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정견망】
제4절 불가지지(扶持佛家)
불법(佛法)을 널리 전파
대당성세(大唐盛世)에 불가사상의 전파는 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이 규모가 컸다. 불경을 번역하고 전파한 수량이 거대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불법(佛法)을 신봉하고 독실하게 인과응보를 믿으며 마음을 닦고 선(善)을 지향했다. 이렇게 되자 사회가 안정되고 백성들의 풍속이 순박해져서 마치 불경에서 언급한 것과 같았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작용하는 곳은 국가나 도시나 마을에 이르기까지 교화를 입지 않은 곳이 없다. 천하는 화순(和順)하고 해와 달이 청명(淸明)하며 비바람이 때맞춰 불어 재난이 일어나지 않는다. 나라는 풍요롭고 백성들은 편안해 병사와 무기를 쓸 일이 없다. 도덕을 숭상하고 사랑을 베풀며 힘써 예절고 겸양을 닦는다(佛所行處,國邑丘聚,靡不蒙化。天下和順,日月清明。風雨以時,災厲不起。國豐民安,兵戈無用。崇德興仁,務修禮讓)”
당나라 때 불법이 이렇게 널리 전파된 데는 태종의 큰 지지가 있었다.
수나라 말기 전쟁의 혼란 속에서 불가수련 역시 큰 영향을 받았다. “온갖 사찰이 인멸(湮滅)되어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으며”, “불사(佛寺)와 승방(僧坊) 역시 따라서 재로 변했다. 승려들도 이리저리 흩어져 고초를 겪었다.”
태종은 불가수련을 지지해 “승려의 출가를 허락해 사찰을 세우고 불사(佛事)를 지원하게 했다.” 아울러 승려들의 실질적인 수련을 몹시 중시하는 태도를 명확히 표시해 불법(佛法)에 부합하지 않거나 덕행을 파괴하는 승려에 대해서는 결코 관용을 베풀지 않아 법문(法門)을 청정하게 하도록 힘썼다.
태종은 또 칙령으로 부처님 사리를 대중에게 공개하게 했고 화엄종(華嚴宗) 초조(初祖)인 두순(杜順)을 궁궐로 불로 ‘제심(帝心)’이란 호를 내렸다. 또 불경 번역 등 여러 가지 조치를 안배해 인심(人心)을 깨닫게 하고 후세에 불법이 진일보도 널리 전파될 기초를 다져주었다.
중국 불교는 본래 서역 천축(인도)에서 비롯되었다. 후한 명제(明帝)는 일찍이 금인(金人)이 궁정에 날아오는 꿈을 꾼 후 낭중(郎中) 채음(蔡愔)과 진경(秦景)을 천축에 파견해 법을 구하게 했고 42장의 불경과 석가모니 불상을 가져왔다. 불가 수련법문이 이때부터 중토에 전파되었다.
삼국시기에 들어와 중국인이 최초로 계율을 받고 머리를 깎아 정식 승려가 되었다. 삼국시기부터 진(晉)나라에 이르기까지 늘 서역에 가서 법을 구하고 불경을 가져오는 사람이 있었으며 불가수련이 동쪽으로 전해져 점차적으로 흥성해졌다. 그 후 역대로 조대(朝代)를 거치면서 우여곡절이 많았다. 어떤 황제는 불가수련을 숭상했지만 어떤 제왕은 승려들이 부처의 율법을 많이 어겼다는 등의 구실로 승려들을 묻어죽이거나 불상을 태워버렸다.
당 고조는 재위 시 일찍이 성지를 내려 경성(京城 장안)에 사찰 3곳과 도관 1곳만 남기게 했고 나머지 각 주(州)에서는 오직 1개의 사찰만 남기도록 했다. 태종이 즉위한 후 천하에 대사면을 내리고 승려와 도사의 정원을 크게 감소시킨 고조의 이 칙령의 시행을 중단하게 했다.
일찍이 무덕(武德) 3년(620년) 진왕(秦王) 이세민이 왕세충을 평정할 때의 일이다. 소림사 상좌 선호(善護), 주지 조(操), 도유나(都維那 사찰의 실무책임자) 혜(惠), 승려 담종(曇宗), 보혜(普惠), 명숭(明嵩), 영헌(靈憲), 보승(普勝), 지수(智守), 도광(道廣), 지흥(智興), 승만(僧滿), 승풍(僧豐) 등 13명의 승려가 낙양 인근 원주성(轅州城)의 조효재(趙孝宰) 등과 안팎에서 호응해 성을 빼앗고 성을 지키던 왕세충의 조카 왕인칙(王仁則)을 체포한 후 이세민에게 귀부했다. 이세민은 왕군곽(王君廓)을 보내 군사적 요지였던 이 성을 점령하게 했다.
그 후 이세민은 이안원(李安遠)을 소림사로 파견해 《고백곡오소림사상좌서(告柏谷塢少林寺上座書)-백곡오의 소림사 상좌에게 알리는 서》란 교서를 가져가 위로하게 했다. 나중에 또 칙령을 내려 1000단(段)의 비단, 둔전지 40경(頃), 물레방아 하나를 소림사에 하사하고 관비로 5백명의 승병 및 개인 병영(營房)을 설립할 수 있게 했다. 이때부터 소림사의 명성이 크게 높아지기 시작했다.
이듬해 진왕 이세민이 형양(滎陽)에서 두건덕을 체포한 후 밤에 흐릿하게 비가 내리는 가운데 “동남쪽 하늘가에서 하늘을 향해 광염이 솟구치고” “관음보살이 금신(金身)을 드러냈다.” 이에 제장들과 병사들에게 말하길 “이는 바로 군사의 성공을 알리고 하늘과 신이 보우하신 것이니 그 공이 크구나!”(《전당문》146권,육원랑(陸元朗)의 《칙건광무산관음사갈(敕建廣武山觀音寺碣)》)라고 했다. 그가 고조에게 이를 알리자 고조가 마침내 칙령을 내려 형양 광무산에 관음사를 세우게 했다.
태종이 즉위한 첫해에 칙서로 경성의 고승들을 내전으로 불러 7일간 나라의 안정을 위한 기도를 올리게 했다. 또 다년간 전란의 와중에 사망한 병사들 및 무고하게 죽어간 민중들을 초도하게 했다. 태종은 당초 천하를 평정할 때 법으로 다스려 죽인 사람들을 생각하며 각 사찰의 여러 승려들에게 의복을 보시했다.
정관 3년 12월 태종은 또 《행진소입칠사조(行陣所立七寺詔)–행진소에 7개의 절을 세우라는 조서》를 내려 과거 진(陣)을 펼치고 싸웠던 일곱 지역에 사찰을 건립하게 했다. 정관 3년 태종은 또 예전 자택을 고쳐 흥성사(興聖寺)로 만들었다. 정관 5년 태종은 또 목태후(穆太後 모친인 두씨)를 위해 경선궁(慶善宮) 안에 자덕사(慈德寺)를 만들고 소릉(昭陵 태종의 능묘, 당시에는 황제가 살아 있을 때부터 능묘를 만들었다)에 요대사(瑤台寺)를 건립했다.
정관 6년에는 또 조서를 내려 태원(太原)에 있던 옛날 집을 수리해 천궁사(天宮事)를 세웠다. 정관 8년 목 태후를 추도하기 위해 서쪽 진안성 안에 홍복사(弘福寺)를 건립했다. 정관 12년 태종은 요동원정에서 돌아오다가 조서를 내려 전쟁 중에 사망한 군사와 백성들을 위해 승려를 불러 초도하게 하고 유주(幽州)에 충염사(忠閻寺)를 창건하게 했다.
태종이 불가수련을 지지했지만 승려의 본분은 불타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임을 명확히 하여 불법을 위배하고 불문에 화란을 일이키는 것은 일체 허용하지 않았다. 그는 정관 원년 일찍이 승려 3천명의 출가를 허락하는 조서에서 말했다.
“짐은 근자에 재난으로 인해 승려가 줄어들어 연화대와 보탑에 문간을 기웃거리는 자는 있어도 머무는 사람이 없어, 청련(淸蓮)같은 부처님의 남색 모발이 비바람을 맞고 사찰 건물 조락하고 훼손되어 진실로 마음이 아프다.”
“천하의 여러 주(州)마다 사찰이 있는 곳에서는 지방관이 사람을 제도해 승니(僧尼 비구와 비구니)로 삼되 총수를 3천 명으로 제한한다.…반드시 정성되고 덕업(德業)이 있는 사람을 취하는데 힘쓰되 나이가 많고 적음을 따지지 말라.”
“불법에 부합하지 않고 덕행을 잃은 승니들에 대해서는 절대 관용을 베풀지 않아 법문을 맑고 청정해지도록 힘써라.”
정관 3년 태종은 수나라 때 설치했던 대흥선사(大興善寺)의 번역장소를 다시 회복시켜 파파(波頗 서돌궐의 승려 파라파가다라)에게 불경 번역을 주관하게 했다. 또 당나라 승려 혜승(慧乘), 혜색(慧賾), 혜정(慧淨), 법림(法琳) 등 19명이 번역을 돕게 했으며 대신 방현령(房玄齡) 두정륜(杜正倫), 소경(蕭璟) 등을 시켜 교감하게 했다.
태종은 정관 5년(631년) ‘불사리를 공개하라는 칙령’을 발표했다. 이는 대당황제로는 최초로 법문사에 소장한 불사리를 “대중에게 공개”토록 한 것이다. 《법원주림(法苑珠林)》의 기록에 따르면 “사리가 나오자 승려와 속인들이 수천 명이 몰려들어 동시에 감상했다. 이때 오래 전부터 눈이 멀었던 한 맹인이 (사리를 보기 위해) 눈을 부릅뜨려다 갑자기 눈이 밝아졌다.”
정관 6년(632년) 태종이 화엄종 초조 두순을 궁궐로 초빙해 직접 대전 아래까지 내려가 맞이하고 ‘제심(帝心)’이란 호를 내렸다. 궁정에서 위아래 모두 두순을 부처님처럼 예를 갖춰 공경했다. 이 때문에 두순은 나중에 ‘제심존자(帝心尊者)’로 존칭되었다.
태종 정관 15년(641년)에는 문성(文成)공주가 티베트로 시집가면서 중국에서 번역한 불경과 불상을 갖고 들어가 불가수련이 중국뿐만 아니라 티베트에서도 널리 선양시켰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535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