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선장
【정견망】
당승은 이어서 또 호랑이를 때려잡은 용감한 사냥꾼 진산태보(鎮山太保)를 만난다.
사람이 수련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도처에 위기가 잠복되어 정말 쉽지 않다.
당승이 호랑이를 만나 생명이 위태로운 순간 진산태보가 나타나 구해준다. 진산태보가 당승을 자기 집에 데려가 식사 대접을 하는데 전부 육식이라 당승이 먹을 게 없었다. 당승은 훈(葷)을 경계하며 단호히 음식을 거부한다.
지금은 채식(素食)이 이미 불교의 상규(常規)처럼 되었다. 하지만 여기서 볼 수 있다시피 단지 채식만으로는 수련할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당승이 구태여 서천에 갈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또 원시불교 중에서 말하는 훈이란 “파, 부추, 마늘, 겨자” 등 매운 채소를 가리키는 것이지 고기가 아니었다. 사실 많은 사람들도 이 점을 알고는 있지만 나중에 훈이 어떻게 고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변했는지 잘 모른다.
당승은 이 집에서 진산태보의 사망한 부친을 초도(超度)하기 위한 법사(法事)를 시행했다. 초도의 문제는 이미 앞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지만 탁몽(托夢 역주: 망자가 꿈에 나타나 무언가를 부탁하거나 알려주는 것)을 포함한 일부 일들은 지금 사람들이 인식하거나 받아들이기 힘들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일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며 확실히 이런 경험을 한 사람들도 있다.
《서유기》 일부 판본에서는 이 회에서 당승의 법사가 아주 효과가 있는 것을 본 사람이 당승에게 굳이 서천으로 가는 모험을 하지 말고 장안에 가서 법사(法師)가 되어 편안하게 살라고 권유한다. 이것은 당승에 대한 또 한 차례 고험이었다. 한쪽은 곤란이 첩첩이 쌓인 위험천만한 여정이고 다른 한쪽은 아주 편안하게 살 수 있는데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수련자로서는 선택이 아주 중요하며 견정할 수 있는가를 보아야 한다.
당승은 근기가 좋아서 이런 유혹에 전혀 흔들림 없이 계속해서 서쪽으로 나아갔다. 그러다 곧 당나라 국경에 도달했다. 여기서부터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는 셈이다. 당승을 배웅하던 진산태보가 양계산(兩界山 역주: 여래불이 손오공을 눌러놓은 오행산으로 여기서는 두 나라 국경에 있는 산이란 뜻)에 이르자 더는 도와줄 수 없고 당승 혼자 가야만 한다고 말한다. 즉 수련의 일은 다른 사람이 도와줄 수 없다는 뜻이다. 수련계의 용어로 말하자면 일반인의 층차를 벗어나 진정한 수련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흔히들 당승 사제 4인(당승,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이는 틀린 말이다. 다들 백룡마(白龍馬)를 망각하는데 백마 역시 보살이 안배한 백룡(白龍)이 변신한 것이다.
중생(衆生)이 평등하다는 말이 무엇인가? 단지 사람만을 말하는 게 아니며 중생이란 모든 생명을 말한다. 윤회의 관점에서 보자면 금생은 사람이지만 다음 생에는 동물이나 식물이 될 수도 있고 어쩌면 돌로 탁생할 수도 있다. 우주 법리 앞에서 중생은 모두 평등한 것으로 인간세상의 명리나 지위 따위는 때가 되면 아무런 작용도 하지 못한다. 법안통(法眼通) 층차에 도달해 특이공능으로 보면 모든 물건은 다 생명이 있다고 하는데 돌이나 나무 등 모든 것이 살아있다.
당승 사도에 관해 사실은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독립적인 몇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의 여러 원신(元神)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사람의 진정한 자신은 주원신(主元神)으로 육신은 단지 의복(衣服)에 불과하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주원신 외에도 또 부원신(副元神)이 있는데 하나가 아니라 여럿일 수도 있다. 즉 한 사람에게 주원신이 있고 또 부원신이 여럿 있을 수 있는데 이들 간에는 서로 독립적인 개체다.
부원신은 종종 주원신보다 명백하고 능력이 있지만 어쨌든 주원신의 말을 따라야 한다. 일반인이라면 부원신의 존재를 상상하기 힘들겠지만 수련인은 때때로 감수할 수 있다. 가령 어떤 사람이 가끔 영문을 알 수 없지만 어떤 일을 아주 잘하는 경우가 있는데 아마도 부원신이 도와주었을 것이다.
《서유기》에서는 또 손오공과 백룡마를 ‘심원의마(心猿意馬 역주: 직역하면 원숭이 같은 마음과 말과 같은 뜻이지만 흔히 마음이 한곳에 집중되지 않고 산만한 것을 의미한다.)’로 비유하곤 하는데 양자 간의 인과관계가 어떠한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바로 수련인은 반드시 자신의 ‘마음과 뜻(心意)’에 관심을 가져야 하며 이것들은 마치 ‘원숭이나 말(猿馬)’의 행동을 단속하기 어려운 것처럼 통제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결국 수련에서 가장 관건은 바로 자신의 사상을 잘 다스려야 하며 바른 믿음을 갖고 좋지 않은 그런 사상들을 제거해 자신의 사상경지를 제고하는 것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478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