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정견망】
중경회담(重慶會談)
1945년 8월 일본이 투항한 후 장개석은 곧 일본군의 항복을 받을 준비 작업에 돌입했다. 8월 11일 장개석 위원장은 18집단군 사령관 주덕(朱德)에게 부대를 이끌고 ‘원래 주둔지로 돌아가 명령을 대기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거절당했다. 중공은 기선을 빼앗기 위해 일본군 점령지역 및 인원, 장비를 접수하기 시작했다. 당시 국군의 주력부대는 서남부에 분포해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거리가 멀었다. 반면 중공군은 후방인 화북(華北)과 동부 연안지역에 있어 지리적인 우위에 있었다.
역사학자 신호년(辛灝年)은 공산군의 진정한 대일군사행동이 일본의 투항 직후부터 시작되었음을 발견했다. 8월 9일 밤 뜻밖에 일본의 투항과 소련의 대일선전포고 소식이 전달된 직후 모택동은 연안에서 즉각 중공군에 일본 점령군에 대해 ‘광범위한 진격을 실행’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8년 대일항전이 시작된 이래 모택동이 자기 군대에 내린 최초의 항일명령이었다. 그의 의도는 중공해방구를 확대하려는 것이다. 8월 10일 밤부터 11일 오후까지 불과 18시간 만에 모택동은 연속 7차례나 명령을 내렸다. 그 목적은 ‘즉각 20만 대군을 움직여 중원을 탈취’하란 것이었다.
모택동은 심지어 각지 중공군대에 거듭 명령을 내려 일본군의 항복을 받고 정부군의 행동을 저지하라고 했다. 또 거점 및 각지의 교통 요지를 파괴하고 일본군의 무장을 몰수하며 “중공의 이런 행동에 저항하는 중국인들은 간첩으로 보고 처분하라”고 했다. 그는 동시에 “중국해방구 항일군총사령관” 명의로 독단적으로 투항 장소를 지정해 일본군 사령관 오카무라 야스지(岡村寧次)에게 오직 중공군에게만 투항하라고 명령했다.
8월 12일 중공 군대는 화북에서 무력을 동원해 자신들에게 투항하길 원하지 않는 3만 명의 일본군을 포위해 지금껏 유례가 없는 ‘항일대전’을 펼쳤다.
[이상의 내용은 신호년의 《누가 신중국인가(誰是新中國)》강의록에서 발췌]
미국과 소련은 각자 전략을 따졌지만 모두 중국의 내전은 피하려 했다. 장개석은 제때에 정세를 파악해 모택동을 초청하여 우선은 좋은 말로 담판하고 그래도 안 되면 무력을 쓰기로 결정했다.
8월 14일부터 23일까지 장개석은 모택동에게 3차례나 전보를 보내 ‘함께 큰 계획을 상의해보자’고 중경으로 초청했다. 모택동은 여러 차례 이 초청을 미루고 참가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장개석이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중립을 지켜주길 원하던 스탈린이 모택동에게 전보를 보내 “즉각 중경에 가서 장과 회담하라” “당신의 안전은 미구과 소련 두 나라가 책임지겠다”며 엄하게 요구했다.
스탈린의 지령을 받은 모택동은 비록 불만이 컸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8월 25일 그는 유백승(劉伯承), 등소평(鄧小平)에게 자신들이 산서(山西)로 돌아온 후에야 현지 국군에 대한 공세를 늦추라고 지시하고 “중경에서 나의 안전은 걱정할 필요 없다. 당신들이 잘 싸울수록 나는 더 안전하고 협상도 더 잘될 것이다”라고 했다.
8월 28일 모택동은 중국 주재 미국 대사 헐리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중경으로 향했다. 공항에서 그는 서면 담화문을 발표해 “현재 가장 급박한 것은 국내평화를 보장하고 민주정치를 실시하며 국내의 단결을 공고히 하는 것이다. 국내 정치와 군사적으로 존재하는 각 항목의 급박한 문제들은 마땅히 평화・민주・단결의 기초 위에서 합리적으로 해결해야 하며 전국 통일을 실현해 독립・자유・부강한 신중국을 건설해야 한다. 중국의 모든 항일 정당 및 애국지사들이 단결해 상술한 임무를 실현하기 위해 함께 분투하기 바란다. 본인은 장개석 선생의 초청에 대해 감사를 표한다.”라고 했다. 모택동은 마치 자신이 ‘평화의 사자’인양 행세했다.
1945년 9월 4일 장개석은 《전국 동포에게 항전승리를 알리는 글(抗戰勝利告全國同胞書)》에서 “항전이 끝난 후에는 더 이상 민주 헌정을 늦출 수 없다. 국민혁명의 최고이상은 바로 전민정치(全民政治)”로 “국민들에게 정권을 돌려주는 것이다.” “우리가 국가의 통일을 완수하자면 유일한 전제는 전국 군대의 국가화를 이루는 것이다.”라고 거듭 밝혔다.
41일간의 ‘중경회담’은 10월 10일 끝났고 쌍방은 ‘쌍십협정(雙十協定)’을 체결했다. 그중에는 “항일전쟁은 이미 승리로 끝났고 평화적으로 나라를 세우는 새로운 단계가 곧 시작된다. 반드시 공동으로 노력해 평화・민주・단결・통일의 기초 위에서 장(蔣) 주석의 영도하에 장기적으로 협력하면서 내전을 단호하게 피하고 독립・자유・부강한 신중국을 건설하며 삼민주의(三民主義)를 철저히 실행해야 한다. 장 주석이 주창하는 군대의 국가화, 정치의 민주화, 당파(黨派)의 평등합법은 평화로운 건국에 도달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길이다.”라고 했다.
회담기간에 모택동은 전력을 다해 장개석에게 성의를 표시했고 여러 차례 “장 위원장 만세!”를 외쳤다. 또 중경을 떠나기 전 발표한 연설에서는 “중국의 오늘은 오직 하나의 길만 존재하니 그것은 바로 평화이며 평화야말로 소중한 것이다. 다른 것은 다 틀린 것이다.” “국공 양당과 각 당파는 일치단결해 곤란을 두려워하지 않고 평화・민주・단결・통일의 방침 아래, 또 장 주석 영도하에 철저하게 삼민주의를 실현한다는 방침 아래에서 모든 곤란은 다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신화일보(新華日報)》 1945년 10월 9일)
1956년 장개석은 당시 상황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모택동은 말로는 다른 속셈이 없다고 했지만 사실 그는 다른 속셈이 있었다. 그의 속셈은 무엇이었는가? 이후의 사실이야말로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좋은 답변이 될 것이다. 모택동은 연안으로 돌아간 후 한 달도 못되어 앞서 말한 모든 협상과 약속을 완전히 파괴해버렸다.”(《중국 안의 소련》)
회담 기간에 유백승, 등소평은 과연 산서에서 상당(上黨)전투를 발동했고 국군 염석산 부대가 일본의 투항을 받는 것을 저지하고 국군에 큰 피해를 입혔다.
장개석은 말했다.
“이 41일간의 협상은 전국의 시선을 집중시켰고 비적군대의 실제행동을 은폐시켰다. 그렇다면 비적군대(중공군)의 실제 행동은 어땠을까? 중경 신화일보 10월 17일 보도에 따르면 9월 11일부터 10월 11일까지 각지에서 비적군이 점거한 도시가 200곳에 달했다. 또 교제(膠濟), 진포(津浦), 농해(隴海), 평수(平綏), 북녕(北寧), 덕석(德石), 평한(平漢), 도청(道清) 등의 주요 도로에서 몇몇 거점을 통제하며 화북과 화중의 교통을 방해했다. 아울러 산해관에서 항주(杭州)에 이르는 해안선, 원곡(垣曲)에서 무척(武陟)에 이르는 황하(黃河)연안 및 강소와 안휘 두 성의 장강(長江)연안과 운하를 위협했다.”(《중국 안의 소련》)
중경담판은 중공의 군사적 승리를 위한 기초를 다져주었을 뿐만 아니라 모택동에게 근거리에서 장개석을 관찰할 기회를 주었다. 그는 장개석이 진심으로 평화를 원하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호교목(胡喬木)에게 장개석에 대해 말하면서 “독재를 하기에는 담이 없고 민주를 하기에는 그릇이 작다”고 했다.
다시 말해 국민당이 “독재를 실행하기엔 불면 날아가는 먼지처럼 힘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는 민주냐 독재냐, 평화냐 전쟁이냐에 대해 중심이 없다. 최근 몇 달간 나는 그에게 아무 노선도 없는 것을 보았다.” “내가 보기에는 장개석이 권력을 잡은 이래 지금껏 이렇게 약한 적이 없었다. 병력은 흩어졌고 신문검열은 취소되었다. 이는 지난 18년간 없었던 일이다. 그가 단호하게 혁명에 반대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호교목이 회상하는 모택동》)
장개석은 물론 중공이 협정에 만족하지 않으리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쌍십협정’에 서명한 이튿날 쓴 일기에서 그는 “공산당은 신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인격(人格)도 없어 진실로 금수와 다르지 않다.”고 썼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중공에게 잘못을 고쳐 바로 잡을 기회를 주었다.
중공은 정권탈취를 위해 제멋대로 민주를 고취시켰다. 미국은 자신들의 국제전략에 따라 국공합작을 강조하며 순환집권을 실현하고자 했다.
당시 중공은 국군이 북상해 동북을 접수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화북에서 주요 철도노선을 파괴했다. 1945년 11월 주중 미국 대사관의 보고서에는 “중공의 주요무기는 화북의 철도를 심하게 파괴하는 것이다. 중경담판 이후 후속협상에서 중공은 국군이 진격을 멈추면 공산군도 철도교통에 대한 공격을 멈추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국민정부는 이 건의를 거절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병력을 보내 항복을 받는 것은 국민정부의 권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충돌은 끊이지 않았고 또 지속적으로 확대되었다. 이에 대사관은 현 상황에 희망이 거의 없다고 본다.”라고 했다.
한편 이 시기 미국 내 친공(親共)인사들 역시 대대적인 여론몰이에 나서 중공을 포장하면서 국민정부를 비방했다. 트루먼이나 마셜 같은 무리는 “장개석이 미국의 원조를 착복했다”는 거짓말을 완전히 믿었다.
1946년 1월 22일 일기에서 장개석은 마셜에 대해 “그는 우리나라의 내부 정황 및 ‘중공’의 음모에 대해 전혀 모르니 결국 큰일을 망칠 것이다.”라고 썼다. 또 “객경(客卿)은 다른 나라 정치에 대한 간격을 알아야 하는데 만약 본인에게 주견이 없다면 일을 그르칠 뿐만 아니라 나라를 망하게 하는 화를 불러올 수 있다.”고 했다.
몇 년 후 송미령은 당시 상황을 언급하면서 “루스벨트 대통령은 자신과 가까운 막료 및 외교관들에게 심각하게 속고 있었다. 그는 심지어 내게 중국공산당은 단순히 ‘토지개혁자’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중공 또는 소련과 교섭할 때도, 주은래든 아니면 스탈린이든 상관없이 미국은 이들 정치인들을 마치 숲속의 어린 아이처럼 대했다.”라고 했다.
“주은래가 한 역할은 실로 극적인 효과를 가져왔는데 그는 가장 적당한 시기에 대성통곡하는 장면을 연기해 관중들을 흡인시켰다. 그는 또 이처럼 뛰어난 연기로 마셜장군의 동정을 얻는데 성공했다. 마셜장군은 심지어 내게도 ‘만약 극단적으로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았다면 그 어떤 사내도 쉽게 눈물을 보이지 않을 겁니다’라고 말했다.”(송미령 《웨더마이어 장군의 ‘전쟁과 평화를 논하다’를 읽고》 1987년)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567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