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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가(同歌)”-중국의 망국지음(亡國之音)

작가: 리젠(立鑑)

【정견망 2006년 1월 24일】 2004년 음력 설을 시작으로, 뉴욕에 자리한 신당인 방송국이 주관한 전 세계 중국인 신년 갈라는 중공당(中共黨) 문화에서 벗어난 중국 전통 문화의 진정한 풍격으로 점점 더 많은 중국인들의 이목을 끌고 있으며 매년 더 성숙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중공 사당(邪黨)은 이에 혈안이 되었다. 급기야 올해 초, 중공은 자신의 주구 CCTV를 풀어, 거금을 투자해 신당인 신년 갈라를 방해했고 뉴욕에서 신당인 신년 갈라와 같은 장소에서 소위 “동일수가(同一首歌)”갈라를 준비했다. 이것은 벼랑 끝에 몰려 발악을 하는 중공이 공산당의 당문화를 전파함과 동시에, 또한 중화민족의 전통 문화에 대한 파괴와도 관련이 있다. 때문에 “동일수가”(동가) 자체에 대해서, 우리는 역사적으로 자세하게 분석하고 토론할 필요가 있다.

예악(禮樂)에 대한 중국 전통 문화의 인식

인류의 각종 문화예술은 단지 인류의 생활을 번영시키는데 일익을 담당하는 것만이 아니다. 인류 문화예술의 도덕적 내포는 올바른 도덕을 선양하는 요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류로 하여금 무엇이 좋은 것이고 무엇이 선한 것인지 알게하여 인류사회의 안정에 중대한 작용을 한다. 이를 현대 과학적인 용어로 말한다면, 만약 우리가 사람을 이 물질 공간을 구성하는 입자(粒子)로 가정한다면, 인류의 문화 예술은 이 각 층의 물질 공간의 안정에 있어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 바꿔 말하면, 인류 문명의 수 천년 역사 중에서 공산사당이 나타나기 이전에 동서양 각 방면의 주체적 문화는 음악을 포함해서 모두 이러한 도덕적 내포를 가지고 있는 정통(正統) 문화 예술이었다. 르네상스 시기를 서양 문화의 전성기라고 말한다면, 중국 문화는 각 왕조마다 모두 문화적으로 서로 다른 예술 형식의 최고조를 열었다.

중국 고대에 고금(古琴)은 “금(琴), 기(棋), 서(書), 화(畵)”4대 예술의 으뜸으로 꼽혔다. 고대 문인들에게 있어 고금은 수신양성(修身養性)에 있어 필수적인 악기였다.

혜강(嵇康)은 금부(琴賦)에서 이렇게 말했다. “”많은 악기 중에 금(琴)의 덕(德)이 가장 빼어나다.” 소위 “사대부가 금슬(琴瑟: 거문고와 비파)를 멀리할 이유가 없다.”(《예기·곡예하(禮記·曲禮下)》), “군자는 의절(儀節)로 금슬(琴瑟)을 가까이하는 것이지, 쾌락을 위해 가까이하면 안 된다”(《좌전·소공원년(左傳·昭公元年)》) 이상의 고대 문헌을 통해 보면, “琴(금)”은 문인들의 마음 속에서 숭고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1]

이것은 음악 예술의 도덕적 내포에 대한 심층적 이해에서 나온 것일 뿐 아니라, 중국 고대의 황제들은 모두 예악(禮樂)을 매우 중시했고, 그것을 치국안민(治國安民)의 방안으로 여겼다.

“<예기·악본편(禮記·樂本篇)>중 한 단락에서는, “왕도(王道)”실현의 중요 방침은 반드시 예악을 통한 교화(敎化)를 위주로 하되, 형법이나 정령(政令)이 그것을 보조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예(禮)로 민심을 다스리고, 악(樂)으로 민성(民聲)을 다스리며, 정(政)으로 정치를 하고, 형(刑)으로 그것을 통제한다. 예, 악, 형, 정, 이 네 가지가 조화되어 어긋나지 않는다면 곧 왕도가 갖추어졌다고 할 수 있다.””[1]

“<사기·악서(史記·樂書)>의 한 단락을 보면, “순(舜)임금이 오현(五弦)의 금(琴)을 연주하고, 남방의 시가를 불러 천하를 다스렸다. …그 남방 시가의 작가가 순임금 앞에서 그것을 연주하니, 순임금이 기뻐하며 그것을 매우 좋아해, 음악과 천지(天地)가 하나되어 백성의 민심을 얻게 되어 천하를 다스릴 수 있었다.”” [1]

공산사당의 전통 예술 파괴

그러나 공산사당이 나타난 후, 그들은 이전의 중국 전통 문화를 대규모로 파괴했고, 예술가들을 박해했다. 세계에서 전통 문화를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프랑스의 현재 소장 예술품은 원래 수량의 1/10도 안 되는데, 이것은 모두 공산사당의 선조라 할 수 있는 파리 코뮌 폭도들에 의해 파괴된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전통 문화의 1/10도 남기지 못했는데, 이는 중공이 문화대혁명 시기에 모든 예술 영역 중 가장 뛰어난 부분을 파괴했고, 모든 학술 영역의 권위자들의 자유를 박탈하고 강제 노동을 시켰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사람들 사이의 전쟁은 보통, 토지, 재산과 예술품을 쟁탈하는 수준에 그쳤고, 이것은 폭력, 탐욕이긴 하지만 정상적인 사람의 악한 측면의 행동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것처럼 공산 사령(邪靈)이 조종하는 사악한 당은 도리어 역사상 전례가 없는 방법을 사용하여, 토지, 재산 혹은 예술품도 다 거부하고, 평화 시기에 민족 문화 멸절에 앞장섰다. 예를 들면 그들은 대규모로 예술품을 때려 부수고 전통 문화를 파괴했다. 왜 그랬을까? 공산사당은 사람의 문화가 아니고, 바로 배후에 있는 유령, 사악한 영의 지배를 받는 사교(邪敎)이기 때문이다. 공산당은 인류가 정통 문화로부터 배울 수 있는 미추(美醜)와 선악(善惡)의 관념을 가지고 있다면, 사람들이 공산당의 본질을 간파하고 추종하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공산당은 악인(惡人)들을 조종하여 필사적으로 중국 전통 문화를 파괴했던 것이다.

1949년 중화 고국(古國)이 중공사당의 손아귀에 들어간 후로, 사당은 모든 인류 문명의 보배에 칼을 대기 시작했다. 이때 그들이 내건 구호는 반봉건(反封建), 반자본주의(反資本主義), 사구(四舊: 옛 사상, 문화, 풍속, 습관) 타파 등이었다. 그러나 사실 인류 문명에 거슬러 그들이 파괴한 것은 인류의 정상적인 문화였다. 그리고 공산당이 전파한 음악은 다분히 폭력적인 소위 “혁명격정(革命激情)”과 같은 것이고, 공산당은 이것으로 사람들의 이성을 마비시켜 인민들을 기계처럼 조종했다. 가장 전형적인 것으로는 최근 사당정권의 “국가(國歌)”이자, 또한 중국 대륙에서 매번 상장 수여식이 있을 때 마다, 흘러 나오는 배경음악 <해방군행진곡(解放軍進行曲)>이 있다. 이 시기에 중공은 모든 중국 전통 음악 예술을 파괴하였고, 사람들이 유행가처럼 부른 것은 모두 격정적이고 전투적인 선율과 사당의 공덕을 칭송하는 내용의 소위 “혁명가곡(革命歌曲)”과 몇 개의 혁명 경극(京劇)과 같은 곡에 지나지 않았다.

문화대혁명 이후의 중국 음악

문화대혁명 이후, 중공 제1대 두목인 마오쩌둥이 이미 성공적으로 모든 전통 문화를 파괴한 바탕 위에, 제2대 두목인 덩샤오핑은 안심하고 정치를 할 수 있었고, 또한 사당은 돈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의 경제 발전 위주의 국가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전의 마오 시기와 같이 인류사회에 반하는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었기에 중공은 목표를 달성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중공은 경제 정책을 확대하고, 이와 상응되는 문화적인 개방을 어느 정도 허용하였다. 그러나 이것으로 공산당이 그 사악한 본질을 버렸다고 볼 수는 없으며, 단지 속임수를 위한 가장(假裝)에 불과했다.

문화대혁명 때 모든 출판물에는 반드시 마오쩌둥의 <어록(語錄)>을 수록해야 했고, 문장의 서두와 말미 혹은 단락마다 반드시 계급 투쟁에 대한 언급을 해야 했다. 문화대혁명이 끝난 후, 이런 <어록>이나 “계급투쟁”과 같은 단어들이 표면적으로는 사라졌지만, 이것은 모든 인민들의 사회관, 역사관에 침투하여, 사실상 중공이 계급투쟁을 하는데 일조했다. 이것이 바로 공산사당의 본질이다. 공산사당의 문화는 이미 각종 속임수를 통해서 중국인의 모든 문화 영역에 깊게 침투하였고, 현재 중국 대륙 사람들은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음악 부분을 말하자면, 비록 문화적으로 개방되긴 했지만, 이 시기 중국 전통 문화는 이미 심각하게 상실되었기 때문에, 전통의 중국 고전 음악 형식과 그 도덕적 내포에 대한 인식은 이미 완전히 실전(失傳)되었다. 그리하여 금(琴)이 문인들의 수양을 위한 필수적인 기예이며, 제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방책은 덕(德)과 악(樂)을 위주로 하는 사회생활방식의 상태를 지금 사람들은 거의 알지 못한다. 문화대혁명 후기에, 서양 고전 음악을 하는 사람과 중국 고전 음악을 하는 전문가들이 있긴 했지만 그들은 모두 중국 사회의 주류가 되지 못했고, 전통 문화의 실전(失傳)과 설상가상으로 음악가들의 경제적 이해 관계로 인해 유행 음악이 문화대혁명 후 중국 사회의 음악 예술 형식을 주도했다.

유행 음악 영역에서, 비록 중국 고대 사람들과 같이 덕(德)에 대해 심도 있는 인식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당시 문화대혁명의 혼란과 투쟁을 극복하고, 생활 상의 안정을 되찾은 중국인들은 새로운 정부 지도층과 미래에 대해서 충분한 희망을 가지게 되었고, 이러한 조건 아래, 80년대 초기 중국 유행 음악 중에 몇몇 작품들이 나왔다. 예를 들어 <희망의 전야에서(在希望的田野上)>, <복숭아꽃이 만발한 곳에서(在那桃花盛開的地方)>, <금릉과 은릉(金梭和銀梭)>등은, 막 자유의 분위기를 누릴 수 있게 된 사람들의 아름다운 생활에 대한 희망을 표현한 것이다.

80년대 중기와 후기에 이르러, 내가 대학을 다닐 당시 추이젠(崔健)의 <신 장정 중의 로큰롤>이라는 노래가 아주 유행했다. 친구들 사이에 서로 이 음악을 추천했고, 음악 장르로만 봤을 때, 이것은 중국 유행 음악 중 첫번째 록 앨범이었다. 그러나 개인적인 생각에 이 앨범에서 가장 수준 높은 부분은 가사였다. 각각의 노래 가사는 형식적으로 깔끔하고 읽기 편했으며, 심도 있는 내포를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가장 빼어난 부분은 처음으로 비유의 형식으로 중공사당의 통치를 비꼬았다는데 있다. 나는 아직도 똑똑하게 다음과 같은 노래 한 구절을 기억하고 있다.

“그날은 너희가 빨간색 천을 사용했지

내 두 눈을 몇일 동안이나 가려두고는

내게 무엇을 봤냐고 물었고

나는 행복을 봤다고 했지

이런 느낌은 정말 나를 편안하게 했고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는 이 현실을 잊게 했지…”

이런 음악에 대해, 중공사당은 그것의 발전을 좌시하지만은 않았다. 분명한 것은 추이젠은 CCTV에 거의 출연할 수 없었는데 이것은 정치적 원인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이후 89년 천안문 대학살이 발발했고, 중공은 엄격하게 교육, 언론 및 문화를 통제하기 시작했으며, 사람들은 겁이나서 <희망의 전야에서>와 같은 노래를 부를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천안문 사건 이후, 사람들은 자유와 미래의 아름다운 생활에 대한 희망을 노래한 작품을 다시는 만들어 낼 수 없었다.

이 때문에 90년대 이후 중국의 유행 음악은 거의 모두 남녀 간의 사랑을 노래한 것으로 변질되었으며, 이는 음악계의 침체를 가져 왔다. 대학살 이후 중국인들의 양심은 이미 완벽하게 사라져 버렸고, 중국인의 마음 속에서 살아 움직이던 희망의 불씨도 꺼져 버렸다. 중공사당의 국가정책은 천안문 사건 이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는데, 바로 중국 인민을 돼지로 간주하고 양육하며 누구든지 자유롭게 돈을 벌고,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이 돼지 우리 안에서 어떤 향락을 즐겨도 모두 개의치 않지만, 중공사당에 대한 의견을 갖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를 제거할 것이다. 대학살 이후, 중공사당의 모든 문예(文藝) 활동은 이런 “돼지 키우기”국가 정책의 일환이었고, 이것이 바로 중국인들을 변하게 하였다! 쾌락에 빠진 돼지들은 우리를 둔하게 만들 것이고, 악당(惡黨) 교주가 당신에게 준 더러운 먹이를 먹고는 그 악당에게 고마움을 표시할 것이다.

“동일수가” 당대 중국의 망국지음(亡國之音)

춘추시대 진(晉)나라의 악관(樂官) 사광(師曠)은 “악성(樂聖)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는데, 그가 망국지음을 저지했다는 고사가 있다.

진나라 평공(平公)이 새로 지은 왕궁이 완성되어 이에 경축행사를 열고자 했다. 위(衛)나라 영공(靈公)은 양국의 우호를 위해, 악공(樂工)들을 데리고 진나라의 경축행사에 참가하기로 했다.

위령공이 시종과 함께, 복수(濮水)란는 강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하늘이 점차 어두워지면서, 달빛이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했는데, 그 모습이 마치 하늘에서 무늬 비단이 내려 오는 것 같이 아름다웠다. 위령공이 이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 있을 때, 갑자기 신비한 곡조의 금(琴) 소리를 들었다. 그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악사(樂師)인 사연(師涓)을 시켜 그 기묘한 음악을 찾아, 기록하라고 명령했다. 사연은 명령을 받고, 강가에 차분히 앉아, 숨을 가다듬고, 금(禁)을 어루만지며, 그 음악을 들었고, 그것을 기록하는데 하루 밤을 샜다.

위령공 일행이 진나라 변경에 도착했고, 진평공은 새로 지은 왕궁에서 풍성한 연회를 준비해, 이미 귀빈을 맞이할 준비를 마쳤다. 연회에서, 위령공은 진나라의 가무를 감상한 후, 사연을 시켜 강가에서 받아 적은 그 곡조를 연주해 흥을 돋우라고 명령했다.

사연은 진국의 성대한 대접에 보답하기 위해, 왕의 명령을 받들어 현의 줄을 고르고는 전력을 다해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손마디의 오르내림에 따라 울려 퍼지는 거문고 소리는 마치 주르륵 내리는 빗줄기 같았고, 또한 사람들의 마음을 적시는 애통한 하소연 같았다.

이때 배석해 있던 진나라의 음악 태사(太師) 사광은 미소를 지으며, 귀를 기울여 듣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점점 사라지더니 점점 안색이 어두워졌다. 사연이 중간 정도 연주했을 때, 사광은 참지 못하고 황급히 일어나 사연의 손을 잡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만 하시오! 이것은 망국지음이오! 계속 연주해서는 안 되오!”

위령공은 본래 진평공에게 축하를 하기 위해서 온 것이었는데, 악관 사광의 말을 듣고는 너무 당황해 어찌해야 할지를 몰랐다. 사연 또한 놀란 나머지 위령공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진평공은 좋은 자리가 계속 되던 때에, 자국의 악사가 갑자기 끼어 들어 위나라 군주 일행의 체면을 구긴 것에 크게 노해 사광에게 물었다.

“이렇게 듣기 좋은 곡을 너는 어찌하여 망국지음이라고 하느냐?”

사광은 당당하게 말했다.

“이것은 상(商)나라 말년의 악사 사연(師延)이 폭군인 상나라 주왕(商紂王)을 위해 만든 “미미지음(靡靡之音: 퇴폐적인 음악)”입니다. 후에 상나라 주왕은 무도(無道)한 정치를 하여 주나라 무왕(武王)에게 왕위를 빼앗겼고, 사연은 주왕을 도와 참혹한 짓을 한 죄로 심판을 받는 것이 두려워, 도망 다니다 궁지에 빠졌을 때, 거문고를 안고 복수에 몸을 던졌습니다. 그러니 이 곡은 아마도 복수 강변에서 들었을 것입니다. 이 곡은 매우 불길한 것으로, 누구든지 이것에 도취되면, 그 나라는 기울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사연(師涓)이 곡을 다 연주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그는 여기까지 말하고 나서, 사연을 보고 물었다.

“당신이 방금 연주한 이 곡은 복수 강변에서 들은 것이지요?”

위령공과 사연은 이에 매우 놀랐고 연달아 사광에게 그렇다고 말했다. “망국지음”이란 말은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2]

망국지음에 대해서는 여기까지 언급하고, 그럼 본론으로 돌아가자. 중공사당의 주구 CCTV가 계속 방송하는 노래 <동일수가>는 1990년에 처음 만들어졌다.

이 노래가 만약 다른 나라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면은 별 문제가 없겠지만, 이것은 중공이 만들었고, 또한 그 창작 시기가 천안문 대학살이 막 끝난 1990년이다. 그럼 가사를 한번 살펴보도록 하자.

“생화(生花)는 우리가 이런 길을 걸었다고 알려줍니다” ⇒6.4사건의 홈페이지를 보세요, 우리가 어떤 길을 걸었나요? 선혈(鮮血)이지, 생화는 아닙니다!

“봄은 우정어린 고사를 전해줍니다”⇒6.4사건 후 다음 해 봄에 어떤 일이 일어났나요, 우호입니까?(동일수가가 6.4사건 후 다음 해에 만들어졌음을 풍자)

“찬란한 태양이 비치는 즐거운 나날에”⇒ 우리는 찬란한 태양의 기쁨을 누려본 적이 없습니다,

“별빛이 모든 유년 시절을 밝게 비춘다”? ⇒ 중국인은 유년 시절부터 중공의 세뇌를 받았고, 내 유년 시절에 “별빛”은 없었습니다,

“기쁘게 우리에게 동일수가를 전해준다”⇒ 내가 누구랑 기쁨을 누린다는 것인가? 사람 잡아 먹는 악당(惡黨)과 “동일수가”를 부를 사람은 없습니다!

파룬공 수련생들은 중공사당이 노교소에 자신들을 가두고, 가곡(歌曲)으로 강제적인 세뇌 전화(轉化)를 한다고 폭로했다. 그러나 많은 외국인들은 사실 이 가곡의 사악한 본질을 파악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노교소 내에서 발생한 사건이나 노교소 밖에서 발생한 사건이나 모두 마찬가지이다. 노교소 내에서, 중공은 혹형으로 파룬공 수련생들에게 신앙을 포기하도록 강요한 후, 이 노래를 불러 그들의 사상을 마비시키고, 혹형으로 받은 고통과 신앙을 포기한 아픔을 잊게 했다.

노교소 외부에서는, 대학살을 자행한 지 얼마 안 되, 이런 노래를 만들어, 즉 “생화, 햇볕과 유년 시절”과 같은 순수한 이미지로, 인민들로 하여금 참혹한 학살과 당의 사악한 폭행을 잊게 하려고 했다! 이렇게 명명된 노래는 매주 전국으로 순회 공연을 다니며 인민들의 귀에 들어가게 했고, 인민들은 매일 이 퇴폐적인 음악에 빠져 공산사당이 동포들에게 자행한 강간, 혹형, 살인 등 각종 악행들을 인식하지 못하게 되었고, 심지어 인민들을 공산사당과 한통속으로 만들어 버렸다!

역사는 우리에게 이미 오래 전에 한 교훈을 남겼다. 역사적 사실과 중국 정통 음악의 관점에서 볼 때, “동일수가”는 명실상부한 중국의 “망국지음”이며, 당시 사연이 주왕을 위해 그 음탕한 음악을 만든 것과 같이 망국을 초래할 죄가 있다. 공산사당이 인류를 박해한 백년 동안 이렇게 큰 죄를 지었는데, 여기에는 사당의 공덕을 칭송한 문인들의 역할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신(神)이 보기에 이런 문인들의 죄는 아주 큰 것이다. 사람의 각도에서, 이 노래가 창작된 시간을 봤을 때, 미래 사람들은 “동일수가”를 만든 자가 죄가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정(正)과 사(邪)의 전쟁

공상과학 소설을 보면 외계의 악당들이 지구를 공격하고, 이때 지구의 영웅이 용감하게 나타나 이를 물리치고 지구를 수호한다. 사실 이런 정과 사의 대결은 오래 전에 이미 시작되었는데, 공산사령은 바로 지구를 공격하는 사악한 생명이며, 그것은 사람 중에 자신의 대리인을 조종해서 인류를 훼멸하고자 한다. 표면적으로 외계인이나 악마가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를 간파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사실 공산사당이 만행한 짓은 우리 모두 알다시피, 사람이 한 일이 아니다. 그러면 이렇게 중요한 정과 사의 대결 중, 공산사당을 위해 일하는 작곡가들은 누구의 편인가? 그들에게 아무런 책임도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 중국에서 불고 있는 탈당 열풍은 사실 정과 사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최후의 결전이다. 이것은 인류 역사상 일어났던 것과 같은 정상적인 전쟁이 아니고, 인류를 훼멸하려고 하는 공산사령과 인류의 전쟁이다.

사람은 신이 만든 것이고, 또한 신에게 귀속되는데, 공산당의 진상을 알지 못하는 일부 중국 동포들은 마땅히 사악한 당(공청단과 소선대 포함)의 피비린내 나는 구호에 사악한 당을 위해서 평생을 살 것을 맹세하고, 사당의 교화를 받고 자기의 동포들을 학대하는데, 이렇게 사당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신이 아름다운 미래를 줄 수 있겠는가? 이점이 바로 중국인들이 탈당(탈단, 탈대)을 선택하는 근본적인 원인이며, 또한 이것은 누가 정치를 하느냐의 문제, 그리고 정치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문제가 결코 아니고 사령을 몰아내고 사당에 의해 속고 있는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행복한 삶을 산 세대는 아니지만, 짊어질 책임이 막중한 세대이다. 사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중책을 지고 한 민족을 이끌어야 하며, 또한 이미 추악과 폭행에 개의치 않고, 사당이 지정한 돼지 우리 안에서 권세에 빌붙어 이익을 꾀하고 사당 문화에서 바보처럼 즐겁게 살고 있는 민족을 이끌고 거짓과 사악함이 가득찬 이 비인간적인 문화에서 벗어나,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신당인 방송, 대기원 시보와 희망의 소리 라디오 방송과 같이 공산당에서 독립된 매체는 매우 중요하다. 그들은 중공에 의해 인권 침해를 받은 모든 중국 동포들에게 자신들의 의견을 토로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해주고, 동시에 이런 매체는 중국이 중화 전통 문화와 정통 인문 문화를 회복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이점은 미래 중화 민족의 생존, 안정적 발전을 위해서 매우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이런 독립 매체들은 반드시 중국 대륙에 존재해야 한다! 우리는 더욱 많은 사람들이 이 같은 독립 매체의 방송을 접할 수 있게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중화 전통 문화를 재건하는 위대한 사업에 참여할 수 있게 해야 한다.

※ 참고자료

[1] 천윈루(陳韻如): 대만 “미래 과학과 문화 연구회” 논문 채록: “고금(古琴)”의 문화적 내포에 대한 논의 http://www.zhengjian.org/zj/articles/2004/5/27/27295.html

[2] 류신위(劉新宇): 역사 고사: 거문고 예술의 진수를 보여준 사광(師曠) http://www.zhengjian.org/zj/articles/2002/9/10/18467.html

원문위치 : http://www.zhengjian.org/zj/articles/2006/1/24/35425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