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신전문화 중국역사 연구팀
【정견망】
2. 오씨 (상)
(1) 유소씨(有巢氏)
《산해경》, 불경, 도장(道藏) 및 다른 고서의 기록에 따르면 원고(遠古)시기 이전 인류의 도덕이 고상하고 심령(心靈)이 순수하고 깨끗했던 시기에 인류는 신(神)과 서로 소통했다. 당시의 인류는 반인반신(半人半神)의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자유롭게 하늘을 날 수 있었고 어느 정도 신력(神力)과 신통(神通)을 지녔다. 지상에는 또 다른 많은 선금(仙禽 선계의 새)과 신수(神獸 신계의 짐승)들이 있었으며 기이하고 특이한 꽃과 과일이 넘쳐났다. 자연환경도 몹시 우아하고 아름다웠으며 인류의 생활 역시 아주 행복하고 단순해서 근심걱정이 없었고 수명도 대단히 길었다.
나중에 와서 인류의 도덕이 타락해 더 이상 순진하지 않게 변하자 인심(人心)이 각종 욕망에 오염되면서 총명하고 교활해졌다. 이렇게 인류는 서서히 자연만물과 간격이 생겨났고 신(神)에게서 점점 더 멀어졌으며 신통(神通) 역시 점차 소실되었다. 자연환경 역시 따라서 갈수록 악화되었고 인류는 자연만물을 적(敵)으로 삼기 시작했으며 서로 경계하며 상처를 주었다.
인류는 손발톱이나 이빨, 뿔, 독(毒) 등에서 모두 다른 동물만 못했다. 이런 인류가 상처 받는 것을 방지하고 갈수록 더 열악해지는 자연환경 속에서 계속 생존하도록 이때 한 분의 성인(聖人)이 세상에 내려오셨다. 그는 사람들에게 목재를 가공해 나무집을 짓도록 가르쳤고 비바람과 추위를 피하고 상처 받지 않을 수 있게 했다.
그러자 백성들은 앞을 다퉈 그를 따라 배웠으며 나무집의 보호를 거쳐 마침내 자연계 속에서 편히 쉴 수 있는 곳을 찾아내 생존위기를 해결했다. 백성들은 몹시 흥분했고 모두들 앞 다퉈 이 성인을 왕으로 떠받들었다.
이 성인이 바로 ‘유소씨(有蘇氏)’인데 ‘대소씨(大巢氏)’ 또는 ‘소황(巢皇)’이라고도 불렸다.
말이 나온 김에 상고시기 ‘씨(氏)’란 호칭에 대해 알아보자. 가장 초기에는 모두 신(神)이나 반신(半神)으로 인간 세상에 내려온 분에 대한 존칭이었고 반신(半神)의 함의가 있었다. 예를 들면 복희씨・신농씨 등이다. 인간세상에서 이들의 후대(後代)를 상응하는 ‘씨’로 부르며 전했는데 이들이 바로 가장 초기의 ‘귀족(貴族)’이었다. 나중에 다른 가족들 역시 이를 따라서 모방했고 상응하는 ‘씨’로 불렀으며 나중에 이르러 모계에서 전해진 ‘성(姓)’과 합쳐져 오늘날 사람들이 말하는 ‘성씨(姓氏)’가 처음 생겨났다.
《노사》에는 두 분의 유소씨에 관한 기록이 있다. 한 분은 인제기(因提紀), 다른 한 분은 선통기(禪通紀) 때였다. 아마 서로 다른 문명시기에 모두 일찍이 유소씨로 강생해 인류에게 마찬가지로 문명을 전수하고 비슷한 일을 했을 것이다.
《둔갑개산도(遁甲開山圖)》에는 원고시기 유소씨가 낭야(琅琊)의 석루산(石樓山 지금의 산동성 제성諸城 인근) 남쪽에서 왕이 되어 인류의 부족을 통치했다고 한다.
《통지(通志)‧삼황기(三皇紀)제1》에서는 유소씨가 인류 부족을 통치했으며 모두 1백여 대(代)를 전승했다고 했다. 아마 이 1백여 세대 모두 유소씨란 이름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모두 유소씨로 불렸을 것이다.
《박물지(博物志)‧잡설상(雜說上)》에는 유소씨 통치 시기 말년에 한 대신이 대권을 독점해 전횡을 일삼자 유소씨(유소씨의 마지막 계승자)가 그의 수중에서 권력을 빼앗으려다 분노한 대신이 정변을 일으켰다고 한다. 유소씨의 통치 시기는 이렇게 끝났다.
유소씨는 최초로 인류에게 집짓는 것을 가르쳤다. 비록 가장 원시적이고 간단한 나무집이었지만 우선 인류의 의식주행(衣食住行)이란 4대 기본 생존조건 중 하나인 주거(住)의 문제를 해결했을 뿐만 아니라 또 중화 건축문화를 개창했다. 나중에 오제의 황제(黃帝)시기에 이르러 사람들은 이미 상동하우(上棟下宇 역주: 대들보는 위로 가로 놓이고, 서까래는 그 양편에서 밑으로 내려뜨린다는 뜻으로 집짓기를 말함]의 정규 궁실에서 살았고 중화 오천년 문화 중에서 매 조대(朝代)와 매 민족, 매 지역마다 모두 자신만의 독특한 건축문화와 풍격이 존재했다. 그 다채로운 아름다움이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2) 수인씨(燧人氏)
원고의 어느 한 시기 인류는 아직 불을 사용할 줄 몰랐다. 주로 식물의 열매나 생고기를 먹었기 때문에 맛이 좋지 않고 위나 장에도 좋지 않았다. 이 때 또 한 분의 성인(聖人)이 세상에 나타났다. 그는 위로 별자리를 보고 아래로 오행을 살펴 천지 사이에서 오행(五行)의 속성을 깨달았으며 불의 오묘함을 알았다. 이에 사람들에게 나무를 마찰시켜 불을 얻는 방법을 가르쳤고 음식물을 익혀서 먹게 했다. 또 불을 사용해 금속을 제련하고 무기나 도구 등을 제작하도록 가르쳤다. 인류 문명은 이로 인해 대대적으로 제고되었고 백성들은 이 성인의 은혜에 크게 감동해 앞을 다퉈 그를 왕으로 옹립하고 수인씨(燧人氏) 또는 수황(燧皇)이라 불렀다.
《습유기(拾遺記)》에 이런 일화가 하나 있다.
해도 달도 닿지 않는 아주 먼 지역에 ‘수명국(燧明國)’이란 반신(半神)의 나라가 하나 있었다. 이곳에는 사계절과 밤낮의 구별이 없었다. 수명국 백성들은 모두 오래 살고 죽지 않았으며 만약 너무 오래 살아서 좀 지겨워지면 하늘로 올라가 신선이 되었다. 수명국에 한 그루 불나무[火樹]가 있었는데 이름을 ‘수목(燧木)’이라 했다. 이 나무는 아주 거대해서 가지와 잎이 1만 여 경(頃 1경은 약 2만 평)의 땅을 덮을 정도였으며 중간에서 구름과 안개가 나왔다. 나중에 어떤 성인의 신(神)이 노닐다가 우연히 수명국에 와서 수목(燧木)을 보니 나무위의 올빼미가 부리로 나무를 쪼자 찬란한 불이 일어났다. 여기서 깨달음을 얻은 성인은 나무를 마찰시켜 불을 얻는 방법을 발명했다. 이 성인이 바로 수인씨였다.
즉, 전설에 따르면 수인씨가 꿈속에 수명국에 놀러갔다가 올빼미가 나무를 쫄 때 불이 생기는 것에서 계발을 받아 불을 만드는 방법을 몰두해서 연구했고 하늘에서는 천상(天象)을 살피고 땅에서는 오행을 관찰해 최종적으로 인간세상에서 나무로 불을 얻는 방법을 인류에게 전해주었다.
《귀덕부지(歸德府志)》에는 “알백대(閼伯台) 서북쪽(지금의 상구商丘 서남쪽 3리 부근)에 수황릉(燧皇陵)이 있는데 전설에 따르면 수인씨를 매장한 능묘라고 한다.”는 기록이 있다. 이 능묘는 지금까지 남아 있는데 높이가 약 10여 미터이고 상구 서남쪽에 있다. 원고 시기 수인씨가 상구 일대에 살았다는 전설이 있다.
《좌전(左傳)‧소공(昭公) 17년》에도 “불을 만들려면 마땅히 송(宋), 위(魏), 진(陳), 정(鄭) 4나라에서 해야 하는데 이중 송나라(수도가 상구였다)는 대진성(大辰星)의 분야에 해당하니 화(火)를 대표한다.”고 했다.
별자리 중에서 대진성은 대화(大火)를 대표하며 심수(心宿)의 두 번째 별이다. 상구 지역은 지상에서 대진성의 분야에 해당하니 다시 말해 대진성과 대응하는 지상의 장소다. 수인씨는 밤에 별자리를 살펴 천지 사이의 오묘한 신비를 통찰했으며 이를 통해 천상(天象)에 순응하고 오행을 배합시켜 나무를 마찰시켜 불을 얻는데 성공했다.
《육예론(六藝論)》에는 수인씨에서 복희씨에 이르기까지 모두 187대를 전했다는 기록이 있다.
(3) 결승기사는 간단하지 않다
수인씨는 인류에게 불의 사용을 가르친 외에도 또 한 가지 아주 큰 업적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인류에게 결승기사(結繩記事)를 전수한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에는 아직 문자가 없었는데 결승기사란 바로 새끼에 매듭을 짓는 일부 간단한 기록으로 천하에 발생한 크고 작은 일들을 기록했다.
아주 간단한 새끼매듭을 사용해 천하에 발생한 크고 작은 일들을 기록할 수 있었다. 이 배후에 함축된 내함(內涵)과 지혜는 대단히 넓고 큰 것으로 아마 현대인들이 상상하듯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닐 것이다.
중화 역학(易學)은 도(道)의 이(理), 수(數), 상(象)의 기초위에 건립된 것이다. 중화 신전문화 속에 한 가지 핵심사상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천인합일(天人合一)이다. 그중 한 방면의 함의는 바로 인체, 자연, 우주 등이 하나의 유기적인 정체로서 서로 대응하며 같은 이치로 서로 통하며, 시시각각 늘 모두 상호 연계되고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 속의 어느 한 변화든 모두 다른 각 방면의 발전과 변화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예를 들어 인체가 하나의 유기적인 정체(整體)라면 인체 속의 매 세포 모두 인체의 정보를 포함하는데 바로 인체의 홀로그램(全息圖)이다. 인체의 어느 한 부위, 심지어 하나의 세포 속에서도 늘 수시로 그 사람의 신장, 체중, 수명, 외모, 질병 등 모든 특징과 변화를 읽어낼 수 있다.
우주 사이의 도리(道里)는 위에서 아래에 이르기까지, 거시적인 것에서 미시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모두 홀로그래픽(全息 모든 정보)으로 관통되고 대응한다. 우주 만사만물(萬事萬物)의 내부에는 모두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대응관계가 존재하는데 이는 하나의 유기적인 정체로서 상호영향을 주고 같으 이치로 관통되어 있다. 이런 도리는 우주 고층에서 가장 낮은 층에 이르기까지 위에서 아래까지 한 길로 관통되어 내려오는 것으로, 고층으로 갈수록 더욱 간단하고 내함 역시 더욱 크며 저층으로 갈수록 표현이 더욱 복잡하고 또한 천박하다. 가장 낮은 층에 이르면 바로 인류가 끊임없이 인식하는 그런 복잡한 일의 도리와 규율 등이다. 이런 규율 내지는 심지어 그보다 높은 천리(天理)에 순응하고 부합하면 사람에게는 곧 복이 있고 순조로우며 발달하거나 번창하게 된다.
마치 백화(白話)와 고문(古文)의 비교와 같다. 백화문은 내함이 비교적 얕고 한 가지 일을 똑똑히 말하려면 몇 천 자를 적어야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데 비교적 번잡하다. 반면 고문은 내함이 비교적 커서 한 가지 일을 똑똑히 말하는데 불과 몇 십 자면 충분하며 아주 간단하다. 때문에 고문의 포함된 내함과 지혜는 백화문보다 크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해하고 분명히 알기란 더욱 어렵다. 같은 이치로 우주에서 도(道)의 이치는 고층으로 갈수록 지혜는 더욱 크지만 표현은 더욱 간단해지고 저층으로 갈수록 지혜는 더 작아지는 반면 표현은 더 번잡해진다.
가령 《주역》 64상(象)이 포함하는 내함은 대단히 넓고 큰 것으로 인류의 과학과 인식을 훨씬 뛰어넘는다. 그러나 ‘상(象)’ 배후에는 또 ‘수(數)’가 포함되어 있고 ‘수’를 더 간단히 추상화시킨 것이 ‘상’이다. ‘상’ 역시 확대되고 구체화된 ‘수’로 볼 수 있는데 ‘수’와 ‘상’은 자연 만물의 이치를 두 가지 서로 다른 방면에서 전개한 것이다.
세간 만사만물의 일체 운행변화 등은 모두 일정한 정도에서 그것의 법칙과 정해진 수[定數]를 따라간다. 가령 음수(陰數), 양수(陽數), 천지의 수, 대연지수(大衍之數), 기수(氣數), 명수(命數), 겁수(劫數) 등등이다. 이런 것들은 모두 천지만물 배후의 ‘수(數)’를 담고 있다. 일정한 우주 층자 속에서 수는 우주 만사만물이 변화하고 운행하는 법칙을 풀어낼 수 있고 여기에 포함된 지혜와 내함은 대단히 크고 넓은 것이다.
그렇다면 결승기사는 바로 한 가지 ‘수’의 응용이며, 세간의 번잡한 일의 이치가 고층차 중에서 제련되고 간단하게 추상적으로 변화된 ‘수’다. 그러므로 새끼를 매듭지어 기록한 것에 포함된 내함과 지혜는 현대인들이 소위 ‘진화’란 잘못된 관념 속에서 본다면 근본적으로 이해하거나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다.
이외에도 수인씨가 인류에게 있어 사도(師道 스승의 도)의 비조가 되며 가르침을 전하는 대(臺)를 세우고 사도를 개창했다는 설이 있다.
원고시기 이처럼 크고 넓은 지혜는 인류가 구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고인은 “하늘에서는 신이고 땅에서는 성이다(神於天,聖於地)”라고 했다. 이는 하늘에서는 신이 되고 땅에서는 성인이 된다는 뜻으로 천상의 신이 아래로 내려와 성인으로 전생(轉生)해 인류와 함께 각기 다른 시기에 인류문명을 전수해주었고 중화 반신문화(半神文化)를 위한 길을 깔아주었다.
참고문헌:
1. 《강감이지록(綱鑒易知錄)》
2. 《시학편(始學篇)》
3. 《둔갑개산도(遁甲開山圖)》(《예문유취(藝文類聚)》11권에서 인용)
4. 《통지(通志)‧삼황기(三皇紀)》
5. 《박물지(博物志)‧잡설상(雜說上)》
6. 《신어(新語)》
7. 《습유기(拾遺記)》
8. 《귀덕부지(歸德府志)》
9. 《좌전(左傳)‧소공17년》
10. 《육예론(六藝論)》(《곡례정의(曲禮正義)》에서 인용)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5544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