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简体 | 正體 | English | Vietnamese

역사이야기: 관상을 잘 보는 비장

작자/ 덕혜(德惠)

【정견망】

북송 정강(靖康) 원년(1126년) 금나라가 두 번째로 남하해 북송의 수도 개봉(開封)을 위협하고 있었다. 금나라 군대가 처음 남하했을 때 강왕 조구(趙構), 바로 미래의 남송 고종(高宗)은 친왕(親王)의 신분으로 금나라 군영에 단기간 인질로 잡혀 있던 적이 있다. 그래서 이번에 강왕 조구는 어쩔 수 없이 금나라에 화해사절로 가라는 명을 받았다.

그런데 수행원 중 한 비장[裨將, 장수를 돕는 부장(副將)이란 뜻]이 있었는데 관상을 잘 봤다. 그는 몰래 다른 사람에게 강왕(康王) 조구에 대해 말했다.

“신관(神觀)이 매우 좋으니 반드시 이번 행차에 큰일을 이룰 것입니다.”

중서사인(中書舍人) 경연희(耿延禧), 관찰사 고세칙(高世則)도 관상에 능했는데 역시 나중에 크게 좋게 될 거라고 했다. 오직 자정전 학사(資政殿學士) 왕운(王雲)만은 “기모(氣貌)가 매우 나쁘니 조만간 화가 미칠 것이다.”라고 했다.

조구 일행이 자주(磁州 지금의 하북성 한단시 자현)에 도착하자 자주를 지키는 신하 종택이 조구에게 극력 권했다. “금나라 사람들은 야심이 매우 큰데 절대 금나라 진영으로 화해하러 가지 마세요.” 왕운은 종택과는 정반대로 조구에게 반드시 금나라 진영에 가서 화해를 구해야 하며 자신의 목숨을 걸고서라도 금군이 조구를 구류하지 않도록 장담하겠노라고 주장했다. 조구는 왕운의 의견에 기울어 금나라 진영에 가서 화해를 하겠다는 환상을 품었다.

자주 백성들도 화해에 반대하며 큰 소리로 조구 일행이 가는 길을 막았다. 사람들이 왕운을 알아보고는 큰 소리로 격분하던 중 왕운이 군중들에게 맞아죽었고 조구는 이 때문에 억류되었다. 얼마 후 금나라 군대가 휘종과 흠종 두 부자를 포로로 잡아 북으로 데려갔고 북송은 멸망했다. 조구는 다행히 포로로 잡히지 않았기 때문에 나중에 남송의 초대 황제가 되었다.

《송사(宋史)》는 자주사변(磁州事變)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왕운이 죽지 않았다면 왕은 반드시 북쪽으로 갔을 것이다. 의론하는 자들은 이것으로 천명이 영험함을 입증한다고 했다.” 중서사인 경연희와 관찰사 고세칙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병사하고 한 사람은 남송까지 살아남아 둘 다 선종(善終)했다.

그렇다면 이 일화에 나오는 비장은 무엇 때문에 미래의 운명을 말할 수 있었을까? 왜냐하면 운명이란 신(神)이 안배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단지 관상술을 통해 미리 신의 안배를 조금 보았을 뿐이다.

한편 왕운의 죽음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해보자. 왕운은 화해를 견지하고 주장했는데 그가 죽지 않았더라면 강왕 조구는 반드시 그의 권고에 따라 금나라 진영에 가서 화해를 구했을 것이다. 당시 북송이 금에 멸망당하는 대세 하에서 그는 분명 구류되어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조구가 남송을 건립하는 천명의 안배 역시 파괴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왕운이 고집을 부린 것은 하늘에 거역한 것으로 하늘의 뜻을 실현하는데 장애가 되었다. 그러니 그의 죽음은 확실히 ‘천명이 영험한’ 것이다. 어쩌면 바로 그가 하늘을 거슬렀기 때문에 “그 모습이 매우 나쁘니 화가 조석에 미칠 것” 이런 관상을 보게 된 것일지 모른다.

물론 운명 중에 정해진 수에도 변수는 있다. 만약 왕운이 생각을 바꿔 종택처럼 조구에게 가지말라고 권했다면 이는 하늘의 뜻에 순응한 것으로 그러면 아마 죽을 운명도 바꿀 수 있었을 것이다.

자료출처:《청파잡지(清波雜志)》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53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