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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망에서 수련의 엄숙성을 생각하다

글/ 해외 대법제자

【정견망】

얼마 전 원한심(怨恨心) 문제에 관한 동수의 교류문장을 듣고 나는 자신의 문제를 떠올리게 되었다. 나는 일을 아주 성실하게 하는 편이다. 한번은 당연히 내게 인계해야 한다고 생각한 일을 동수가 잘 배치해주지 않은 것을 보고 나는 어떻게 고객에게 응대해야 할지 몰랐다. 이때 나는 속으로 ‘진작 알았으면 하지 않았을 텐데’라고 생각했다. 사실 이때 내가 가장 중시한 것은 자신의 득실(得失)과 보다 많은 관용의 부족이었다. 나는 자신이 설정한 표준으로 다른 사람을 가늠했으며 진선인(眞善忍) 표준으로 자신을 가늠하지 않았다.

사부님께서는 《2013년 대뉴욕지역법회설법》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아주 순정하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아니며, 아주 많은 잡념을 갖고 있고, 후천적으로 양성된 아주 많은 것을 갖고 있다. 심지어 당신이 간단하고도 간단한 한 가지 생각이라고 여기지만 이 기점(基点)과 기인, 부대적인 것들은 모두 불순할 수 있다.”

또 《미국 플로리다 법회설법》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럼 여러분 생각해 보라. 인류 사회, 우리들이 볼 수 있는 이 일체가 우연히 존재하는 것인가? 현재 매 대법제자의 일거일동, 일언일행, 심지어 당신이 사색하는 문제마저 모두 간단한 것이 아니다. 장래에 당신들은 모두 매우 세밀하게 배치된 것임을 볼 것인데, 내가 배치한 것이 아니며, 이는 이런 구세력(舊勢力)이 배치한 것이다. ”

나는 문득 아까 ‘진작 알았으면 하지 않았을 텐데’라는 일념이 내 대뇌에서 자동적으로 반응되어 나온 것으로 근본적으로 깊은 사고나 생각을 거쳐 나온 것이 아님을 알고 깜짝 놀랐다. 수많은 염두(念頭)들은 자신이 정말 이렇게 생각한 게 전혀 아니다. 그렇다면 진짜 나인지 아니면 후천적으로 형성된 관념인지 똑똑히 구별하는 것이 아주 관건적이다.

수련이란 바로 잘 배치된 사상(思想)의 극본을 따라 가는 게 아니며 이렇게 해야 만 사물의 본질을 똑똑히 볼 수 있다. 원망은 표상(表象)일뿐이며 그것은 수많은 집착심에서 촉성된 것이다. 예를 들며 이익을 중시하는 마음, 질투심, 체면을 중시하는 마음,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마음, 과시심, 안일한 마음, 잘못을 저지를까 두려워하는 마음 등등이다.

사부님께서는 《2014년 샌프란시스코설법》에서 말씀하셨다.

“수련이라, 신이 보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지, 이 활동 자체를 안배한 것이 완벽한지 완벽하지 않은지, 전면적인지 전면적이지 않은지는 보지 않는다. 신은 이를 보지 않는다. 그것이 전면적이지 않을수록 그것은 오히려 기뻐하는데, 당신들 어느 사람이 이 일이 완벽하지 않은 것을 보고 그것을 잘 해내는지를 보며, 누가 그 일의 부족한 부분을 잘 메우는지를 본다. 왜냐하면, 무슨 일을 하든지 당신 수련이 모두 그 속에 있으며, 보는 것은 당신의 수련이기 때문이다! 배우기만 하고 쓰지 않으면 안 된다. 당신이 주동적으로 수련하는지, 당신이 수동적으로 이끌려서 걸어가는지, 표현해낸 것은 여전히 당신이 수련하는지 수련하지 않는지의 문제이다.”

나는 원망은 단순히 간단하고 간단한 수구(修口)의 문제가 아니며 그것의 가장 기점문제는 바로 당신이 수련을 생각하는가 하지 않는가의 문제임을 깨달았다. 동시에 또 밖으로 구하는 표현과 원망이 오래되면 곧 원한이 되며 곧 자신도 모르게 수련에 나태해지고 제고하지 못하게 된다. 원망이 적어야지만 비로소 안으로 많이 찾을 수 있는데 이 역시 상생상극(相生相克)의 이치다.

수련인은 끊임없이 자신을 수련할 때라야만 비로소 끊임없이 진선인(眞善忍)에 동화할 수 있다. 자신을 잘 수련하지 못하면 곧 구세력의 극본에 따라 걷게 된다. 반대로 말하면 다른 사람 역시 마찬가지다. 만약 남의 극본 역시 잘 배치된 것이라면 그럼 내가 어떻게 다른 사람더러 그의 극본을 수정하라고 요구하고 다른 사람더러 잘할 것을 요구할 수 있는가?

동수가 부족한 점을 보면 우리는 다만 선(善)으로 권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본인이 자신의 문제를 의식하지 못한다면 방법이 없는 것이다. 이 도리에 명백해지자 나는 사부님께서 《무엇이 대법제자인가》에서 말씀하신 “좋은 그 일면은 이미 격리되어 볼 수 없다. 당신들이 보는 것은 영원히 수련이 잘 안 된 이 일면이다. 하지만 당신들은 자비심을 품지 않아서는 안 되며 고정적으로 사람을 보지 말아야 한다.”는 함의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미국의 한 유명한 정신과 의사가 사람의 의념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실험한 적이 있다. 그는 측정기로 인체에서 나오는 진동수를 측정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환자를 보기만 해도 이 사람이 왜 병에 생겼는지 알 수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환자 몸에서 그 어떤 사랑도 발견할 수 없고 오직 고통, 원망, 실망만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부정적인 의념은 자신에게만 상처를 주는 게 아니라 주변의 자기장도 나쁘게 변화시킨다. 이런 것들은 모두 낮은 진동수에 속하고 또한 암이나 심장병 등 각종 질환을 유발하는 원인이 된다.

반대로 자비롭게 베풀기를 좋아하고 남을 돕고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안정적이고 편안하다. 이런 것들은 모두 높은 진동수에 속하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아주 조화로움을 느끼게 한다.

원망해도 소용이 없어지면 곧 소극적이고 비관적인 상태가 시작된다. 비록 입으로는 원망을 말하지 않지만 이는 모두 자신의 바른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으로 수련인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상태가 아니다.

또한 만약 평소 두뇌 속에서 생각하는 것이 모두 질책과 원망 등 부정적인 의념이고 하는 말도 불순(不純)하다면 바른 요소를 이끌어오지 못할 것이며 일을 잘 처리하지 못할 것이다. 마치 전에 한 동수가 나더러 협조인을 찾아가서 자신이 만든 오해를 풀어달라고 한 것과 같았다.

처음에 내게 여전히 한 가지 생각이 있었는데 이 일은 내가 주로 조성한 게 아니고 다른 동수가 조성한 것인데 왜 내가 가서 처리해야 하는가? 나중에 내가 마땅히 정면적인 작용을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나중에 나는 협조인을 찾아가 내가 잘하지 못한 것을 말하고 또 줄곧 협조인의 오해를 받은 것이 전부 그의 문제라고 아님을 분명히 해명하도록 도와주었다.

때로는 또 원망하지 않아야 하고 또 다른 사람에게 부정적인 생각을 품지 말아야 함을 분명히 알면서도 알 수 없는 이유로 여전히 해내지 못한다. 돌파하기가 아주 어려워 어쩔 수 없다고 여기는데 이렇게 오래되면 마비되었다. 지금 분명해진 것은 만약 오직 이 마음을 억제하려고만 생각한다면 근본적으로 진정으로 왜 그것과 그것이 나의 수련에 만들어낸 부정적인 영향을 제거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럼 진정으로 자신을 개변할 방법이 없어지며 일에 부딪히면 그것이 또 되돌아 나오는데 사실 다른 집착심 역시 마찬가지다.

사부님께서는 《2015년 뉴욕법회설법》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하자. 대법제자로 말하면 요구가 높은데, 어떤 환경 속에서 수련하는 것보다도 더 높다. 형식상에서는 그렇게 엄격하지 않지만, 수련의 표준에 대해서는 엄격하고 요구가 높다. 당신이 자신의 잘못을 의식하지 못하는 그것은 안 된다. 당신이 자신에게 아주 강한 사람의 집착이 있음을 의식하지 못하는 그것은 안 된다. 이러한 것을 인식하였다면 물론 대법제자로서 말하자면 그것을 틀림없이 잘하려고 하는데, 그럼 이것이 바로 수련이다.”

전에 나는 “어떤 환경 속에서 수련하는 것보다도 더 높다”는 이 구절의 말씀에 대해 깊은 감수가 없었지만 지금은 내가 근본적으로 자신에게 잘못이 있음을 의식하지 못했기 때문임을 알게 되었다. 사실은 또 의식하기에 아주 어려운데 자신은 항목을 위해 잘하고 회사를 위해 잘한다고 여겼다. 왜냐하면 우리는 매일 속인 사회 속에서 수련하기 때문에 만약 늘 법으로 자신을 대조하지 않으면 속인의 영향을 받게 되며 또 속인보다 낫다면서 만족하기 때문이다.

속인은 매일마다 늘 원망하는데 모두 일상의 다반사로 되었다. 얼마 전에 동료가 누구누구는 줄곧 원망했지만 당신이 원망하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당시 나는 자신이 수련을 잘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며, 속인은 모두 조용히 우리를 관찰하고 있고 신(神) 역시 바라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현재 나는 동수에 대해서나 또는 업무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이나 불만이 있을 때면 곧 한 가지 사상이 들어오는데 “너는 아직도 수련하려 하는가?” 바로 이런 일념인데, 모든 불만과 원망의 생각을 곧장 멈추게 하며, 이어서 안으로 자신의 문제를 찾게 한다.

한번은 내가 고객에게 해야 할 티켓 일을 책임자에게 알리고 대신 처리해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여전히 처리되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렇게 간단하고 불과 몇 초면 해결할 수 있는 일인데 왜 아직도 처리하지 못하는 걸까? 그녀는 이렇게 바쁜데 어떻게 책임자가 될 수 있는가? 고객이 모두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한다면 정말 프로가 아니다. 그녀가 왜 이렇게 시간을 끄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곧장 자신의 불선(不善)을 의식했고 이런 부면적인 사상을 중단했다. 대신 문자메시지를 보내 선의(善意)적으로 이 일을 잘 처리해달라고 일깨워주었다. 그러자 오래지 않아 바로 일이 처리되었다.

나중에 나의 사상동기를 깊이 파보니 질투심이 작용을 일으킨 것이다. 나의 관념에 따르면 협조인은 자각적으로 책임을 져야 하며 남이 일깨워줄 필요가 없다고 여겼던 것이다. 조금이라도 잘못을 저지르면 곧 남에 대한 선입견이 생긴다.

이런 사유는 바로 사부님께서 《전법륜》에서 말씀하신 “당신은 모범사원이니까 잘하지 않는가, 당신은 일찍 오고 늦게 가면서 이 일을 다 하라”는 것과 같다.

이렇게 오래 수련을 해왔음에도 만약 줄곧 ‘초등학교 교과서’의 이치를 품고 내려놓지 못한다면 그럼 영원히 제고할 수 없다. 지금 나는 새로운 기점과 각도에 서서 문제를 보아야 하며 더는 과거의 표준으로 발생한 모든 일을 가늠하지 않아야 한다고 본다. 또한 오직 자신의 심성에 대한 요구표준을 끊임없이 높여야지만 비로소 수련의 길에서 끊임없이 정진할 수 있다.

부족한 곳이 있다면 동수들의 자비로운 시정을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0377