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简体 | 正體 | English | Vietnamese

도가수련이야기: 장백과 장허백

글/ 덕혜(德惠)

【정견망】

장백(張白)

북송 초기 이름이 장백(張白), 자는 ‘허백(虛白)’으로 자칭 백운자(白雲子)라는 수도인이 있었는데 청하(清河) 사람이었다. 조용하고 박학하며 글재주가 있었으나 두 차례 과거에 응시했음에도 합격하지 못했다. 나중에는 과거를 포기하고 도가(道家) 경서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점차적으로 신이(神異)한 일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그의 사부가 누구인지 어디서 그런 도법을 배웠는지 모른다. 송 태조 시기 그는 무릉(武陵 지금의 호남성 상덕시 무릉구)에 와서 용흥관(龍興觀)에 머물렀다.

그는 매일 술을 마셨는데 마치 실의에 빠진 사람처럼 구속받는 게 없었다. 술에 취한 후에는 늘 다른 사람을 가리키며 그들이 어떤 나쁜 짓을 몰래 했다고 말했다. 견식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가 이미 신통을 지닌 이인(異人)이라 여겼다. 그는 눈보라가 몰아치거나 매우 추운 날이 되면 늘 강에 가서 얼음을 깨고 물에 들어가 하루 종일 얼음물 속에 앉아 있곤 했다. 나온 후 온몸에 열이 났는데 열기가 뜨거운 끓는 찜통처럼 위로 솟아올랐으며 잠시 후 옷이 다 말랐다.

그는 늘 최씨(崔氏) 주점에서 술을 마시곤 했는데 어느 날 술값을 지불하겠노라고 했다. 술집 점원이 얼른 주인에게 보고했다. “장백이 술을 마시러 오기만 하면 꼭 손님들이 가득 들어차서 수입이 배가 됩니다. 이것은 모두 그가 가져온 복입니다.”

최씨 주인은 이 말을 듣고는 지시했다.

“장백이 술을 마시러 오면 한 푼도 받지 마라.”

얼마 후 그는 최 씨 주가에서 시를 읊었다.

무릉 계곡가의 최 씨 주점은응당 지상 아닌 천상에 있어야 하리.남쪽에서 온 도사 여러 말 마시고흰구름 깊은 동에 취해 누웠노라

武陵溪畔崔家酒地上應無天上有南來道士飲數斗醉臥白雲深洞口

이때부터 술을 마시러 오는 손님이 더 많아졌다. 아마 장백은 최가에서 공짜 술 마시고 싶지 않았기에 이런 식으로 보답했을 것이다.

나중에 어느 날 그가 갑자기 병이 들었는데 도관 주지에게 부탁했다.

“이번에는 반드시 죽을 것이요. 사후에 서쪽 성문 밖에 장례 지내주시오.” 하고는 죽어버렸다.

며칠 두었더니 “신체는 산 사람처럼 변함이 없었고 기이한 향기가 온 방에 가득했다.” 온 성의 백성들이 다 와서 송별했다. 최가는 그를 위해 관을 사주고 안장했다. 얼마 후 어떤 사람이 그를 강회(江淮) 지역에서 우연히 보았는데 등에 큰 호로병을 지고 약을 팔고 있었다. 돌아와 사람들에게 말하니 사람들이 관을 열어보자 그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들은 비로소 장백이 시해(尸解)의 방법으로 도를 얻어 떠나간 것을 알았다.

장허백(張虛白) – 장백의 후세

북소 휘종 시기에 이르자 황상이 도를 좋아하여 늘 유명한 도사들을 불러 입궁시켰다. 그 중 한 도인의 이름이 장시신(張侍晨)이라 했는데 장허백(張虛白)으로도 불렀다. 그는 특히 존경을 받아 옥패를 수여받았고 ‘금문우객(金門羽客 역주: 황궁을 드나드는 신선이란 의미)’에 봉해졌으며 궁의 일반인 금지구역에도 출입할 수 있었다. 당시 ‘금문우객’에 봉해진 도사는 오직 셋이었으니 그가 당시 가장 유명한 도사 중 한 명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장허백은 하남성 남양(南陽) 사람으로 장시신은 그의 본명이다. 그는 도를 닦은 후 자신의 전생이 바로 수도인 장백이라고 말했으며 전생의 자 ‘허백’을 금생의 이름으로 삼아 개명했다. 장허백의 자는 ‘치상(致祥)’이었고 도교의 용덕태일궁(龍德太一宮)을 주관했다. 장백은 도를 닦을 때 술을 마셨는데 장허백이 수도할 때와 마찬가지로 주량이 대단해서 휘종은 늘 그에게 술을 하사하곤 했다.

장허백은 처음 황제의 은총을 입었을 때는 아주 겸손했다. 비록 옥패가 있어서 자유롭게 황궁을 출입할 수 있었음에도 제왕이 부르지 않으면 나서지 않았다. 하루는 황제가 사람을 시켜 그에게 상자를 하나 하사했다. 그가 열어보니 안에는 모두 작은 황금이 들어있었다. 그는 절을 하고 선물을 받을 때 전혀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고 “이는 조정의 물건이니 도류(道流 역주: 도사)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라고 했다. 하지만 황제가 하사한 물건을 거절할 방법도 없어서 다만 잘 봉해서 보존해두었다. 장허백이 한약으로 병을 치료할 수 있었기 때문에 환자들이 병을 보러 오면 대부분 약을 먹은 후 곧 호전되곤 했다. 휘종이 이 때문에 궁중에 있던 많은 한약재를 그에게 하사해 민중들을 치료하게 했다. 이 약재를 그에게 하사할 때 소 수레로 며칠을 실어 날라야 했을 정도로 많았다.

장허백이 처음 궁중에 불려갔을 때는 도가의 일만 말하며 정사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정말 누가 물으면 말하기를 “조정 일은 재상이 있으니 신(臣) 등은 아는 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술에 취하면 말이 달라져 늘 예언하는 식으로 어떤 일이 어떻게 될 거라고 말했다. 나중에 일이 발생하면 과연 그가 말한 대로였고 아주 영험했다.

선화(宣和) 연간에 북방의 금(金)나라에서 사자를 개봉에 파견해 공동으로 요(遙)나라를 멸하기로 약속했다. 황상은 기뻐하며 금나라 사자를 불러 연회를 베풀었다. 연회가 끝난 후 황상은 장허백을 궁에 들여 이 일을 알려주었다. 그는 다시 술에 취한 후 말했다. “금나라 사람이 그들이 있는 곳에 궁실을 만들어 폐하를 가두려 합니다. 그러니 금나라 사람에 대해 더 단단히 방비하셔야 합니다!”

휘종은 평상시에는 그를 아주 신임했으나 이번에는 믿지 않았다. 선화 7년(1125년)이 되자 금나라가 대규모 군대를 동원해 침략해 왔다. 정강(靖康) 2년(1127년) 수도인 개봉이 금나라에 함락되었고 북송은 멸망했다. 휘종과 흠종(欽宗) 둘 다 포로로 잡혔다. 송 휘종이 청성(靑城)에서 하늘에 제사지내러 나올 때 장허백을 보고는 그의 등을 쓰다듬으며 유감스럽게 말했다. “그대가 그때 한 말이 오늘 다 들어맞았구려. 유감스럽게도 내가 그대의 의견을 따르지 않고 방비를 하지 않아 오늘의 이런 액운을 당했소.”

금나라 군대는 송 휘종 부자를 잡아갔고 또 장허백의 신적을 알고는 대대적으로 그를 찾았다. 가마에 태워 남훈문(南熏門 역주: 개봉성 외성의 남문)에 도착했다. 금나라 장수들이 앞을 다투어 그의 가마를 들려 했으며 그를 신선으로 받들었다. 그를 금나라 경내로 모셔왔다.

북송이 멸망한 후 4년째 되던 금 태종(太宗) 천회(天會) 8년(1130년) 다시 말해 남송 고종(高宗) 건염(建炎) 4년, 금나라 병사들이 다시 남하했다. 백성들이 놀라서 피난하는데 천경관의 도사들도 따라서 도망쳤다. 이때 한 금나라 병사가 도사들을 보고는 말했다. “두려워하지 마시오. 당신들 도사 중에 신이한 분들이 많아 우리가 함부로 당신들을 해치진 않을 것이오. 당신들은 장허백을 아십니까? 그가 어제 내가 있는 주둔지로 돌아왔소.”

나중에 들어보니 장허백이 금나라에서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을 아는 금나라 여러 두령들에게 말했다고 한다. ‘모월 모일에 나는 인간 세상을 떠날 것이오. 불교식으로 화장하지 말고 관을 하나 구해서 땅에 매장해주면 됩니다.’ 그날이 되자 그는 과연 세상을 떠났다.

자료출처:《곡유구문(曲洧舊聞)》 《역세진선체도통감(曆世真仙體道通鑒)》 등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553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