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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영웅인물 악비】 천고신장 악비전 (12)

일대명장의 천고기원(千古奇冤)

글/ 유적(柳笛)

악비는 어려서부터 정충보국의 뜻을 세웠다(에포크타임스 삽화)

‘정충보국(精忠報國)’은 악비의 생명 깊은 곳에 새겨진 맹세이자 사명으로 이를 목격한 모든 이들을 감동시켰다. 주심관이었던 하주(何鑄)는 원래 악비를 탄핵했던 인물이지만 이때에 이르러 냉정한 시선을 거두지 않을 수 없었다. 더는 자신의 양심을 속이고 악비에게 억울한 판결을 내릴 수 없었던 것이다.

나중에 하주는 증거부족을 이유로 진회에게 악비는 무고하다고 보고했다. 또 이 사건을 계속 심리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자 진회는 뻔뻔하게 이는 “황상의 뜻이오(上意)”라고 했다. 하주가 계속해서 “제가 어찌 악비를 위해 인정을 호소하려는 것이겠습니까? 다만 지금은 강적이 다 사라지지 않았으니 무고하게 대장을 살해하면 군심(軍心)을 잃을까 우려되니 이는 국가의 장구한 계책이 아닙니다!”[1]라고 간언했다.

진회는 말문이 막히자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심복 만사설로 교체해 사건을 계속 심리하게 했다. 만사설이란 위인은 진회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악비에게 극심한 고문과 심문을 능사로 했다. 그는 허장성세로 일부러 악비를 큰소리로 질책하면서 악운, 장헌과 어떻게 모반을 꾀했는지 물었다. 동시에 악비가 과거에 썼던 시 중 “한문하재부귀(寒門何載富貴 미천한 가문에서 어찌 부귀를 실으랴)”를 가져다 진작부터 역심을 품고 있었노라고 무함했다.

“하늘에 맹세코 나는 나라를 저버린 적이 없습니다! 당신들이 나라의 사법(司法)을 장악하고 있다해도 절대 충신을 모함할 수는 없습니다! 설사 내가 저승에 가서라도 당신들과 끝까지 대질할 것이오!” 악비는 이렇게 늠름하게 이치에 근거해 강력히 따졌지만 지금 자신 앞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진회와 같은 패거리로 전혀 이치가 통하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이에 그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길게 탄식했다.

“내 이제야 비로소 이미 국적(國賊)인 진회의 손에 떨어졌음을 알았노라. 나라에 보답하려는 나의 충심이 물거품이 되었구나!”[2]

이때부터 그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고 단식으로 항의하며 영웅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켰다.

온갖 시달림 끝에 원한을 품고 죽다

만사설은 온갖 구실을 다 찾아내 죄명을 꾸며냈지만 최종적으로 전혀 설득력 없는 3가지 ‘하늘에 사무치는 큰 죄(彌天大罪)’만 찾아냈다.

첫째 장헌과 왕귀가 지닌 악비가 썼다는 모반편지는 오히려 자신들에 의해 소각되었다.

두 번째로 회서(淮西)전투에서 병력을 운용할 때 시간을 끌며 나아가지 않았다는 것이었고 세 번째는 악비가 했다는 몇 마디 반란 의도가 담겼다는 말이었다.

예를 들면 회서전투에서 패배한 후 “나라에 큰일이 났는데도 관아(황제)에서는 또 덕을 닦지 않는구나!”라고 하며 황제를 비판했다고 했다.

또 한 번은 “내가 서른두 살에 절도사가 된 것은 자고로 드문 일이다.”[3]라고 말해 송 태조가 서른에 절도사가 된 일과 비교하며 태조를 본받아 황제가 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석 달 이상 조사를 했음에도 대리시 관원들은 줄곧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하지만 악비가 투옥된 일은 남송 조야(朝野)를 진동시켰고 충의지사(忠義之士)들이 앞다퉈 상서를 올리며 악비를 구명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들은 오히려 진회 일당으로부터 잔혹한 탄압과 박해를 받았다. 당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세상을 피해 은둔해 있던 한세충(韓世忠)은 의분(義憤)에 못이겨 직접 진회를 찾아가 질의했지만 황당무계한 답변만 들어야 했다.

이번 사건이 비록 명확하진 않지만 “그 일이 아마 있었을지도 모른다(其事體莫須有)”는 것이다. 한세충은 이 말에 분노해 “막수유(莫須有)란 세 글자로 어떻게 천하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겠는가?”[4]라고 반문했다.

곧 연말이 다가왔기 때문에 진회 등 간신배들은 걱정이 많아졌다. 어떻게 해서든 악비를 죽여 논란을 잠재우고 평화회담을 성사시켜야 했다. 소흥(紹興) 11년 섣달 29일 진회는 혼자 화실(畫室)에 앉아 악비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심하고 있었다. 귤을 먹을 때도 깊이 생각에 잠겨 귤껍질을 만지작거리며 손톱으로 위에 그림을 그렸다.

그의 아내 왕(王)씨가 이 모습을 보더니 앞으로 나서서 냉소하며 말했다.

“영감은 어째서 결단하지 못하시오? 호랑이를 잡기란 쉽지만 놓아주긴 어렵습니다!”[5]

이 수다스런 부인의 음험하고 악랄한 수단은 진회를 능가했다. 그녀는 마침내 남편을 사주해 일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즉시 악비를 처단하게 했다. 그녀의 한마디 말이 악비의 명을 재촉하는 마지막 부적인 최명부(催命符)가 된 것이다. 이 말은 진회의 ‘막수유’와 마찬가지로 지난 천 년간 악명이 자자한 말이 되었다. 진회는 결국 최종 결심을 내렸고 직접 편지를 써서 대리시에 보냈다.

만사설 등은 마지막으로 악비를 심문한 후 그에게 공소장에 지장을 찍으라고 강요했다. 악비는 자신의 생명이 곧 끝날 것을 예감하고 붓을 들어 8글자 절명사(絕命詞)를 적었다. “하늘의 태양이 환히 보고 계신다, 하늘의 태양이 환히 보고 계신다(天日昭昭 天日昭昭)”

곧이어 악비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천일조조(天日昭昭)와 영원한 영웅의 혼

《악국금타졸편(鄂國金佗稡編)》과 《조야유기(朝野遺記)》에 따르면 진회는 황제의 윤허를 건너뛰고 직접 감옥에 편지를 보내 비밀리에 악비를 처형시킨 진정한 원흉이다.

반면 《건염이래습년요록(建炎以來習年要錄)》에서는 악비가 고종의 조서를 받은 후 사사(賜死)되었고 또 죽은 후 참혹하게 효수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악비의 사망 원인에 대해서는 사료마다 주장이 서로 다르다. 이중 가장 보편적인 견해는 독약인 짐주(鴆酒)를 마시고 죽었다는 것이다. 또는 감옥에서 옥졸의 구타로 늑골이 부러져서 죽었다고 한다.[6]

이유야 어찌되었든 항금(抗金)의 명장 악비는 천고의 원한을 품고 학살당했으며 이루지 못한 꿈을 품은 채 갑자기 사망했다. 곧 새해가 왔지만 천하는 더 이상 기뻐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국토는 쪼개지고 장수의 별(將星)이 떨어지자 대송(大宋) 백성들은 목 놓아 울었다!

이 억울한 옥사에 연루된 악비의 가족들은 고향에서 쫓겨나 타향으로 유배되었고 악가군의 여러 장수들 역시 험난한 운명에 처했다. 사료에 따르면 악비는 일찍이 같이 감옥에 들어간 장헌과 악운을 본 적이 있다고 한다. 두 사람은 맨살을 드러낸 채 족쇄가 채워져 온몸에 혈흔이 낭자한 모습으로 고통스레 신음하고 있었다.[7] 그 후 두 사람도 참수되었고 악비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일당천의 용맹한 두 장군이 간신이 휘두른 도살의 칼날 아래 희생양이 된 것이다. 이때 악운의 나이는 불과 22세로 한창 나이에 억울하게 죽어 보는 이들을 더욱 안타깝게 했다.

또 ‘복장(福將)’으로 불렸던 우고(牛皋)는 2차 평화회담에 불만을 품었다가 무참히 살해되었다. 소흥 17년(1147년) 상사절(上巳節 역주: 삼월 상순 첫 번째 사일巳日을 말함.) 우고는 어느 잔치에 참석했다가 뜻밖의 중독을 당해 집에 돌아온 후 사망했다. 향년 61세였다. 당시 사람들은 연회를 베푼 전사중(田師中)의 짓으로 보았는데 그는 악비를 배반한 장준(張俊)의 수하였다.

그러나 영웅의 비극적인 결말이 꼭 역사의 종결은 아니다. 악비가 임종 직전에 남긴 ‘천일조조’는 바로 그가 하늘을 향해 표현한 가장 깊고 간절한 호소였다.

악비가 사망한 후 외순(隗順)이란 선량한 옥졸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악비의 시신을 등에 업고 성을 빠져나와 구곡총사(九曲叢祠) 부근에 묻었다. 또 두 그루 귤나무를 심어 매장 장소를 표시하고는 ‘가의란 사람의 무덤(賈宜人墳)’이라고 적어 사람들의 이목을 속였다. 그는 충신양장(忠臣良將)은 언젠가 반드시 누명이 벗겨지고 간사한 악당들은 끝내 도덕의 심판을 받게 될 날이 오리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바로 그의 이런 의로운 행동 때문에 악비의 시신은 무사히 보존될 수 있었고 영령(英靈) 역시 편히 쉴 수 있었다.

악비가 주심관에게 ‘정충보국’이란 글자가 새겨진 등을 보여주다(하경분夏瓊芬/에포크타임스)

전설에 따르면 진회는 어느 날 서호(西湖)에 놀라갔다가 악비의 신령이 나타난 것을 보았고 악비가 매섭게 질타하는 소리를 들었다.

“너는 나라를 망치고 백성을 해쳤으니 내가 이미 하늘에 보고 드렸다. 천제(天帝)께서 사람을 파견해 너를 잡아갈 것이다!”

곧이어 진회는 병으로 급사했다. 나중에 왕씨가 남편을 위해 도사를 청해 법사(法事)를 하는데 도사가 저승에서 온갖 형벌을 받고 있는 진회의 모습을 보았다. 이때 지옥의 진회가 도사에게 한마디 말을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번거롭더라도 부인에게 전해주십시오, 동창에서 악비를 모살하려던 음모가 이미 드러났다고!”[8] 다시 말해 곧 왕씨에게 큰 재앙이 닥친다는 의미였다.

비록 고종이 치세한 기간에 진회는 고위직에 머물며 역사자료를 멋대로 뜯어고쳐 자신의 죄상을 덮어 감추려 했지만 그는 함께한 악인들과 함께 생전에는 물론이고 사후에 무수한 욕을 먹었다. 필기(筆記)소설 중에는 진회 등이 지옥에서 악보를 받는 참상을 기록한 것이 있고 또 악비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영웅 앞에서 영원히 참회하는 모습을 남겼으니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유취만년(遺臭萬年 더러운 이름을 영원히 남긴다는 의미)이다.

고종의 뒤를 이은 효종(孝宗) 시기에 이르러 악비는 명예가 회복되고 시호(諡號)도 무목(武穆)으로 정해졌다. 또 이후 점차적으로 역대의 군왕과 백성들 사이에서 공경 받고 추도되는 대영웅(大英雄)이 되었다.

악비의 일생을 돌이켜보면 부모를 모심에는 효도를 다했고 나라를 위해서는 충성을 다했으며 군영(軍營)에서는 기율을 엄명하게 했고 지극히 공평무사했으니 가히 전통도덕의 전범(典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고강한 무예와 뛰어난 지략으로 가는 곳마다 적을 무찔러 뛰어난 공을 여러 차례 세웠으니 남송 항금(抗金)전쟁의 제1인자라 할 수 있다. 그는 또 시와 문장에도 뛰어났고 호연지기(浩然之氣)로 가득해 문자를 통해서도 강산을 되찾으려는 거대한 포부를 드러낸 천고의 절창(絶唱)을 남겼다. 한마디로 말해 악비는 역사상 흔치 않은 문무(文武)를 겸비한 국사(國士)였다.

정충의 신장(神將) 악비는 서른아홉 짧은 인생을 통해 한편의 벽혈단심(碧血丹心 정의로운 피와 순수한 충성심)의 영웅의 역사를 기록했다.

(계속)

주석:

[1] 出自《宋史》卷380:檜不悅曰:“此上意也。”鑄曰:“鑄豈區區爲一岳飛者,強敵未滅,無故戮一大將,失士卒心,非社稷之長計。”

[2] 出自《三朝北盟會編》卷207:侯向萬俟卨、羅振曰:“對天明誓,吾無負於國家!汝等既掌正法,且不可損陷忠牙!吾到冥府,與汝等面對不休!”⋯⋯侯知眾人皆是秦檜門下,既見不容理訴,長籲一聲雲:“吾方知已落秦檜國賊之手,使吾爲國跽主,一旦都休!”道罷,合眼任其拷掠。

[3] 出自《鄂國金佗稡編》卷24。

[4] 出自《宋史》卷365:獄之將上也,韓世忠不平,詣檜詰其實,檜曰:“飛子雲與張憲書雖不明,其事體莫須有。”世忠曰:“‘莫須有’三字,何以服天下?”

[5] 出自《朝野遺記》:秦檜妻王氏素陰險,出其夫上。方岳飛獄具,一日,檜獨居畫室,食柑,玩皮以瓜劃之,若有思者。王氏窺見,笑曰:“老漢何一無決耶?捉虎易,放虎難也。”檜掣然當心,致片紙付入獄。是日,嶽王薨於棘寺。

[6] 關於岳飛死因,《三朝北盟會編》卷207載“侯中毒而死,葬於臨安菜園內”;《朝野遺記》載獄卒令岳飛沐浴,伺機將他“拉脅而卒”。

[7] 出自《三朝北盟會編》卷207:言罷,隨獄吏前行至一處,見張憲、嶽雲露頭赤體,各人杻械,渾身盡皆血染,痛苦呻吟。

[8] 出自《錢塘遺事》卷2:《東窗事發》。

【천고신장악비전(千古神將岳飛傳)】 시리즈 문장

(에포크타임스에서 전재)

 

원문위치: http://www.epochtimes.com/gb/18/10/6/n10765783.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