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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영웅인물】 당태종(8): 현무문의 변

【정견망】

현무문에서 재앙을 없애다

왕질이 이건성과 이원길 무리가 이세민을 암살하려는 정보를 장손무기 등에게 알리자 진왕부의 사람들이 모두 이세민에게 앞서 일을 도모하라고 권했다. 하지만 이세민은 탄식하며 “골육상잔(骨肉相殘)은 고금의 큰 죄악이다! 내가 진실로 조만간 화가 닥칠 것을 알지만 저들이 촉발하기를 기다린 다음 정의(義)로 토벌함이 옳지 않겠는가?”라고 했다. 이 말은 만약 다른 선택이 있었더라면 결코 이 방식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란 뜻이다.

진왕(秦王)이 주저하며 결심을 내리지 못하자 왕부(王府)의 여러 신하들이 모두 말했다.

“제왕(齊王 이원길)은 결코 태자 아래 있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화란을 모의하여 아직 성공하기도 전부터 이미 태자를 제거할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제왕은 탐욕스럽고 수단이 악독하니 어떤 짓인들 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두 사람이 뜻을 얻게 된다면 천하는 더 이상 당나라에 속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직을 안정’시키기 위해 반드시 다음과 같은 조치가 필요했다.

* 이건성과 이원길은 이세민을 용납하지 않고 심지어 낙양으로 피양(避讓)가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으면서 사지로 밀어 넣으려 한다.

* 만약 이세민이 사라진다면 원길은 반드시 건성을 죽이고 자립할 것이다.

* 이원길은 소인배로 덕도 없고 능력도 없으면서 어질고 능력 있는 사람들을 질투하니 국정이 반드시 문란해질 것이다.

* 군웅간의 정벌전은 이제 겨우 끝났지만 국토는 아직 황폐하고 민생은 도탄에 빠져 있는데 이민족은 호시탐탐 중원을 노리고 있다.

* 돌궐의 수만 기병이 황하 남쪽으로 내려와 오성(烏城)을 포위하고 있다. 만약 조정에 사람이 없으면 당조(唐朝)의 위기는 조석에 닥칠 것이다.

* 천하가 다시 어지러워지면 만민이 도탄에 빠질 것이다.

* 무력으로 나라를 평정하고 성세천조(盛世天朝)를 개창하는 일을 이세민이 아니면 누가 감당할 수 있겠는가?

여러 신료들이 진왕에게 권고했다.

“대왕(大王)이시여 순(舜) 임금은 어떤 인물입니까?”

진왕이 대답했다.

“지혜가 깊고 재주가 넘치면서도 온화하고 겸손하며 공명정대하고 성실하시고 아들로서 효성스러운 성명한 군주셨다.”

무리가 말했다.

“만약 순임금이 우물을 파러 들어갔을 때 부친과 동생이 흙으로 우물을 메우는 독수(毒手)를 펼칠 것을 방비하지 않았더라면 우물속의 진흙이 되었을 겁니다. 또 식량창고를 수리하기 위해 지붕위로 올라갔을 때 부친과 동생이 불을 지르는 독수를 미리 알고 피하지 않았더라면 창고 위에서 재가 되었을 겁니다. 그랬더라면 어떻게 성군이 되어 천하 사람들에게 은택을 입히고 후세에까지 법도가 유전될 수 있었겠습니까? 순임금은 부친이 회초리를 때리려 하면 참고 맞았지만 큰 몽둥이로 때리려 하면 달아났습니다. 왜냐하면 순임금이 마음속으로 생각한 것은 모두 큰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이 주는데도 취하지 않으면 도리어 허물이 되고 때가 이르렀음에도 행동하지 않으면 도리어 재앙을 초래합니다(天與弗取,反受其咎;時至不行,反受其殃).”

줄곧 참고 양보해왔던 진왕도 이 지경까지 이르자 더는 참을 수 없었다. 그는 마침내 천의(天意)를 따라 행동해 위엄을 보이기로 결정했다. 마냥 손을 묶고 죽음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이것이 대의(大義)였기 때문이다.

무덕 9년(626년) 6월 초하루 정사일(丁巳日 양력 6월 29일) 태백금성이 대낮에 정남방의 오위(午位)를 지나갔다. 또 초삼일(양력 7월 1일)에 태백금성이 또 다시 정남방에 나타났다. 고대인들은 이것을 ‘황권(皇權)변경’의 징조로 보았다. 천문에 밝았던 태사령(太史令) 부혁(傅奕)이 비밀리에 고조에게 상주했다. “태백성이 진(秦)지역에 나타났으니 진왕(秦王 이세민)이 마땅히 천하를 갖게 될 겁니다.”

황제가 이 상주문을 이세민에게 주었다. 이에 이세민은 비밀리에 이건성과 이원길이 후궁들과 음란한 짓을 했다는 상주문을 올리고는 말했다.

“신은 형제들에게 조금도 죄를 짓지 않았는데 지금 신을 죽이려 하니 마치 적을 위해 원수를 갚는 것 같습니다. 신이 지금 억울하게 죽어 혼(魂)이 지하로 돌아간다면 여러 도적들을 보기가 수치스러울 것입니다.”

황제가 이를 보고는 놀라 내일 건성과 원길을 불러 직접 국문하기로 하고 이세민도 참석하라고 통보했다.

한편 고조의 총비 장첩여(張婕妤)가 몰래 진왕이 올린 표문의 뜻을 알아채고는 말을 달려 이건성에게 알렸다. 이건성이 원길을 불러 모의하자 이원길이 말했다.

“마땅히 동궁부의 병사들을 챙기고 병이 났다는 핑계를 대고 조회에 나가지 않으면서 형세를 관망하셔야 합니다.”

하지만 이건성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우리 쪽이 군사를 방비한 것이 이미 삼엄하니 마땅히 아우와 함께 들어가서 직접 소식을 알아보자.”(《자치통감》191권)

6월 4일 경신일(양력 7월 2일) 이건성, 이원길이 아침 일찍부터 4~5백 명의 병사들을 파견해 현무문에 매복시켰다. 이세민도 장손무기 울지경덕과 함께 정예병력을 이끌고 갔다. 진왕 일행이 도착하자 이원길이 먼저 활을 당겨 이세민을 겨냥했으나 적중하지 못했다. 건성과 원길 두 사람이 이세민에게 3발의 화살을 쏘았지만 미리 방비한 이세민이 갑옷을 입고 있어서 부상을 입히지 못했다. 쌍방이 혼란스레 교전하던 도중 진숙보가 쏜 화살에 태자 이건성이 맞아 죽었다. 상황이 불리해진 이원길이 도망치려다 울지경덕이 쏜 화살에 죽었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현무문(玄武門)의 변’이다.

현무문의 격전이 평정된 후 재상 소우(蕭瑀) 등이 황제에게 권유했다.

“이건성과 이원길은 세운 공로가 없으면서도 진왕을 질투해 간사한 꾀를 사용했습니다. 지금 진왕이 이미 그들을 소멸했으니 이는 좋은 일입니다. 폐하께서는 마땅히 국사를 진왕에게 맡기셔야 합니다.”

이에 황제가 “이는 바로 평소 내가 바라던 바이다.”라고 말했다.

이세민은 고조 품에 안겨 한참을 통곡했다.

사서(史書)의 기록

“황태자 건성은 적장자로 황태자가 되어 동궁에 거처하며 뒤를 잇기를 기대했노라. 마침내 소인배들과 어울려 사악한 음모를 듣고는 임금과 어버이를 업신여기고 버려 골육이 갈라지고 몰래 패역(悖逆)을 꾀해 배은망덕한 자가 되었다. 사도(司徒) 제왕(齊王) 원길은 짐이 반석처럼 깊이 의지하고 임용권을 주어 총애가 아주 깊었으며 직위도 가볍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의 대의를 어기고 원악(元惡 악의 우두머리 이건성을 지칭)에 협력해 사특함을 돕고 감추며 서로 선동했으니 추악한 마음으로 반역하려는 자취가 하루아침에 모조리 드러났다. 저 두 흉수의 죄가 수년에 달하니 화가 곧 들이닥쳐 도륙되었다.”

(《전당문(全唐文)》제1부 권1 고조 《주건성원길대사조(誅建成元吉大赦詔)》-건성과 원길을 주살하고 대사면을 내리는 조칙)

“성인인 순임금도 네 죄인에게는 어질지 못했고 요임금도 아들인 단주(丹朱)를 훈계하지 못했으니 앞서 선례가 있었다. 건성이 짐의 공을 미워한 날이 오래되어 틀림없이 나라가 분리되거나 무너지는 변고가 발생했을 것이다. ‘나라가 망하는’ 재앙을 두려워하기 보다는 차라리 ‘형제간의 불화’란 비난을 걱정하는 게 낫지 않겠는가?”

(《구당서‧태종본기》)

“주(周)나라 문왕과 무왕이 나라를 여시니 한 가문에 세 분의 성인이 나왔다. 주공(周公)이 관숙과 채숙을 주살하자 성왕과 강왕의 도가 바르게 되었다. 정관의 풍속은 지금에 이르러 찬양되었다.”

(《구당서‧태종본기‧찬(贊)》)

“건성은 잔인하니 어찌 제왕의 재목이겠는가? 원길은 흉악하고 경솔해 집안을 망친 자취가 있다. 만약 세민이 무력으로 빼앗고 법으로 지켜 덕과 공을 쌓지 않았더라면 당나라가 어찌 삼백년에 걸쳐 스무 명의 황제가 이어갈 수 있었겠는가? 만약 작은 절개를 지키려 했다면 분명 큰 계책을 망쳤을 것이다. 진이세나 수양제와 비교한다면 역시 미치지 못한다.”

(《구당서‧고조이십이자전》)

“건성과 원길은 사실 두 흉수다. 안과 밖에서 사통함은 사람과 신이 용납하지 않는다. 지혜를 감춤으로써 밝음을 드러내고 깊은 근심으로 성스러움을 여셨다. 천운은 문황제 태종에게 속했으니 공을 이루고 바름을 지켜냈다. 선악이 분명해지고 사직이 이에 안정되었다.(《구당서‧고조이십이자전‧찬(贊)》)

“고공단보(古公亶父 주문왕의 조부)는 장자인 태백(泰伯)을 버리고 셋째인 계력(季歷)을 태자로 삼았고 문왕은 장자 백읍고(伯邑考)를 버리고 무왕을 태자로 삼았는데 이것이 잘못이란 말인가? 만약 어진 것으로 한다면 태종만큼 크게 어진 이가 없었고 큰 공과 덕을 지녀 천지를 바로잡았으니 이는 고공단보나 문왕과 같이 밝은 지혜를 기다릴 것도 없이 설사 아주 어리석은 사람일지라도 그가 천하를 가져야함을 알 수 있다. 고조가 안으로 미혹되어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나이가 들어 판단력이 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건성・원길이 태종을 해치려는 모의를 한 것은 태종의 계획이 아무 이유 없이 나온 게 아니라 실은 천하와 함께 주살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주공이 관숙과 채숙을 주살한 뜻과 비교해도 전혀 부끄러움이 없다.”(송나라 소백온(邵伯溫 소강절의 아들)의 《소씨견문록(邵氏聞見錄)》)

창세주(創世主)께서 기왕에 대당성세(大唐盛世)를 오천년 중화문화의 최정상으로 안배하셨다면 스스로 세상을 편안히 하고 사악을 진압하며 혼란을 없앨 큰 힘이 있어야만 이룰 수 있다.

그 일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라[直書其事]

정관 14년 태종이 방현령에게 말했다.

“나는 항상 이전 시대의 역사서에서 선한 자를 표창하고 악한 자를 징벌해 후세인들의 경계가 되도록 하는 것을 보았소. 옛날부터 그 시대의 역사를 제왕 자신이 직접 보지 못하도록 한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소.”

방현령이 대답했다.

“국사를 기록하는 사관이 선이든 악이든 모두 기록하는 것은 군주가 불법을 저지르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기록한 것이 군주의 마음을 거스를까 두렵기 때문에 군주가 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태종이 말했다.

“짐의 의견은 옛 사람과 다르오. 지금 내가 국사(國史)를 보려는 것은 좋은 일은 별도로 논의할 필요가 없지만 나쁜 일이 있으면 이후 경계로 삼아 스스로 바로잡으려는 것이오. 경이 초록을 적어 내게 보여줄 수 있을 것이오.”

이에 방현령 등이 국사를 간략히 기록한 고조실록과 태종실록 각 20권을 태종에게 주었다. 태종이 보고는 6월 4일 현무문 사건에 대해 모호한 내용이 많자 현령에게 이렇게 말했다.

“옛날에 주공께서 관숙과 채숙을 주살한 후 주나라 왕실이 편안해졌고 노나라의 계우(季友)가 형인 숙아(叔牙)를 독살한 후에야 노나라가 안정되었소. 짐이 한 행위의 의미는 이것과 같아서 원래 나라를 안정시키고 만민에게 복을 주기 위함이었소. 사관이 붓을 잡고 기록하면서 어찌 이런 일을 감출 수 있소? 즉시 겉만 번지르르한 언사를 고치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도록 하시오.”

그러자 시중 위징이 아뢰었다.

“신은 군주는 더없이 높고 존귀한 지위에 있어 꺼리거나 두려워하는 것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오직 국사만은 죄악을 경계하고 선을 권장함에 사용하는데 만약 사실이 아닌 것을 기록한다면 후대에 무엇을 보여주겠습니까? 폐하께서 현재 사관에게 위 언사를 수정하게 하신 것은 매우 공정한 일입니다.”(《정관정요(貞觀政要)》7권)

즉 ‘현무문 사건’은 본래 천추에 빛나는 좋은 일로 “사직을 안정시키고 만민을 이롭게 한 것이다.” “사관이 붓을 잡았으면 정정당당하게 쓸 것이지 번거롭게 감출게 무엇이란 말인가!”라는 태종의 말은 의리에도 부합하고 너무나 합당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53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