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简体 | 正體 | English | Vietnamese

정법수련이야기 (2) 온가족이 북경에 가서 법을 실증하다

정법수련이야기 (2) 온가족이 북경에 가서 법을 실증하다

작자:석명

【정견망 2010년 4월 17일】

아래는 진운천 가족이 몇 차례에 걸쳐 북경에 가서 상방(上訪)한 일에 대한 일단의 진술이다. 이는 2002년 초에 기록한 것이다.

1999년 4월 25일 우리 가족은 모두 북경에 가서 상방했다. 그날 우리는 상화한 심태로 만 명의 대법제자들이 상방하는 대오에 합류했다.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으며 정부가 자유롭게 수련할 수 있는 환경을 보장해주기를 희망했다. 그것은 인간 세상에 종래 볼 수 없었던 자비롭고 상화한 장면이었으며 표어나 구호도 없었고 떠들썩하거나 나쁜 행위가 전혀 없었다.

현장을 떠날 때 우리는 바닥에 휴지조각 하나 남기지 않았다. 이 상방사건은 많은 사람들을 진감시켰고 줄곧 파룬궁을 박해하려던 권력자들과 세계를 진감시켰다. 이날 모친도 정식으로 법을 얻어 수련에 입문했고 우리는 온 가족이 대법수련에 들어섰다.

1999년 7월 20일 사악이 천지를 뒤덮듯 대법을 비방했다. 진상을 알리고 대법을 실증하기 위해 부친 진운천, 모친 왕련영, 큰 아들과 둘째 외 다른 13명의 동수들이 북경에 들어갔다. 결국 중간에 회래현 파출소장 유옥봉 등에게 잡혀 되돌아왔고, 우리 17명은 회래현 간수소에 3일간 갇혀 있었다.

간수소에서는 급식비라면서 부모에게 500여 위안을 뜯어갔다. 사흘째 파출소장이 우리에게 잔혹한 박해를 가하기 시작했다. 소장 유옥봉은 우리에게 파룬궁과 결별한다는 보증서를 쓰라고 핍박했다. 그러나 우리는 엄숙하게 거절했다. 파출소장 유옥봉과 정법위 서기 왕생회(王生懷 지금은 이미 다른 곳으로 전근갔음)가 하수인 왕위동(王衛東)에게 진 씨 집 사람들에게 폭행을 가하라고 명령했다.

부친이 보는데서 아들을 때리고 아들이 보는데서 부친을 때렸다. 정오부터 오후 네 시까지 때렸는데 부친은 가슴이 시퍼렇게 멍들었다. 그동안 핍박하며 스승을 모욕하라고 했으나 우리는 거절했다. 폭도들은 더욱 흉악하게 때렸다. 때리다 지쳐 손을 내려놓았는데 해가 질 무렵 2000위안의 벌금을 물리고 우리를 돌려보냈다.

99년 7.20부터 99년 말까지 몇 개월 동안 우리집은 온갖 박해를 다 당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생명으로 대법을 실증하는 시작에 불과했다.

99년 12월 21일 진숙란과 진애립, 진홍평이 다시 한 번 북경 신방사무실에 찾아가 정부가 불법적으로 박해하는 정황을 반영하려 했다. 그러나 신방사무실을 찾지 못했고 진애립과 진홍평이 천안문 파출소에 끌려갔다. 장가구 북경 사무소에서는 우리를 보내는 경비라는 명목으로 200위안을 갈취했다. 진숙란은 창평(昌平) 구류소에 15일간 구류되었다.

정법위원회 서기 왕생회는 양(楊)씨 성을 가진 여자를 시켜 진홍평의 몸을 수색했다. 돈을 어디에 숨겼는지 브래지어, 속바지까지 수색했다. 결과적으로 20위안밖에 찾지 못하자 그는 부끄러움에 화를 내며 말했다. “돈을 집어넣어!” 잠시 후 그녀를 간수소에 보냈다.

12월 27일 부친은 애립과 홍평이 돌아오지 않는 것을 보고 재차 모친과 진애충을 데리고 북경에 들어가 상방했다. 돌아온 후 심하게 구타당했고 치안을 교란했다는 구실로 15일간 갇혔다. 그들은 기한에 되어도 석방하지 않고 보증서를 쓰라고 핍박하며 그렇지 않으면 나갈 생각을 하지 말라고 했다. 이렇게 하여 전 가족은 또 불법적으로 10개월간 잡혀 있었다.

2000년 10월 어느 날 진애충은 친구를 통해 이런 말을 전해왔다. “목숨을 걸고 대법을 실증할 것이다!” 우리는 불법적으로 잡혀 일가족 5명이 같은 날 사악의 박해를 항의단식을 했다. 공안국 부국장 진강(陳江)의 지시 하에 간수소장은 강제로 위에 관을 삽입했 음식을 부어넣었다. 진애립은 피를 토하고 기절하여 깨어나지 못했다. 단식한지 9일이 되어 간수소의 5명이 너무 말라 생명 위험이 있자 책임질까 두려워 10월 14일 돌려보냈다. 집에 돌아온 후 새로 전근되어 온 향장(鄕長) 도(姚)씨가 수 차례 집을 찾아와 소란을 피웠으며 시장을 가는 것마저 감시했다.

2000년 10월 24일 우리는 온 가족이 다시 북경에 가기로 결정했다. 당시 우리는 감옥에서 나온 지 열흘밖에 안되었고 그때 진숙란은 북경에 상방하러 갔다가 창평 간수소에 잡힌지 일개월이 되었다. 우리가 북경에 들어가기 하루전날 밤 공안국 부국장이 우리 집에 와서 위협했다. “다시 북경에 가면 3년 노교형에 처할 테다.”

겹겹의 봉쇄를 뚫기 위해 부모와 두 아들, 작은딸은 준령을 넘고 먼 길을 걸어 온갖 고생을 겪었고 팔달령을 넘어 북경으로 들어갔다. 60여 세의 모친은 감옥에서 단식하고 두 발이 부어 아들의 부축이 있어야만 걸을 수 있었다. 가는 동안 바람을 맞고 노숙을 하여 사흘을 걸어 27일 새벽에 천안문에 도착했다.

무장경찰이 진홍평의 팔을 당기며 물었다. “당신 파룬궁 하는 사람이야?” 일가족은 천안문 광장에서 국기를 게양하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외쳤다. “파룬따파 하오, 파룬따파는 정법이다!” 무장경찰이 발로 차고 차에 끌어올려 천안문 파출소로 보냈다. 이름을 대지 않고 사악에 협력하지 않았기에 또 선무구(宣武區) 간수소에 끌려갔다. 그곳에 73명의 동수가 잡혀있었는데 그중 남자는 11명이었다.

진애충은 성명을 대지 않아 3명의 경찰이 바꾸어가며 시도했으나 이루지 못했다. 매번 그에게 잔인한 수단을 실시했으며 그가 말하지 않자 빗자루로 그의 얼굴을 쓸었고 방망이로 다리를 때려 땅바닥에 넘어졌어도 다시 시달리게 했다.

진애립은 옆방에서 갇혀있었는데 그를 심문하는 악경이 말했다. “이 젊은 녀석은 다루기가 너무 힘들군, 방법이 없어. 아무리 때려도 말하지 않으니.” 다른 더 흉악한 경찰이 말했다. “내가 그를 다스리지 못한다면 말이 안돼, 내게 넘겨!”

이때 진애립은 이미 시달려 말이 아니었다. 방금 들어온 경찰은 더욱 흉악하게 따귀를 때리고 신을 벗어 신발바닥으로 때렸다. 그는 맞아서 거의 의식을 잃을 지경이 되었다. 그러자 악경은 책임질까 두려워 그를 얼른 일으켜 세웠다. 맞아서 바보가 되지 않았는지 확인해보려고 방안에서 100바퀴 돌게 했다. 그가 아직 정신이 있는 것을 보고 멈추게 한 다음 스승을 욕하게 했으나 그가 욕을 하지 않자 악경은 그의 얼굴에 펜으로 글자를 썼다. 진애립은 네 명의 악경의 시달림을 받았는데 사악은 여전히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여동생 진홍평은 사악에 협조하지 않아 사진을 찍지 않았다. 두 범인이 끌고 나와 그녀 머리를 붙잡았으나 표정 때문에 사진을 찍을 수 없었고 몇 번이나 실패했다. 최후에는 상의를 당겨 바닥에서 끌고 감옥으로 돌아왔다. 신발이 찢겨지고 발도 껍질이 벗겨져 출혈이 났고 바지에 큰 구멍이 났으며 온 몸이 흙투성이에 머리카락은 산발이 되었다.

57세 양계보(楊桂寶)라는 이름의 동수가 그날 선무구 간수소에서 사형수의 시달림 하에 견딜 수 없어 이름을 말했고 그날 밤 회래현 간수소로 돌아왔다.

회래현 북신보 파출소 장 유옥봉은 우리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데려가려고 왔으며 우리 가족에게 1000위안과 시계를 빼앗아갔다. 또 다른 동수 황지풍(黃志風)은 48세인데 그녀의 돈 360위안도 빼앗아갔다. 그 후 우리를 함께 쇠고랑을 채워 경찰차 뒤 칸에 태워 그곳 간수소로 돌려보냈다.

그날 오후 향 파출소의 노(盧)씨가 부친을 심문할 때 판자에서 목을 뒤쪽으로 잡아당겼다. 부친은 당장에 질식했다가 반시간 후 겨우 깨어났다. 부친은 양계보와 함께 갇혀 있었다. 현 공안국장 서유국(徐維國)이 직접 나서 이불을 주지 말라고 명령했으며 땅바닥에 누워 자라고 했다.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말고 죽으면 도랑에 버리라고 했다.

간수는 우리의 이불을 모두 거두어 갔고 당시 여동생 진홍평은 반바지와 조끼만 입고 있었다. 우리 가족과 기타 몇몇 제자들은 단식을 시작했다. 5,6명의 무장경찰이 형사범을 대법제자에게 배당하여 가죽 띠로 다리를 묶고 입과 눈을 가리고 음식을 강제로 부어넣었다. 사흘에 한 번씩 그렇게 하여 피를 토했다.

13일 후 진홍평이 혈뇨가 나오고 피를 토하며 호흡이 짧아지고 맥박이 없어져 병원에 보내 응급치료를 했다. 초음파 검사를 해보니 위에 핏덩어리가 맺혀 위험했다. 진애립은 혈압이 떨어지고 맥박이 없이 때때로 혼미해지며 생명이 위험했다. 이런 상황 하에 2000년 11월 11일 오후 2시 모친, 둘째, 여동생은 집으로 보내졌다.

모친이 물었다: “왜 남편과 큰 아들은 석방하지 않는가?” 경찰은 좀 있다가 곧 석방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틀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19일째, 즉 16일 저녁 6시30분 어떤 사람이 문을 두드렸는데 모친이 문을 열기도 전에 파출소의 하수인 왕위동이 담을 넘어 들어와 부친과 진애충을 부축해 집으로 들어왔는데 그들은 이미 피골이 상접하여 그저 숨만 붙어 있었다.

알고 보니 이러했다. 16일 오후 3시 동수 양계보가 있던 감방 안의 사람이 고함쳤다. “양계보가 큰일 났다!” 병원에 보내 치료해도 소용없었으며 멀쩡하던 사람이 이렇게 시달려 죽어갔다. 양계보의 아들이 부친의 유해를 보니 그의 두 눈이 아직 감기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 국장 서유국은 사람이 죽은 것을 알고 얼른 다른 세 사람(부친과 진애충을 포함)을 내보냈다.

15일 오전에 식구들에게 통지하여 양계보가 감옥에서 밥을 먹지 않아 굶어죽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아울러 양가의 가족에게 고소하지 말 것이며 고소해도 소용없다고 위협했다. 가족의 동의도 얻지 않고 시체를 강제로 화장했다.

사후에 간수소에서는 소식을 봉쇄했으며 여경은 여자 감방 범인에게 양계보의 신체가 건강을 회복하여 만두를 먹을 수 있고 이미 집으로 보내져 요양하고 있다고 말했다.

온가족이 다 나왔으니 원래 일은 잠시 단락을 고했다고 여겼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또 풍파가 일어났다. 2000년 11월 20일 정오 진애충과 진홍평은 장산영(張山營)에 있는 친구 집에 가다 중간에 파출소에 잡혀 돌아왔는데 설명도 없이 잡혀갔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간수소에 보내졌다.

여동생 진홍평은 사악에 결코 협조하지 않고 중도에 차에서 뛰어 내리다 팔이 부러지고 머리에 크게 피가 맺히고 기절하여 병원에 실려 갔다. 돌아온 후 간수소 소장 유옥봉은 의료비를 내야한다며 그녀에게서 300위안을 빼앗아갔다. 감방 범인들은 모두 내 여동생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그녀들 중 가장 오래 있었던 사람이 여동생과 1년 이상 같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좋은 사람이며 연공인은 다 좋은 사람임을 알고 있었다. 그녀들은 양계보가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깜짝 놀랐다. 이렇게 착실한 사람이 멀쩡하다가 시달려 죽었는데 경찰이 집에서 요양하고 있다고 거짓말을 했구나 라고 말했다. 여동생은 걱정말라, 대법은 곧 바로잡힐 것이라고 했다.

진애충이 간수소 감방에 들어갔을 때 “파룬따파 하오!”를 외쳤다. 간수소 소장은 극히 두려워했다. 성에서 사람이 와서 검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얼른 그를 지하실에 숨겼다. 그곳 두목 양문예(楊文藝)라는 자가 그를 십자가에 묶어 뺨을 때리고 찬물을 부었다. 그는 거의 질식하여 죽을 뻔 했다. 진애충과 여동생의 단호하게 저지하여 11월 21일 오전 5시 경 그들은 집으로 돌아왔다.

사악의 무리는 근본적으로 우리를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이후 며칠간 마을에서 이삼일 마다 우리 집에 와서 소란을 피웠다. 한번은 일어나기도 전에 어떤 사람이 문을 두드렸다. 모친이 막 나가려는데 마을의 하수인 왕위동이 이미 담을 넘어 들어와 창문에 다가와 고함을 질렀다. “왜 문을 열어주지 않는거야?” 모친이 물었다. “당신 어떻게 들어왔어?” 그는 잘못된 것을 알고 몸을 돌려 나갔다.

2000년 11월 28일 사악은 또 맹렬하게 쳐들어왔다. 거대한 난을 대면하여 우리 전가족은 다시 한 번 생명을 바쳐 대법을 실증하고 사악에 대항하기로 결정했다.

2000년 11월 28일 오전 9시경 현 공안국 부국장 진강이 간수소 여경 신방(辛芳), 실습 의사 조양(趙揚), 정법위의 여자 간부 하나, 무장경찰 5명 또 향정부 파출소의 14-5명의 사람을 데리고 와 우리 집을 포위했다. 그들은 문을 두드리고 부수는 한편 고함을 쳤다. 우리는 무슨 일인 지 알지도 못했는데 무장 경찰은 이미 담을 넘어왔고 즉시 한 무리의 사람이 우리 마당으로 뛰어 들어와 두사람을 잡아 노교소로 가야한다고 했다. 나중에 우리는 소식을 들어서 알았는데 사실 그들이 우리를 집에 돌려보낸 것은 우리가 신체를 요양하여 그곳에서 죽지 말고 다시 노교소로 가라는 뜻이었다.

사악은 매우 기세가 흉맹했으며 그들은 창밖에 엎드려 수시로 뛰어들려고 했다. 당시 내가 집안에 그들에게 진상을 말하고 사악을 폭로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듣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내가 공무를 방해한다고 하며 나를 잡아야겠다고 했다. 도대체 누가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인가? 당시 주위에 보던 군중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며 이웃들도 직접 두 눈으로 그것들의 사악한 행동을 목도했다.

사악은 일이 커지는 것을 보고 향 파출소로 하여금 서류 두개를 가져오게 했는데 “노교판결서”라고 거짓말을 했다. 우리에게 읽어주었으나 우리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 거짓말쟁이들에게 우리는 할 말을 잃었다. 없었다. 오늘 사악에게 잡혀가서는 안된다. 우리는 무고하며 신앙의 자유는 헌법의 보호를 받는 국민의 권리이다.

62세의 부친이 부국장 진강에게 말했다. “오늘 우리는 필사적으로 목숨을 걸고 당신들에게 잡혀가지 않을 거요.” 진강은 세가 불리하다고 보고 사람들과 상의했다. 잠시 후 또 들어와 무장경찰에게 문을 부수고 들어오라고 했다. 부친은 재차 진강에게 말했다. “우리는 죽을지언정 집에 있을 것이요. 절대 당신들에게 협조할 수 없소.”

진강은 냉소했다. “죽음으로 협박하지 마라. 오늘 당신을 잡아가지 않으면 안돼. 함부로 죽지도 못할 것이요.” 하면서 또 무장경찰을 들여보냈다.

그랬다. 우리는 죽으려고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는 더욱 많은 정법의 일을 해야 한다. 그러나 결코 사악을 따를 수 없고 그것들이 거리낌 없이 대법제자를 박해하게 해서는 안 된다. 우리 일가족은 일제히 고함을 질렀다. “파룬따파 하오, 파룬따파는 정법이다!”

주위에서 구경하던 군중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들 의논했다. “집에 숨는 것도 범법이고 이치대로 말할 곳도 없구나. 이렇게 사람을 핍박하다니”

우리의 정의로운 행동은 유력하게 사악을 진감시켰다. 이후 사악은 다시는 감히 함부로 집에 뛰어 들어오지 않았으며 담 밖의 작은 가게에서 주야로 감시했다.

2001년 설날 우리 일가족 6명에 진숙란의 9살 난 딸 이영까지 7명이 천안문에 도착했다. 우리는 생명이 있는 한 호법을 그치지 않기로 결정했다. 오전9시 경 천안문 광장에 현수막을 펼치고 함께 외쳤다. “파룬따파하오, 파룬따파는 정법이다!”

이어서 한사람씩 사악의 무리들에게 맞아 땅에 넘어졌다. 당시 9살 된 딸 도 땅에 넘어져 진숙란은 자기 몸으로 덮어 아이를 보호했다. 다른 사람의 몸에 엎어진 사람도 있었다. 이렇게 사악의 발과 주먹에 뒹굴었다. 당시 진숙란은 눈에 얻어맞아 불꽃이 튀었으며 진애충의 귀는 구둣발에 차여 얼굴, 옷에 온통 피가 튀었다.

대법제자를 가득 실은 버스에서 9살짜리 이영은 창평의 7리거 간수소에 이를 때까지 줄곧 외쳤다. “파룬따파하오, 파룬따파는 정법이다!”

1월 2일 여동생 진홍평이 회유(懷柔)간수소로 끌려갔는데 이름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남자 형사범들을 시켜 옷을 벗기고 찬물을 뿌린 후 맨발로 눈밭에 서 있게 했다. 여동생은 단식 11간 단식한 뒤에 정정당당하게 간수소를 걸어나왔다.

1월 2일 후 부친과 두 아들은 함께 해정(海澱)간수소에 갇혔다.

부친 진운천은 첫날 이름을 알 수 없는 파출소에 보내어져 지하 삼층에 갇혔다. 그 속은 어둡고 습하며 공기가 통하지 않아 매우 괴로웠다. 삼일 갇혀있으면서 단식하고 심문해도 소용이 없자 또 해정으로 돌려보냈다. 예심과에서는 그 속의 형사범을 시켜 부친에게 옷을 벗겨 목욕을 시켰으며 선풍기를 틀었다. 4, 5일 후 주소를 댔다.

진애충은 동북 왕(旺)파출소로 인계되었다. 눈이 내리던 밤이었는데 수갑을 나무에 묶어 옷을 발가벗긴 후 눈 위에 한 시간 이상 서 있게 했다. 두발이 있는 곳은 눈이 녹아 웅덩이가 되었다. 또 볼일을 보지 못하게 했다. 그래도 소용이 없자 전기 곤봉으로 다리를 감전시켰다 발에서 무릎까지 다 탔다. 그래도 방법이 없자 간수소로 돌려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당시 그의 다리는 전부 부어서 걸을 수 없었고 이미 4일째 단식 중이었다. 해정에서 형사범은 그를 바람 속에서 뛰게 하고 눈에 묻은 다음 무릎을 때렸다. 그의 다리가 부러졌다. 칫솔로 손가락 사이 관절을 비틀었다. 7일째 되자 주소를 댔다.

진애립은 해정 간수소에서 사진을 찍는데 그는 협조하지 않아 지독하게 맞았다. 또 주소를 대지 않았고 그에게 어느 방에 집어넣었다. 호실의 두목이 말하길 밥을 먹지 않든 연공을 하든 나는 상관하지 않겠다. 그래서 그를 다른 호실로 보냈다. 그곳에서는 만일 그가 밥을 먹지 않으면 같이 있는 형사범도 밥을 먹지 못하게 했다. 그 때문에 그들 간에 모순이 일어났다.

형사범은 차례로 그를 위협했다. “당신이 우리와 잘 지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저 조금이라도 먹으면 된다.” 진애립이 말했다. “당신들더러 먹지 말라는 것이 아니오, 그들이 당신을 먹지 못하게 하는 것이오.” 방법이 없자 형사범은 찬 만두만 먹었다.

4일째 오전에 음식을 주입하기 전 신체검사를 했다. 어느 여의사가 진애립은 심장이 좋지 않다고 말했으나 강제로 음식을 주입했다. 그날 밤 예심은 그에게 마보(馬步)를 서보라고 했다. 그는 그것은 파룬궁의 동작이 아니라고 하며 포룬을 했다. 그것들은 하지 못하게 하며 세 사람이 흉악하게 팔을 비틀고 머리를 숙이게 하여 죄를 인정하라고 했으며 비록 밥을 먹지 않지만 어디서 나온 힘인지 그것들은 그를 비틀지 못했다. 사악은 이 방법이 안되자 물을 몸에 부리 뿌리고 또 귀뺨을 한동안 때리고 돌려보냈다.

애충과 부친이 주소를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애립도 되돌려 보내져 회래간수소에 불법으로 갇혔다.

2월 9일 애립이 3호 감방으로 옮겨졌는데 감방 두목 교삼은 감방 사람들에게 구두 밑창으로 그의 얼굴을 때리게 해 코와 입에 모두 피가 터졌다. 그가 “파룬따파하오”를 크게 외치자 소장이 듣고 급히 달려왔는데 그는 소장에게 달려들며 말했다. “사람이 일단 진리와 생명 존재의 진정한 의의를 알면 목숨을 버려도 아깝지 않다.” 나중에 이 경찰은 호실의 형사범에게 다시는 때리지 말라고 말했다.

3월 9일 진애충이 연공하자 악경 동옥복(佟玉福)이 그의 두 손을 창문에 수갑으로 채우고 전기 곤봉으로 어깨를 팔을 감전시켰다. 전기가 떨어지면 다시 충전시켜 계속 괴롭혔으나 그는 견뎌냈다. 3월 12일 그 악경이 또 그를 괴롭히며 말했다. “이 녀석은 전기를 무서워하지 않는군.” 그가 또 “파룬따파하오”를 외치자 악경은 수건으로 그의 입을 막았다. 어떤 사람이 전화가 와서 그를 찾았으나 그는 그치지 않고 말했다. “내가 퇴근할 때 까지 기다려.” 나중에 그는 일이 생길까 두려워 매일 밤 차례로 당직을 세우며 한달 동안 긴장했다.

진애립은 불법(不法)으로 열린 법정 최후 진술에서 이렇게 말했다. “선악에는 보응이 있습니다. 이는 우주의 절대 진리입니다.” 나중에 부친과 진애립은 불법으로 형을 판결 받아 대당만(大唐灣) 감옥에 갇혔다.

진애충이 불법 노동교양 당한지 2년에 다리가 부러졌기 때문에 장가구 노교소에서 받지 않았다. 결국 회래 간수소로 다시 돌려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2001년 9월 12일 또 당산 제 1 노교소로 보내져 3년 노동에 처해졌다. 노교소에 온지 10일도 안 된 9월 21일 혹형을 당해 사망했다.

나는 그의 몸에 상처가 있고 눈언저리가 젖어 있으며 어깨 뒷등이 퍼렇게 크게 멍든 것을 보았다. 또 두 귀에도 시커먼 출혈이 있었으며 입에도 핏자국이이 있었다. 그러나 사망 증명서에는 신부전으로 인해 정상적으로 사망했다고 적혀 있었다. 나더러 합의서에 서명하라고 했으나 나는 거절했다.

발표시간:2010년 4월 17일
정견문장 : http://www.zhengjian.org/zj/articles/2010/4/17/6557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