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정견망】
제3절 도가 존숭(尊崇)
진도(真道)가 당을 돕다
당대(唐代)에는 도가(道家) 수련이 광범위하게 퍼져 도(道)를 찾아 방문하는 이들이 아주 많았다. 명의(名醫) 손사막(孫思邈)은 평생 도를 닦으며 의술로 세상을 구제하는데 힘썼고 세인들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복을 주었다. 때문에 후세에 그를 가리켜 ‘손진인(孫真人)’ 또는 ‘약왕(藥王)’이라 불렸다. 태종 신변에도 적지 않은 도사들이 있었다. 왕원지(王遠知), 설이(薛頤), 이순풍(李淳風), 원천강(袁天綱) 등의 도가 수련진인들이 보좌했는데 이들 모두 당시의 유명한 도(名道)였다.
당 고조 이연은 도가를 존숭했다. 기평정(岐平定), 왕원지 등의 도사들이 노군(老君)의 뜻을 받든다고 하면서 비밀리에 부명(符命 역주: 하늘이 임금이 될 사람에게 내리는 상서로운 징조)을 알려주었다. 노자가 이씨(李氏 당나라 황실)를 보우했다는 전설이 이연이 처음 기병할 때부터 황위에 오를 때까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구당서‧고조본기》, 《혼원성기(混元聖紀)》 및 《역대숭도기(曆代崇道記)》 등에는 대업 13년(617년) 이연이 수나라의 무아낭장(武牙郎將) 송노생(宋老生)과 곽읍(霍邑)에서 교전할 때 기록이 나온다. 당시 “열흘간 장맛비를 만나 식량운송에 차질이 생겼다.” 바로 이때 갑자기 곽산 산신(山神)이 나타나 태상노군의 명령이라면서 이연에게 “반드시 천하를 얻을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또 “8월이면 비가 그치고 곽읍 동남쪽으로 길이 나타날 것이며 내가 마땅히 군사를 돕겠노라.”고 했다. 이렇게 “8월 신사일이 되자 고조가 병사를 이끌고 곽읍에 들어가 송노생을 참하고 평정했다.”
《혼원성기》에는 또 “대업 13년 정축일에 노군이 종남산에 강림해 산인(山人) 이순풍에게 말하길 ‘당공이 마땅히 천명을 받을 것이다(唐公當受天命)’라고 말했다.”고 한다.
나중에 이연이 제위에 오른 후 《당회요(唐會要)‧존숭도교(尊崇道教)》에 “무덕 3년(620년) 5월 진주(晉州) 사람 길선행(吉善行)이 양각산(羊角山)에서 붉은 갈기의 백마를 탄 한 노인을 만났는데 자태가 아주 위엄이 있었다. 노인이 말하길 ‘내가 당(唐) 천자에게 이르니 나는 네 조상이다. 올해 적들을 평정한 후 자손들이 천 년간 다스릴 것이다.’라고 했다.”
이연이 이 말을 듣고는 즉각 양각산에 노군묘(老君廟)를 세우고 자신의 조상으로 삼아 제사를 올렸다. 또 부산현(浮山縣)을 신산현(神山縣)으로 고치고 양각산을 용각산(龍角山)으로 바꿨다. 아울러 직접 여러 차례 노자사당을 찾아 배알하고 숭경을 표시하고 노자와 한 맥으로 이어진 혈연관계임을 확인했다.
태종은 도가를 황실의 종교로 삼아 도를 숭상하는 고조의 정책을 계승했다.
태종은 제위에 오르기 전부터 도사들과 밀접하게 왕래했다. 당시 법림(法琳)을 중심으로 한 불교도들은 태자 이건성을 옹호했고 왕원지를 중심으로 한 도교도들은 태종을 옹호했다.
왕원지는 수당시기 양주(揚州) 사람이다. 그의 모친이 대낮에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 신령한 봉황이 자기 몸에 모인 것을 보고 임신했다. 한 승려가 그의 부친을 찾아와 아이가 태어나면 장차 큰 방사(方士)가 될 것임을 미리 알려주었다. 왕원지는 어려서부터 기민하고 총명한데다 박학다식하고 재주가 많았다. 밝은 스승을 찾아 학문을 배우고 도를 닦으니 조야에 명성이 자자했다. 수양제가 제위에 오르기 전 진왕(晉王)으로 있을 때 양주에서 왕원지를 찾아가 만난 적이 있었다. 당시 왕원지는 머리카락을 일시에 백발로 변하게 했다 잠시 후 다시 흑발로 변하게 만들어 보는 이들을 놀라게 했다.
수양제는 등극한 후로도 그에게 제자의 예를 올리며 신선에 관련된 일들에 대한 자문을 구하곤 했다. 나중에 수양제가 양주로 떠나려 할 때 왕원지가 경성을 멀리 떠나면 안 된다고 알려주었지만 따르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양주에서 부하들이 일으킨 병란에 목이 졸려 시해 당했다.
한편 당고조 이연이 아직 현달(顯達)하기 전 왕원지가 몰래 천명이 그에게 있음을 넌지시 알려주었다. 무덕 4년(621년) 태종이 낙양에 진주하던 시기에 따로 시간을 내서 낙양 옥청관(玉清觀) 주지로 있던 왕원지를 예방했다. 당시 태종은 방현령과 함께 평민 복장을 하고 왕원지를 찾았다. 그는 전에 두 사람과 안면이 없었지만 그들을 맞이하면서 “이 중 성인(聖人)이 계시는데 혹 진왕(秦王)이 아니십니까?”라고 말했다. 태종이 깜짝 놀라 이 고인(高人)이 과연 명불허전이라며 사실대로 말했다.
그러자 왕원지가 말했다.
“장차 태평한 세상의 천자가 되실 터이니 반드시 자중하시기 바랍니다.”
태종은 제위에 오른 후에도 계속해서 도를 숭상하는 정책을 폈고 왕원지를 아주 중시했으며 또 중임을 맡기려 했다. 하지만 왕원지가 극력 고사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구당서‧왕원지전》에는 “태종이 등극하여 (왕원지에게) 중책을 맡기려 했으나 고사하고 산으로 돌아가길 청했다. 정관 9년(635년) 칙령으로 윤주(潤州) 모산(茅山)에 태수관(太受觀)을 설치하게 하고 아울러 도사 27인을 두게 했다.” 또 조서를 내려 왕원지에 대해 “이간(夷簡)을 지조 있게 실천하고 덕업(德業)이 높고 순수하여 속세의 잡스러움을 물리치고 허현(虛玄)에 뜻을 두었다.(操履夷簡,德業沖粹, 摒棄塵雜,棲志虛玄)”고 칭했다.
정관 9년(635년)에 이르러 왕원지의 예언이 이미 실현되어 모든 것이 이미 이루어지자 태종은 여전히 왕원지를 생각했다. 이에 공개적으로 조서를 반포해 세상 밖의 이 고인에 대해 추념의 정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조서에는 “짐이 옛날 번왕(藩王)으로 있을 때 일찍이 도(道)들 물은 적이 있는데 그의 풍모를 되돌아보며 오매불망 잊은 적이 없다.”(《구당서‧왕원지전》)
활주(滑州)의 도사 설이(薛頤) 역시 태종에게 비밀리에 부명(符命)을 알려주며 “덕성(德星)이 진(秦)의 분야를 지키고 있으니 왕께서는 마땅히 천하를 가지실 겁니다. 부디 자애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했다. 태종이 제위에 오르기 전부터 설이에게 태사승(太史丞)을 제수했고 이어 태사령(太史令)으로 옮기게 했다. 정관 연간에 설이는 표문을 올려 도사가 되기를 청하자 태종은 “구종산(九嵕山)에 자부관(紫府觀)을 설치하고 설이를 중대부(中大夫)로 임명해 자부관의 일을 주관하게 했다. 또 관(關) 내부에 청대(清台)를 설치해 천문현상을 관측하고 재이(災異)나 상서(祥瑞) 일식이나 월식 모반 등의 일이 있으면 아뢰게 했다.” (《구당서》 〈열전 141〉》
태종은 정관 6년(632년) 박주(亳州)에 있는 태상노군의 사당을 수리하게 했다. 태종은 또 직접 도덕경을 연구하고 널리 전파하는데 참여했다. 정관 13년(639년) 태종은 국자좨주(國子祭酒) 공영달, 사문(沙門) 혜정(慧淨), 도사 채황(蔡晃)을 홍문전으로 불러 유석도(儒釋道) 삼교에 대해 함께 담론했다. 정관 16년(642년) 고구려에서 사신을 보내 도교를 배우고 싶다고 하자 태종이 도사 서달(敘達) 등 8명을 보내 도교 경전을 강의하고 전수하게 했다.(《삼국사기‧고구려본기》)
한편 당나라와 왕래하던 서역 여러 나라들 가운데 쿠마라국(伽沒路國)이 있었다. 왕현책(王玄策)이 이 나라에 가자 국왕이 사신을 파견해 기이한 보물과 지도를 바치면서 중국의 노자상과 도덕경을 요청했다. 정관 21년(647년) 태종은 현장과 도사 성현영(成玄英)에게 명령을 내려 도덕경을 산스크리트 어로 번역하게 했다. 또 왕현책에게 노자의 도덕경을 주어 서역 여러 나라에 들어가게 했다.
당서(唐書)에 기록된 ‘도(道)’
태종이 위징 등에게 명해 편찬케 한 《수서‧경적지(經籍志)》 중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도경(道經)에서는 원시천존은 태원(太元)보다 전에 태어나 자연의 기를 품부 받고 마음을 비우고 정신을 집중하니 그 끝이 어딘 지 모른다고 했다. 그러므로 천지(天地)가 훼멸되고 겁수(劫數)가 다 끝남을 말하자면 대체로 불경(佛經)과 같다. 천존(天尊)의 몸이 늘 존재하며 불멸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매번 천지가 처음 열려 혹 옥경(玉京) 위에 있거나 혹 궁상(窮桑)의 들에 있어도 비밀스런 도를 주기 때문에 겁을 열어 사람을 제도한다[開劫度人]고 말한다. 그러나 개겁(開劫)은 한번뿐이 아니라서 연강(延康), 적명(赤明), 용한(龍漢), 개황(開皇)은 그 연호이다. 그 사이의 기간은 41억만 년이다. 제도하는 이는 모두 천선상품(天仙上品)이니 태상노군, 태상장인(太上丈人), 천진황인(天真皇人), 오방천제(五方天帝) 및 제선관(諸仙官)이 있어 돌아가면서 함께 이어받는데 세인들은 알지 못한다.”
“언급한 경(經) 역시 원일(元一)의 기(氣)를 품어 자연히 존재하니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천존과 함께 늘 존재하며 불멸했다. 천지가 불괴(不壞)하면 깊이 감춰 전하지 못하고 겁운(劫運)이 열리면 그 글이 스스로 드러났다. 무릇 여덟 글자로 도체(道體)의 심오함을 다했으니 이를 일러 천서(天書)라 한다. 글자는 사방 1장으로 여덟 모서리에서 빛이 나는데 휘황찬란해 눈이 부실 정도다. 비록 천선이라 해도 자세히 살펴볼 수 없다. 천존이 겁을 여시니 바로 천진황인에게 명하시어 천음(天音)을 고쳐 울리게 하고 변별하고 분석하게 했다. 천진(天眞)이하로 제선(諸仙)에 이르기까지 절차와 등급에 따라 차례대로 서로 이어받게 했다. 제선이 얻은 후에야 비로소 세인(世人)에게 전수했다. 그러나 천존께서 겪으신 연수로 처음 개겁하여 사람에게 법을 전수하니 소중한 비밀을 얻음에는 또한 연한이 있으니 바야흐로 처음 전수하셨다. 상품(上品)이며 연수가 오래되었고 하품이면 연수가 가까웠다.”
“그러므로 지금 도를 받은 자는 49년을 거쳐 처음 사람에게 전수해주었다. 그 큰 뜻을 추론해보면 대개 인애(仁愛)와 청정(淸靜)으로 돌아가는데 점차적으로 닦아서 연마하면 서서히 장생(長生)에 이르고 자연히 신비한 변화가 있어 혹은 백일등선(白日登仙 대낮에 신선이 되어 올라감)하여 도(道)와 합체된다. 그 도를 받는 방법은 처음에는 《오천문록(五千文菉)》을 받고 다음 《삼동록(三洞菉)》,그 다음 《동현록(洞玄菉)》을 받고, 그 다음에 《상청록(上清菉)》을 받는다. 여기서 녹(菉)이란 모두 소서(素書)인데 여러 천조(天曹)의 관속(官屬)과 좌리(佐吏)들의 이름이 나오고 또 여러 부절이 있는데 그 사이에 뒤섞인 게 있고 문장이 괴이해서 세상에 아는 사람이 없다. 받은 사람은 반드시 먼저 결제한 후 금환(金環)으로 이은 후 여러 가지 폐백을 갖고 스승을 알현해야 한다. 스승이 그 폐백을 받은 후 녹을 수여하는데 금환을 갈라 각각 반을 지니고 계약으로 삼는다. 제자가 녹을 받으면 끈으로 묶어 차고 다닌다.”(《수서》35권 〈경(經)제30〉)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535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