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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의 거지 성인 무훈(武訓)】 숱한 고난 끝에 동냥으로 학교 설립

글/ 동흔(童欣)

【정견망】

3. 숱한 고난 끝에 동냥으로 학교 설립

알다시피 학교설립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학교 설립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정부에서 설립한 관학(官學)이고 다른 하나는 개인이 설립한 사학(私學)이다. 그런데 사학을 설립하려면 적어도 생활이 부유한 사람이라야 한다. 직업도 있고 가족들도 기본적인 생활이 보장된 후에 여윳돈을 가져다 학교를 세우는데 이것을 교육을 중시한다고 할 수 있다.

만약 그가 설립한 것이 의학(義學 역주: 학비를 받지 않거나 아주 저렴하게 받아 가난한 학생들이 배울 수 있도록 설립한 학교)이라면 더 좋은 일이며 일반 사학보다 경지가 더 높은 것이다. 하지만 무훈은 땡전 한 푼 없이 의학을 세우려 했다. 여러분 생각해보라, 과연 이런 일이 역사상 존재한 적이 있는가? 없다. 동서고금에 오직 유일할 것이다.

진정으로 고생을 낙으로 삼다

무훈은 스물한 살 때부터 위대한 목표를 세웠고 그 목표를 위해 해이하지 않고 꾸준히 실천했다. 그는 매일 시(詩)와 비슷하지만 시는 아닌 노래를 부르면서 가장 큰 고생과 가장 큰 고통을 겪었다. 다음은 그가 즐겨 부른 노래이다.

나는 구걸로 돈을 모아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의학을 세우려하네

我乞討,我積錢,
修個義學爲貧寒。

그는 비록 배운 것은 없었지만 이런 식으로 시라기보다는 입에서 나오는 그대로 순구류(順口溜)를 만들어 매일매일 즐겁게 불렀다.

그가 구걸로 돈을 모아 의학을 세우려 했을 때 당시 사람들은 그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한마디로 “거지 주제에 의학을 세운다니 미친놈의 잠꼬대”라고 여겼다. 하지만 무훈은 자신이 의학을 창설할 생각을 갖고 있음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가는 곳마다 늘 이 이야기를 꺼냈고 노래를 부르면 듣는 사람들은 다 알 수 있었다.

“땡전 한 푼 없는 거지 주제에 의학을 설립한다니 이는 미친놈의 잠꼬대다! 이건 정신병자가 아닌가!”라고들 생각했다. 당시에 그가 학교를 설립할 수 있다고 믿은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무훈은 이때부터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고 진정으로 고생을 낙(樂)으로 삼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매일 매일 즐거운 마음으로 언제 어디서나 일을 하든 휴식을 하든 늘 즐겁게 이런 노래를 불렀다. 시 같지만 시는 아니고 노래 같지만 노래도 아닌 그저 자신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불렀다.

가사 내용은 전부 학교 설립에 관한 것으로 그의 순구류에는 늘 ‘의학(義學)’이란 두 글자가 들어 있었다. 누가 어떤 문제를 묻거나 또는 어떤 일을 말하든 그의 말 속에는 언제나 이 두 글자 들어 있었다. 마치 이 말을 하지 않으면 정신병에라도 걸리는 것처럼 늘 의학을 말했다.

여기서 우리도 무훈을 따라서 순구류를 한번 만들어보자.

매일 매일 즐거운 마음으로 일마다 생각마다 노래하네.
일하든 휴식하든 언제나 즐거이 노래 부르네.
시도 아니고 노래도 아니지만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생생한 목소리로
내용은 전부 의학 설립!

每天開開心心,事事念念有詞。
無論勞作休息,都在愉快歌唱。
似詩非詩,似歌非歌,
發自心底,有聲有色,
所有內容,興辦義學!

그러자 사람들은 무훈을 ‘의학증(義學症)’이라고 불렀다. 즉 이 사람이 정신병에 걸렸는데 비정상적으로 언제나 의학을 말한다 증상이라는 뜻이다. 그는 의학을 위해서라면 아무리 큰 고생을 겪어도 아주 즐거웠기 때문에 진정으로 고생을 낙으로 삼을 수 있었다.

사실 인생에서 고생을 낙으로 삼는 일은 아주 중요한데 가장 먼저 고생을 겪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경지인데 바로 “마음고생과 몸 고생”을 겪는 것이다. 이는 하늘이 당신을 완벽하게 만들어주려는 것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높은 경지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고생을 낙으로 삼는(以苦爲樂)” 것이다. 이는 억지로 참는 게 아니다. 남들이 나를 욕하지만 억지로 참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데, 속으로 화가 나지만 말을 하지 않는 것을 가리켜 억지로 참음이라고 한다. 이런 참음은 언젠가는 참지 못하고 한바탕 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진정하게 고생을 낙으로 삼음은 고생을 겪을 뿐만 아니라 마음이 즐거워야 한다. 때문에 우리가 성현(聖賢)이라 부르는 굴원, 이백, 두보 등을 보면 그들의 생활은 물질적으로나 현실 문제에서 고생을 겪었을지 몰라도 그들의 내심만은 늘 아주 행복했다.

모두들 무훈이 부른 노래가 얼마나 확고한지 보시라

머슴살이 하며 남에게 속으니
걸식하며 자신을 따르는 것만 못하다네
내가 걸식한다고만 보지 마시오
조만간 의학을 꼭 세우리니

扛活受人欺,
不如討飯隨自己,
別看我討飯,
早晚修個義學院。

그의 마음속에 든 것이 전부 의학뿐이기 때문에 말하는 것도 당연히 다 이것뿐이었다.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보고 정신병자의 잠꼬대로 보았다.

최초로 모은 자금

그렇다면 무훈의 최초 자금은 어디에서 왔을까? 아마 대부분 짐작조차 하지 못할 텐데 머리카락을 팔아 모은 돈이었다. 거지다보니 수중에 가진 거라곤 없었고 팔 수 있는 것은 오직 머리카락뿐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머리카락을 한 번에 다 팔진 않았고 일부는 남겨두었다. 즉 이쪽은 깎고 저쪽은 남겨두었는데 의학 설립을 위해서라면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여러분 상상해보라, 머리카락을 한쪽만 깎고 다른 쪽은 남겨두었으니 보기에 좋을 리가 있겠는가? 이에 그는 어릿광대(小丑)처럼 분장하고 구걸할 때도 자신을 광대처럼 여겼다.

이쪽은 깎고 저쪽은 남기니
의학 설립 위해서라면 고민하지 않네
이쪽은 남기고 저쪽은 깎으니
의학 설립은 어렵지 않네

這邊剃, 那邊留,
修個義學不犯愁。
這邊留, 那邊剃,
修個義學不費力!

그는 의학을 세우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외모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참기름 발라 반짝반짝 문지르니
음식 때문도 아니오 내가 쓸 것도 아니니
모두를 위한 의학을 세우려하네!

擦上香油亮嚓嚓,
不爲吃,不爲花,
修個義學爲大家!

때문에 아무리 고생스럽고 더럽거나 피곤한 일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했다.

똥 푸기 잡초 제거
나귀 대신 찾아오네
밤일도 상관없고
돈이 많고 적음도 따지지 않네

出糞,鋤草,
拉驢子來找,
管黑不管了,
不論錢多少。

무훈은 일을 할 때 피로한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나귀가 하는 일조차 마다하지 않았다. 이렇게 더럽고 힘들며 거친 일을 다 했는데 밤낮을 가리지 않았고 돈이 많건 적건 따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오직 학교설립을 위해서였다. 아마 일반인이 이렇게 일을 하면 다른 사람들이 모두 바보 또는 정신병자라고 했을 것이다.

돈을 주면 밭을 갈아요
의학 설립 어렵지 않네
나귀 되고 소가 되니
의학 설립에 걱정 없다네

給我錢,我犁田,
修個義學不費難。
又當騾子又當牛,
修個義學不犯愁。

그는 이처럼 마음속에 거리낌 없이 모두 다 말했다. 또 나귀나 소처럼 일을 하고 아무리 고생스러워도 의학을 설립할 생각을 하면 힘들지 않았다. 그래서 “이 사람은 정신병”이란 말을 들었다. 늘 의학을 말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의학증(義學症)이라 불렀다. 의학에 미친 정신병자란 뜻이다.

어느 시대나 남을 돕기보다는 공격하거나 조롱하는 사람들이 늘 있게 마련이다. 사람들은 그에게 중병에 걸렸다고 했지만 무훈은 이런 것들을 이해하지 못했고 자신도 이렇게 인정했다.

의학증 화를 내지 않네
사람을 보면 공경히 예를 올리네
돈을 주면 목숨을 살리니
의학설립은 만년에도 흔들리지 않아라

義學症,沒火性,
見了人,把禮敬,
賞了錢,活了命,
修個義學萬年不能動。

당신이 나를 어떻게 말해도 좋고 정신병자라고 해도 좋고 바보라 해도 좋지만 어쨌든 나는 의학을 창립하려 한다는 것이다!

첫해에 모은 돈을 전부 사기 당해

하지만 무훈이 첫해에 모은 돈은 매형에게 사기당해 돈을 전부 날렸다. 이에 화가 난 그는 밥도 먹지 못했고 입에서는 흰 거품을 토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난 후 생각을 고쳐먹기 시작했다.

본래 빈털터리였던 그가 1년간 온갖 고생 끝에 어렵게 돈을 모았는데 이 돈을 전부 사기당한 것이다. 얻기 전에는 얻으려 노심초사하고 얻은 후에는 잃을까봐 걱정한다는 말이 있다. 일반인이라면 돈이 있어도 걱정이요 돈이 많아도 걱정인 법이다.

돈이란 본래 몸 밖의 물건이라 누가 이 이치를 알 수 있다면 이게 바로 흉금이고 경지가 제고된 것이다. 그는 이렇게 생각을 바꾼 후로는 아무리 많은 돈을 잃어도 더 이상 거품을 토하지 않게 되었다. 돈이 없으면 또 구걸하면 되는데 무슨 상관인가, 나는 원래 아무것도 없었다. 매형에게 사기당한 것도 생각을 고쳐먹자 더는 화가 나지 않았다.

그는 선악(善惡)에는 각기 보응이 따름을 믿었다. 사람들이 처음 만나면 “당신의 성이 어떻게 되십니까?”라고 묻는다. 그러면 상대방은 “저는 악(岳)씨로 악비(岳飛)의 악입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제 성은 진(秦)으로 진회(秦檜)라고 할 때의 진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악비는 위대한 충신이었지만 사후 20년이 지난 후에야 명예를 회복했다. 하지만 진회는 당시 사람들이 뭐라고 불렀는지 아는가? 바로 성상(聖相)이라 불렸다. 성스러운 재상이란 뜻이다. 이 말을 과연 믿을 수 있는가? 역사적으로 관중(管仲)이나 안영(晏嬰) 등 다른 재상들도 모두 대단하지만 성상이란 이런 호칭을 들은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당시 남송 사람들은 진회를 성상이라 불렀다. 하지만 그 시기의 역사가 지나간 후 진상이 드러났다. 청산은 충신의 뼈를 묻는 것을 행운으로 여기지만 무고한 백철(白鐵)은 간신의 상으로 주조되었다(青山有幸埋忠骨,白鐵無辜鑄佞臣)는 말이 있다. 악비와 같은 충신을 묻으면 그것만으로도 자랑이 되지만 아무리 좋은 금속이라도 진회와 같은 간신을 만드는데 사용되면 무고하게 욕을 먹는다는 뜻이다. 때문에 선악에는 반드시 응보가 따르고 악인이 일시적으로 잘나갈 수는 있지만 끝까지 잘되는 악당은 없는 법이다.

하늘을 공경하고 분수를 알아 진정으로 참아내다

무훈은 하늘을 공경했고 진정으로 크게 참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대인지심(大忍之心)에 대해서는 역사상 아주 많은 일화들이 있다. 가령 한나라의 개국공신 한신(韓信)은 시장에서 남의 가랑이 밑을 기어나가는 굴욕을 참아냈다. 한신은 이렇게 아무 잘못도 없이 길거리에서 건달을 만나 그의 사타구니 아래로 기어나가는 굴욕을 당했다. 하지만 한신은 바로 이런 치욕을 참아낼 수 있었기 때문에 성현(聖賢)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만약 그자의 목을 자르고 관아에 잡혀가 목숨으로 갚았더라면 훗날 한나라의 기초를 다진 대장군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대의 많은 성현들은 모두 한신과 같은 이런 대인지심을 지녔다. 때문에 무훈 역시 밥을 빌고 동냥하면서 그를 욕하거나 쫓아내는 사람이 다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동냥을 주지 않아도 나는 원망하지 않네
선량한 사람 절로 있어 밥을 준다네
어르신 아저씨 화내지 마세요
당신이 화내지 않으면
그때 제가 나갈께요

不給俺,俺不怨,
自有善人管俺飯。
大爺大叔別生氣,
你幾時不生氣,
俺幾時就出去。

당신이 보라, 이 얼마나 담담한가? 그는 먹을 게 없어도 조급해하지 않았다. 늘 밥을 주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니 당신이 내게 주지 않아도 또 다른 선량한 사람이 있어 밥을 준다는 것이다. 이는 바로 하늘을 공경하고 명(命)을 아는 것으로 다시 말해 선량함이다.

무훈이 동냥할 때 가령 누가 찐빵을 주면 학교 설립을 위해 자신이 먹는 대신 다른 노동자나 돈을 가진 거지에게 팔았다. 이렇게 팔아서 돈을 버는 대신 그는 무엇을 먹었는가? 그는 풀뿌리를 먹었다. 여러분은 ‘채근담(菜根譚)’이란 책을 들어보았을 텐데 노인이 후손들에게 남겨주는 일종의 가훈이다. 그럼 왜 제목을 ‘채근담’이라 지었을까? 그 속에 바로 이런 구절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풀뿌리를 먹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다.(咬得菜根者則百事可爲)”

다시 말해 사람이 이렇게 쓰고 맛없는 풀뿌리를 먹을 수 있다면 그는 어떤 고생이든 할 수 있다는 의미다.

사실 여기에는 아주 큰 의미가 담겨 있다. 지금 젊은 사람들더러 거친 음식을 먹으라고 하면 아마 목구멍으로 삼키지도 못할 것이다. 하지만 고생을 겪지 않고 어찌 큰 그릇이 될 수 있겠는가? 무훈은 의학을 세우기 위해 조금이라도 좋은 물건이 있으면 자신이 먹지 않았다. 대신 풀뿌리를 먹거나 부패해서 곰팡이가 핀 그런 음식들만 먹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잡다한 것을 먹으며 밥으로 삼네
돈을 아껴 의학을 설립하려네
잘 먹는 것이 좋다 할 수 없으니
의학 설립만이 좋은 일이라네

吃雜物,能當飯,
省錢修個義學院。
吃的好,不算好,
修個義學才算好。

당신이라면 이렇게 어렵게 동냥한 것을 돈으로 바꿔 의학을 설립할 수 있겠는가? 남들도 다 정신병이라고 할 것이다.

무훈은 또 남들이 아무도 하려고 하지 않는 가장 힘들고 더러운 일을 골라서 했다. 가령 한여름 뙤약볕 아래 곡식을 수확하거나 똥을 푸는 일 등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도맡아 했다. 이 모든 것은 물론 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것이다.

29세가 되자 그는 약 10년간 모은 돈으로 45무(畝)의 밭을 샀다. 그런데 지대가 낮아서 소금피해를 입기 쉬운 곳이었다. 그가 이런 불리한 조건의 땅을 산 이유는 이런 토지는 땅값이 쌌기 때문이다.

오직 학교를 세울 수만 있다면
소금모래라도 두렵지 않네
염분이 줄고 모래를 골라내면
3년 후에는 염분모래 사라지네
오직 학교를 세울 수만 있다면
움푹 꺼진 땅이라도 두렵지 않네
물이야 흘려보내고 흙을 쌓으면
3년 후에는 구덩이도 평평해지네

只要該我義學發,
買地不怕買堿沙;
堿也退,沙也刮,
三年以後無堿沙。
只要該我義學發,
要地不怕要大坑;
水也流,土也壅,
三年以後平了坑。

보라, 이 얼마나 낙천적인가! 그는 도량이 커서 움푹 꺼진 땅을 샀지만 걱정이라곤 전혀 없다. 그는 하늘은 선량한 사람을 돕는다는 말을 믿었기에 하늘이 자신을 대신해서 반드시 이 구덩이를 메꿔줄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이재민을 구휼하고 가난한 사람을 돕다

무훈은 아주 선량했다. 그에게 돈이 생긴 후 단순히 학교만 설립한 게 아니었다. 그가 38세 되던 해 산동 지방에 큰 가뭄이 들어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었다. 그는 자신이 모은 돈으로 40포대의 수수를 사서 많은 이재민들을 구휼했다. 하지만 그의 친형이 직업도 없으면서 돈을 빌려달라고 하자 단 한 푼도 빌려주지 않았다. 그는 이 돈은 전부 학교를 세우기 위한 것이지 우리 집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전부 학교 돈이라는 것이다. 그는 또 이렇게 노래했다.

가족도 돌보지 않고 친구도 돌보지 않으며
나는 여러 곳에 학교를 세우리라

不顧親,不顧故,
義學我修好幾處。

이처럼 무훈은 이재민을 구휼하는 일에는 과감하게 돈을 썼지만 조카와 형이 먹을 게 없다면서 돈을 요구할 때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런데 무훈의 고향 마을에 노파와 두 며느리 등 여자들만 사는 집에는 10무의 땅을 주었다. 옛날에는 집안에 일하는 남자가 없으면 생활이 아주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은 좋아요 이 사람은 좋아요
그녀에게 10무를 줘도 불만이 없어요.
이 사람은 효부에요 이 사람은 효부에요
노인을 봉양하도록 10무를 줬어요.

這人好,這人好,
給她十畝還嫌少。
這人孝,這人孝,
給她十畝爲養老。

이런 시가 있다.

복을 부르는 노래는
탐하지 않아도 여유가 있고
싸우지 않아도 올라가고
구하지 않아도 복은 절로 오네
소중한 것은 덕을 온전히 모으는 것

福歌
不貪卻有餘,
不爭反上去。
不求福自來,
惜者德全聚。

무훈은 아주 많은 고생을 겪으며 힘든 삶을 살았다. 낮에는 이런 육체적인 일을 했고 밤에도 쉬지 않았다. 그는 거처가 정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남의 집에서 잠을 자다보디 부엌이든 방앗간이든 가리지 않고 어디서든 잠을 잤다. 당연히 베개며 이불 따위는 전혀 없었다. 방앗간 같은 곳에서 자다보면 아무래도 모기에 물리기 일쑤였지만 그렇다고 모기향이나 모기장도 없었다. 또 낡은 사찰에서 잠을 자다보면 바람을 피할 수 없었다. 그는 이런 곳에서 살아야 했다. 아울러 매일 밤마다 노끈을 꼬는 일을 했다.

그는 이렇게 하루 종일 늦게까지 일했고 따로 쉬는 시간도 없었다. 하지만 의학설립이란 꿈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아주 즐거워했다. 여기 소개한 노래들은 무훈의 원래 가사인데 그가 살아 있을 때 만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의 자신감과 확고부동함, 선량함,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 당시에도 큰 맷돌을 돌리는 것처럼 힘든 일은 보통 사람 대신 가축을 시켰다. 하지만 그는 힘들고 번거로워도 본인이 직접 일을 했다. 한여름 뙤약볕아래 땀을 비처럼 흘리면서 일을 했고 변소를 치우는 더럽고 냄새나는 일도 했다. 남들이 싫어하는 그 어떤 일이라도 무훈이 와서 했다.

불교에 이런 일화가 하나 있다. 석가모니가 당시 대변을 푸던 사람에게 설법한 이야기다. 어느 곳에 똥을 푸는 사람이 있었는데 아이들이 그를 보고는 돌을 던졌다. 마침 석가모니가 이 장면을 보고는 아이들을 불러다가 설법했다. 아이들도 석가모니 부처님을 알았기 때문에 모두들 부처님 말씀을 들으려 했다. 그런데 이때 석가모니는 뜻밖에도 똥 푸는 사람을 존중해 자기 옆 자리에 앉게 했다.

고대 인도에는 카스트 제도가 아주 엄격했고 특히 똥을 푸는 사람은 가장 천한 사람으로 무시당했다. 석가모니는 그에게 말했다. “내가 하는 일이 당신의 일과 같습니다.” 아이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석가모니는 이렇게 위대한 분인데 어째서 똥 푸는 일과 같다고 하시는 걸까?

그러자 석가모니가 말했다.

“그대가 하는 일이 물질의 쓰레기를 치우는 것이라면 내가 하는 것은 정신의 쓰레기를 치우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하는 일은 같은 것입니다.”

아이들이 이 모습을 보고는 모두들 똥 푸는 사람에게 사과했다.

이 일화에서 부처님은 아이들에게 다른 사람을 존중해야 함을 가르쳐주었다. 여러분 생각해보라, 사람이 생명을 존중할 줄 모른다면 어찌 행복해질 수 있겠는가? 당연히 똥 푸는 사람에 대해서도 마땅히 감사하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 만약 그가 없다면 어떻게 하는가? 당신은 그가 냄새나고 더럽다고 여기지만 그 더러운 똥과 오줌은 어디에서 왔는가? 바로 당신을 포함한 가족들이 만든 것이지 그가 가져온 것이 아니지 않은가?

석가모니가 아이들에게 들려준 것은 생명을 존중하라는 것이다. 아이들이 똥 푸는 사람을 존중할 수 있다면 집에 가서 자기 모친을 존중하고 더욱 고맙게 여길 것이다. 때문에 불타야말로 진실로 위대한 영혼의 지도자이다.

똥 푸는 이야기가 나온 김에 말하자면 사실 무훈은 이런 일도 했다. 똥을 푸고 말리는 일이 얼마나 더럽고 냄새가 나는가? 하지만 그는 이런 일도 다 했고 돈을 적게 주든 많이 주든 따지지 않았다.

또 연극공연이 있으면 광대 역을 맡거나 때로는 다른 단역들도 맡았다. 가령 송곳을 몸에 찌르거나 칼로 머리를 치거나 큰 솥(大鼎)을 들어올리는 등의 위험한 역할을 맡았고 심지어 뱀이나 전갈 기왓장을 삼키기도 했다. 물구나무를 서라고 하면 섰고 아이들이 목말을 태워달라고 하면 태워주고 돈을 받았다. 때로는 매를 맞기도 했는데 한 대 맞을 때마다 돈을 받았다. 이렇게 번 돈이 조금씩 쌓여나갔다.

양거인(楊舉人)에게 도움을 청하다

이렇게 20여 년이 흐르자 무훈은 동냥을 통해 꽤 많은 돈을 모았다. 그럼 이렇게 모은 돈을 어떻게 보관했을까? 거지에게 보관할 장소가 있을 리 없었다. 다행히 고향에 양거인(楊舉人)이라 불리던 양수방(楊樹芳)이란 인물이 있었다. 그는 어진 덕을 갖춘 사람이었다. 그가 선량한 사람임을 알게 된 무훈은 그를 찾아가 자신의 돈을 맡아달라고 부탁하고자 했다.

무훈은 무작정 그의 집을 찾아가 대문 앞에 꿇어앉아서는 양 거인을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옛날에 거인(擧人)은 현령(縣令)을 만날 때조차 무릎을 꿇지 않을 정도로 신분이 상당히 높았기 때문에 일반 백성이 함부로 만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게다가 다 헤진 옷을 입은 거지가 찾아와 주인을 만나게 해달라고 했으니 그 집 하인들이 아예 상대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훈은 포기하지 않고 매일 매일 찾아가서 대문 앞에 무릎을 꿇고 기다렸다. 또 집안에서 실을 짜거나 새끼를 꼬는 등의 일이 있으면 나서서 도와주곤 했다. 하지만 거인을 만나게 해주지는 않았다. 이튿날에도 다시 찾아와 무릎을 꿇었고 이렇게 7~8일이 지나자 문지기는 정신병자가 자기 주인을 괴롭히려는 것으로 오해할 정도였다.

이렇게 꿇어 앉아 있을 때의 일이다. 한번은 새가 날아가다 무훈의 몸에 똥을 쌌지만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또 한 번은 비가 내려 지붕에서 떨어진 기왓장이 머리를 때렸지만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는 이렇게 노래했다.

새가 똥을 싸도 나는 상관 없어요
학교를 세울 수만 있다면 좋아요
머리가 깨져도 화를 내지 않아요
학교 설립은 전부 내게 달렸어요

鳥拉屎,我不理;
修個義學才歡喜。
打破頭,出出火,
修個義學全在我。

마침 손님을 배웅하러 밖에 나왔던 양 거인이 머리가 깨져도 여전히 꿇어앉아 있는 그를 보고는 큰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마음이 이렇게 진실한 것을 보니 진정으로 의학을 설립하려는 것이다. 내 기필코 당신의 돈을 보관해주고 아울러 평생동안 당신의 후견인이 될 것이다.”

나중에 양거인은 여러 사람을 모아 그가 의학을 설립하도록 도와주거나 의학을 관리하는 일을 돕게 했다. 돈이 어느 정도 모여 의학을 세울 수 있게 되자 양 거인은 그에게 이렇게 권했다.

“불효에는 3가지가 있으니 후손이 없는 것이 가장 크다네. 자네는 먼저 아이를 낳아줄 여자부터 들이고 나서 의학을 설립하세나.”

하지만 무훈은 단호하게 거부의 뜻을 표현했다.

혼인하지 않아요 자식도 낫지 않아요
그래야만 의학 설립에 사심(私心)이 없어져요

不娶妻,不生子,
修個義學才無私。

그는 왜 이렇게 했을까? 자기 자신은 이런 고생을 겪을 수 있지만 장가를 갈 경우 생기는 처자식 역시 자신과 같은 이런 고생을 겪게 해서는 안 될 일이기 때문이다. 이에 그는 학교설립를 위해 인생의 아름다운 동경마저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남을 위해서라면 또 의학을 위해서라면 그는 무엇이든 다 버릴 수 있었다.

여기서 나는 여러분더러 무훈처럼 장가도 가지 말고 아이도 낳지 말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무훈의 정신을 배워야 하는데 바로 남을 위하는 사심 없는 마음이 그것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347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