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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범(帝範)》─당태종의 치국의 도 (1)

글/ 이검(李劍)

【정견망】

들어가는 말

648년(당나라 태종 정관 22년) 정월 일대영주(一代英主) 태종 이세민은 새봄의 즐거움과 천하 신민(臣民)들의 새해축하 소리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기백과 뛰어난 예지를 발휘해 자신이 평생 겪었던 전투경험과 각고면려 힘써왔던 치국의 도(道)를 유창한 문필과 심오한 지혜로 성공의 모범사례들을 모아 《제범(帝範)》 12편을 단숨에 저술했다. 이것을 태자 이치(李治 훗날의 고종)에 대한 훈계의 말로 삼게 했다. 이 책을 완성한 이듬해(649년) 태종이 서거했으니 《제범》은 그의 정치적 유언이자 절필(絶筆)인 셈이다.

《제범》은 총 12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편의 제목은 《군체(君體 군주의 수양)》, 《건친(建親 권력의 운용)》, 《구현(求賢 인재등용)》, 《심관(審官 관리임용)》, 《납간(納諫 충언허용)》, 《거참(去讒 참언제거)》, 《계영(誡盈 가득 참을 경계)》, 《숭검(崇儉 검약을 숭상)》, 《상벌(賞罰 신상필벌)》, 《무농(務農 농업경제)》, 《열무(閱武 국방정책)》, 《숭문(崇文 문교정책)》이다. 이 책은 전체적인 구조가 엄밀하게 짜여있지만 각 편이 독자적인 체계를 갖췄다. 이는 당태종의 수신(修身)과 치국(治國)경험을 총결한 것으로 다시 말해 ‘정관의 치’에 대한 이론적 개괄이다.

당태종은 《제범》을 아주 높이 평가해 “제왕의 강령으로 나라의 안위(安危) 및 흥폐(興廢)가 모두 여기에 달려있다(帝王之綱,安危興廢,咸在茲焉)”고 했다. 이 책은 말은 간결해도 뜻이 완벽히 갖춰져 있고 태종의 평생 심혈이 응결된 것으로 그의 치국사상의 정화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그는 이 책을 태자에게 주면서 “수신과 치국이 그 안에 갖춰져 있으니 일단 어기지 않으면 더는 할 말이 없다.”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태자에게 지행(知行)을 합일해 시작과 끝을 잘 맺도록 격려했다. 태종의 간절한 마음과 은근한 정이 뚜렷이 나타나 있다.

하지만 이 책은 궁궐 안에 비장(秘藏)되어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신당서(新唐書)》와 《구당서(舊唐書)》에도 《제범》의 내용이 4권이라고만 설명하고 내용을 전재하지 않아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었다. 《자치통감》에도 전문(全文)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다 송대(宋代)에 유실되어 이 책의 대부분 내용은 이미 세인들이 모르게 되었다.

다행히도 원나라 태정(泰定) 2년(1325년) 뜻밖에 운남에서 책이 발견되어 다시 세상에 알려졌다. 청나라 건륭(乾隆) 연간에 기윤(紀昀) 등이 원나라 사람들의 주석을 참고해 고증하고 새로 주를 달아 원문 뒤에 부친 후 건륭제의 비준을 받은 후 《흠정사고전서(欽定四庫全書)-자부(子部)1》에 편입시킨 후에야 후인들이 비로소 책의 전체 내용과 종지(宗旨)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본인의 수준에 한계 때문에 원문에 대한 번역과 평가에서 소략함과 누락 내지는 잘못을 면하기 어렵다. 독자 여러분의 자비로운 지적과 시정을 바란다. 왕도(王道)는 넓고 크니 독자들이 자세히 원문을 읽고 《제범》에 담긴 깊은 사상을 깨달을 수 있다면 반드시 큰 수익이 있을 것이다.

《제범》 이 책은 중화문화의 경전으로 장차 영원히 중국전통문화의 전당 속에 보존되어 끊임없이 빛을 발산할 것이다.

제범서(帝範序)

서문에 이르길 “짐이 들으니 대덕(大德)을 생(生)이라 하고 대보(大寶)를 위(位)라 하나니 위와 아래를 분별하고 임금과 신하를 수립함은 백성을 어루만지고 양육하며 서민(庶民)을 교화하기 위함이로다. 만약 지극히 총명하고 지극히 지혜로우며 문무(文武)를 겸비하고 황천(皇天)이 돌보시는 천명을 받아 임금이 된 게 아니라면 어찌 신령한 그림을 잡고 제위(神器)에 오늘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취규(翠媯 역주: 전설에 따르면 황제가 취규에서 용이 지고 나온 하도를 받았다)로 요임금의 덕을 드러냈고 원규(元圭 우임금 때 그의 공을 기리기 위해 하늘이 내린 보배)를 하사해 우임금의 공을 드러내셨다. (문왕이 태어날 때)붉은 새가 단서(丹書)를 물고와 상서로움을 보여 주나라 8백년의 복을 여셨고 백사(白蛇)의 정령이 상서로움을 표현한 후 24대에 걸친 한나라 왕업의 기초를 여셨다.”

序曰:朕聞大德曰生,大寶曰位,辨其上下,樹之君臣,所以撫育黎元,鈞陶庶類。自非克明克哲,允武允文,皇天眷命,曆數在躬,安可以濫握靈圖叨臨神器?是以翠媯薦唐堯之德,元圭錫夏禹之功;丹字呈祥,周開八百之祚;素靈表瑞,漢啟重世之基。

이를 통해 보건대 제왕의 업(業)은 힘으로 다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옛날 수나라 말년에 나라가 혼란에 빠지고 천하가 분열되자 선황(先皇 당 고조)께서 신묘한 무용의 자태로 경륜을 펼칠 기회를 맞아 (한고조처럼) 신령한 뱀을 자르고 왕업을 다지셨고 금경(金鏡 밝고 바른 도)을 열고 천추(天樞 정권)를 장악하셨다. 그러나 오악이 기운을 머금고 삼광(三光)이 빛을 거두자 승냥이와 이리가 여전히 강경해 풍진(風塵)이 편안치 못했다. 짐이 약관의 나이에 강개한 뜻을 품고 대난(大難)을 평정해 창생(蒼生)을 구제할 생각으로 몸소 갑옷을 입고 화살과 돌에 맞섰다. 저녁이면 어린진(魚鱗陳)을 마주하고 아침이면 학익진(鶴翼陣)의 포위에 맞섰다. 적이 아무리 강해도 꺾지 않음이 없었고 적병이 아무리 굳세도 분쇄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큰 적을 물리쳐 사해를 깨끗하게 한 후에는 잔당을 소탕해 팔방을 평정했노라. 다행히 황상의 후계자가 되어 천자를 빛내고 아버님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올랐도다. 전전긍긍(戰戰兢兢)하면서 마치 깊은 물에 이른 듯 썩은 수레를 모는 듯 했으며 매일 삼가 하면서 시작을 잘하고 마무리를 잘할 것을 생각했노라.

由此觀之,帝王之業,非可以力爭者矣。昔隋季版蕩,海內分崩,先皇以神武之姿,當經綸之會,斬靈蛇而定王業,啟金鏡而握天樞,然由五嶽含氣,三光戢曜,豺狼尚梗,風塵未寧。朕以弱冠之年,懷慷慨之志,思靖大難以濟蒼生,躬擐甲胄,親當矢石,夕對魚鱗之陣,朝臨鶴翼之圍,敵無大而不摧,兵何堅而不碎,剪長鯨而清四海,掃挽槍而廓八□,乘慶天湟,登暉璿極,襲重光之永業,繼大寶之隆基,戰戰兢兢,若臨深而禦朽,日慎一日,思善始而令終。

너(태자 이치)는 어려서부터 자애로운 총애를 받아왔으나 의리에 부족함이 많고 집안의 훈계에도 어긋남이 있구나. 너를 발탁해 구중궁궐에서 지내게 하고 동궁의 임무를 맡겼음에도 군신의 예절을 가리지 못하고 농사의 어려움을 모른다. 매번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근심이 되어 침식(寢食)을 잊지 않은 적이 없다. 위로는 황제(黃帝) 소호(少昊 황제의 아들)로부터 주(周)나라와 수(隋)나라에 이르기까지 천지를 경영한 군주에서 나라를 창업하고 후세에 전한 주인들의 흥망과 치란은 그 도가 환히 빛난다.때문에 거울을 열어 과거의 자취를 비추고 널리 역사 서적을 열람해 그 요지를 모아 가까운 사람에게 경계로 삼고자 할 따름이로다.

汝以幼年,偏鍾慈愛,義方多闕,庭訓有乖,擢自維城之居,屬以少陽之任,未辨君臣之禮節,不知稼穡之艱難,每思此爲憂,未嘗不廢寢忘食。自軒昊以降,迄至周隋,以經天緯地之君,纂業承基之主,興亡治亂,其道煥焉,所以披鏡前蹤,博覽史籍,聚其要言,以爲近誡云耳!

[백화 번역] 당태종이 서문에서 말하길 “내가 들으니 천지의 고상한 덕행은 만물을 생성하고 군주가 가장 보귀한 것은 권세와 지위다. 귀천과 상하를 나누고 군신의 역할분담을 확립함은 백성을 위로하고 양육하며 서민들을 교화하기 위함이다. 만약 총명한 예지와 문무를 겸비하고 천명을 받아 하늘이 돌보고 보우하는 군주가 아니라면 어찌 상서로운 부서(符瑞)가 나타났다 하여 쉽게 제위에 오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요임금의 성세 때 신령한 거북이 규구의 강에서 떠올라 요임금에게 하도(河圖)를 바쳐 그 성스런 덕을 표창했고 대우(大禹)가 물을 다스리고 산천을 두루 다닐 때 하늘은 원규를 하사해 그의 위대한 공을 찬양했다. 주나라 흥기할 때 붉은 새가 단서를 입에 물고 기산으로 날아와 문왕에게 천명이 있음을 알리고 상서로움을 드러내자 주나라 8백년의 기업(基業)을 열었고 한고조 유방은 백사(白蛇)를 칼로 베고 의병을 일으켜 서한과 동한에 걸쳐 24대나 이어진 제국의 기반을 다졌다.

이로써 보건대 자고로 제왕의 기틀은 천명에서 유래한 것이지 사람의 힘으로 다투어 빼앗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수나라 말년 양제가 천도(天道)를 어겨 용렬하고 잔인해지자 조정의 기강이 무너져 천하가 큰 혼란에 빠져 사분오열되었다. 선황이신 고조께서는 신묘한 무위(武威)로 풍운의 기회를 맞아 옛날 한 고조를 본받아 태원에서 병사를 일으켜 어지러움을 평정하시고 대당황실의 기업을 다지셨다. 이리하여 깨끗하고 밝은 정치를 다시 닦으셨으며 천하에 군림하는 자리에 오르셨다. 고조께서 황제를 칭하실 때는 신주대지(神州大地)에 요사한 기운이 아직 남아 있어 군웅이 할거했다. 온 들판에 피난민이 가득했고 하늘의 태양마저 암담해졌으며 승냥이나 이리처럼 사나운 자들이 횡행해 도처에 봉화가 피어올라 천하가 편안하지 못했다.

나는 방년 18세에 나라와 백성을 구하려는 큰 뜻을 품고 한마음으로 대란(大亂)을 평정해 창생을 구제하고자 했다. 매번 큰 전투에 임할 때마다 반드시 갑옷을 입고 직접 전투에 나아가 화살이나 돌의 공격을 피하지 않고 용감히 전진했었다. 아침저녁으로 적군의 험악한 진에 맞서 일말의 두려움도 없었다. 적군의 성세가 아무리 크고 대단할지라도, 군웅(群雄)이 아무리 단단하고 날카로운 병력을 지녔을지라도 나는 군사를 이끌고 진공하여 깨뜨리지 못한 성이 없으며 꺾지 못한 적이 없었다. 큰 적들을 제거해 사해를 깨끗이 한 후 남은 잔당들을 소탕하자 팔방이 평정되었다.

대당왕조는 번영하고 창성했으니 나는 고조의 아들로서 여러 신하들의 옹립을 받아 제위에 올라 해나 달처럼 빛나는 대당의 위업을 계승했다. 매일 전전긍긍하며 마치 깊은 못에 이른 것처럼 마치 낡은 수레를 모는 것처럼 조금이라도 소홀하거나 나태한 마음이 없었다. 하루하루를 근신하면서 늘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히 할 것을 생각했고 어떻게 해야 시작을 잘하고 마무리를 잘할 수 있을지 근심했다.

너는 태자의 신분으로 어려서부터 부왕과 모후의 총애를 받았음에도 언행이 종종 의리에 부합하지 않으며 나의 훈계에 어긋난다. 내 너를 몹시 신뢰해 너를 태자로 책봉해 장차 황위를 계승할 막중한 임무를 맡겼다. 하지만 너는 어려서부터 구중궁궐에서 자라 군신간의 예의를 잘 모르며 백성들의 어려움을 잘 모른다. 나는 매번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깊은 근심으로 늘 침식을 잊으며 마음이 편치 못하다.

위로는 삼황오제에서 아래로는 북주(北周)와 수나라에 이르기까지 천지를 경위할 재능을 지니고 나라를 창업해 후세에 전한 군주들은 그 공업이 찬란해 누구나 볼 수 있다. 역대의 흥망과 국가의 치란(治亂)은 그 도리가 분명하며 어느 하나 역사책에 기록되지 않은 것이 없다. 나는 네가 대당(大唐)의 기업을 더 잘 계승해 태평성세를 개창하여 일대 명군이 될 수 있도록 전대 군왕의 치적을 추적하고 여러 역사서들을 두루 열람해 그들이 나라를 다스린 요지를 모아 책으로 만들어 네게 훈계로 삼고자 한다.

[평어]

당태종은 서문에서 “만약 지극히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문무를 겸비하고 황천이 돌보시는 천명을 받아 임금이 된 게 아니라면 어찌 신령한 그림을 잡고 제위(神器)에 오늘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취규(翠媯)로 요임금의 덕을 드러내고 원규(元圭)를 하사해 우 임금의 공을 드러내셨다. 붉은 새가 단서를 물고와 상서로움을 드리자 주나라 8백년 복을 열었고 백사(白蛇)의 정령이 상서로움을 드러낸 후 24대에 걸친 한나라 기초를 여셨다. 이로써 보건대 자고로 제왕의 기틀은 천명에서 유래한 것이지 사람의 힘으로 다투어 빼앗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자고로 제왕의 즉위는 신의 수여한 권한으로 국군(國君)은 하늘을 받들고 천운을 이어 자신이 도가 있는 명군(明君)임을 증명해야 한다. 이것이 중화 전통문화 중에 포함된 유신론(有神論)과 천명론(天命論)이다.

황제는 구중궁궐 지극히 높고 존귀한 자리에 있기 때문에 자신을 천자(天子)라 칭한다. 이 말에는 황제라 해도 하늘의 뜻에 의해 관할되고 단속되며 수시로 자신에게 죄를 묻고 하늘에 참회해야만 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주나라가 흥기할 때 붉은 새가 단서(丹書)를 물고 기산(岐山)으로 날아와 문왕(文王)에게 천명이 있음을 알렸다.

주나라 무왕이 즉위할 초기 원로대신 상보(尚父)는 나라를 다스리는 도를 토론하고 가르치면서 단서의 말을 인용해서 이렇게 말했다.

“부지런히 정사에 임하고 하늘을 공경하며 나태함을 물리치는 자는 사업이 번창할 것이고, 직무수행에 태만하고 공경한 사람을 물리치는 자는 사업이 쇠망합니다. 정치를 함에 공의(公義)로 사욕(私欲)을 이기는 사람은 사업이 순조로울 것이고 사욕이 공의를 이기는 사람은 사업이 좌절될 것입니다.”

오직 ‘경(敬)’과 ‘공(公)’ 두 글자에 공력을 들여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소위 보존이 간편하고 실천하기 쉬우면서 자손만대가 본받아야 할 치국의 도리다. 당태종은 “전전긍긍하면서 마치 깊은 물에 이른 듯 썩은 수레를 모는 듯 했으며 매일 삼가하며 시작을 잘하고 마무리를 잘할 것을 생각했다.”고 했으니 바로 이 도리를 깊이 알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당태종은 어진 정치로 백성을 사랑하고 왕도(王道)를 실천하며 중용을 잡고 균형을 추구하며 널리 백성에게 베풀고 중생을 구제했다. 때문에 백성들은 예를 따르고 법을 지키면서 생업에 편안히 종사할 수 있었고 군주와 백성이 함께 태평성세의 위업(偉業)을 누렸다. 태종의 영명(英名)이 널리 퍼졌고 후세에 위업을 남길 수 있었으며 대당성세(大唐盛世)가 만고에 아름다운 이름을 남겼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33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