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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영웅인물 악비】 천고신장 악비전 (13)

남송 전신(戰神)의 충과 효

글/ 유적(柳笛)

악비는 어려서부터 정충보국의 뜻을 세웠다(에포크타임스 삽화)

송금 두 나라의 교전의 봉화는 이제 싸늘하게 식어버렸고 시비(是非)와 성패(成敗)의 은혜와 원한마저 역사의 장하(長河) 속에서 사라져버렸다. 당시의 대영웅(大英雄) 악비가 떠난 지도 이미 8백년이 넘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악가군(岳家軍)의 전투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언급하고 있고 충의(忠義)의 영웅은 여전히 사람들의 추도 속에 기려지고 있다.

왜냐하면 악비는 일찌감치 중화민족의 혼(魂)이 되었기 때문이다. 악비를 언급하면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바로 ‘악모자자(岳母刺字)’의 일화다. 악비의 모친은 아들의 등에 ‘진충보국(盡忠報國)’이란 글자를 새겨넣었고 이는 악비 평생의 이상이자 이미지가 되었다. 그는 또한 부모님의 가르침을 엄격히 지킨 지극한 효자였다.

“안으로 부모를 모시는 도리를 극진히 하지 못하면서 어찌 밖으로 군주를 사랑하는 충신이 있을 수 있겠는가?”[1]

고대에 충효(忠孝)는 사람들이 가장 중시하는 도덕관이었다. 악비는 집안에서 부모님께 효도하는 사람이라야만 밖에 나가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에 보답하는 의로운 인물이 될 수 있다고 여겼다.

악비는 성년이 되어 평생 말 등위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군대 막사나 전쟁터에서 지냈다. 하지만 그는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한 동시에 부모를 모시는 효성 역시 지극했다.

악비 모친이 아들의 등에 글자를 새기다(岳母刺字)[유자(柚子)/에포크타임스 삽화]

부모를 극진히 섬겨 효를 충으로 옮기다

악비의 후손들이 조상이 남긴 일들을 회고하면서 악비의 효도를 언급하기만 하면 “선신(先臣 선조인 신하. 여기서는 악비를 가리킴)께서는 천성이 지극히 효순(孝順)하셨다”[2]라 한다. 이렇게 천성과도 같은 효순은 악비가 모친을 봉양한 일화에서 완벽하게 보여준다.

악비가 군대에 들어간 초기 모친은 그가 마음 편하게 고향을 떠나 나라를 위해 종군할 수 있도록 격려했다. 당시 고향마저 전란의 위기에 처해 있어 악비는 마음을 내려놓을 수 없었고 어쩔 수 없이 처자를 남겨 모친을 봉양하게 한 후 혼자 출정했다.

나중에 하북(河北 송나라의 북방 행정구역)이 함락되자 악비는 모친과 연락이 끊겼다. 다년간 모친의 행방을 수소문하며 찾아다녔지만 도대체 행방을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모친이 인편을 통해 고향 소식을 전해왔다.

“천자를 모시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늙은 어미는 걱정하지 말거라.”[3]

그런데 편지 어디에도 자신의 근황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오로지 한마음으로 자식이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하라고 격려했다. 하지만 악비는 사람을 보내 몰래 전투지역을 지나 모친을 모셔오게 했다. 앞뒤로 모두 18차례에 걸쳐 찾아간 끝에 악비 모친은 마침내 악가군이 주둔한 악주(鄂州)로 모셔올 수 있었다.

밤낮으로 그리던 모친을 본 악비는 한편으로는 기쁘고 또 다른 한편 부끄러움을 느꼈다. 모친에게 공손히 절을 올리며 눈물을 흘렸고 아들로서 옆에서 지켜드리며 효도를 다하지 못한 부끄러움을 표현했다. 모친은 그동안 수많은 우환을 겪었기 때문인지 아들을 만난 후 온몸에 병이 생겨 음식은 물론이고 일상적인 생활조차 힘들어 돌봐줄 사람이 필요했다. 악비는 비록 군사업무에 바쁜 와중에도 매일 저녁만 되면 모친의 처소를 찾아가 직접 약을 맛보고 음식 수발을 들곤 했다.

악비는 이외에도 모친을 돌봄에 있어 아주 소소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소홀함이 전혀 없었다. 사계절 기후 변화에 따라 옷이며 그릇 등을 갈아드렸고 침실에서는 모친을 방해하지 않도록 말과 행동에 조심했다. 혹여 쉬시는 데 방해가 될까 염려했다. 또 만약 전투에 나가게 되면 반드시 남은 가족들에게 모친에 대한 봉양을 소홀히 하지 않도록 엄격히 요구했고 만에 하나 부족한 점이 발견되면 일일이 훈계하거나 처벌했다.

악왕의 초상. 청나라 때 금사(金史 금고량金古良)의 《남릉무쌍도(南陵無雙譜)》 중에서

옛날 사람들은 효(孝)를 사람이 되는 기초로 보았고 또한 모든 선(善) 중에서도 으뜸으로 보았다. 때문에 늘 최선을 다해 노인을 공경하고 효도를 다했다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악비의 마음속에서 그의 모친은 단순히 자신을 낳아준 사람일뿐만 아니라 국가의 대의(大義)를 가르쳐준 스승이었다. 때문에 악비는 어디서든 늘 모친에 대한 효를 잊지 않았고 모친의 큰 은혜에 보답하고자 했다.

약 2년의 시간이 흘러 악비가 양요(楊么)의 반란을 평정한 후 모친은 악비의 군영에서 서거했다. 당시 악비는 눈병으로 크게 고생할 때였지만 악몽과도 같은 모친의 사망에 자신의 병은 아랑곳하지 않고 목을 놓아 대성통곡했다. 사흘 밤낮을 끊임없이 울면서 모친에 대한 침통한 애도를 표현했다. 이렇게 하고 나자 악비는 얼굴이 수척해졌고 눈병이 더욱 악화되었다. 할 수 없이 하루 종일 두터운 차단막을 치고 어두운 곳에서 휴양해야만 했다.

악비는 또 조정에 글을 올려 모친에 대한 효도를 다하기 위해 3년간 관직에서 물러날 것을 요청했다. 몸이 호전되자마자 그는 고종의 답변도 기다리지 않고 큰아들 악운과 함께 모친의 영구를 고향으로 운반했다. 악주에서 강주(江州) 여산(廬山)까지 천리나 되는 먼 길이었지만 악비 부자는 질퍽거리는 도로와 뜨거운 태양에도 불구하고 맨발로 걸어서 시신을 모셨다.

보다 못한 여러 병사들이 자발적으로 악비를 대신하고자 했지만 이렇게나마 직접 모친을 모시려는 악비의 마음을 꺾진 못했다. 이렇게 아들과 함께 번갈아가며 모친의 시신을 업고 고향으로 향하는 악비를 본 사람들은 누구라도 감동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모친을 편히 안장한 후 악비는 묘 옆에 움막을 짓고 은거하며 3년 상을 지키려 했다. 하지만 나중에 전투상황이 긴급해지자 고종은 끊임없이 조서를 보내고 사람을 파견해 악비더러 다시 나와 종군하길 원했다. 악비는 부모님의 생전 가르침을 떠올리며 마침내 다시 악주의 군영으로 돌아가 북벌의 대업(大業)을 지속하기로 결정했다. 대신 그는 직접 모친의 모습을 조각한 목상(木像)을 만들어 마치 살아계실 때 했던 것처럼 매일 아침 저녁으로 문안인사를 올렸고 아들로서 마지막 효도를 다했다.

나라 위해 충의로 목숨을 바친 장군

청나라 도광 10년 《고성현상전략(古聖賢像傳略)》에 실린 악비의 초상

효도에는 최선을 다하고 나라를 위해서는 목숨을 바치라(孝當竭力,忠則盡命)는 부모님의 가르침 아래 효자 악비는 한평생 나라를 위해 보답할 뜻을 세웠다. 금나라 병사들이 세상을 어지럽히던 난세에 그가 나라를 위해 할 수 있었던 가장 직접적인 행동은 바로 군인이 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말을 타고 전장을 누비는 인생에서 그의 꿈은 북벌에 나서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고 포로로 잡힌 두 황제를 맞아들여 정강(靖康)의 치욕을 깨끗이 설욕하는 것이었다. 이 꿈을 위해 그는 평생을 고된 전투와 근심 및 고생 속에 살았고 결국 자신의 목숨마저 대가로 치러야 했다.

어떤 이들은 아마 이렇게 질문할지 모른다. 나라를 위해 정충(精忠)의 뜨거운 피를 바친 악비가 왜 고종이 12차례 금패의 재촉 때문에 군사를 되돌려 귀환하면서 눈부신 북벌의 성과를 물거품으로 만들어야 했는가? 그 대답은 바로 악비가 지극히 효성스럽고 충성스런 사람이었기에 임금에게 충성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의 선택은 단순히 황제의 명령에 따르는 복종일 뿐만 아니라 전체 국가 정세를 고려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또한 그에게 이런 충의지심(忠義之心)이 있었기 때문에 비로소 사람들의 탄복과 감탄을 더욱 자아냈던 것이다.

처음에 군사를 물리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악비는 즉각 반대 상소를 올렸다. 북벌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높으니 금나라를 물리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후 악비는 승기를 타고 직접 주선진(朱仙鎮)까지 진출했다. 하지만 조정에서는 악비의 철군으로 평화회담을 앞당기려 했다. 다른 부대에도 철군하거나 또는 현지에 주둔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12차례나 금패를 내려 악비군의 철수를 요구했다.

이런 조치는 다른 부대의 가담을 사전에 원천봉쇄한 것으로 악비 역시 이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설사 악가군 단독으로 적진 깊이 들어가 잇따른 승전보를 올릴지라도 지원부대가 오지 않으면 장기간 버틸 수 없었고 수만에 달하는 악가군의 생명마저 위험한 지경에 처할 수 있었다.

이렇게 앞에는 강력한 금군이 웅크리고 뒤에는 진회라는 간사한 재상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북벌은 성공을 눈앞에 두고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바로 하늘의 뜻이라 이를 어기기는 힘들었다. 악비는 만약 황제의 명령을 어기고 진군했을 때의 두려운 후과를 잘 알았기에 어쩔 수 없이 북벌구국의 꿈을 포기해야 했다. 하지만 악비는 현지 백성들의 안위를 고려해 특별히 5일을 머무르며 백성들의 피난을 도와주었다.

나중에 금군이 돌아와 중원을 도륙했다는 말을 듣고 악비는 침통하게 말했다.

“획득한 모든 군(郡)들이 하루아침에 다 끝났구나! 사직강산을 중흥하긴 어렵겠구나! 건곤세계(乾坤世界)를 다시 회복할 수는 없겠구나!”[4]

악비가 비록 군신간의 도리를 엄격히 준수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원칙을 버리고 무조건적으로 황제의 뜻에 영합한 것은 아니다. 여러 차례 고종이 간신들에 둘러싸여 잘못된 결정을 내리는 것을 볼 때마다 그는 개인적인 이해득실이나 영욕(榮辱)은 돌보지 않고 오직 임금을 위하여 힘껏 간언했다. 남다른 지혜와 용기로 악비는 충신으로서 마땅히 했어야 할 모든 사명을 진정으로 완수했다.

12차례 철군명령이 북벌의 전과를 물거품으로 만들다. 하경분(夏瓊芬)/에포크타임스 제작

가령 고종이 처음 즉위했을 때 여러 신하들이 천도(遷都)를 상의할 때 악비는 겨우 7품 무관이란 미천한 신분임에도 직접 상소를 올려 천도에 반대했다. 또 이 일 때문에 관직을 잃고 어디에도 의지할 곳이 없게 되었다. 송금 두 나라의 평화회담에 대해 악비는 처음부터 끝까지 강력히 반대했으며 또 황제에게도 직언했다. “금나라 사람들은 믿을 수 없고 화친에 의지할 수 없습니다!”[5] 아울러 간신 진회를 통렬히 비판해 고종이 대답할 말이 없게 했다.

평화회담이 성립된 후 고종은 주화파 간신들이 분칠한 태평에 깊이 빠져 여러 신하들에게 두루 상을 내렸다. 이때에도 악비는 고심 끝에 상소를 올려 “소신의 생각으로는 오늘의 일은 위태로울 순 있어도 편안할 순 없고 근심할 순 있어도 축하할 순 없습니다.”[6]라고 했다.

또 제4차 북벌 전에 고종이 전세가 완화되었다고 여겨 악비에게 철군하라는 비밀 지령을 내렸다. 그러나 악비는 적을 섬멸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를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의연히 ‘황명을 어기고’ 군사를 몰아 북상했다. 그 후 언성과 영창에서 큰 승리를 거두면서 직접 황룡부까지 쳐들어가려는 꿈의 실현을 눈앞에 두게 했다.

사료의 기록에 따르면 악비는 소년시절부터 강직하고 곧은 성격이라 언행에서 화복(禍福)을 꺼리지 않았다. 군국(軍國)의 대사를 앞에 두고 그가 고려한 것은 늘 대송 전체의 기반이었고 또 있다면 수많은 송나라 백성들의 안위였다. 악비는 단순히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에 보답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또 나라와 백성을 이롭게 하는 방면에서 황제에게 바른 말로 간언하기도 했다. 바로 그의 이런 충성스런 마음과 정의로운 목소리 때문에 천지신명(天地神明)이 귀감으로 여겼고 이후 역대의 제왕과 신하들이 악비에 대해 깊은 존경과 그리움을 품게 만든 것이다.

주석:

[1] 出自《鄂國金佗稡編》卷14,《乞終制劄子》。

[2] [3] 出自《鄂國金佗稡編》卷9,《行實編年六‧遺事》。

[4] 出自《三朝北盟會編》卷207:《嶽侯傳》。

[5] 出自《宋史》卷365:會金遣使將歸河南地,飛言:“金人不可信,和好不可恃,相臣謀國不臧,恐貽後世譏。”檜銜之。

[6] 出自《鄂國金佗稡編》卷14,《辭開府劄子》。

【천고신장악비전(千古神將岳飛傳)】 시리즈 문장

(에포크타임스에서 전재)

 

원문위치: http://www.epochtimes.com/gb/18/11/5/n10832096.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