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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의 열정을 되찾다

작자: 홍콩 대법제자

[정견망]

존경하는 사부님 안녕하십니까!
수련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나는 홍콩 제자다. 내게 정법수련 중의 체험을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준 사존과 수련생 여러분들에게 감사드린다. 적절하지 못한 곳은 삼가 시정해 주기 바란다.

전에 나는 미술교사였으나 건강이 좋지 않아 명예퇴직했다. 1998년 초에 기쁘게 법을 얻었다. 10수년의 수련을 거쳐 대법은 약골이며 병이 많고 담이 작았던 나를 한 방면의 임무를 혼자 담당할 수 있는 정법제자로 만들었다.

“자비는 천지에 봄이 오게 하고, 정념은 세상 사람을 구하는도다”(법정건곤-홍음2)

내가 법을 얻은 지 오래지 않아 사악은 파룬궁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내가 정법 중에서 참여한 첫 항목은 신화사(新華社 나중에 중련판으로 이름이 바뀜) 앞에서 법을 실증하는 것이었다. 나는 홍콩에서 태어나 편안한 환경에서 자랐다. 하늘땅을 뒤덮는 파룬궁에 대한 사악의 박해를 마주하고 나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그러나 나는 대법이 좋다는 것을 알았기에 법을 수호하고자 했다.

처음에는 고생을 많이 겪고 관도 적지 않게 넘었다. 홍콩 시민들의 몰이해, 가족의 압력을 상대해야 했으며 풍찬노숙을 해야 했는데, 나는 모두 법에 대한 확고한 믿음으로 지나올 수 있었따. 나는 법속에 용해되라는 사부님의 말씀을 늘 기억하면서 매일 법공부를 열심히 했다. 매일 한 강씩 공부하던 데에서 나중에는 세 강씩 했다. 나는 법공부와 연공에서 모두 입정(入靜)에 들어갈 수 있는데 비교적 잡념이 거의 없었다. 사부님의 가호하에 나는 대법 속에서 하루하루 성장했다.

나중에 좀 큰 심성 고험이 왔다. 우리 연공장의 보도원은 나더러 매일 아침 6시에 연공장에 도착하라고 했다. 처음에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왜냐하면 우리 집이 연공장에서 멀어 버스가 5시 반에 출발하기 때문에 6시에는 절대 도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도원은 계속 이 일을 제기했고 나는 그녀에 대해 원망이 가득 생겨나, 다른 연공장을 찾으려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안으로 찾는 것을 까맣게 잊은 채, 다른 사람만 줄곧 원망했음을 알았다. 나는 정말 6시에 공원에 도착할 수 없는가? 홍콩에는 심야 버스가 있는데 노선이 비록 좋진 않지만 그래도 방법은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매일 4시경에 일어나 심야 버스를 타고 연공장에 갔다. 내가 매일 제 시간에 연공을 시작하니 일체 모순이 다 없어졌다. 이것이 수련이구나. 이렇게 간단하구나. 그러나 나는 아주 많은 시간과 정력을 들이며 그렇게 빙빙 둘러온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수련생의 입을 빌려 나를 위로 끌어올리셨으며 나더러 자아를 내려놓고 층차를 제고하도록 하셨다.

내가 법을 실증하는데 주견(主見)이 없고 늘 다른 사람을 따라하며 주동적이지 않고 독립적이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늘 있었다. 나를 제고하게 하는 기회가 또 온 것이다!

2005년 1월 “대기원시보” 홍콩판이 주보에서 일보로 바뀌어 나더러 진중(金鐘)에 가서 일보를 배포하라고 했다. 진중은 홍콩 중심지에 있는데 정부부문, 입법회, 고등법원. 금융기관, 각국 영사관이 있는 곳이다. 나 혼자 이곳에 배치해 법을 실증하게 했는데, 책임이 중대했고 단독으로 이 방면의 임무를 맡아야 했다. 나는 고마운 마음으로 정법의 매 하루를 맞이했다. 나는 이 진귀한 하루하루가 사부님께서 나를 제고하게 하고, 사람을 구하게 하는 하루이며, 대법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하루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 하루는 천금, 만금의 가치가 있으며 우주에서 가장 귀중한 시간이다.

나는 일사일념이 법에 있어야 하고, 일거수일투족에 선의(善意)가 충만해야 한다고 자신에게 요구했다. 행인이 이해하지 못하거나 선의적이지 못할 때 나는 그들을 축복해주며 선량한 미소를 보냈다. 나는 신문을 배포하는 한편 발정념을 하면서 행인들에게 인사를 했는데 상대의 태도에 개의치 않았다. 이렇게 하자 사람들이 천천히 변했다. 어떤 사람은 인사를 받아주었고, 어떤 사람은 신문을 받아갔으며, 초콜릿을 주는 사람도 있었다. 또 나더러 견지하라고 격려하는 이도 있었으며, 설이 되면 돈 봉투를 주는 사람도 있었다. 전체 마당이 아주 상서로웠다.

어느 날 한 경찰이 나의 신분증을 조사하러 왔으나 나는 응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법을 위반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나의 신분증을 조사할 권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매일 육교를 지나던 한 서양 여성이 이 광경을 보았다. 이튿날 그 경찰이 다시 와서는 “나는 더 이상 당신의 신분증을 조사하지 않겠다. 어제 그 법조계 여사가 나를 고소했다.”고 말했다.

또 한 번은 어느 독자가 신문을 난폭하게 두드렸다. 그러자 한 행인이 나서며 “나는 그가 한 일을 보았다. 그가 만약 당신을 건드린다면 내가 보호해주겠다!”라고 말했다.

경찰은 이미 나의 좋은 친구가 되었다. 어느 날 아침, 두 명의 젊은 경찰이 와서 다른 지역으로 전근한다며 말했다. “누님, 이젠 매일 아침 당신을 보지 못하겠습니다.” 나는 대법의 자비한 장이 그들을 감화하여, 그들의 명백한 일면이 대법에 감사한다는 것을 안다. 독자도 친구가 되었고 인근 빌딩의 보안과 청소원들도 친구가 되었는데 비바람이 거세게 부는 날이면 그들이 나를 도와 신문을 실어주었다. 육교에서 구두를 닦는 할아버지도 나를 도와 신문을 지켜주셨다.

지금 진중에는 대기원 배포처가 4곳으로 늘었고, 원래 3묶음 배포하던 것이 13묶음으로 늘었다.

지난 수년간 주변국가의 정부가 중공에 협조해 파룬궁을 박해한다는 소식이 수시로 들려왔다. 진중 일대에는 많은 영사관이 집중되어 있다. 나는 그 영사관 부근에서 현수막을 펼치고, 보드판을 설치해 민중들에게 사악을 폭로했다. 사람을 구하는 마음이 순수할 때 사부님께서는 우리더러 영사관 직원을 만날 수 있도록 배치해 주셨다. 나는 그들에게 중공이 파룬궁을 박해한다는 것을 폭로하고 시비와 선악을 분명히 구별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알렸다. 진상을 안 후 그들은 우리의 자료를 자기 나라 정부에 전달해주겠다고 했다.

대만 수련생들이 강제추방된 사건과 션윈이 저애 받은 사건을 심리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고등법원, 최종심(終審)법원 앞에 가서 법을 실증했다. 총괄적으로 말해 홍콩 중심지 사람들은 대기원시보를 끊임없이 보았기 때문에 대법의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나는 몇 년간 진중 중환(中環) 일대에서 끊임없이 법을 실증했다. 그렇다. 이는 사부님께서 나더러 자비로운 감로를 뿌릴 수 있도록 배치하신 것이다. 정법의 추진되고 대법제자들의 끊임없는 노력에 따라 사존께서는 한 무리 한 무리의 중생에게 진상을 알도록 인도하여, 그들이 파룬궁 수련생들의 평화롭고 이성적이며 꾸준히 견지하는 정신으로부터 파룬궁이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니고 진정으로 반(反)박해를 한다는 것을 보게 했다. 그들은 사악의 거짓말, 기만에서 걸어 나와 우리를 동정하고 탄복했다. 많은 의원, 정부 관원, 법조계 인사, 영사관 직원들이 우리의 독자가 되었다. 나는 마치 하나하나의 대궁(大穹)이 구도되고 중생이 환호하며, 만물이 소생해 생기발랄한 것을 보는 듯 했다.

일당십으로 꾸준히 견지하다

나는 매일 오전 신문을 배포하고, 점심에 현수막과 진상 보드판을 펼치는 외에 또 가가호호 문 앞까지 찾아가 신문과 잡지를 전달한다. 우리는 매일 입법회 의원 60명에게 신문을 가져다주었다. 그들의 직원도 우리 신문을 좋아해 “풍성한 아침 식사가 왔다”고 했다. 나는 시시각각 자신이 더욱 정성을 들이고 더욱 잘해서 내가 신의 생명으로 보증하여 얻어온 인간세상에서 조사정법할 기회와 인연에 대해 진정 떳떳해져야 한다고 일깨운다.

중련판은 사악이 집중된 곳이다. 우리 수련생들은 여기에서 함께 진상을 알리고 발정념하는 것을 줄곧 견지하고 있다. 중련판 후문에는 있는 길은 넓지는 않지만 차가 많이 다니고 시끄러우며, 여름에는 아주 덥다. 현수막을 견지할 수 있는지는 심성의 큰 고험이다. 길가에는 나무도 없어 그늘조차 없다. 하지만 모두들 중생을 위해 아무런 원망도 없다. 쩐싼런(眞善忍)의 정신은 주변 환경을 서서히 개변시켰다. 처음에 신화사 주변 사람들이 우리를 끊임없이 고소했다. 그때마다 경찰이 출동해 우리의 신분증을 조사하고 우리의 현수막과 보드판을 빼앗기도 했다. 우리는 몇 차례나 정문 앞에 가서 법을 실증하다 경찰에 체포되고 기소되었다. 지금은 고소하는 사람도 적고 경찰도 우리를 교란하지 않는데, 매일 보는 친구가 되었고 더욱이 대기원의 충실한 독자가 되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시간이 없어 중련판에 가지 못하면, 나는 주말과 공휴일에 그곳 정문 앞에 가서 현수막을 펼치고 발정념하는데 종래로 멈춘 적이 없다. 이전에 내가 무슨 일을 하면 짝을 찾거나, 다른 사람이 하면 따라서 했지만, 지금 나는 혼자 할 수 있다. 사부님께서는 나를 성숙하고 독립된 대법제자로 육성하셨다. 온갖 어려움속에서도 꾸준히 견지한 우리의 정신은 중련판을 지키는 경비원들조차 감동시켰다. 지난 10여 년의 정법으로 대량의 사악이 소멸되었고 중생은 명백해졌으며 그들의 선한 일면이 주도하는데 중생에겐 희망이 있다!

10년의 정법의 길을 회고하니 법에 대한 견정함 외에 모든 것은 사부님께서 하신 것이고 사부님께서 주신 것이었다. 10년 정법의 길에 줄곧 유암화명이었으며 그 아름다움은 언어로는 표현하기 어렵다.

수련의 열정을 되찾다

정법 중에서 한 일이 많아지자 나를 찬양하는 목소리가 많이 들려와 나도 점차 사람 마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줄곧 과시심, 환희심이 아주 강했는데 의식적으로 극복하고자 했으나 힘이 부족했다. 자아를 방임하는 중에 나도 모르게 사심(私心)이 줄곧 팽창되었다. 이런 마음이 반영되어 동수를 대할 때 겸손함 대신 교만으로 대했으며, 일에 부딪히면 나의 관념을 견지하며 다른 사람에게 강요했는데 상의할 여지조차 없었다. 다른 의견을 들으면 구실을 찾아 밖으로 밀어냈으며 자신이 맞고 다른 사람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했다. 또 질책하고 비평하며 원망했다. 정법에서 곤란에 부딪히면 이전에는 자신이 어떻게든 대법의 요구에 도달하려고 노력했으나, 지금의 팽창된 자아가 생각하는 것은 이 일이 나의 관념에 부합하는가 나의 시간에 부합하는 가였다.

약 2개월 전에 발생한 한 가지 일이 나의 마성을 충분히 폭로했다.

올해 9월 홍콩에는 태풍이 왔다. 기상청에서는 8호 태풍이 온다고 했다. 홍콩정부는 8호 태풍이 오는 기간에 학교수업을 중단하고 기업에는 생산을 중단하라고 규정했다. 이 기상특보는 당일 오전 5시에 통보되었기 때문에 대기원시보는 이미 다 인쇄가 끝나 신문수송차량이 이미 출발한 상태였다.

나는 6시가 다 되어서야 기상특보를 봤는데, 첫 일념은 “내가 있는 그곳에는 신문을 배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공장에 신문을 인쇄했는지 전화로 문의했다. 그러자 오늘은 2만부 밖에 인쇄하지 않았다고 했다. 평소의 절반이다. 각 배포처마다 절반을 줄였고 항도(港島)로 가는 차는 이미 출발했다고 했다. 나는 곧장 배송기사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 배포처에서는 한 묶음도 받지 않겠다고 했다.

이튿날은 목요일로 내가 한주 중 신문을 가장 많이 받는 날이다. 중문과 영문 신문과 신기원 잡지가 있는데 나 혼자 신문을 육교위로 올려야 했다. 오전 7시경에 차가 도착했다. 기사는 당일 신문을 내려놓고 또 어제 신문을 6묶음 주었다. 어제 신문이 온 것을 보고 나는 화가 치밀었다. 오늘은 가장 바쁜 날이라 오전에 중, 영문을 배포하고 점심에 영문을 또 배포하고 오후에 진료소, 변호사 업계에 갖다 줘야 하는데 어제 신문까지 나더러 배포하란 말인가?

“우리 이곳에서는 배포하지 않으니 신문을 가져가세요!”

그러자 기사도 역정을 냈다.

“당신이 배포하지 않으면 어찌합니까? 갖다 버리겠습니까?”라며 신문을 다시 내려놓았다.

“당신들은 남의 입장은 너무 고려하지 않는군. 내 말대로 신문을 다른 곳에 갖다 주거나 공장으로 돌려 보내세요!”

나는 이렇게 말하고는 신문을 다시 차에 실었다. 차가 출발했지만 나는 정말 화가 났다. “비가 오는 줄 알면서 신문을 그렇게 많이 인쇄하다니! 그리고 나더러 어제 신문을 배포하라고! 다음에는 내가 사장을 찾아가 공장 쪽 인원을 다시 배치해야겠다.”

오전 신문을 다 배포하고 나는 협조인에게 전화하여 나의 불만을 표시하며 내게 이렇게 많은 번거로움을 조성했다고 했다. 저녁 무렵에 사장을 찾아갔지만 마침 자리에 없었다. 기다려도 오지 않아 나는 수련생에게 나의 뜻을 사장에게 전달하라고 하고 “꼭 전달해야 합니다. 한 글자도 빠뜨리지 말고!”라고 강조했다.

집에 돌아와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왜 그토록 크게 화를 냈는가? 무슨 요소가 나더러 이지를 잃고 불평하게 했는가? 자세히 생각해보니 바로 “나(我)”였다. 다른 사람이 “나”를 이해해주지 않고 “나”를 존중해주지 않아 “나”의 이익을 해쳤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은 그리 큰 일이 아니다. 협조인의 각도에 서서 한번 생각해보면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이 일에서 나는 자신이 수련 초기의 그런 열정과 상태가 사라졌고, 사심(私心)이 진정한 나를 덮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때를 기억해보면 어떤 곤란에 부딪혀도 늘 자신을 찾을 수 있었고, 나에 대한 대법의 요구와의 차이를 찾아 그 관을 넘어갈 수 있었다.

사실 신문 6묶음은 우리 진중의 4개 배포처에 나눠주고 독자들에게 어제 신문을 받겠는지 물어보고, 남은 것은 대륙 여행객이 많은 곳에 갖다 주면 된다. 중국으로 전생해 간 왕과 주가 모두 구도되기를 기다리고 있으며 사부님께서는 우리더러 고귀한 중국인들을 구도하라고 거듭 일깨워 주셨다. 우리가 고생을 좀 하는 것이 무엇이 대수인가? 우리는 정법을 위하고, 사람을 구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닌가? 이 소중한 시간은 금새 지나갈 것이다.

나는 최근 몇 년간 정법 중에서 적지 않은 일을 했으나 심성 역시 크게 떨어졌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수련생과 속인의 칭찬 속에서 “나”란 이런 물질이 암암리에 자라나 나도 모르게 정법 중에서 명을 구하고, 무엇을 하든 나의 요구를 만족시켜야 하며 나의 뜻에 부합해야 하며, 나의 말을 들어야 했다.

“나”가 자라나면서 일을 하려는 마음, 나를 실증하려는 마음, 나를 수호하려는 마음이 잡다하게 다 나왔다. 그 원인은 법공부를 소홀히 하고 착실한 수련을 느슨히 했기 때문이다. 법공부는 상당부분 임무완성으로 변했고 마음을 닦는 것이 순정하지 않게 되었으며, 심지어 수련의 가장 기본적인 명, 리, 과시심, 환희심을 닦는 것마저 잊었던 것이다! 구세력은 내가 방임한 틈을 타서 나를 아래로 끌어내리고 있었다.

수련을 처음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줄곧 법공부를 중시해 늘 입정하여 법공부하고 연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최근 2년은 일을 하려는 마음, 안일한 마음, 환희심이 나로 하여금 법공부를 느슨히 하게 했다. 한 동안 법공부를 하면 졸렸고 매일 읽는 양과 질이 제 위치에 도달하지 못했으며, 신경문도 적게 보고 단체법공부에도 참가하지 않았다. 현재 나는 법공부 상태를 조정하고 매일 “전법륜” 한 강과 신경문 몇 편을 읽으며 화요일, 목요일 저녁에 있는 단체법학습에도 참가한다.

나는 반드시 착실히 수련할 것이다! 수련의 열정을 다시 되찾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부님의 “로스앤젤레스 시 법회 설법” 중의 한 단락으로 여러분과 함께 격려하고자 한다.

“대법제자는 줄곧 당신이 원만의 최후 한 걸음에 이르기까지 걸어가서도 당신은 여전히 되는지 안 되는지를 고험 당하게 될 것이며 줄곧 당신이 오직 고만큼 부족해 한 걸음만 닿으면 끝날 때까지도 가능하게 당신에 대하여 모두 아주 관건적이고 아주 관건적인 고험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매 한 걸음은 모두 당신들의 수련과 당신들의 고험에 대하여, 더욱이 최후 단계에 이르러서는, 갈수록 더 관건적이기 때문이다. 당신들이 알다시피 낡은 우주의 그러한 난잡한 신[亂神], 그것들이 아직 존재하기만 한다면 그것들은 곧 최후까지 좌우지하려고 할 것이다. 당신이 안 되면 그것은 반드시 방법을 생각하여 당신을 끌어내릴 것이다. 그것은 리훙쯔(李洪志)가 당신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것들은 각종 방식을 취하여 당신으로 하여금 떨어져 내려가게 한다. 사람의 일념이 차이나면 곧 자신으로 하여금 동요가 발생하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최후에 이르면 이를수록 당신들에 대한 고험 역시 갈수록 준엄하고 갈수록 관건적이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2011년 아시아법회 발언고)

발표시간:2011년 12월 7일
정견문장:http://www.zhengjian.org/zj/articles/2011/12/7/7907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