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석방행
【정견망】
사막 깊은 곳에 석굴 뚫어
회화와 조소의 수승한 신운(神韻)
천년을 이어 화려한 꽃을 피우니
말세에 본성의 초기를 돌아보게 하노라.
大漠深處鑿石窟
繪畫彩塑神韻殊
綿延千載鑄芳華
末世回眸本性初
돈황에 관해서는 앞서 다른 문장에서 간단히 언급한 적이 있다. 하지만 석굴의 유래와 건설과정 및 채색 소조와 벽화 등을 겨냥한 보다 깊은 탐구는 없었다. 오늘은 이 기회를 빌려 돈황 막고굴(莫高窟)에 신이 부여한 문화 내포와 깊은 의미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돈황이 함축한 역사와 문화 내함이 방대하고 복잡한 관계로 우리는 몇 편의 문장으로 나누어 개괄적으로 서술하겠다. 앞서 두 편의 글 즉 《서출양관》과 《명산홍천》을 바탕으로 본문에서는 직접 막고굴과 관련된 경험과 문화 내포 및 신의 펼쳐짐에 대해 서술한다.
먼저 막고굴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먼저 해보자. 현지인들은 막고굴을 천불동(千佛洞)이라 부른다. 중국 감숙성 돈황시 동남쪽 2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막고진(莫高鎮) 명사산(鳴沙山) 동쪽 기슭 절벽에 위치한다.
절벽 앞으로는 탕천하(宕泉河)가 있어서 동쪽을 향해 남북으로 1680미터, 높이 50미터 가량 된다. 5호16국의 하나인 전진(前秦) 시기 366년 낙준(樂樽)이란 승려[어떤 사료에는 동진 영화永和 8년-기원 352년-에 불교 신도들이 굴을 뚫었다고 한다]가 처음으로 건축했다고 한다.
이후 16국, 북조(北朝), 수, 당, 오대(五代), 서하(西夏), 원(元) 등 역대에 걸쳐 건축되었다. (나중에 상술할 예정) 현재는 735개의 동굴에 벽화 4만 5천 제곱미터, 흙으로 만든 채색 조소 2415존(尊)이 있어 현존하는 세계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내용도 가장 풍부한 불교예술지역이다.
근대에 들어와 왕원록(王圓籙)이라는 이름의 한 도사가 장경동(藏經洞)을 발견했다. 그 속에 5만여 건의 고대 문물이 있었는데 대부분 외국인들이 가져갔고 장경동에 있던 경전 및 서적과 돈황 예술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돈황학(敦煌學)이란 전문 학과가 생겨났다.
막고굴에 와본 사람들은 이곳에 오면 신앙의 보고(寶庫)에 온 것 같은 동일한 느낌을 갖게 된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두 이곳에서 수확을 얻는데 심지어 도덕과 신념(信念)조차 제고될 수 있다. 천국에 있는 고향에 대한 생명 심층의 기억과 동경이 격발되어 나올 것이다. 아울러 이곳이 비록 사막에 있음에도 늘 국내외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심지어 관광객이 너무 많아 동굴 내 벽화와 채색 조소가 크게 손상되어 어쩔 수 없이 입장객의 수를 제한하고 있다.
본문부터 시작해 우리는 독자들에게 돈황 벽화(채색조소 등을 포함)의 유래와 음악, 무도(舞蹈) 등 몇 가지 큰 방면에 대해 개인적인 소견을 말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보다 좋은 의견들이 나오길 바란다.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돈황 문화유산에 대한 어느 돈황연구원의 견해를 인용해보고자 한다.
“내가 보기에 그곳은 신적(神跡)으로 가득하며 가히 기적이라 할 수 있다. 생각해보면, 천 년도 전에 우리 선배들이 신앙에 대한 추구와 무한한 미래의 각종 가능성에 대한 인류의 탐구에서부터, 또 비단 길 위의 문화예술과 상업적인 교통 왕래로부터 돈황이란 이런 신앙의 공간을 만들었다. 자비, 지혜, 인내의 심령(心靈)으로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사람과 우주 사이의 이런 영원과 현실의 관계를 탐구했으며 줄곧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수많은 계발과 자극을 준다.
또한 내 생각에 가장 신기(神奇)한 것은 바로 이렇게 혼란하고 전란(戰亂)으로 가득 찬 역사 속에서 오히려 돈황석굴이 운 좋게 존재해 내려와 우리에게 한 조대 한 조대의 사람들이 어떻게 우리의 가장 소중한 문화의 전승(傳承)을 소중히 여기고 또 보호할 수 있었는지 보여준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미(美)와 신앙(信仰)의 대한 뜨거운 사랑과 충성을 보여주었다.
중국 문화는 최근 백년 이래 거대한 변화를 맞이했다. 하지만 변화의 국면 속에는 실질적으로 희망을 포함하고 있다. 수많은 오랜 문화가 세계 문명이란 거울을 통해 보편적 가치 속에 녹아 들었고 종종 다시 태어나 환히 빛난다.”(주 참조)
…중략….
아주 오래 전 역사 시기 돈황 지역에 대한 체계적인 배치를 말해보자.
당시 천상(天上)에서는 이미 인간세상의 천지 산맥과 사람이 어떻게 생활하는지 또는 사회의 발전을 잘 배치했고 그 신들이 질서 있게 서로 다른 신전문화(神傳文化)를 가져다주었다. 그러면 신앙 측면에서는 ‘의사일정(議程 어젠다)’이 펼쳐져 있었다.
왜냐하면 창세주께서 인간 세상에 와서 창생(蒼生)을 널리 제도하자면 그럼 수많은 신들이 신앙 방면에서 길을 다질 책임을 져야했기 때문이다. 동방은 불도(佛道) 체계에 속하는데 이것은 인종의 요소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은 동방과 서방에 걸쳐 전생할 수 있으므로(여기서는 혼혈아의 형식이 아니라 다른 민족의 사람으로 전생하는 것을 말한다) 부동한 생명은 부동한 문화적 온축(底蘊)을 펼쳐낼 수 있다. 비록 같은 인종 체계 범위 내에서도 불도(佛道) 및 서방신(西方神) 등의 부동한 체계가 있지만 개체 생명에게는 이런 반영이 있을 수 있다. 비록 뚜렷하지는 않아도 이런 요소가 있다.
당시 창세주께서는 창우(蒼宇)의 중생을 널리 구도하기 위해 중원 문화 변두리의 한 지방을 선정하셨다. 이 곳은 교통이 편리하고 상업이 발달하며 각종 문화가 교류 융합하고 사화 환경이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왕조가 바뀌거나 혼란해도 중간에 단절되지 않아야 했다.
알아야 할 것은 신(神)이 이런 환경 속에서 생활하도록 사람을 배치한 것은 아무리 휘황해도 모두 사람이 된 근본 목적이 아니며, 사람더러 신불(神佛)에 대한 신앙을 지니고 이를 통해 수행방면의 내포를 다지게 하기 위해서다. 이렇게 해야만 인류사회가 발전해 창세주께서 생명이 진정으로 구도 받을 수 있는 대법을 세상에 널리 전하실 때 사람들이 법을 인식하고 이를 통해 진정으로 구도 받는 근본 의미를 알 수 있다.
이에 이곳은 인간세상에 다음과 같은 효과와 표상이 나타나게 해야 했다. 즉, 당시 사람들이 여기서 수행하거나 또는 신앙에 몰두하면서 신의 조화를 펼쳐내는 한편 동시에 창세주께서 인간세상에 대법을 널리 전하실 때 사람들이 이전의 순진함을 찾고 진정으로 회귀의 길을 걷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 창세주께서 직접 중국 역대 왕조의 사상과 신앙 측면을 책임진 신들과 기타 사회 환경을 보조하는 많은 신들을 소집해 다함께 어떻게 배치하는 것이 가장 좋을지 상의하셨다. 나중에 아주 높은 층차의 한 신(神)이 말했다.
“만일 당신(창세주)께서 법을 전하기 시작하실 때 사람들의 사상 중에 중토(中土) 각 조대의 신앙 상태를 구비할 수 있다면, 또는 다른 말로 당시의 보통 사람들이 불상(佛像)을 보면서 창세주와의 그런 성스런 인연을 연결할 수 있다면, 평평하게 나타내는 방식이 가장 좋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불가(佛家) 신앙이 중토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될 때부터 부동한 조대(朝代)의 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신앙에 대한 이해와 진심을 이곳에 넓게 펼친다면, 후세인들은 천 년간 누적된 것들을 통해 신(神)이 부여한 부동한 조대의 가장 정화적인 것들을 볼 수 있고, 이로부터 전통을 찾는 과정 중에 그 성스런 인연을 일깨워 진정으로 당신(창세주)의 구도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이 신이 이렇게 말함에 따라 다른 신들도 모두 아주 도리가 있다고 느꼈다. 창세주께서는 아주 많은 방면에서 상세한 배치를 시작하셨다.
나중에 창세주께서 말씀하셨다.
“역사상 신앙을 다진 신은 당시 사람들에게 역사의 장래에 내가 세상에 머물며 법을 전할 것을 알려주기 위해 부동한 방식으로 나타낼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층층 아래로 걸어와 인간에 도착하는 과정 중에 부동한 신불(神佛)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이 인간 세상에서 신앙을 다지는 과정 중에 부동한 명호(名號)로 불릴 것이다.(원주: 가령 부동한 각자가 전륜성왕과 미륵불, 메시아 등등을 언급했다) 사실 그들이 최종적으로 가리키는 것은 모두 나다. 당신들은 이점을 똑똑히 알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어느 신이 말했다.
“그 때가 되면 이곳에 불법(佛法)이 크게 융성함을 상징할 수 있는 비범한 이름이 마땅히 부여되어야 합니다. 즉 이곳에서 신불(神佛)과 천국의 제반 수승하고 아름다움을 집중하여 나타낼 수 있도록 정해야 합니다.”
창세주와 여러 신들이 모두 동의해 하는 김에 이 일도 정했다.
근대 180년(즉 1840년부터 지금까지. 현재는 마르크스 레닌주의가 중국을 식민지로 삼고 있는데 문화적으로 보자면 중국인들은 망국의 노예다. 이 점을 반드시 똑똑히 알아야 한다!) 간 이곳의 쇠락과 비애를 말하자면 매우 복잡하니 나중에 천천히 탐구해보도록 하자.
당시 많은 신들이 돈황 지역에 아주 상세한 배치를 했다.
우선 명사산(鳴沙山)과 월아천(月牙泉)은 그 자체로 사람들에게 신적(神跡)을 증명하는 것이다. 막고굴과 삼위산(三危山)은 신앙을 이어받는 사명을 짊어졌다.
그렇다면 이 산의 바위와 토지 환경은 어떤 모양이어야 석굴을 뚫는 상황에 부합할 수 있을까? 또 만일 사람들이 상(像)을 만들 때 어떤 방식으로 조각해야 오래 보존할 수 있고 어떤 천연 안료를 사용해야 채색 조소와 벽화가 쉽게 퇴색하지 않을 수 있을까? 등등 매우 상세히 배치했다.
막고굴과 삼위산을 말하자면 이 두 산은 천상에서 매우 영성이 있는 바위였다. 그것들은 원래 거리가 서로 멀었는데 안배한 신은 한 단락의 시간을 지나서 그것들이 비로소 세상에 내려오도록 선정했다. 하계(下界)하기 전에 신은 일찍이 어느 왕조의 사람이 산의 어느 부위에 팔 것인가를 나누어 놓았다. 대체적으로 구분해놓고 인간 세상에서 구체적으로 실시할 때 일부 변동이 있었지만 그리 크진 않았다. 신의 안배는 한 측면이고 생명이 이것을 선택하는지 역시 보아야 했기 때문이다.
지리적 환경과 각종의 세밀한 배치를 다 했고, 또 누가 와서 돈황 지리 문화의 분위기를 충실히 하고, 어느 곳으로 왕래하는 상인들과 인물들이 이곳에 신앙을 가지고 올 것인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절벽에 동원할 인원과 방식(굴착, 조소, 회화 등등) 및 얼마나 많은 조대를 걸쳐 천년에 이르는 여정을 지속할 것인지 등등. 이런 것들을 상세히 배치해야 했다.
만약 위진(魏晉) 남북조(南北朝)에서 원명(元明)시기에 이르기까지 부동한 조대가 부동한 문화 내포를 가지고 있다면 다시 말해 부동한 신이 인류에게 가져다주거나 펼쳐준 표현과 내포, 의상에서 건축 등 각종 측면을 모두 짊어져야 한다. 그러면 돈황 막고굴은 마치 진열관과 같은데 (주로) 각 조대의 사람들과 신앙에 관련된 실물 표현을 진열하는 것과 같다.
그럼 막고굴을 관리하는 신은 일반적인 신이어서는 안 되고 반드시 매우 크고 거대한 자비와 포용의 상태를 지녀야만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천년의 축적을 전혀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부동한 조대마다 문화 내포와 생명 상태에 많은 차이가 있고 신이 미래에 남겨줄 요소 역시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만약 홍대(洪大)한 포용과 자비가 없다면 이런 부동한 신들의 요소가 사람의 손을 통해 부동한 시기에 함께 진열될 수 있는 것을 허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울러 또 반드시 이곳이 파괴되거나 침식당하지 않도록 보증해야 한다. 적어도 창세주께서 인간 세상에 대법을 널리 전하실 때 사람들이 이렇게 남겨 내려온 소상(塑像)과 회화 속에서 전통을 되찾아 오랜 먼지에 싸인 양지(良知)와 선념(善念)을 불러일으켜 이를 통해 진정으로 법을 얻을 수 있게 해야 한다.
대한(大漢) 왕조는 돈황이 동서방 문화의 모임과 융합이 되는 시작이었다. 양진(兩晉) 교체 시기인 오호십육국 시대의 사회혼란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진리에 대한 추구와 동경을 격발시켰다. 때문에 중원과 북방 일대가 혼란할 때에도 막고굴은 천 년간 굴착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던 것이다.
다시 말해 이 모든 것은 신이 의도적으로 배치해 질서 있게 걸어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신이 사람을 만들었으니 사람이 보답하기 위해 신상(神像)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사실 신상을 만든 사람은 아마 많은 내원이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가 어떻게 그렇게 크고 아름다운 신상을 만들 수 있겠는가? 지금 사람들이 막고굴의 채색 조소를 보면 신상의 정교한 아름다움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감탄하고 이곳을 떠나려 하지 않는가. 어떤 연구원은 이처럼 생활 조건이 매우 간고한 지방에서 반세기 넘게 머문 이도 있었다. 무엇 때문인가? 바로 채색 조소의 힘을 느꼈기 때문이다. 한번은 그 노인이 인터뷰를 할 때 이렇게 말했다.
“(대체적인 뜻) 저 채색 조소를 보세요. 그의 눈썹, 뺨, 입술이 미소 짓고 있지 않습니까?(그림6)”
다시 말해 신의 안배하에 세상에 내려온 생명이 신이 부여한 정밀한 기교로 생동감 넘치는 각종 신의 표현을 그리거나 조소할 때, 사람 마음이 곧 이곳에서 귀의하게 된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을 《내 마음의 귀의처 돈황(我心歸處是敦煌)》이라 지었다. 이것이 대표적이다.
돈황석굴에 관련된 모든 문헌에서 만든 사람에 대한 기록이 아주 드물다. 본문에서는 이 기회에 돈황에 처음으로 석굴을 판 일부 인물들과 당시 장면을 돌이켜 본다.
여기서 그 사람의 이름을 굴명(窟鳴)이라 하자. 이 사람은 천상에서 신을 만드는(造神) 신 옆에 있던 시자(侍子)였다. 신을 만드는 신을 말하면 이런 신의 층차는 일반 신보다 매우 높다. 만일 일정한 층에서 어느 신에 문제가 나타나면 이 신은 여기에 머물 수 없기 때문이며 층차를 떨어뜨려야 한다. 그러면 이 층차에서 한 신이 빠져도 안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법의 기제(機制)는 이런 신을 만드는 신더러 만들게 하여 그 층차 신의 공백을 메운다. (‘모친’ 신 또는 그냥 ‘모친’이라 부를 수 있다)
당시 그 층차의 뭇신(衆神)들은 “창세주께서 장차 인간 세상에 내려가 우주의 법을 바로잡으실 것”이란 소식을 다 알고 있었다.
그 ‘모친 신’은 자기 대신 시자를 파견해 내려가게 했다. 내려가는 과정 어느 층차에서 그는 인연관계 때문에 막고굴을 굴착하는 사람들의 행렬에 참여하게 되었다.
물론 이것은 형상적인 비유이며 굴착자를 말하자면 누가 굴착하는지 어느 시간에 신이 부여한 어느 조대의 문화 배경과 내포를 펼쳐내는지 등등이 모두 일찍이 신에 의해 배치된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신이 아래로 내려와 사람 몸을 이용해 이 비할 바 없이 신성한 일을 완수한다. 이 과정 중에서 기타 신들이 건축자에게 지혜와 보조적인 측면을 부여한다. (건축자의 의식주 및 도구 등)
그는 한때 모친 신 옆에 있었던 시자였기 때문에 많은 지혜를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신이 그가 때가 되면 굴을 파는 첫번째 대열의 동굴에 참여하도록 배치했다(수선굴修禪窟). 왜냐하면 막고굴에 신불(神佛)을 펼쳐내는 근본 목적은 창세주께서 말법시기에 대법을 전하는데 사용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은 굴명을 유소씨(有巢氏) 시대에 사람으로 전생하도록 배치했다. 이 시대에 그는 신이 세상에 내려오는 반인반신(半人半神)의 상태를 경험해 유소씨가 사람들에게 집을 짓는 것을 가르치는 일을 도왔다. 당시 사람들은 생활 조건이 누추하고 환경이 열악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과정에 어려움이 아주 많았다. 당시 사람들 한 곳에 모여 살지 않았고 여러 다른 지방의 지형 재질 기후 등이 다르고 게다가 집을 짓는 방식도 각자 달랐다.
또 당시에는 사람들이 야만적이라 본래 그는 사람들에게 유익한 일을 하려고 했으나 사람들은 처음에 인정하지 않았고 밖에서 노숙하는 게 좋다고 느꼈다. 심지어 무력을 동원하여 위협하기도 했다. 다시 말해 이런 것이 모두 쉽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의 문명화 과정을 가속화하기 위해 당시 사람들의 접수 능력에 근거하여 신적(神跡)을 펼쳐냈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거나 심지어 일부 진실한 ‘장면’을 만들어 내거나 혹은 일부 문명 정도가 그들보다 높은 사람을 만나 그들로 하여금 신의 자비와 고심(苦心)을 알게끔 했다.
상고 시대 역사를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은 역사 기록이나 출토 문물에 근거해 매우 기괴한 현상을 발견한다. 가령 사람들이 집을 지을 줄 아는 때부터 불을 사용할 줄 알 때까지 길고 긴 역사 시기를 거쳤는데 어떻게 그럴까? 사실 역사를 펼쳐보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지 않다. 알기 쉽게 말하면 집을 지을 줄 아는 무리들과 오래전부터 불을 사용할 줄 아는 무리들은 전혀 전승 관계가 없었다. 마치 북경인과 산정동인(山頂洞人 역주: 북경 주구점 용골산에서 발견된 북경인 유적지 인근 산 정상에서 발견된 구석기 시대 유적지를 말함)과 마찬가지로 비록 거주지는 매우 근접하지만 아무런 전승 관계가 없는 것과 같다.
그때 사람들은 집을 지을 줄 알고 난 후 얼마 안 되어 바로 불을 사용할 줄 알았다. 왜냐하면 상천(上天)이 뇌신(雷神)을 배치해 나무를 문질러 불을 붙이게 하거나 아니면 지하에 매장된 많은 석탄이 쉽게 불이 붙는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다시 말해 하늘에서 사람들에게 안배한 불을 인식하는 방법에도 많은 종류가 있다. 당시 사람들의 수명은 비교적 짧아서 질병과 환경의 영향으로 한 종족이 오랜 기간 발전해나가기 어려웠다.
한 종족이 사라진 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또 다른 종족이 생긴다. 또한 사람은 윤회하므로 이렇게 하여 많은 사람들은 이전의 생활 경험으로 새로운 종족의 발전 노정이 조금 빨라지게 된다. 또 신이 의도적으로 사람들에게 성인(聖人)이 사람들을 위해 한 일이라고 기억하게 하거나 심지어 나중 사람들이 내막을 잘 모르도록 일을 혼란하게 만들었고 더 이후의 사람들은 그 일체를 이야기나 전설로 삼아서 진정으로 인지하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이전 글에서 고고학과 각종 역사서적 및 전설에는 모두 국한성이 있고 심지어 사건의 진상에 대해 왜곡된 서술과 이해가 있다. 만약 사람들이 반본귀진(返本歸真)의 길을 걸을 때 수행인의 능력으로 본다면 그럼 진실하고 상세한 상황을 볼 수 있다. 물론 그것도 층차와 심성(心性)의 상태에 따라 다르다. 다시 말해 ‘수행’도 마찬가지로 우리가 역사를 정확히 인식하는 일종 방식이고 길이다.
굴명은 수인씨 시대에 사람으로 전생했고 당시에 또 창세주를 뵈었다. 창세주께서는 그에게 인간세상에서 중요한 한가지 사명을 명시해주셨다. 바로 선(禪)을 닦는 동굴을 만들어 후세인들에게 길을 닦아주는 것이다. 그는 심지어 태산에 올라간 적도 있으며 그곳에서 상고 시기 일부 현명한 왕들을 만났고 장래 창세주께서 친히 개창하실 신전문명(神傳文明)의 중요한 의미가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되었다.
헌원황제(軒轅黃帝) 시기에 그는 헌원황제를 도와 치우(蚩尤)와 싸웠으며 나중에 황제의 한 아들을 따라 북쪽으로 가서 유목민족 중에서 전전했다.
하(夏)나라 초기에 하계(夏啟 우임금의 아들로 하나라를 개국한 시조)를 따라 왕조를 세웠다. 최초의 정권의 형식이었기 때문에 아주 많은 힘을 기울여야 했다. 나중에 상나라 탕 임금이 폭군 걸왕을 정벌하는 과정에는 탕의 기거를 돌보았다.
동주(東周) 시기 그는 한 대장(大將)으로 전생했고 나중에는 인도, 네팔에서도 여러 번 전생했다. 그런 곳에서 그는 늘 수행인으로 전생했고 늘 산속에서 폐관 수련했다. 그래서 동굴을 파는 많은 소양과 학식을 쌓았다. 동진(東晉) 시기에 그는 인연이 닿아 막고굴로 왔고 다른 몇 명의 불교도와 함께 첫 무리의 동굴을 팠다.
당시 사람들은 부처님에 대한 신앙은 오직 수행을 위한 것으로 다른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파낸 동굴도 좀 간단했다. 수행인으로서 청정하게 입정(入定)해 수행할 수 있는 곳이면 족했고 다른 생각이 없었다. 불타에 대한 신앙은 오직 마음속의 성심과 확고함에 의지하면 되었다.
그가 동굴을 파기 시작했을 때 하늘에서 번개가 치고 우레가 울렸고 잠시 후 비가 쏟아졌다. 그때 돈황 지역은 지금에 비해 비가 비교적 많이 내렸지만 그래도 다른 습한 지역보다는 적었다. 굴명은 이것이 하늘의 은혜라고 생각했고 동시에 그를 씻어주는데 도와주는 것이라고 가장 경건한 방법 마음으로 이 동굴을 파서 예전 사명을 완성하려 했다. 이에 조금씩 동굴을 파나갔다. 이 과정에서 신도 그의 심성 상태를 보고 있었고 그도 많은 교란을 받았다. 어떤 공사 과정에는 나쁜 생명의 교란도 있었지만 이런 것들을 모두 극복했다.
굴을 다 판 후 그는 이곳에서 가주좌하며 수행했다. 나중에 창세주께서 그를 보러오셨고 아울러 그에게 몇 년이 지나면 이곳에 많은 사람들이 동굴을 파러 올 것이며 사람들이 신앙을 기울이는 곳이 될 거라고 알려주셨다.
십여 년이 지난 후 낙준(樂樽)이란 승려가 이곳에 왔다. 기연(機緣)이 성숙하자 삼위산 방향에 석양이 비칠 때 천불(千佛)이 솟아오르는 장관이 나타났다. 당시 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매우 많았으며 이곳은 참배장소가 되었다. 처음에는 여전히 참선을 위한 동굴을 파는 것이 위주였다. 이런 것들은 다음 편에 상세히 말하겠다.
굴명은 가장 초기에 석굴을 파기 시작한 사람이지만 당시에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의 그 일생은 수명도 길지 않았다. 그는 사명을 완성하고 곧 속세를 떠났다. 그의 이 생은 직접 나가서 창세주를 찾지 않았고 대신 창세주께서 맡기신 바람을 완성했으니, 바로 후세를 위한 선구자가 된 것이다. 이 자체도 일종의 법을 찾는 방식이지만 다만 겉으로 드러난 표상이 다를 뿐이다.
굴명은 나중에 수행인으로 전생했고 오대산(五臺山)에서 출가했다. 그가 다시 한 번 이곳을 운유했을 때 감개가 무량했다. 그래서 이곳에 머물며 상을 조각하는 사람들에게 부처와 보살 천국의 장면을 어떻게 묘사하는지 상세히 알려주었다. 원(元)나라 때 그는 일본에 왔으며 그곳에서 승려가 되었고 나중에 한 사찰의 주지가 되었다. 금생에 굴명은 산동에 전생났으며 이미 일찍 법을 얻었다. 지면의 제한으로 더 상세한 것은 말하지 않겠다.
주: 인터뷰-돈황연구원 연구원의 각성 과정
(http://cn.epochtimes.com/gb/20/10/23/n12496954.htm)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2631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