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정견망】
덕을 잃은 교육
이 시기에 들어와 중국인들은 5천년 중국 신전문화와 분리되어 중국인의 도덕이 추락했으며 민족정신이 거의 사라져 나라가 망하기 직전에까지 이르렀다. 장개석은 중국의 실패는 교육이 제대로 되지 못하고 자신의 고상한 도덕문화와 위대한 지혜를 계승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교육의 요지(要旨)는 도덕을 강조해야 한다고 했다.
“사실 우리 중국은 이렇게 고상하고 심후(深厚)한 문화기초와 이렇게 우수한 민족을 지녔고 여기에 광활하고 비옥한 토지와 유구한 역사를 더하면 현대 세계상의 그 어떤 나라나 또는 민족과 비교해도 더 진보하고 강성해야 하는데 왜 지금 저 하찮은 섬나라만도 못하게 되었으며 오히려 그들의 침략을 받게 되었는가? 바로 우리의 교육이 안 되고 우리 민족 고유의 고상한 도덕문화와 위대한 지혜와 재능을 계승하고 발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험 삼아 일본을 보자. 일본은 원래 문화기초가 없는 낙후된 나라였지만 수십 년간의 노력 끝에 부강한 나라로 성공했다. 먼저 중국을 싸워 이겼고 나중에 러시아를 꺾었으며 지금은 더 과감해져서 세계를 적으로 삼고 우리 중국을 멋대로 침략하고 있다. 그들이 가난한데서 부유해지고 약한데서 강해진 원인은 바로 메이지유신 이후 교육의 성공 때문이다.”
“우리 중국의 신식(新式)교육은 일본과 큰 차이가 없으며 거의 비슷한 시기에 시작되었지만 왜 일본 교육은 2~30년 만에 과학이 진보하고 정치는 공명하며 경제가 발달해 현대적인 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는가? 반면 우리 중국 교육은 오히려 아무런 좋은 효과도 내지 못하고 국가는 아직까지도 가난하고 약해져서 남의 모욕과 압박을 받아야 하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 중국에서 이전에 교육을 주관한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교육의 요지에 주의하지 않았거나 또는 주의했어도 요지에 따라서 하지 못했기 때문에 교육이 실질적인 효과를 낳지 못한 것이다. 기껏해야 표면적인 발전만 있었을 뿐 실질적인 진보는 아주 적었다.”
“내가 말하는 교육의 요지란 무엇인가? 바로 보편적으로 일반 국민의 ‘덕(德), 지(智), 체(體), 군(郡)’ 4가지를 증진하도록 기르는 것이다. 나라의 부강과 민족의 창성은 완전히 국민의 도덕이 고상하며 지식이 우량하고 체백(體魄 신체와 정신)의 강건함과 사회성(群性)의 발양에 근원한다. 지금 우리 중국의 일반 국민은 정신도덕이 추락하고 지식의 정도가 낮으며 체백이 쇠약하며 사회적으로 산만해 어느 하나 우리나라와 민족의 주요한 병근(病根)이 아닌 게 없다. 이런 주요한 병근을 제거하지 못한다면 절대 약한 것을 강하게 하고 망하는 것을 구원해 부흥시킬 수 없다!”
장개석은 항일의 관건은 정신과 도덕에 있다고 지적했다.
“소위 전쟁이란 순수한 물질역량만의 전쟁이 아니며 물질역량 외에 또 가장 근본적인 정신역량이 있다. 물질역량은 반드시 정신역량을 기초로 한 후에야 충분히 발휘될 수 있다. 그러므로 정신역량은 늘 물질역량을 극복할 수 있으며 최후의 승리를 얻을 수 있다. 우리 중국은 지금 경제와 과학이 낙후되어 일체 물질역량을 단시간에 충실히 할 순 없지만 정신은 우리 사람마다 모두 고유한 것이다. 소위 정신이란 바로 민족정신을 말한다. 민족정신은 민족 고유의 도덕인 ‘충효(忠孝), 인애(仁愛), 신의(信義), 평화.’에서 생긴다. 오직 우리 전 국민이 민족 고유의 도덕을 회복하고 민족 고유의 정신을 발휘하며 일치단결해 공동으로 분투한다면 반드시 적의 우세한 물질역량을 싸워 이길 수 있다.”(《정부와 인민이 공동으로 나라를 구하는 중요한 도리(政府與人民共同救國之要道)》,1936년)
2. 무사도의 근원
왜국(倭國)–일본
고대에 고대에 왜국(倭國)으로 불렸고 백성들의 풍속이 순박했다. 진시황이 서불(徐市)을 동쪽으로 파견하면서 일본에 중화문화를 가져다주었다. 수당(隋唐)시기 일본은 대량의 유학생을 중국으로 파견해 전면적으로 중화문명을 흡수했다.
당나라 정관 4년(630년)부터는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했는데 이를 견당사(遣唐使)라 한다. 이들 견당사는 대당의 신전문화와 각종 다양한 제도, 민속, 건축, 복식 등을 일본에 가져갔다. “당태종은 그 나라가 거처하는 곳이 해가 뜨는 동해에 의지하기 때문에 국명을 일본(日本)이라 하사했으니 의미는 해가 뜨는 근본을 말한다.”
정관 20년(646년) 일본은 ‘다이카개신’(大化改新)을 단행했다. 고토쿠(孝德) 일황이 중국을 모방해 연호를 만들면서 ‘다이카’라 한 것이다. 다이카 개신 이후 일황은 나라이름을 태종이 전에 하사했던 국명인 일본으로 정식으로 고쳤다.
당나라 고종 때 일본이 신라를 침범하면서 전쟁이 일어났지만 당나라가 이겼다. 역대 천고영웅인물들은 일본민족을 포함해 주변민족에 관심을 가져왔다. 신주(神州)무대에서 조대(朝代)가 변경되는 가운데 대당의 문화는 일본에 뿌리를 내렸다. 원나라 때는 두 차례에 걸쳐 일본을 공격하려 했으나 모두 폭풍우에 기세가 꺾여 돌아와야 했다. 일본사람들은 이를 가미카제(神風)라 하는데 의미는 신이 거처하는 곳에서 온 위력이 강력한 폭풍을 말한다. 당시 원나라가 일본 본토에 발을 들여놓지 못했기 때문에 대당 문화가 일본에서 보존될 수 있었다.
일본은 유교(儒敎) 중에서 무사도(武士道)로 나라를 세웠다. 남송시기부터 무사(武士)가 집권해 가마쿠라 막부(鐮倉幕府), 무로마치(室町) 막부, 에도막부(江戶幕府 여기서 막부란 고대 중국어로 원래 출정할 때 대장군의 관공서를 가리킨다) 등 세 시기를 거쳐 왔다. 1185년 겐페이 캇센(源平合戰)부터 시작해 1867년 메이지유신에 이르기까지 총 682년에 걸쳐 일본은 장기간 무인이 집권한 역사가 있었다.
“미나모토 요리모토(源賴朝)는 가마쿠라 막부(남송 광종 소희 연간)를 창설해 부하 무사들을 이끌고 유도를 숭상하며 천하를 통치했다. 당시 정치는 간이(簡易)함을 숭상했고 예의는 검약을 숭상했으며 무사도에 대한 교육을 특히 중시했다. 미나모토 요리모토는 무인집안 출신이라 극단적으로 무사정신을 중시했다. 소위 무사의 정신이란 가령 충효를 다하고 믿음을 지키며 홀로 있음을 삼가면서, 안으로는 사람이 되는 도를 밝게 하고 밖으로는 무공을 닦는 등이다.
무사는 백성의 사표를 자처하며 소위 ‘꽃이 되려면 사꾸라가 되고 사람이 되려면 마땅히 무사가 되라(爲花當爲櫻花,爲人當爲武士也)’고 했다. 무사는 가정교육이 더욱 엄격해서 ‘칼 속에서 죽고 죽음을 돌아가는 것으로 여기며 적의 무기가 얼굴을 찌르는 것은 무사에게는 큰 치욕이다(死在刀劍裏,視死如歸,敵人武器刺及面部,爲武士之大恥辱)’라는 등의 격언이 있었다. 이런 무사도 교육은 당시 일본 선비들의 풍속에 큰 영향을 끼쳤고 무사들이 존중하는 신조(信條)가 점차 일반인들도 공동으로 존중하고 지키는 덕목이 되었다. 이외에도 신불(神佛)을 공경하는 사상 역시 무사도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일본은 신위(神威 신의 위엄)와 불력(佛力 부처님의 힘)을 무력과 함께 나란히 거론했으며 출정하거나 전투에 임하거나에 구애받지 않고 늘 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이런 풍속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중국의 입국정신(中國的立國精神)》,1932년)
원나라와 청나라 두 왕조가 중원에 들어온 후 일본 조야(朝野)에서는 “애산(崖山 역주: 남송의 마지막 재상 육수부가 어린 황제를 안고 투신한 곳) 이후로는 중국이 없고, 명나라가 망한 후에는 화하(華夏)가 없다”는 주장이 나타났다. 즉 일본이야말로 진정한 중화문화의 계승자로 여기며 스스로를 중국이라 칭하고 화하(華夏)를 만이(蠻夷)로 여기며 화인(華人)을 ‘청나라 노예(清國奴)’또는 ‘지나인(支那人)’ 등으로 불렀다.
무사도는 일본 민족의 영혼이며 장개석은 이 한 점을 가장 분명히 했다.
“무사도의 역사는 비록 우리 송대(宋代)에 해당하는 일본의 미나모토 요리모토 시기부터 있었지만 도쿠가와 막부 이후 메이지 유신 시대에 특히 흥성했다. 그들은 무사도를 가져다 일본의 민족정신을 제창했고 자신들의 대화혼(大和魂)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일본의 민족영혼 즉 무사도가 바로 그들 국가와 민족의 진정한 정신이다.”
“총리께서는 늘 ‘마음을 공략함이 상책(攻心爲上)’이라는 손자(孫子)의 구절을 인용하곤 하셨는데 다시 말해 이런 의미다. 우리가 적국을 공격하려면 반드시 먼저 그의 마음을 공격해야 하며 단순히 그의 성곽을 얻고 그의 포로를 잡는 것만으로는 다 소용이 없다는 뜻이다. 물론 누구라도 이런 격언을 기억할 수는 있지만 특히 일본이 중국을 침략한 정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한다. 이것은 그 어떤 전술과 무기를 연구하는 것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일본인의 사도(士道)는 바로 중국 유교(儒敎)의 두 글자에 해당한다. 사(士)는 바로 유(儒)를 말하며 도(道)는 교(敎)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사도란 곧 유교를 가리킨다. 무사도는 바로 유교 중의 잔존물다.”
“유도(儒道)는 본래 전반 우리 중국에서 왕도(王道)의 민족정신이었지만 오히려 일본인들이 단편적으로 가져가서는 그들의 패도(覇道)의 민족정신을 만들었다.”
“무사도의 정신은 단지 용기(勇)에만 있을 뿐이며 기껏해야 여기에 약간의 지(智)를 더한 것이다. 우리 중국 고대인들은 용기(勇)를 설명할 때 의례(義禮)의 용과 혈기(血氣)의 용을 구별했다. 그러나 우리 중국의 지인용(智仁勇) 세 글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仁)임에도 일본인들은 이것이 아예 없다. 때문에 그들은 신의(信義), 인애(仁愛), 평화 등은 말하지 않고 완전히 침략과 폭력만을 말한다.”
“무사도의 이치는 이런 것에 불과하며 무슨 진기할 것이 없다. 또한 그들 일본 고유의 보물이 아니며 중국의 옛날 물건을 훔쳐가서는 자기 민족의 정신으로 만들었고 뜻밖에도 그것을 이용해 우리 중국을 침략한 것이다. 반면 우리 중국은 우리 고유의 것임에도 도리어 스스로 포기하고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남들이 훔쳐가게 했고 그들이 이를 이용해 우리를 압박하는 것이다. 그러니 당신이 보라 이 얼마나 비참한가! 이 얼마나 치욕스러운가!
(《중국의 입국정신(中國的立國精神)》,1932년)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560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