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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영웅인물】 이백(7): 시선의 일화

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시선의 일화

장안에서 한림공봉으로 재임하던 기간에 이백은 여러 차례 기회를 통해 가슴에 품은 무궁한 학문을 펼쳐 보여 적선이 아니고선 불가능함을 보여주었다. 그중에서도 이백이 ‘술에 취해 화번서(和蕃書)를 작성’한 이야기가 전해져온다. 당시 당나라 조정의 수많은 문무백관들 중에서 그 누구도 번국(蕃國 역주: 당시 당나라와 전쟁이 잦았던 토번으로 추정됨)이 보낸 외교문서를 해독하지 못하자 어쩔 수 없이 이백이 불려왔다. 이백은 술에 취한 상태에서 화번서를 쓴 이 이야기는 천고의 가화(佳話)로 전해져온다. 일반인들은 이백이 유년기에 서역에서 잠시 머물렀기 때문에 번서를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해석한다. 또 어떤 책에서는 번서가 동쪽의 발해와 관련된 것이라고 하는 등이다. 사실은 이백이 본래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적선(謫仙)’이란 두 글자는 결코 공치사가 아니며 이백이 품은 무한한 학식은 일반인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또 당 현종이 평민신분의 이백을 왜 그토록 칭찬했는가 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또 하나의 아름다운 일화는 이백이 술에 취해 현종을 위해 《청평조(清平調)》 세 수 및 《궁정행락(宮廷行樂)》 10수(현재는 8수만 남아 있음)를 지은 것이다. 당 현종과 양옥환(楊玉環 양귀비)가 달빛 아래에서 침향정의 모란을 감상하다 현종이 이백을 불러 흥을 돋우는 시를 짓게 했다. 하지만 이때 이백은 마침 술꾼친구들과 술에 거나하게 취한 상태였다. 침향정에 불려왔을 때도 반쯤 취한 상태였음에도 이백은 붓을 들자마자 단번에 《청평조》 세 수와 《궁정행락》을 지어 올렸다. 먹물을 찍어 붓을 흔들면 도도하게 흐르는 기세는 시선이 아니고선 불가능한 일이다.

《청평조(清平調)》 3수

1수

구름 같은 옷자락, 꽃다운 그대 얼굴봄바람은 난간 스치고 꽃이슬 함초롬한데군옥산(群玉山) 위에서 만날 수 없다면요대의 달 아래서 만날 수 있으리

雲想衣裳花想容(운상의상화상요)春風拂檻露華濃(춘풍불함로화농)若非群玉山頭見(약비군옥산두견)會向瑤台月下逢(회향요대월하봉)

2수

붉고 요염한 꽃가지에 이슬 맺혀 향기로운데무산의 운우지정에 공연히 애끊는데묻노니 한나라 궁궐에서 누구와 닮았을까?어여쁜 조비연이 꽃단장 하고 섰구나.

一枝紅豔露凝香(일지홍염로응향)雲雨巫山枉斷腸(운우무상왕단장)借問漢宮誰得似(차문한궁수득사)可憐飛燕倚新妝(가련비연의신장)

3수

이름난 꽃과 경국미인 서로 즐기니군왕께선 웃음 띠며 바라보시네.봄바람의 끝없는 한을 풀어버리며침향정 북쪽 난간에 기대어 섰네.

名花傾國兩相歡(명화경국양상환)長得君王帶笑看(장득군왕대소간)解釋春風無限恨(해석춘풍무한한)沉香亭北倚闌干(침향정북의란간)

청평조는 원래 악부의 곡조명인데 이 작품은 이백이 칠언절구의 격률로 스스로 창작한 것이다.

《궁중행락사(宮中行樂詞) 8수》

1수

어려서 귀한 집에서 자라탐스런 모습으로 자미궁에 거하네.산꽃을 꺾어 쪽머리에 꽂고비단옷엔 석죽 무늬 새겼네.매번 깊은 궁에서 나와언제나 임금의 연을 따라 돌아오네.다만 근심하는 건 노래와 춤이 끝나면오색구름 되어 날아가 버릴까.

小小生金屋(소소생금옥)盈盈在紫微(영영재자미)山花插寶髻(산화삽보계)石竹繡羅衣(석죽수라의)每出深宮裏(매출심궁리)常隨步輦歸(상수보련귀)只愁歌舞散(지수가무산)化作彩雲飛(화작채운비)

2수

여린 황금 빛 버들흰 눈 향 나는 배꽃.옥루에 비취새 깃들고황금 전각엔 원앙 숨었네.기녀를 뽑아 조각 가마 좇게 하고명창을 불러 깊은 방을 나서네.궁중에서 누가 제일이런가?소양전에 비연이 계신다네.

柳色黃金嫩(류색황금눈)梨花白雪香(이화백설향)玉樓巢翡翠(옥루소비취)金殿鎖鴛鴦(금전쇄원앙)選妓隨雕輦(선기수조련)徵歌出洞房(징가출통방)宮中誰第一(궁중수제일)飛燕在昭陽(비연재소양)

3수

맛있는 노 땅의 귤 진(秦)의 나무 되고포도는 한나라 궁궐에 나네.해질녘의 불꽃놀이풍악소리 봄바람에 취하네.피리 연주에 물속의 용이 울고퉁소 소리에 봉황이 내려오네.임금에겐 즐거운 일 많다마는온 천하와 더불어 즐기시네.

盧橘爲秦樹(노귤위진수)蒲桃出漢宮(포도출한궁)煙花宜落日(연화의락일)絲管醉春風(사관취춘풍)笛奏龍吟水(적주용음수)簫鳴鳳下空(소명봉하공)君王多樂事(군왕다락사)還與萬方同(환여만방동)

4수

옥나무에 봄 돌아온 날황금 궁궐엔 좋은 일 많네.아침에는 후궁에 들리 않고가벼운 연으로 밤에만 드시네.웃으며 꽃에서 나와 소곤대며아리땁게 와 촛불 아래서 노래하네.밝은 달아 떠나지 마라항아를 남겨 취해보리라.

玉樹春歸日(옥수춘귀일)金宮樂事多(금궁락사다)後庭朝未入(후정조미입)輕輦夜相過(경연야상과)笑出花間語(소출화간어)嬌來竹下歌(교래죽하가)莫教明月去(막교명월거)留著醉嫦娥(유착취항아)

5수

수놓은 방에 향그런 바람 따스한데깁창에는 새벽빛이 밝았구나.궁정의 꽃들 다투어 햇볕에 웃고연못의 풀은 슬며시 봄빛 띠었네.녹음 속엔 새소리 들리고푸른 누대엔 무용수가 보이네.소양전 복사꽃 달빛 아래비단 옷자락 서로 스치네.

繡戶香風暖(수호향풍난)紗窗曙色新(사창서색신)宮花爭笑日(궁화쟁소일)池草暗生春(지초암생춘)綠樹聞歌鳥(녹수문가조)青樓見舞人(청루견무인)昭陽桃李月(소양도리월)羅綺自相親(나기자상친)

6수

오늘은 명광문 안에서짝지어 놀아보세.봄바람에 대궐문 열리니천상 음악이 구슬 누대로 내려오네.고운 춤은 온갖 기교 터득했고예쁜 노래는 반쯤 수줍어하누나.더욱 어여쁜 달밤에 핀 꽃궁녀들 웃으며 구슬 놀이 하네.

今日明光裏(금일명광리)還須結伴遊(환수결반유)春風開紫殿(춘풍개자전)天樂下珠樓(천악하주루)豔舞全知巧(염무전지교)嬌歌半欲羞(교가반욕수)更憐花月夜(경련화월야)宮女笑藏鉤(궁녀소장구)

7수

찬 눈은 매화 속에 사라지고봄바람은 버들 위로 돌아왔네.궁궐 꾀꼬리는 예쁘기가 취할 듯하고처마 밑 제비는 지저귀며 나는구나.더디 지는 해는 무대를 밝게 하고새로운 꽃에 무용 옷 돋보이네.해 저물어 의장대를 옮기니즐거운 놀이에 광채가 당당하네.

寒雪梅中盡(한설매중진)春風柳上歸(춘풍류상귀)宮鶯嬌欲醉(궁앵교욕취)簷燕語還飛(첨연어환지)遲日明歌席(지일명가석)新花豔舞衣(신화염무의)晚來移彩仗(만래이채장)行樂泥光輝(행락호광휘)

8수

물 푸른 남훈전꽃 붉은 북궐루.꾀꼬리 노래 태액지에 들려오고영주산엔 생황소리 감도누나.궁녀는 패옥을 울리고천인은 채색 공을 굴리는구나.오늘 아침 날씨가 좋으니미앙궁에 들어가 놂이 마땅하리.

水綠南薰殿(수록남훈전)花紅北闕樓(화홍북궐루)鶯歌聞太液(앵가문태액)鳳吹繞瀛洲(봉취요영주)素女鳴珠佩(소녀명주패)天人弄彩球(천인농채구)今朝風日好(금조풍일호)宜入未央遊(의입미앙유)

현종은 천자이자 시인이었다. 현종은 또 서법(書法)에도 조예가 깊어 중국 서법 역사상 황제서법가의 하나로 특히 팔분(八分)과 장초(章草)를 잘 썼다. 《구당서‧본기》에는 현종에 대해 “여러가지 예술 특히 음률(音律)을 잘 알았고 팔분서를 잘 썼다.”고 했다. 팔분서란 글씨를 쓸 때 글자의 자취가 또렷하면서도 빼어나고 다채로운 아름다움이 있어 당나라 서법 중에서 일정한 지위를 차지한다. 당나라 때 두기(竇臮)는 《술서부(述書賦)》에서 “현종황제는 신묘한 무공과 총명으로 풍골이 거대하고 화려하며 산처럼 가팔라 생각은 우물에서 바람을 토하고 붓은 바다가 고래를 삼키는 것과 같다.”고 평가했다.

《고금서법원(古今法書苑)》에서는 “당 명황(明皇 현종)은 팔분과 장초(章草)에 뛰어났는데 글씨가 풍성하면서도 빼어났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현종의 필적은 아주 많은데 《척령송(鶺鴒頌)》, 《기태산명(紀泰山銘)》, 《석대효경(石台孝經)》 등이 가장 유명하다.

《척령송》의 서법은 맑고 깨끗하다. 북송의 유명한 서예가 황정견(黃庭堅)은 이 글씨에 대해 “현종의 글씨는 고상함이 마치 조부(祖父)의 풍격이 있는 것 같다.”고 평하면서 당 태종의 《온천명(溫泉銘)》이나 《진사명(晉祠銘)》과 비교했다.

여기서 또 하나 언급할 것은 현종의 뛰어난 음악적 재능이다. 그는 비파, 얼후(二胡), 피리, 갈고(羯鼓) 등 여러 가지 악기를 연주할 수 있었고 어느 하나 통하지 않거나 모르는 게 없었다. 그는 직접 연주하길 좋아했고 작곡에도 뛰어나 백여 편의 악곡을 작곡해 당조(唐朝) 음악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제위에 오른 후에는 또 황궁 안에 음악교육 기관인 ‘이원(梨園)’을 설치해 전문적으로 연주자를 배양했다. 지금도 중국에서는 연극단을 ‘원(園)’이라 부르는데 바로 여기서 유래했다.

현종은 또 무도(舞蹈)를 아주 좋아했다. 저 유명한 《예상우의곡(霓裳羽衣舞)》 곡조도 그가 작곡했다. 당나라 때 설용약(薛用弱)이 쓴 고대전기 소설집 《집이기(集異記)》에 ‘엽법선(葉法善 당나라 때 유명한 도사)’이야기가 나온다. 엽법선이 당현종을 데리고 월궁으로 놀러갔다는 이야기다. 《태평광기(太平廣記)》에는 《집이기》와 《선전습유(仙傳拾遺)》를 인용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또 일찍이 팔월 보름날 밤 법사(法師 엽법선을 가리킴)가 현종을 모시고 월궁에 놀러가 달나라의 천악(天樂)을 감상했다. 그 악곡의 이름을 묻자 《자운곡(紫雲曲)》이라 했다. 현종은 평소 음률에 정통했기에 그 소리를 묵묵히 기억했다가 돌아온 후 그 음악을 전하고 이를 《예상우의(霓裳羽衣)》라 이름 지었다. 월궁에서 돌아온 후 노주성(潞州城) 위를 지나다 성곽을 내려다보니 고요하고 달빛이 대낮처럼 밝았다. 법사가 현종에게 옥피리 연주를 요청했다. 이때 옥피리는 침전에 있었기에 법사가 사람을 시켜 가져오게 하자 옥피리가 구름 속에서 저절로 떨어졌다. 현종은 연주를 끝낸 후 돈을 뿌리고 달을 타고 돌아왔다. 며칠 후 노주의 관원이 팔월 보름날 밤에 천악이 성에 들려왔고 또 돈을 얻었기에 진상한다고 상주했다.”

《예상우의무(霓裳羽衣舞)》는 확실히 진귀하고 신이 인간 세상에 전한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천보 3년(744년) 봄 이백은 장안을 떠나 양원(梁園 지금의 개봉)을 중심으로 11년에 걸쳐 2번째 유람에 나섰다. “정처 없이 천하를 떠돌며 시와 술로 유유자적했다.”(《당고한림학사이군갈기(唐故翰林學士李君碣記)》)

천보 3년 가을 낙양과 변주(汴州)에서 각각 두보와 고적(高適)을 만나 세 사람은 동행이 되어 양원과 제남(濟南) 등 지역을 유람했다. 이백과 두보 두 사람은 이 때 깊은 우정을 맺었다. 바로 이 시기가 이백의 창작활동이 가장 풍부했던 때로 대표적인 작품에는 《몽유천모음유별(夢遊天姥吟留別)》, 《장진주(將進酒)》, 《북풍행(北風行)》, 《양원음(梁園吟)》 등이 있다.

고적은 어려서부터 글공부 검술을 함께 익혀 포부가 대단히 컸다. 뛰어난 재기와 웅장하고 분방한 시로 일찍부터 멀리까지 명성이 전해졌다. 당세의 대시인 3인은 서로 손을 맞잡고 높은 대에 올라가 “가을에 술에 취해 잠들면 같은 이불을 덮고 날마다 손을 잡고 동행하며(醉眠秋共被,攜手日同行)” 호기롭게 맘껏 마시며 회포를 풀었다. 문단의 삼걸(三傑) 모두 이 시기 모임에 대해 시편(詩篇)을 남겼는데 이백이 쓴 시가 바로 《양원음(梁園吟)》이다.

이백의 마지막 부인이었던 종(宗)씨가 ‘천금으로 벽을 샀다(千金買壁)’는 아름다운 일화가 전해진 작품이 바로 이 《양원음》이다. 당시 이백이 붓을 들어 사찰 벽에 이 시를 적었는데 나중에 부인 종씨가 발견하고는 탄복을 금할 수 없었다. 종씨는 혹여라도 사찰 사람들이 남편의 작품을 훼손시킬까 우려해 돈을 아끼지 않고 이 벽을 매수했던 것이다. 천재시인 이백과 그의 재능과 예술을 사랑한 종씨 부인 사이의 이 일화는 천고의 미담으로 남았다. 종씨는 본래 재주와 용모가 뛰어난 대갓집 규수로 전에 재상을 지낸 종초객(宗楚客)의 손녀다. 그녀는 또 독실한 도교(道敎)신자이기도 했다. 종씨는 상원(上元) 2년(761년) 남편을 떠나 광산(鄺山)으로 도를 배우러 갔다. 하지만 두 사람은 깊은 감정을 지녔고 나중에 이백이 영왕 이린의 역모사건에 억울하게 연루되었을 때도 종씨가 나서 여러 차례 도움을 주었다. 이때 이후 두 사람은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이백은 자신이 몹시 사랑했던 마지막 부인 종씨를 위해 《자대내증((自代內贈)–안 사람을 대신해 써서 보내며》이란 시로 아내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기도 했다.

《양원음(梁園吟)–양원의 노래》

황하에 배 띄우고 장안을 떠나니돛 올리고 가려하니 산 같은 파도 줄이었네.하늘 멀고 물은 넓어 먼 길이 싫증나서옛 자취 찾아 처음으로 평대에 가보았네.평대의 나그네 수심이 많아술 마시며 양원가를 지어보네.문득 봉지(蓬池)를 노래한 완적이 생각나“맑은 물에 큰 물결 일며(淥水揚洪波)”를 읊어보네.큰 물결 드넓어 옛 고을을 헤매다가길이 먼데 서쪽으로 어이하면 돌아갈까?인생을 달관하면 시름 생길 틈 있으랴좋은 술 마시면서 높은 누에 오르리라떠꺼머리 아이가 큰 부채를 부쳐대니오월이 덥지 않아 맑은 가을 같구나.옥쟁반엔 그대 위해 양매(楊梅)를 내어놓고꽃 같은 오나라 소금 흰 눈처럼 하얗구나.소금을 안주로 술을 들어 마시나니백이 숙제처럼 고결함만 배우지 마라.옛 사람 신릉군은 호걸 귀인이었건만지금 사람 그 무덤에 밭 갈고 씨 뿌리네.무너진 성엔 푸른 산 달빛만 공허하게 비치는데고목은 모조리 창오의 구름 속에 들어갔네.양효왕의 궁궐은 지금 어디 있나매승과 사마상여는 먼저 가더니 기다리지 않네.춤 그림자 노랫소리 푸른 못에 흩어지고변수(汴水) 물만 공연히 동해로 흘러가네.침울하게 이 일 노래하니 눈물이 옷을 적시고황금으로 산 술에 취해 돌아갈 줄 모르네연달아 오백을 부르며 육박 놀이를 벌여편 가른 술내기에 해 지는 줄 잊었노라노래하고 또 읊조리니가슴이 후련하구나!동산(東山)에 높이 누웠다가 때 되면 일어나서창생을 구하려 해도 늦지는 않으리라.

我浮黃河去京闕(아부황하거경궐)挂席欲進波連山(괘석욕진파연산)天長水闊厭遠涉(천장수활염원섭)訪古始及平臺間(방고시급평대간)平臺爲客憂思多(평대위객우사다)對酒遂作梁園歌(대주수작양원가)卻憶蓬池阮公詠(각억봉지완공영)因吟淥水揚洪波(인음녹수양홍파)洪波浩蕩迷舊國(홍파호탕미구국)路遠西歸安可得(노원서귀안가득)人生達命豈暇愁(인생달명기가수)且飮美酒登高樓(차음미주등고루)平頭奴子搖大扇(평두노자요대선)五月不熱疑淸秋(오월불열의청추)玉盤楊梅爲君設(옥반양매위군설)吳鹽如花皎白雪(오염여화교백설)持鹽把酒但飮之(지염파주단음지)莫學夷齊事高潔(막학이제사고결)昔人豪貴信陵君(석인호귀신릉군)今人耕種信陵墳(금인경종신릉분)荒城虛照碧山月(황성허조벽산월)古木盡入蒼梧雲(고목진입창오운)梁王宮闕今安在(양왕궁궐금안재)枚馬先歸不相待(매마선귀불상대)舞影歌聲散綠池(무영가성산록지)空餘汴水東流海(공여변수동류해)沉吟此事淚滿衣(침음차사루만의)黃金買醉未能歸(황금매취미능귀)連呼五白行六博(연호오백행육박)分曹賭酒酣馳輝(분조도주감치휘)歌且謠(가차요)意方遠(의방원)東山高臥時起來(동산고와시기래)欲濟蒼生未應晩(욕제창생미응만)

취대(吹臺)는 춘추시기 유명한 악사 사광(師曠)이 건축했다. 한나라 문제 때 총애하던 황자 유무(劉武)를 양효왕(梁孝王)으로 삼아 지금의 개봉(開封) 지역에 봉했다. 양효왕이 취대 주위에 정자와 누각을 새로 짓고 온갖 기이한 꽃과 식물을 심어 이곳에서 술자리를 갖고 부(賦)를 짓곤 했기 때문에 이곳을 ‘양원(梁園)’이라 불렸다. 하지만 당나라 때 이르러 양원은 이미 폐허로 변해있었다. 하지만 개봉은 전국 수운(水運)의 중심지가 되어 날로 번창했다. 3명의 대시인이 취대에서 이별한 후 고적은 동쪽 강소(江蘇)로 떠났고 두보는 서쪽 장안으로 떠났으며 이백은 이때부터 각고(刻苦)의 수련에 들어갔다. 1년 후 이백은 산동에서 잠시 두보와 재회하긴 했지만 그때 헤어진 후 각자 이리저리 떠돌다 길이 엇갈려 더는 만날 기회가 없었다.

유난히 정이 돈독했던 두보는 하루도 이백을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이백을 생각하면서 적지 않은 감동적인 시를 지었다. 이백에게 주거나 이백을 추억하거나 이백을 그리거나 이백을 꿈꾸거나 이백에게 부치는 등등. 두보는 이백에 관해 쓴 시만 십여 수가 넘는다. 아울러 각각의 시는 거의 모두 피를 토하는 듯 진정(眞情)을 토해낸 명작들이다.

“죽은 후의 이별은 소리 죽여 울면 그만이지만 생이별은 늘 슬프기만 하구나.강남은 덥고 습해 열병이 많은 곳인데 귀양 간 그대는 소식이 없네.옛 친구 내 꿈에 나타나 나를 반김은 늘 서로 생각해서라네.”

死別已吞聲(사별이탄성) 生別常惻惻(생별상측측)江南瘴癘地(강남장려지) 逐客無消息(축객무소식)故人入我夢(고인입아몽) 明我常相憶(명아상상억)(두보 《몽이백(夢李白)–이백을 꿈꾸며》)

“뜬구름 종일 다니는데 떠도는 그대는 오랫동안 오지 않네.한밤에 자주 그대 꿈을 꾸니 친밀한 우정에 그대 그리는 마음 때문이라네.”

浮雲終日行(부운종일행) 遊子久不至(유자구부지)三夜頻夢君(삼야빈몽군) 情親見君意(정친견군의)(두보 《몽이백 2(夢李白二)–이백을 꿈꾸며 2수》),

“서늘한 바람 하늘 멀리 이는데 그대는 무슨 생각하시나,그대 소식 언제나 오려나? 가을 오니 강과 호수 물 불어나겠네.”

涼風起天末(양풍기천말) 君子意如何(군자의여하)鴻雁幾時到(홍안기시도) 江湖秋水多(항호추수다)(두보 《천말회이백(天末懷李白)–하늘 끝에서 이백을 그리며》)

시인들은 갔어도 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이 시는 살아남아 여전한 감동을 전한다.

한편 이백의 시에도 자주 두보를 언급하곤 했다.

“그대 생각 문수의 흐름과 같아서 도도하게 남으로 흘러가네.”

思君若汶水(사군약문수) 浩蕩寄南征(호탕기남정)(《사구성하기두보(沙邱城下寄杜甫)–사구성 아래에서 두보에게 부치며》),

“어느 때면 석문 길에서 다시 황금 술통의 술을 나누리?”

何時石門路(하시석문로) 重有金樽開(중유금준개)(《노군동석문송두이보(魯郡東石門送杜二甫): 노군 동쪽 석문에서 이백에게 보내며》)

이상은 이백이 두보에 대한 그리움과 우정을 표현한 작품들의 일부이다.

원문위치 : http://www.zhengjian.org/node/1544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