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정견망】
제2장 백전백승
제1절 무공(武功)으로 나라를 안정시키다
당시 정국
당나라가 처음 생겼을 때 영토는 관중(關中)과 하동(河東) 일대에 불과했다. 당 고조 이연(李淵)은 무덕(武德) 원년(618년)부터 황제를 칭하고 장안을 차지했다. 하지만 천하에는 여전히 군웅(群雄)이 병립해 있었기 때문에 도처로 정벌(征伐)전을 펼쳐 사방을 평정해야만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다. 당시 왕이나 황제를 칭하고 무력으로 한 지방을 지배하는 자들이 여럿 있었다.
이연이 처음 병력을 일으킬 때부터 설거(薛舉) 설인고(薛仁杲) 부자가 농우(隴右 지금의 감숙성 서쪽 지역)를 차지하고 황제를 칭하며 국호를 진(秦)이라 했다. 유무주(劉武周)도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한(漢)이라 했으면 산서(山西) 북부에서 강한 힘으로 당나라가 차지하고 있던 태원(太原)을 직접적으로 위협하고 있었다.
왕세충(王世充)은 하남(河南)을 차지하고 황제를 칭하며 국호를 정(鄭)이라 했는데 역시 무시할 수 없었다. 두건덕(竇建德)은 국호를 하(夏)라 하고 하북을 지배했으며 세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장강(長江) 중류와 하류 일대에도 소선(蕭銑), 두복위(杜伏威), 보공(輔公) 등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북쪽에는 또 강력한 힘을 지닌 돌궐(突厥)이 중원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중원은 저마다 권력을 잡기 위해 다투며 살기등등했으며 군웅을 소탕할 수 있는 자라야 천하를 호령하고 왕이 될 수 있었다. 소위 말하는 무력으로 천하를 정벌하고 왕이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이다.
대당(大唐)의 천하통일 과정에서 주요 전쟁에서 태종은 직접 참여하거나 중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때로는 직접 원수(元帥)가 되어 당군을 총괄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설인고, 송금강(宋金剛), 유무주, 왕세충, 두건덕, 유흑달(劉黑闥) 등과 치른 몇 차례 전투들은 통일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전쟁이자 형세가 가장 위태로우면서도 가장 치열하고 어려웠던 대전(大戰)이었다. 매번 전투에서 승리할 때마다 태종은 투항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인재 등용을 중시했기 때문에 그 의미는 더욱 깊다고 할 수 있다. 태종이 여러 차례 혁혁한 전공을 세우자 고조는 그를 천책상장(天策上將)에 임명했는데 이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것으로 황제와 황태자를 제외하면 일반적인 공후(公侯)보다 더 높은 직위였다.
예봉을 처음 드러내다(鋒芒初露)
수 양제(煬帝) 대업(大業) 11년 안문(雁門)에서 돌궐의 10만 기병에 포위당한 수양제가 봉쇄를 뚫지 못하자 조서를 나무토막에 묶어 분하(汾河)를 따라 흘려보냈다. 상황이 워낙 다급한지라 누구라도 조서를 보는 사람이 있으면 와서 구원해주길 바란 것이다.
당시 이세민은 16세로 전투에 참가해 운정흥(雲定興) 장군의 휘하에 있었다. 하지만 운정흥 휘하에는 겨우 2만의 신병(新兵)뿐이었고 그나마도 대부분 보병(步兵)이었다. 이세민은 운정흥에게 건의했다. “돌궐이 감히 천자를 포위한 것은 우리에게 원군이 없으리라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군대를 앞뒤로 간격을 벌려 수십 리에 걸치게 만들고 낮에는 적군에게 깃발이 나부끼는 것을 보여주고 밤에는 징소리와 북소리를 울려 대군이 닥쳐온다고 오해하게 만드는 것만 못합니다. 이렇게 하신다면 싸우지 않고도 승리하실 수 있습니다. 만약 그들이 우리의 허실을 알고 서로 충돌한다면 승패는 예상하기 어렵습니다.”
운 장군이 이세민의 의병계(疑兵計 역주: 거짓 군사로 적을 속이는 전술)를 채택하자 돌궐 군사들이 수나라 군사들이 호탕하게 끊이지 않고 오는 것을 보고는 대군이 구원온 것으로 여기고 과연 포위를 풀고 도망갔다.
부친인 이연이 태원(太原) 유수로 있을 때 이세민의 나이는 18세였다. 고양(高陽)의 적군 두령 위도아(魏刀兒)는 자신을 역산비(曆山飛)라 불렀는데 아주 용맹했다. 그가 병력을 이끌고 태원을 공격하자 이연이 병력을 이끌고 반격했으나 불행히도 적진 깊숙이 빠져버렸다. 이연 혼자서는 포위를 뚫고 돌파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때 이세민이 경기병(輕騎兵)을 이끌고 포위를 뚫고 진격해 강궁으로 적을 쏘니 백발백중이었다. 일만의 무리 속에서 이연을 구출해냈다. 그 후 적의 보병이 다시 접근하자 이연과 이세민이 반격에 나서 대파했다.
당시 수나라 왕조의 운명이 다해가자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도처에서 전쟁의 불길이 치솟자 백성들의 생활은 몹시 어려워졌다. 이세민은 의병(義兵)을 일으킬 준비를 하면서 매번 백성들을 도와주고 사병들을 예우했다. 또 재산을 풀어 빈객(賓客)을 양성하자 강호인사 및 협객들이 모여들어 의병을 일으킬 충분한 준비가 되었다.
대업 13년(617년) 5월 이세민은 천하를 가슴에 품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천의에 순응하고 백성들의 바람에 근거해 부친에게 기병(起兵)할 것을 권유했다. 마침내 이연이 진양(晉陽)에서 황제를 지키고 적을 토벌한다는 근왕토적(勤王討賊)의 구호를 내세우고 정식으로 기병했다. 대당 왕조의 시작을 연 것이다.
처음 의병을 기병하자마자 이세민은 병력을 이끌고 서하(西河) 공략에 나섰다. 당시 그의 직책은 우령대도독(右領大都督)으로 우삼군(右三軍 역주: 당시 당군은 좌우 각 3군으로 편제되어 있었는데 좌삼군은 큰아들 이건성이 지휘하고 우삼군은 둘째아들 이세민이 지휘했다.)을 모두 관할했으며 추가로 돈황군공(敦煌郡公)에 봉해졌다.
617년 7월 이세민이 이연을 따라 출정해 수나라 장수 송노생(宋老生)의 2만 정병과 산서 곽읍(霍邑)에서 대치했다. 마침 장마철이라 계속해서 비가 내리고 식량이 바닥났다. 이연은 장사(長史 참모에 해당) 배적(裴寂)과 의론한 후 차라리 태원으로 돌아가 나중에 다시 거사하느니만 못하다고 결정했다.
하지만 이세민은 이연에게 절대 물러서지 말라고 간절히 호소했다.
“본래 대의를 일으킨 것은 백성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마땅히 선공하여 함양(咸陽)에 들어가 천하를 호령해야 합니다. 작은 적을 만나 군사를 돌리신다면 기의한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흩어질까 두렵습니다. 돌아가서 태원 한 성을 지키신다면 이는 적을 잠시 멈추게 하는 것에 불과한데 어찌 자신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연은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고 회군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대로 단념할 수 없었던 이세민은 밤에 부친의 군막을 찾아가 밖에서 대성통곡했다. 울음소리에 잠이 깬 이연이 불러서 그 이유를 묻자 이세민이 말했다. “이번 출병은 정의에 의지한 출동이기 때문에 전진하고 전투하면 반드시 승리하겠지만 뒤로 물러서면 반드시 뿔뿔이 흩어지고 말 것입니다. 모두 흩어져버리면 적이 그 기회를 타고 뒤에서 추격해올 것이니 죽음이 곧 닥쳐올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이연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는 곧 철군을 중지시켰다.
8월에 접어들어 장마가 그치자 병력을 이끌고 송노생(宋老生)이 있는 곽읍(霍邑 지금의 산서성 곽주시)으로 향했다. 곽읍성은 공격하기가 어려운 곳이라 이세민은 송노생이 방어만 하면서 출전하지 않을까 우려했다. 이에 몇몇 기병을 이끌고 읍성 아래로 가서는 마치 성을 에워쌀 것처럼 채찍으로 장소를 지정하며 적을 격발시켰다.
과연 발끈 화가 치민 송노생이 성문을 열고 출병해 성을 등에 지고 진영을 세웠다. 이연은 이건성과 함께 성 동쪽에 진을 쳤고 이세민은 시소(柴紹 이연의 사위)와 함께 성 남쪽에 진을 쳤다. 송노생이 병사들을 지휘해 신속하게 전진하면서 이연을 핍박해오는데 이건성이 갑자기 말에서 떨어졌다. 노생이 이 기회를 노리고 진공하자 이연과 이건성의 부대가 밀리면서 뒤로 후퇴했다.
이를 지켜보던 이세민이 성 남쪽 높은 곳에서 기병 둘을 이끌고 급히 달려 내려가서는 송노생의 부대를 갈랐다. 또 병사들을 이끌고 전력을 다해 공격에 나서자 적군이 크게 패해 무기를 버리고 도망쳤다. 송노생이 퇴각해 성문 앞에 이르렀는데 성위에 있던 군사들이 급히 성문을 닫는 바람에 성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마음이 급해진 송노생이 성위에서 내려주는 밧줄을 잡기 위해 해자(垓字)에 뛰어들었다가 뒤쫓던 유홍기의 칼에 목이 떨어졌다. 밤늦게까지 치열한 공방 끝에 마침내 곽읍을 평정했다.
당군이 하동(河東)에 이르자 관중의 많은 호걸들이 앞다퉈 의군에 가담했다. 이세민은 계속 진군해 관중에 들어가 영풍창(永豐倉)을 취해 궁핍하고 곤란한 이들을 구제하고 여러 영웅과 호걸들을 받아들여 함께 장안을 취하자고 제안했다. 이연이 이에 동의했다. 이세민이 앞장 서서 황하를 건너 위수(渭水) 북쪽을 안정시켰다. 장안 인근의 관리와 백성들 및 많은 호걸이 군문(軍門)으로 찾아왔다. 의군에 자원하는 자들이 많으면 하루 천명에 달했고 노약자를 이끌고 온 사람들로 군문이 가득했다. 이세민이 이들 중 용맹하고 뛰어난 자들의 재능을 가려 선발하자 원근에 소문이 나서 모두들 몸을 의탁하러 찾아왔다.
당군이 경양(涇陽)에서 큰 병영을 세우고 힘세고 용맹한 자들을 선발하니 병사가 9만이 되었다. 유요자(劉鷂子)를 격파하고 그 부하들을 흡수한 후 은개산, 유홍기 등을 남겨 장안 옛성에 주둔하게 했다. 이세민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사죽원(司竹院)으로 갔다. 이곳에서 이연의 딸 평양(平陽)공주에 호응해 수나라에 반기를 들었던 이중문(李仲文), 하반인(何潘仁), 향선지(向善志) 등과 만났다. 이들의 무리를 재편해 아성(阿城)에 주둔했는데 얻은 13만이나 되었다.
장안 백성들이 소고기와 술을 병영 앞으로 보내와 군사들의 노고를 치하한 것이 셀 수 없이 많았다. 하지만 이세민은 이들을 따뜻하게 위로하되 백성들의 물건은 절대로 받지 못하게 했다. 군령(軍令)이 엄격해서 추호도 어기는 사람이 없었다. 뒤이어 다른 갈래의 당나라 군사들과 함께 장안을 평정하자 진국공(秦國公 역주: 국공國公은 공작의 작위 중에서 가장 높은 등급으로 군왕郡王 바로 아래다. 진秦은 봉지의 지명)에 봉해졌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531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