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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영웅인물】 장개석(34): 무너지는 국군

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정견망】

무너지는 국군

항일전쟁이 끝날 무렵 중공은 120만의 정규군을 보유하고 자신들이 통제하는 지역의 인구가 1억을 훨씬 넘어 중화민국 역사상 그 어떤 군벌보다 힘이 커졌다. 임표(林彪)는 병력을 이끌고 동북(東北)으로 들어갔고 소련은 중공 군대에 대한 지원을 시작해 대량의 군수물자와 무기를 넘겨주었다. 중공은 애초 섬북(陝北)에서 약 10만의 병력을 동북으로 이동시켰는데 불과 1년 만에 40만 대군으로 확장되었다. 하지만 소련이 중공을 지원하던 이 중요한 시각 미국은 오히려 국민정부에 대한 지원을 줄여버렸다.

중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전목(錢穆)은 미국인들이 중국의 공산화를 초래했다고 보았다.

“게다가 당시 서양인들은 끝까지 중국의 공산화를 서구화의 일환으로 보고 지지하며 찬조했다. 미국인들은 그 가장 두드러진 사례였다. 소련 세력은 서방에서 동쪽으로 침입해 외몽골을 독립시켰고 장성 밖 동북 삼성과 한반도 북부를 모두 자신의 세력범위에 포함시켰다. 이것은 모두 미국인들이 주장한 것이다. 당시 미국인들은 비록 중화민국(中華民國)이 자신들과 함께 일본과 싸웠음에도 중국은 병력이 약해서 소련만큼 믿을 수 없다고 여겼다. 더욱이 중국은 결국 동양의 황인종이라 서양의 백인인 소련과는 차이가 있었다. 미국인들이 대대적으로 소련을 끌어들여 동방으로 돌아오게 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 분명하며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민주정치와 극권정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민족혈통이란 큰 차이에 비하면 실로 작은 차이로 변했다. 하지만 황인종과 백인종의 차이는 큰 차이였다. 이를 근대 미국인들의 심리로 말하자면 이미 분명한 증거가 있다.”(《국사신론(國史新論)》)

마셜은 ‘조정(調停)’기간에 국민정부에 대한 무기수출 금지와 재정지원을 중단했다. 이렇게 되자 군사적으로 손발이 묶인 국군은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했고 국민정부에 대한 여론의 압력으로 민심을 잃게 만들었다.

반면, 중공 장령(將領)들은 미국 비행기를 타고 연안을 출발해 군사요지들을 차지했다. 하룡(賀龍)은 “지금 우리는 미국 비행기를 타고 도처로 다니는데 연안의 서적과 잡지도 미국 비행기를 통해 각지로 운송하고 있다.”고 말했다.

1947년 6월 22일 모택동은 ‘미국의 장개석 군사원조법안에 대한 성명’을 발표해 “중국에 대한 미국의 모든 군사원조를 당장 중단하고 철회하며 중국에 주둔한 미군 부대도 당장 철수하라고 단호히 요구했다.”

1947년 7월 마셜은 중공에 또 하나의 선물을 보냈다. 그는 미국의 대중 무기수출금지를 촉구해 민국 정부의 무기공급 내원을 단절시켰고 심지어 이미 지급한 화물마저 압수했다. 그 수단의 악랄함은 사람을 놀라게 할 정도였다. 1년간 지속된 무기수출금지령은 국군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반면 중공은 소련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미국의 금지령이 두렵지 않았고 서서히 판세를 뒤집기 시작했다. 이후 3년간 중공은 점차 우세를 차지했고 결국에는 대륙을 탈취하기에 이른다.

중화민국 신육군(新六軍) 사령관 요요상(廖耀湘)은 웨더마이어 장군에게 무기수출금지가 초래할 엄중한 결과에 대해 알려주었다.

“신육군은 동북에서 소모가 아주 큰데 또 쉬면서 정비와 보충을 할 수 없다면 완전히 무너질 것이다. 자동화기는 대부분 심하게 파손되었고 기관총도 대부분 연발사격이 불가능하다. 자동화기와 박격포는 탄약보급이 부족한데 특히 포탄이 크게 부족한 상황이다. 자동차와 다른 특수차량들도 이미 폐차연한에 도달했다. 신육군의 전투력은 과거의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며 장병들의 자질도 떨어졌고 사기마저 저하되었다.”

수출금지가 끝나고 화북의 비적토벌사령부 총사령관 부작의(傅作義)가 뒤늦게 도착한 미군 무기 상자를 열어보니 수량이 애초 허락된 것의 10분의 1에 불과했다. 게다가 절대다수의 기자재가 제대로 갖춰지지 못해 대포가 있으면 받침대가 없고 총이 있어도 탄창이 없어 고철이나 마찬가지였다.

1952년 장개석은 국민당 제7차 전국대표대회에서 반란평정의 실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총결했다.

“민국 35년(1946년) 전반부 우리가 비적군대를 토벌하는 일은 순조롭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러나 군사조처(軍事調處 역주: 국공내전을 방지하기 위해 국민당, 공산당, 미군 대표 3자가 함께 만든 조직)의 3인 소조는 우리 군이 전진할 때마다 늘 엄중한 항의를 제출하며 방해하고 가로막지 않은 적이 없다. 때문에 우리 군은 한걸음 전진할 때마다 한걸음 저지당했고 진실로 우리 군의 손발을 묶고 공격받게 해 성공을 눈앞에 두고 실패하지 않을 수 없었다.” (《俄蒙滿陸台格局成因》,一九五二)

국민정부가 가장 위기에 처했던 1949년 가을 미국은 ‘미중관계 백서’를 발표해 미국은 국공의 내전에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강조하면서 국민정부를 저버렸다. 그 후 대륙에서는 병사들의 사기가 무너졌고 마치 산이 무너지듯이 패배했다. 국민정부는 백서에 대해 우물에 빠진 사람에게 돌을 던진 것으로 보았다.

염석산(閻錫山)은 1949년 8월 8일 ‘침략에 반대하는 대동맹’ 상임위원회 강연 원고에서 “만약 미국이 백서를 중국과 미국의 우호적 결말을 위한 하나의 문서로 본다면 우리에겐 하나하나 실패의 과정이었고 정신적으로 극심한 타격을 주었다. 이 백서는 우리 중국에 있어 우물에 빠진 사람에게 돌을 던진 것과 같다. 나는 미국은 마땅히 이런 식으로 중국과 미국의 우호관계를 끝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우리는 백서가 이미 지나간 중미(中美) 우호의 결과(果)가 아니라 앞으로 중미가 공동으로 반공하는 원인(因)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라고 했다.

한편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중국의 적화를 방임하고 한국전쟁의 원인을 조성한데다 맥아더를 해임하면서 민심을 크게 잃었다. 1952년 2월 2일 갤럽 조사에서 트루먼의 지지율은 22%로 나타났는데 이는 역사상 모든 미국 대통령 중에서 가장 낮은 지지율이다.

1952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 아이젠하워는 트루먼에 반대하는 선거운동의 표어로 “한국! 공산주의! 부패!”를 내걸고 백악관 입성에 성공해 20년에 걸친 민주당 장기집권을 끝내고 트루먼을 하야시켰다.

3. 공산재앙이 널리 퍼지다

향신(鄕紳)제도를 파괴

장개석이 보기에 “농촌으로 도시를 포위”하는 것은 중국의 낡은 유구(流寇 떠돌이 도적)의 관념이었다. 중공은 증오를 통해 가정을 파괴하고 자신의 군대를 키워나갔다.

“하지만 공산비적은 러시아식 무장폭동 방법을 배운 외에도 중국 옛날의 유구식 폭동방법을 채택해 ‘농촌으로 도시를 포위’하는 관념이 중공 비적들 사이에서 점차 대두되었으며 유구식의 방법은 마침내 공산비적 폭동의 주요 노선이 되었다.”(《중국 안의 소련》)

“그러나 당시 중국 농촌은 가족을 기본조직으로 하는 자치단체였다. 동성(同姓) 가족끼리는 혈통을 유대로 삼았고 이성의 가족은 혼인을 통해 서로 연계되었기 때문에 설령 지주와 소작농의 관계일지라도 대대로 함께 살하가며 서로 돕는 깊은 정을 지니고 있었다. 이에 중공 비적이 이런 평화로운 농촌에서 투쟁을 만들어 내고 폭동을 일으키자면 단순히 선전선동의 방법만으로는 효과를 낼 수 없었다. 때문에 그들은 특별히 약탈, 습격, 납치, 인질살해 등 유구의 방식을 채택해 마을을 쓸어버리고 사람들을 위협하며 강제로 끌어들여야 했다.”(《중국 안의 소련》)

“그들은 향촌에서 무뢰배와 깡패들을 자신의 도구로 삼아 그들이 지주와 부농을 학살하고 아동을 살해하며 여자들을 유린하게 했다. 또 죄수들을 협박해 스스로 무덤을 파게 만든 후 산채로 묻어버렸다. 이외에도 물고문, 불고문, 윤간 및 배를 가르는 등의 온갖 잔인한 만행을 저질렀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군중들 속에 공포분위기를 조성했고 지주와 소작농 사이에 증오심을 커지게 했다. 그들은 또 지주나 부농의 집에 불을 지르는 한편 빈민들의 약탈을 부추겨 빈부사이에 투쟁하게 만들었다.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빈민들의 집을 불태워 강제로 고향을 떠나 비적군대와 함께 유구의 길을 걷게 했다.”(《중국 안의 소련》)

“그들은 특히 농촌 가정에서 가족이나 혈육간의 투쟁을 선동함으로써 군중 속에서 당이나 단 조직을 발전시키고 통제를 강화했다. 또 청년들을 성적으로 방탕하도록 고취시키기 위해 소위 염치를 타도하고 도덕을 박멸한다는 구호를 사용해 공비(共匪)들이 자신의 가정을 파괴하고 윤리를 훼멸하도록 유혹했다. 이를 통해 비적 당(匪黨)의 부림을 달게 받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도록 만들었다.”(《중국 안의 소련》)

중공군대는 “당이 군대를 지휘한다.”고 한다. 공산당은 처음 시작할 때부터 무고한 이들을 멋대로 살해하고 부자들의 재산을 약탈하는 사악한 천성(天性)을 지녔다. 초기에 공산군과 싸웠던 국군장령 중 한명인 허극상(許克祥)은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필자 개인은 비록 일찍부터(당시 연대장) 공산당을 제거할 결심을 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속으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또 공산당이 ‘농민과 노동자 해방’과 ‘농민과 노동자를 대신해 이익을 꾀한다’는 등의 기만적인 구호를 주장했기 때문에 농민이나 노동자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궁금했다. 나는 빨리 답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민국 16년(1927년)부터 두세 달 동안 각종 관계를 이용해 군무에 종사하는 한편 민중들의 심리를 시험하는 작업을 했다.

어느 날 원래 잘 알고 지내던 농민 장춘생(張春生)의 집에 가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나는 장형 당신 땅의 지주는 당신을 어떻게 대합니까? 지금 호남 각 향촌마다 농민협회가 설립되어 지주를 청산하면 그의 토지를 당신들에게 나눠주며 지주는 땅에서 쫓아내 굶어죽게 한다는데 당신 생각은 어떻습니까? 라고 물었다. 장춘생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나를 자기 집 안방으로 데려가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지주와 서로 수십 년을 함께 지냈고 평소 서로 편안해서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지금 농민협회의 한 무리 망나니들이 제멋대로 굴면서 자신들의 세상인양 나더러 지주를 청산하고 그를 산채로 굶겨죽이라고 하는데 이는 너무 잔혹합니다!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중국 고유의 도덕은 인도(人道)를 중시하는데 농민은 밥을 먹어야 하지만 지주 역시 마땅히 그의 살길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소작농도 다만 열심히 일하고 절약하기만 하면 언젠가는 모두 지주가 될 날이 있을 겁니다. 우리 농민들은 공산당의 이런 유혈적인 토지개혁에 대해 절대 동의할 수 없습니다.’”

“지금은 마침 농사일이 바쁜 봄철인데 밭일을 하느라 너무 바쁩니다. 하필 이런 때에 농민협회와 적위대(赤衛隊)를 설립해 온종일 우리 농민들더러 회의에 나가라고 하고 회의에 가지 않거나 조금이라도 늦으면 반동파로 모함해 처벌합니다. 심지어 구타하거나 무릎을 꿇는 벌을 받는데 공산당의 이런 작법은 실로 대부분의 농민들이 내심으로 극히 혐오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재 저들이 정권을 차지하고 있으니 우리는 저들의 협박을 받아 정말 어찌 해야 좋을 지 모르겠습니다. 당신들 군인이 방법을 찾아 우리를 구해주세요!”(《마일사변회고록(馬日事變回憶錄)》)

대륙에서 출판된 《소비에트 숙반 대기록(蘇區肅反大紀實)》에 나오는 기록이다. 하희(夏曦 역주 : 중공 초기 지도자 중 하나)가 상악서소비에트지구(湘鄂西蘇區) 제4차 숙반(肅反 반혁명분자 숙청)에서 한 무리 홍군(紅軍)의 군적을 박탈하자 이들 홍군이 애걸복걸하면서 자신들을 쫓아내지 말아달라고 애원했다. 왜냐하면 이들은 “토호를 타도하고 토지를 나눈 혁명에 참가한 가난한 농민들이라 집이 있어도 돌아갈 수 없었고 공산당을 따라가지 않으면 죽는 길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567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