루)煙花三月下揚州(연화삼월하양주)孤帆遠影碧空盡(고범원영벽공진)唯見長江天際流(유견장강천제류)
개원 23년(735년) 무렵 단구생의 사촌형이 이백을 태원(太原)으로 초청했다. 이 기간에 이백은 당시까지 병사로 있던 곽자의(郭子儀)를 사귀게 된다. 의기가 충만하고 장차 천고의 풍류인물이 된 두 사람이 함께 목숨을 걸고 의리를 지킨 이야기는 천고에 아름다운 일화로 남았다.
이백은 음주와 도박을 좋아했을 뿐만 아니라 기마와 활쏘기에도 정통했다. 때문에 자연스레 당시 사람들이 속으로 동경하는 인륜의 풍채가 되었다. 이백의 뛰어난 풍채를 본 임화(任華), 위만(魏萬) 등이 천리를 마다않고 찾아와 이백을 따랐다. 사명광객 하지장은 이백을 처음 보자마자 ‘적선인’이라 감탄하고 금 거북을 풀어 술을 마셨다. 문인 무십칠(武十七)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이백을 따랐으며 안록산의 반군이 동로(東魯) 지역을 점령했을 때에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이백의 자녀들을 데려오기도 했다.
《증무십칠악병서(贈武十七諤並序)–무악에게 주다 및 서문》
문인 무악(武諤)은 의리가 깊은 사람이라 성품이 질박하나 굳세고 용감하다. 요리(要離 오나라 협객)의 기풍을 흠모해 물가에서 숨어 낚시질하며 세상일에 자주 관여하지 않았다. 중원에서 난리가 났다는 말을 듣고 서쪽에서 나를 찾아왔다. 사랑하는 아들 백금(伯禽)이 동로(東魯)에 있는데 장차 반란군의 위험을 무릅쓰고 데려 오기로 약속하니 술을 마시고 감격한 김에 붓을 들어 이 시를 준다.
한 필 비단 같은 말을 타고 내일 오문(吳門)을 지나리라.그는 요리(要離 춘추시대 오나라의 자객)와 같은 협객으로 서쪽에서 와 은혜를 갚으려 하네.웃음 띠며 연나라 비수를 꺼내고는어루만지며 끝내 말이 없구나.적군 개들은 맑은 낙수에 짖어대고 천진교(天津橋)는 변방의 담장이 되었구나.사랑하는 아들이 동로에 떨어지니 애끓는 원숭이처럼 괜히 슬퍼지누나.임회(林回)가 천금 백옥을 버린 것 같은 마음이지만 천릿길이라 함께 오지 못했네.그대 나를 위해 아들을 데리러 가벼운 차림으로 회수를 건넌다하니,그 정성 천도에 부합하니 등유(鄧攸)의 영혼에 부끄럽지 않으리.
馬如一匹練(마여일필련) 明日過吳門(명일과오문) 乃是要離客(내시요리객) 西來欲報恩(서래욕보은)笑開燕匕首(소개연비수) 拂拭竟無言(불식경무언)狄犬吠清洛(적견폐청락) 天津成塞垣(천진성새원)愛子隔東魯(애자격동로) 空悲斷腸猿(공비단장원)林回棄白璧(임회기백벽) 千里阻同奔(천리조동분)君爲我致之(군위아치지) 輕繼涉淮原(경계섭회원)精誠合天道(정성합천도) 不愧鄧攸魂(불괴등유혼)
역주: 1) 요리(要離) : 춘추시대 오나라의 자객으로 합려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돕기 위해 처자식을 희생하고 라이벌인 경기에게 중상을 입혔다. 경기가 그의 충심에 감동해 풀어주었으나 나중에 칼로 자결함.
2) 임회(林回) : 《장자 산목(山木)》에 나오는 인물. 어떤 일로 도망가는데 천금의 백옥을 버리고 어린 자식을 업고 도망쳤다. 재물보다는 천륜을 중시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3) 등유(鄧攸) : 진(晉)나라 사람으로 석륵(石勒)의 난 때 피난을 가다 도적에게 쫓겼다. 등유 부부가 자기 아들과 동생의 아들을 데리고 가다 도저히 두 아이를 데려갈 수 없게 되자 자기 아이를 포기하고 동생의 아이를 데려갔다. 여기서 이백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아들을 구하러 떠나는 무악을 등유에 비유한 것이다.
장안을 떠난 후 천보 14년(755년)에 안사의 난이 발생할 때까지 이백은 줄곧 도처를 운유하고 있었다. 이 10년 사이 조정은 날로 부패해졌고 이백이 운유하는 중에도 불길한 소식들이 잇따라 들려왔다. 우선 하지장이 세상을 떠났고 최성보(崔成甫)가 관직에서 쫓겨났으며 이적지(李適之)는 핍박을 받다 자살했다. 이옹(李邕)과 배돈복(裴敦複)은 모두 곤장을 맞다 죽었다. 간신들이 요직을 장악하고 온갖 비방이 난무하고 현명하고 능력 있는 인재들이 박해당하는 현실에 직면해 이백은 《답왕십이한야독작유회(答王十二寒夜獨酌有懷)》를 지었다. 이 시에서 이백은 조정의 부패를 맹렬히 공격했다. 이런 불평의 목소리가 커지면 당시 조정의 실권을 쥐고 있던 이임보(李林甫) 등에게 박해를 당할 우려가 있었지만 의롭고 강직했던 이백 결코 간신배나 권력자들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답왕십이한야독작유회(答王十二寒夜獨酌有懷)―왕십이의 ‘한야독작유회’에 답하며》
어제 밤 오 땅에 눈 내리니 왕휘지가 아름다운 감흥 동했네.만 리에 뜬구름 청산을 휘감고 푸른 하늘 가운데로 외로운 달 흘러갔네.외로운 달이 은하수 물결 위로 맑게 비치는데 북두칠성 반짝이고 장경성(금성)은 밝구나.나를 생각하며 술을 마시니 밤 서리 하앟게 내리고 화려한 난간 있는 우물에 얼음기운 솟아있는데백년도 못 채우고 훌쩍 사라질 인생인데 마땅히 만고의 시름 술에 취해 날려야지.
昨夜吳中雪(작야오중설) 子猷佳興發(자유가흥발)萬里浮雲卷碧山(만리부운권백산) 青天中道流孤月(청천중도류고월)孤月蒼浪河漢清(고월창랑하한청) 北斗錯落長庚明(북두착락장경명)懷余對酒夜霜白(회여대주야상백) 玉牀金井冰崢嶸(옥상금정빙쟁영)人生飄忽百年內(인생표홀백년내) 且須酣暢萬古情(차수감창만고정)
그대는 하지 못하리라 살쾡이 기름 바르고 쇠발톱 끼운 투계를 배워무지개 날릴 듯 콧김을 내뿜는 것을.그대는 하지 못하리라가서한(哥舒翰)을 배워 밤에 칼 차고 청해에서 이리저리 날뛰며서쪽 석보성(石堡城) 학살하고 높은 관직 얻는 것을.북창에서 시부를 짓고 읊조리는데,만 마디 말이 한 잔 물만도 못해세상 사람들 이를 듣고도 모두 고개 흔드니마치 봄바람이 말 귀를 스쳐가는 것 같구나.
君不能狸膏金距學鬪雞(군불능이고금거학투계) 坐令鼻息吹虹霓(좌령비식취홍예)君不能學哥舒(군불능학가서) 橫行青海夜帶刀(횡행청해야대도) 西屠石堡取紫袍(서도석보취자포)吟詩作賦北窗裏(음시작부북창리) 萬言不直一杯水(만언부직일배수)世人聞此皆掉頭(세인문차개도두) 有如東風射馬耳(유여동풍사마이)
물고기 눈과 같은 자들조차 나를 비웃으며 자신은 명월주와 같은 인재라 말하네.화루마(명마)는 몸을 웅크리고 먹지 못하는데 절름발이 나귀가 뜻을 얻어 봄바람에 소리치네.〈절양(折揚)〉이나 〈황화(皇華)〉 같은 노래 세속에 어울리는데진 평공 〈청각(清角)〉 들어 곡을 모욕했으니〈파인(巴人)〉을 좋아하는 이 〈양춘(陽春)〉에 화답할까?초 땅에선 원래 기이한 보석을 천하게 여겼네.황금을 다 써도 진정한 교제 이루지 못하고머리가 희도록 유생으로 있어도 몸은 무시받네.한번 담소하는 사이에 낯빛을 잃으면 파리의 참언과 비방 소리 시끄럽구나.
魚目亦笑我(어목역소아) 謂與明月同(위여명월동)驊騮拳跼不能食(화류권국불능식) 蹇驢得志鳴春風(건려득지명춘풍)折揚皇華合流俗(절황황화합류속) 晉君聽琴枉清角(진군청금왕청각)巴人誰肯和陽春(파인수긍화양춘) 楚地猶來賤奇璞(초지유래천기박)黃金散盡交不成(황금산진교불성) 白首爲儒身被輕(백수위유신피경)一談一笑失顏色(일담일소실안색) 蒼蠅貝錦喧謗聲(창승패금훤방성)
증참이 어찌 사람을 죽였겠는가마는참언이 세 번 이르자 어진 모친도 놀라셨다네.그대와 속마음을 논하고 그대 손을 잡으니내게 있어 영예와 욕됨 또한 뭐가 있는가?공자도 오히려 봉황과 기린 다쳤단 말 들었는데잘난 체 하는 동영은 또 어떤 닭이나 개였는가?평생 잘난 체하여 어울리지 못해 괴로웠으니은혜는 멀어지고 중매인도 애만 쓰니 뜻이 자꾸 어긋나네.엄자릉은 천자에게 높은 읍만 하였으니하필 긴 칼로 턱 괴고 임금을 섬기리?
曾參豈是殺人者(증참기시살인자) 讒言三及慈母驚(참언삼급자모경)與君論心握君手(여군논심악군수) 榮辱於余亦何有(영욕어여역하유)孔聖猶聞傷鳳麟(공성유문상봉린) 董龍更是何雞狗(동룡경시하계구)一生傲岸苦不諧(일생오안고불해) 恩疏媒勞志多乖(은소매로지다괴)嚴陵高揖漢天子(엄릉고읍한천자) 何必長劍拄頤事玉階(하필장검주이사옥계)
현달해도 귀하게 여길 바 아니고 궁핍해도 또한 슬퍼할 바 아니라네.한신은 주발이나 관영과의 비교를 부끄러워했고예형은 백정 같은 이들 쫓아다니길 부끄러워했네.그대는 보지 못했는가?북해태수 이옹의 영준하고 호방한 기상이 지금은 어디에도 없는 것을.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형부상서 배돈복의흙무덤에 석 자 쑥과 가시덤불만 자란 것을.젊어서 일찍이 오호로 떠나려 하였으나이런 일을 보니 더욱 부귀공명 멀리하리라.
達也不足貴(달야부족귀) 窮也不足悲(궁야부족비)韓信羞將絳灌比(한신수장강관비) 禰衡恥逐屠沽兒(예형치축도고아)君不見李北海(군불견이북해) 英風豪氣今何在(영풍호기금하재)君不見裴尚書(군불견배상서) 土墳三尺蒿棘居(토분삼척호극거)少年早欲五湖去(소년조욕오호거) 見此彌將鍾鼎疏(견차미장종정소)
역주: 1) 자유(子猷) : 동진의 명필 왕휘지. 그가 산음에 살 때 어느 날 밤 눈이 내리자 친구인 대규(戴逵)가 생각나 배를 타고 섬계까지 갔다가 만나지 않고 그냥 되돌아왔다. 흥취가 일어 찾아갔지만 흥취가 다해 돌아온 것이다.
2) 이고금거(狸膏金距): 이고는 살쾡이 기름인데 닭을 잘 잡아 닭들이 두려워한다. 때문에 투계에서 그 기름을 발라 상대 닭의 기를 꺾는데 사용했다. 금거는 금속으로 만든 발톱으로 투계의 발에 달아서 상대편을 공격하게 했다. 현종이 닭싸움을 좋아해 투계꾼들이 총애를 받아 기세가 등등한 것을 풍자.
3) 가서한(哥舒翰): 현종 때 유명한 장군으로 돌궐족 출신. 농우하서절도사를 지냈으나 나주에 안녹산에게 살해당함.
4) 석보: 지금의 청해성 서녕시. 당나라 때는 티베트와 교통 요지였다. 749년 가서한이 10만 군사를 이끌고 티베트의 거점인 석보성을 공격했는데 양쪽 사상자가 아주 많았다. 그는 이 공로로 종삼품 어사대부가 되어 자주색 관복을 입었다.
5) 음시작부북창리(吟詩作賦北窗裏): 도연명이 맑은 바람이 불면 북창 아래 누워 시부를 읊곤 했다. 여기서는 도연명과 같이 좋은 시를 많이 썼음에도 세상 사람들은 한 잔의 물보다 못하게 여겼다는 의미.
6) 절양양화: 절양과 황화는 일반인들이 좋아하는 통속적인 곡이다.
반면 청각은 황제가 지었다는 전설의 곡으로 덕이 있는 군자만이 즐길 수 있고 덕이 부족한 사람이 들으면 재앙이 닥친다. 진평공이 무리하게 이 곡을 듣다가 삼년간 가뭄이 들고 자신도 병에 걸렸다.
7) 〈파인(巴人)〉은 수준이 낮은 통속적인 곡이고 〈양춘(陽春)〉은 수준이 높은 고상한 곡. 노래 수준이 높아질수록 따라 부르는 사람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8) 증참: 증참은 효자로 유명한 공자의 제자다. 동명이인이 사람을 죽이자 세 명이 차례로 증참의 어머니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그러자 두 번째까지는 믿지 않던 어머니마저 세 번째는 소문을 믿고 담을 넘어 도망갔다는 일화가 있다.
9) 동룡: 북조 전진(前秦)의 우복야를 지낸 동영(董榮)으로 자(字)가 용(龍)이다. 전진의 재상인 왕타(王墮)는 성격이 강직해서 간신 동영을 미워해 사람으로 상대하지 않고 닭이나 개처럼 여겼다고 한다.
10) 엄릉: 동한의 엄광(嚴光)을 말하는데 자가 자릉(子陵)이다. 광무제와 어려서부터 동문수학한 사이였는데 나중에 광무제가 즉위한 후 여러 차례 불렀지만 거절하고 은거했다. 나중에 조정에 들어와 황제를 알현할 때도 친구의 예인 읍(挹)만 하고 절을 올리지 않았다.
11) 강관(絳灌): 강은 강후 주발을 말하고 관은 영음후 관영으로 둘 다 한나라 초기의 명장이다. 한신이 제왕과 초왕을 지낼 때까지만 해도 까마득히 차이가 났으나 나중에 회음후로 강등되자 이들과 같은 신분이 되었다. 한신은 이들과 어울리길 거부하고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12) 예형(禰衡) : 동한 말의 사람으로 자부심이 높아 당시 사회명사인 진군이나 사마랑과 어울리라는 사람들의 말에 자신은 백정 같은 자들을 따라다닐 수 없다며 거절했다.
13) 이북해: 당나라 때 북해태수를 지낸 이옹으로 서예와 문장이 뛰어난 유명한 선비였다. 하지만 천보 6년 이임보의 모함으로 살해당했다. 배상서는 형부상서 배돈복으로 이옹과 같이 해를 당했다.
이 시는 천보 9년(750년) 작품이다. 《이한림집서(李翰林集序)》에는 “이백은 ‘북창에서 시부를 짓고 읊조리는데 만 마디 말이 한 잔 물만도 못하다’고 노래했다. 좋은 시절을 만났음에도 제대로 된 위치에 있지 못함을 탄식한 것이다. 오호라! 한림(이백)의 재주와 명성으로 현종과 같은 지견(知見)을 만났음에도 이처럼 안타깝게 떠돌았구나.”라고 말했다. 이 시는 모두 51구에 달하는 장편으로 주제가 집중되어 있고 층차가 정연하며 언어가 극히 날카로우면서도 비유가 아주 생동적이다.
이백은 권세가들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옛날 장안에서 꽃과 버들에 취해 놀며 오후 칠귀들과 술자리 같이 했었네. 의기는 높아 호걸을 능가하고 풍류도 남에게 뒤지지 않았네.(昔在長安醉花柳,五侯七貴同杯酒. 氣岸遙淩豪士前,風流肯落他人後)”(《유야랑증신판관(流夜郎贈辛判官)》), “수풀 속에서 올곧게 살다 죽을지언정 황금 새장에 갇혀 살기는 바라지 않네.(乍向草中耿介死,不求黃金籠下生)”(《치자반(雉子斑)》)
한번은 이백이 재상부를 찾아가 문 앞에서 자신을 소개하면서 “바다에서 큰 거북을 낚는 이백입니다(海上釣鼇客李白)”라고 말했다. 그러자 재상이 웃으면서 “선생이 창해에서 큰 자라를 낚으신다면 낚싯줄은 어떤 걸 씁니까?”라고 물었다. 이백은 “명월(明月)을 바늘로 쓰고 무지개를 낚싯줄로 쓴답니다.”라고 했다. 재상이 또 “그렇다면 미끼는 어떤 걸 쓰시오?”라고 묻자 이백이 큰 소리로 “바로 천하에서 가장 의기(義氣)가 없는 사대부를 미끼로 쓴답니다.”라고 말했다. 재상이 이 말을 듣고는 모골이 송연해짐을 느꼈다.(《후청록(侯鯖錄)》)
몇 백 년 후 소동파는 이백에 대해 “만승의 천자를 친구처럼 희롱하고 비슷한 무리를 초개처럼 여겼다(戲萬乘若僚友,視儔列如草芥)”고 평가했다.
한번은 이백이 사방을 주유하다 화산(華山)에 오르고 싶어 술에 취해 나귀를 타고 현치(縣治 현의 관아)를 지나갔다. 현재(縣宰 현령)가 그를 몰라보고 화를 내며 마당으로 끌어다 호통을 쳤다. “너는 뭐하는 자이기에 감히 이렇게 무례한가!” 그러자 이백은 자신의 성명을 밝히지 않은 채 “일찍이 용건(龍巾 황제의 수건)으로 토한 것을 닦고 황제께서 손수 국을 대접하고 양귀비가 먹을 갈고 고력사가 신발을 벗겨주었지. 천자의 문 앞에서도 말을 탈 수 있었는데 화음현에서는 나귀조차 탈 수 없단 말인가?” 현재가 깜짝 놀라 사죄하며 “한림께서 이곳에 오신 줄 몰랐습니다.”라고 했다. 이백이 크게 웃으며 떠났다.(《당재자전(唐才子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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