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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영웅인물】 장개석(15): 서안사변

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정견망】

서안사변

집안의 적은 막기 어려워

중공은 통일전선에 장학량의 이용 가능성이 큰 것을 발견하고는 그에게 국방정부(國防政府)와 항일연합군을 조직해 난주(蘭州)를 차지하고 소련과의 교통을 열면 무기를 받을 수 있다고 제안했다. “당장 홍군과 협력하기로 약속하고 9~10월 사이 유리한 시기를 정해 항일국면을 발동할 결심을 내려 난주를 점령하고 소련과의 통로를 열며 내부를 공고히 다지고 수원(綏遠)으로 출병하는 것을 기본전략방침으로 삼는다.”

이 유혹에 넘어간 장학량은 공산당과 소련의 지지를 얻고 무력으로 중앙에 저항할 준비를 하면 서북을 차지할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1936년 5월 초 장학량 신변의 중공 특사 유정(劉鼎)이 섬북(陝北 중공 거점)에 급전을 보냈는데 기밀유지를 위해 은어를 많이 사용했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괄호 안은 은어에 대한 설명이다.

“당신이 그(장학량)의 계획을 보면 크게는 그의 집이 이 큰 건물(동북군)을 완전히 가져와 동쪽 큰 길(양호성의 17로군을 쟁취)까지 기도하려 한다. 작게는 그의 고용인들을 모두 강력하고 유능한 경호원(동북군 내부의 장령)으로 만들려 한다. 그는 최근 큰 활동(장개석 반대 활동)을 펼칠 준비를 하고 있고 지금은 또 무장을 착실히 해서 인근의 여러 본가들(서북의 군벌들을 쟁취) 및 그의 대문 앞에 사는 푸른 도포를 좋아하는 몇몇 젊은이들과 엄노인(염석산의 군대) 등과 잘해보려 한다. 그는 이미 ‘愛×(애국)’과 ‘抗×(항일)’활동을 대내외적으로 언급하면서 노사장(장개석)이 공공연히 반대할 수 없게 만드는 동시에 강경하게 노사장과 한번 싸울 준비(장개석에 철저히 반대하는 일)를 하고 있다. 노인(장학량)은 11월이면 새 애인의 친구들(소련)의 지지를 얻을 수 있고 11월이면 변화가 생길 거라고 했다. 이 가운데 대내적으로는 화친하며 친구에 대해서는 항일 대활동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노사장(장개석)을 크게 떠받들어 최고조에 이르게 한다. 반년 정도만 노력하면 큰일을 이룰 수 있다. 나는 일을 하면 철저하게 한다.”(《유정이 이극농에게 보낸 편지(劉鼎致李克農信)》,1936년 4월 27일)

장학량은 중공과 가진 몇 차례 협상에서 단 한 번도 소련의 원조 문제를 언급하지 않은 적이 없다. 나중에 장학량과 양호성은 중공과 회동해 서북에 동북군(東北軍 장학량), 서북군(西北軍 양호성)과 홍군(紅軍)이 삼위일체 된 서북연합군을 만들 준비를 했고 남경의 중앙정부와 대립하는 ‘서북(西北)항일연합정부’를 설립하려 했다.

장학량 본인은 1936년 6월말 중공중앙 연락원 유정(劉鼎 중공 고위 특무)을 통해 처음으로 중공중앙에 입당신청서를 제출했다. 7월 2일 중공은 코민테른에 지령을 내려달라고 요청했다. 구(舊) 소련에서 공개된 코민테른 문건에 따르면 코민테른은 1936년 8월 15일 전보를 보내 “우리를 특히 불안하게 하는 것은 당신들이 입당을 원하는 모든 이들에 대해 사회적 출신배경을 따지지 않고 모두 입당을 받아들이거나 또는 일부 야심가들이 당내로 뚫고 들어오는 결정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으로 심지어 장학량의 입당을 받아들이려 한다는 통지까지 했다는 점이다.”

“전(前) 중공중앙서기처 서기 및 중앙통일전선부장을 지낸 염명복(閻明複)의 폭로에 따르면 엽검영(葉劍英) 생전 동북군 당사 편집을 맡은 송려(宋黎 서안사변 당시 장학량 주변에서 일하던 중공 비밀당원으로 2002년 11월 22일 사망)에게 장학량은 중공 당원임을 인정했다. 송려는 당시 엽검영과 나눈 대화를 기록했고 또 그 원고를 금고에 넣어 보존했다. 아울러 장학량이 아직 건재하니 우리는 절대적으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그를 보호해야 하며 그의 중공 당원신분을 외부에 누설해서는 절대 안 된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대화기록을 꺼내 중앙에 보고해야 한다.”[사명(史鳴),《서안사변 주역 장학량의 중공당원 신분 폭로(西安事變主角張學良中共黨員身份揭秘)》]

일찍이 1936년 6월 16일 중공 내부에 한 보고서가 발표되었다. 당시 중공은 이미 장학량과 약정을 맺어 일단 소련의 동의와 협조를 얻은 후 곧바로 서북에서 항일(抗日)반장(反蔣)운동을 발동시켜 섬서, 감숙, 영하, 청해, 신강 등 5성을 하나로 결합해 서북국방정부와 항일연합군 설립을 쟁취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 계획에 따를 경우 중국은 장차 불가피하게 대규모 내전국면에 빠지게 되고 모스크바가 원하던 중국이 거국적으로 일본에 저항해 일본의 소련 침공 가능성을 낮춰줄 가능성은 불가능해진다. 그러므로 이 계획은 곧장 스탈린 등으로부터 부정당했다.

7월 23일 코민테른 집행위원장 디미트로프는 중국문제에 관한 토론회에서 다음과 같이 명확히 지적했다.

“중국에서의 임무는 지금 소비에트를 확대하고 홍군을 발전시키는 게 아니라 기회를 찾고 방법을 찾아 적당한 구호와 적당한 방법으로 절대다수 중국민중들과 연합해 항일하는 것이다.”(1936년 7월 23일 코민테른 중국문제회의에서 디미트로프의 발언)

“장개석과 일본을 똑같이 보는 것은 옳지 않다. 이 방침은 정치적으로 착오적인데 왜냐하면 중국 인민의 주적은 일본제국주의이며 현 단계에서 다른 모든 것은 전부 항일에 복종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외에 일본에 효과적으로 반대하면서 장개석에 반대하는 투쟁을 동시에 진행할 수는 없으며 국민당 및 장개석 군대 전체를 다 일제의 동맹자로 간주할 수는 없다. 절실하고 효과적으로 무장항일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장개석 군대의 참여하거나 또는 그 대부분의 군대가 참가해야 한다. 이상의 정황에 근거해 홍군과 장개석 군대 사이의 군사행동은 반드시 중단해야 하며 또 장개석 군대와 협력해 항일방침을 채택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중국공산당과 홍군사령부가 반드시 국민당과 장개석에게 건의해 즉각 군사행동을 중단하고 공동항일을 위한 협정을 맺으며 구체적인 협의를 위한 협상을 해야 한다고 본다. 공산당과 홍군사령부는 마땅히 지금 당장이라도 대표단을 파견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또는 소비에트에서 국민당과 장개석 대표단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선포해야 한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서기처가 중공중앙서기처에 보낸 전보》, 1936년 8월 15일)

하지만 중공은 코민테른의 이 중요한 명령을 장학량이나 양호성에게 아예 전하지 않았다.

합종연횡

“서안사변을 통해 장개석이 항일하도록 압박했다”는 것이 중공측 주장이다. 당시 장개석은 국난(國難)을 위해 서안사변이 발생하기 전부터 이미 중공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거나 심지어 재편을 고려하고 있었다.

“중일간의 전쟁은 이미 더이상 피할 방법이 없고 국민정부는 소련과 교섭하는 한편 중공 문제 해결에 착수했다. 중공 문제에 대한 나의 방침은 중공이 반드시 먼저 무장해제를 해야 하며 그런 후에야 그 당의 문제가 정치문제가 될 수 있고 정치적인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민국 25년(1936년) 5월 5일 중공은 ‘정전(停戰)회담’을 하자고 통보해왔다. 뒤이어 주은래가 중공을 대표하고 반한년(潘漢年)이 코민테른을 대표해 상해에 와서 국민당 대표인 장충(張沖)과 협상을 가졌다. 반한년은 또 남경에 와서 진립부(陳立夫)와도 협상했다. 당시 국민정부가 중공에 제출한 조건은 다음 4가지였다.”

1. 삼민주의를 따를 것

2. 장(蔣)위원장의 지휘에 복종할 것

3. ‘홍군’을 없애고 국군으로 재편할 것

4. 소비에트를 없애고 지방정부로 개변할 것(《중국 안의 소련》)

중공측은 처음부터 반대했다. “남경에서 철도부 차장 증양보(曾養甫)가 우리의 서신을 이미 받았다고 서면답변을 받았다. 신문에는 온통 연합해서 항일하자는 내용이지만 실제로는 우리의 조건을 거절했고 홍군이 차하얼-수원-외몽골 변경 밖으로 나가 일본과 소련전쟁의 도화선이 되길 원했다.”(《모택동이 팽덕회에게 보낸 전보》,1936년 5월 28일)

만약 중공 군대가 차하얼-수원-몽골변경을 와서 항일하려 했다면 당연히 일본과의 무력충돌을 우려한 소련의 지지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중공은 출병해서 항일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고 또 소비에트 및 홍군 재편문제에 대해 타협하지도 않았다. 때문에 장개석은 계속해서 중공을 토벌하는 동시에 진립부와 반한년을 통해 협상을 진행하면서 정치적인 해결을 모색하게 했던 것이다.

1936년 6월 양광(兩廣 광동과 광서) 지역의 군벌들이 30만 대군을 모아 소위 ‘항일’을 구실로 중앙에 반대했다. 장개석은 급히 40만 중앙군을 남쪽으로 내려보내 9월까지 양광사변을 마무리해야 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562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