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 덕혜(德惠)
【정견망】
송(宋)대의 도사 왕병문(王秉文)은 자가 언형(彥衡)이다. 출가 후 도적(道籍)이 여산 태평흥국관(太平興國宮)에 속해 있었다. 그 스스로 성취가 있다고 여긴 후에는 수도 개봉에 돌아다녔다. 당시 휘종은 도를 좋아하여 신수옥청만수궁(神霄玉清萬壽宮)을 지어 각지 도사들을 초빙했다. 이에 그에게도 자색 옷을 하사하고 만수궁 ‘전객(典客)’을 맡겼다.
어느 날 문득 한 방사가 찾아왔는데 그의 탁자 위에 《주역》이 있는 것을 보고는 그를 위해 한번 계산해보더니 말했다. “이곳은 병액(兵厄 전쟁으로 인한 재앙)이 있을 것인데 당신은 해당하지 않으니 마땅히 피하시오.” 그리고 그에게 ‘존삼수일(存三守一)’이란 도술과 ‘황제화편(黃帝和扁)’이라는 도결(道訣)을 전수해주었다. 왕병문은 이 방사가 진정한 고인임을 깨닫고 전수받은 후 즉시 사직하고 경성을 떠나 여산에서 마음을 조용히 하고 수련했다.
나중에 과연 정강의 변이 발생해 휘종, 흠종 두 황제와 조정의 대다수 귀인들이 모두 금나라의 포로로 잡혀가 북송이 멸망했다. 과연 개봉은 방사가 예언한대로 병화를 당했다.
남송 고종 건염(建炎) 4년 (1130년) 여산 태평흥국궁이 적병에 의해 파괴되었다. 다음 해 적병이 물러가고 왕병문 등이 도궁을 다시 짓기 시작했는데 수년의 시간에 걸려서야 비로소 궁전의 면모를 일신할 수 있었다. 그 후 그는 은거하며 전심으로 도를 닦았으며 그가 거주하던 곳을 ‘삼일당(三一堂)’ 자호를 ‘삼일선생(三一先生)’이라 지었다. 매일 도경(道經)을 읽고 방사가 그에게 전해준 비결에 따라 고생스럽게 도를 닦고 의약(醫藥)에 마음을 쓰는 이외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남송 효종 건도(乾道) 2년 (1166년) 정월 보름날 밤 그의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알려주었다. “상제의 명으로 그대를 화대척동(華大滌洞)의 주(主)로 명하고 반혼단(返魂丹) 한 알을 하사하니 그대의 정신을 회복하고 원기가 돌아오며 신광백마와 여러 관리들이 동부로 맞이할 것이다.” 그 후 곧 꿈에서 깨어났다. 그는 자신이 인간 세상을 떠날 날이 된 것임을 깨닫고 다음날 도제들에게 말했다. “속세는 머물기에 부족하니 나는 곧 갈 것이다.” 자신의 문장을 도손(徒孫 도제의 도제)에게 주고 후사를 부탁했다. 이월 초하루 그는 조용히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조용히 몸이 굳으며 떠났다.’ 현지 태수가 이 이야기를 듣고 ‘글로 제문을 지었다.’
왕병문이 수련에서 성취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방사의 전수 때문이며 또 그가 방사의 예언을 믿어 제때 개봉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북송이 멸망할 때 난을 당했을 것이며 이후 신선으로 성취될 아름다운 미래가 없었을 것이다.
오늘 많은 수련인들이 줄곧 “천멸중공 퇴당보명(天滅中共 退黨保命)”을 알리고 있는데 무릇 진정 중공 당단대를 탈퇴하는 사람들은 미래에 이 이야기 속의 왕병문처럼 재난을 면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대법 수련으로 들어와 더 아름다운 미래를 맞이할 수 있다.
자료출처《태평흥국궁사실(太平興國宮事實)》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53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